편집자주 오랫동안 CEO들을 대상으로 심리클리닉 강좌와 상담을 진행해온 신경정신과 전문의 양창순 대인관계클리닉 원장이 리더들에게 필요한 마음경영 방법을 제시합니다. 많은 스트레스 속에서 살아가는 경영자들이야말로 ‘마음의 힘’이 중요합니다. 마음을 강하고 매력적으로 만드는 방법을 통해 인생을 변하게 하는 마술 같은 힘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이연희(가명, 30세) 씨는 석 달 남짓 사귀던 남자와 헤어졌다. 문제는 주변 반응이었다. “그처럼 장난 아닌 스펙을 가진 남자를 찼다고? 네가 먼저? 그쪽에선 널 잡았는데도? 너 미친 거 아니니”라고 친구들은 입을 모았다. ‘장난 아닌 스펙’이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덕분에 가족들까지 싸늘한 표정으로 그녀를 이해할 수 없어 했다.
일반적인 기준으로 봤을 때 그는 썩 괜찮은 사람이었다. 말 그대로 스펙도 훌륭했고 외모도 핸섬했다. 옷도 잘 입었다. 그러나 진짜 마음에 안 드는 것은 그의 말투였다. 그는 어떤 이야기든 시작하기 전에 반드시 “솔직히 말해서”라고 말하는 버릇이 있었다. 이야기를 해 나가는 도중에도 그 말을 마치 무슨 접두사처럼 몇 번이고 되풀이해서 사용하곤 했다. 그가 자주 쓰는 말 중에는 “내가 진심으로 말하는데”도 있었다.
계속해서 “솔직히 말해서”와 “진심으로 말하는데”라는 식의 말투를 듣다 보면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은가? 연희 씨는 “어느 것도 솔직하게 진심으로 와 닿지는 않았다”고 말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도 진짜 솔직하고 진심 어린 사람이 그런 말투를 입에 달고 살 리는 없었다. 실제로 솔직하지 못한 구석이 있거나 진심 대신 사심이 더 많은 사람이라면 모를까. 그렇다 보니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무의식적으로 그런 말투를 쓰게 됐을 가능성이 높다. 연희 씨는 그런 사실을 간파한 것뿐이다.
게다가 그에게는 또 다른 나쁜 버릇이 있었다. 자기보다 처지가 못해 보이는 사람들에게 지나치게 말을 함부로 했다.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성품이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래저래 그와 만나는 것이 연희 씨에게는 괴로운 일이 되고 말았다.
이별 통고를 받고 나서 남자는 강하게 주장했다. “솔직히 말해서 그동안 네가 날 갖고 논 것 같다. 그게 아니라면 진심으로 말하는데 난 너와 이대로 헤어질 순 없다”고. 그 말끝에 그는 종업원을 큰소리로 불러 냉수를 청했다. 종업원이 냉수를 가져오자 그는 빨리 가져오지 않았다는 이유로 있는 대로 신경질을 부림으로써 만남의 끝을 그답게 마무리했다.
그 후 연희 씨는 ‘정말 괜찮은 남자를 차버린 한심한 여자’로 낙인 찍혀서 한동안 마음고생을 해야 했다. 누구한테도 남자한테서 느낀 실망감을 제대로 설명하기가 어려웠다. 말투가 조금 이상하고 상스럽다고 해서 ‘장난 아닌 스펙’을 가진 남자를 차버린다는 걸 주변에서는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녀는 바로 그 말투로 인해 오히려 남자에게 신뢰를 가질 수 없었다. ‘솔직함’이나 ‘진심’ 같은 단어는 남발할수록 빛이 바래는 법이 아니던가.
누구나 위선과 이중성을 갖고 살아간다
생각해 보라. 우리가 “나는 진심이었어”란 말을 쓰는 때가 언제인지. 우린 대개 상대방한테 상처를 주었을 때 그 말을 쓴다. 난 진심으로 너한테 이런 저런 말을 하고 행동을 한 건데 네가 내 진심을 오해해서 상처를 받은 거라고 말할 때 외에는 그 말을 쓸 일이 거의 없다. 물론 난 진심이었을 수 있다. 하지만 상대방이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받았다면 내 진심을 계속 주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따라서 “난 진심이었어”란 말을 덜 쓸수록 인간관계를 잘해나가는 것이라는 공식이 성립한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나를 포함해 많은 사람들이 그렇지 못한 건 왜일까? 그건 우리의 무의식과 관계가 있다. 우린 누구나 인간관계에서 상대방에게 약간의 영향력이라도 끼치거나 적어도 상대방을 기쁘게 하고 싶은 욕망을 갖고 있다.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진짜 모습이 어떤 식으로든 상대방의 눈에 띄는 것을 바라지 않게 마련이다. 누구도 진정한 자신의 모습을 꿰뚫어볼 수 없을뿐더러 설령 그럴 수 있다 해도 그 모습을 환영할 만큼 완전한 인간은 없기 때문이다.
우린 스스로 잘 알고 있다. 지혜로운가 하면 어리석고, 부지런한가 하면 게으르며, 자비로운가 하면 인색하고, 진실한가 하면 거짓투성이인 모습이 곧 ‘나’라는 한 인간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우린 거의 본능적으로 어리석고 게으르며 인색하고 거짓투성이인 나를 남들에게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남들이 지혜롭고 부지런하며 자비롭고 진실한 내 모습만을 기억해주기 바란다. 그런 욕구가 병적으로 심해지면 문제를 일으킨다. 마음에 들지 않는 내 모습에 집착해 혹시라도 남들에게 그런 것이 알려질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것이다. 정신과에서는 그런 경우를 노이로제라고 진단한다.
누구라도 그런 상태에 놓이면 자신도 모르게 위선적인 면만을 드러낼 수 있다. 생산적인 데 써야 할 에너지를 그와 같은 상태를 유지하는 데 낭비하다 보면 당연히 불안감과 죄책감이 뒤따르게 마련이다. 바로 그런 불안과 죄책감을 해소하는 방편의 하나로 ‘솔직함’이나 ‘진심’ 운운하는 말을 더 많이 하게 된다.
노이로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우린 누구나 약간의 위선과 이중성을 가지고 살아간다. 그리고 그것마저 상대방에게 들키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다 보니 스스로 생각하는 것보다 더 솔직함과 진심을 가장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30대 초반의 남자가 피상적인 인간관계는 잘해나가는 편인데 친밀한 인간관계가 쉽지 않다는 문제로 찾아왔다. 이유를 들어보니 그는 인간관계는 재미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기가 만나는 사람을 즐겁게 해주기 위한 소재를 찾아 헤맨다는 것이었다. 좀 더 이야기를 나눠보니 그는 인생에서 물질적인 성공에 몹시 집착하고 있었다. 넉넉하지 못한 부모님 밑에서 성장하면서 돈 때문에 상처를 많이 받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었다. 그럴 때마다 그는 부모 잘 만나 여유 있게 사는 친구들을 보면서 자신의 환경을 원망했다. 결국 믿을 건 자신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는 열심히 공부에 매진했다. 덕분에 좋은 대학을 나오고 남들이 부러워하는 직장에도 다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늘 자기보다 잘사는 사람들을 만나면 주눅이 든다고 했다. 거기서 벗어나기 위해 그가 택한 방법이 남을 즐겁게 해주는 것이었다. 목표는 분명했지만 그 속에 진심은 담겨 있지 않았다. 그렇다 보니 그는 자신의 말대로 피상적인 인간관계는 얼마든지 잘해나갈 수 있었지만 진심이 필요한 가까운 관계에는 늘 어려움을 겪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어떤 의미에서 앞서 말한 연희 씨의 남자친구와 비슷한 딜레마에 놓여 있는 셈이다. 스펙도, 인물도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지만(게다가 말투도 정상이었지만) 진심이 결여돼 있다는 점에서 그 역시 연희 씨의 남자친구와 다를 바가 없었던 것이다. 그는 자신이 왜 친밀한 관계에서 어려움을 겪는지 모르겠다고 호소했지만 그의 행동 속에 이미 해답은 나와 있다. 아무리 남들을 재미있게 해준들 그 안에 진심이 담겨 있지 않으므로 마음을 얻는 데는 실패한 것이다. 그 점을 깨닫고 나서야 그는 자신의 문제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다.
진심을 위해서는 관심이 필요하다
그들의 예를 보면서 새삼 진심이란 무엇일까에 관해 생각하게 됐다. 우린 내가 어느 순간에 이러저러한 감정을 느꼈다면 그건 진심일 거라고 단정한다. 하지만 그것이 꼭 진심이라고 할 수는 없다. 인간의 감정은 그때그때 달라지기 때문이다. 내가 어느 순간 진심이라고 생각한 것도 그 다음 순간에는 진심이었나 싶은 것이 너무 많지 않던가?
우리가 진심이라고 말하려면 최소한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첫째는 나만큼 상대방도 소중하다는 인식이다. 이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두 번째는 나와 상대방이 다를 수 있고 내 마음과 상대방 마음이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수용의 자세이다. 친밀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이 두 가지가 전제돼야 한다. 그래야 진심이 들어설 여지가 생긴다.
진심을 갖기 위해서는 꼭 필요한 것들이 있다. 바로 관심이다. 내가 관심을 갖는지 아닌지, 어디에 관심을 갖는지에 따라 세상은 달라진다. 그래서 누군가는 우리가 세계에 보이는 관심은 우리가 상대하는 세계의 본성을 바꾼다고 말했다.
예를 들어, 등산가에게 산은 자신이 도전하면서 스스로의 존재를 확인시켜주는 존재다. 하지만 부동산업자에게 그 산은 돈으로 환산할 수 있는지 아닌지가 중요하다. 신화를 믿는 사람이라면 그 산은 신이 사는 곳으로 보일 수도 있다. 그러므로 실재하는 산이 아니라 자신이 관심을 갖는 산만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창조는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고 하는지도 모른다. 세상과 나를 이어주는 통로가 바로 관심이다. 관심이 없으면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고 알지도 못하게 된다. 그러므로 인간관계는 관심에서부터 시작된다.
그 다음 중요한 것이 공감 능력이다. 공감 능력을 가질 때 우린 상대방에게 비로소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최근 뇌 과학에서 공감에 작용하는 거울신경세포가 발견됐다는 점이다. 이 공감 뉴런 세포가 있기에 우린 남이 다친 것을 보고 마치 자기가 다친 것처럼 아파할 수 있다. 우린 남에게 공감하고 진심으로 다가갈 수 있는 능력을 애초부터 지니고 있는 셈이다. 실제로 사이코패스들에게는 공감 뉴런이 부족하다고 한다.
결국 인간관계를 잘해나가고 싶다면 작은 일에서부터 관심을 가지고 공감의 능력을 넓혀나가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다. 그렇게 해서 상대방에게 내 진심이 전해질 때 비로소 진정한 소통이 시작된다. 진심이란 말이 진짜 의미를 갖는 것도 바로 그 순간부터다.
양창순 신경정신과·대인관계클리닉 원장 mind-open@mind-open.co.kr
양창순 원장은 정신과, 신경과 전문의로 현재 <양창순신경정신과·대인관계클리닉> 원장이다. 연세대 의대에서 의학박사 학위를 받았고 성균관대에서 주역과 정신의학, 리더십을 주제로 한 논문으로 두 번째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미국정신의학회 국제회원, 미국의사경영자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미운 오리새끼, 날다> 등 자기계발, 대인관계, 리더십을 주제로 한 책들을 10여 권 넘게 저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