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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3

익살은 나의 힘:마키아벨리, 고통을 조롱하다

김상근 | 94호 (2011년 12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냉소의 눈초리를 가진 남자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국가 피렌체는 시뇨리아 정청(Signoria, 政廳)을 중심으로 국가의 업무를 수행해왔다. 시뇨리아 정청(베키오궁전으로도 불린다)은 서울 광화문에 있는 정부종합청사쯤에 해당하는 관공서다. 피렌체의 행정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도 이 건물에서 일했다. 피렌체의 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던 제2 서기장 마키아벨리는 이 건물 2층의 집무실(Cancelleria)을 사용했는데 지금도 마키아벨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조작품으로 조각된 마키아벨리의 흉상과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 1536∼1603)가 그린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

 

피렌체 시뇨리아 정청 안에 보존돼 있는
 마키아벨리의 집무실 입구
시뇨리아 정청의 2층 집무실에 걸려 있는 
마키아벨리의 초상화


최초로 마키아벨리 전기를 출간(1877)했던 파스콸레 빌라리(Pasquale Villari)는 그의 외모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는 보통 정도의 신장에 마른 체구를 가졌다. 늘 반짝이던 눈과 검은 머리카락, 작은 두상에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입술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외모로도 그가 날카로운 관찰자이며 생각하는 사람이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무엇인가 말하려드는 듯 입술을 연신 씰룩거렸으며 눈에서는 냉소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그 심각한 표정을 쉽게 잊지 못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공상에 빠져들곤 했는데 그 정도가 심해 어떤 때는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눈에서는 냉소적인 기운이 느껴졌다는 빌라리의 표현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날카로운 관찰자에다 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현자(賢者)의 이미지에 냉소적인 외모가 더해졌다는 것은 그의 삶이 그렇게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가 겪었던 생의 고초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도메니코 베카푸미가 ㅡ케치로 그린 날개꺾기(Strappado) 고문의 실제 모습.
마키아벨리는 바르젤로 감옥에서 이런 고문을 여섯 번 당했다.

바르젤로 감옥에서 당한 날개 꺾기 고문

<군주론>의 말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오늘날에 와서는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을 밤낮으로 보고 있다.”1 마키아벨리는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무엇이 그에게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으로 보였을까? 나폴리 군대가 자기 고향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고 프랑스의 대포가 굉음을 내며 피렌체 시내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체사레 보르자와 율리우스 2세와 같은왕관을 쓴 괴물들이 이탈리아를 유린하고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그것을 대격변이라고 느꼈을까? 삶과 역사와 정치의 현장에서 철저한 현실주의적 사고로 일관했던 마키아벨리에게 최대의 격변은 아마 자신의 삶에 밀어닥친 끔직한 불행이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근무하는 시뇨리아 정청에서 100m도 떨어져 있지 않는 바르젤로 감옥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1512, 피에로 소데리니가 이끌던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이 복권된 다음, () 정부의 고위직 관리였던 마키아벨리에게는 모진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바르젤로 감옥에서 악명 높기로 소문난날개꺾기(Strappado)’ 고문을 당했다.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체포된 날은 피렌체의 엄동설한이 기승을 부리던 28일이었다. 극심한 고문의 고통과 지하 감옥의 추위에 떨며 마키아벨리는 자신에게 닥친 최대의 격변을 맞는다. 마키아벨리는 날개꺾기 고문을 모두 6차례 당했다. 마키아벨리가 반() 메디치 암살 시도에 개입했다고 불었던 두 명의 음모자 보스콜리(Pietro Boscoli)와 카포니(Agostino Capponi)는 고문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빨을 굳게 깨물고 여섯 차례의 날개꺾기 고문을 견디면서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을 밤낮으로 겪었던 마키아벨리의 두 눈에 분노의 핏발이 섰을까? 고문기술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익살을 부렸다. 대격변이 몰아닥쳐도 그는 여유 있게 그 운명의 장난에 몸을 맡기면서 해학을 즐기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마키아벨리는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감옥에서 시()를 지었다. 충성을 다 바쳤던 조국이 자신을 배신자로 몰고 그 뒤에서 이 모든 고난의 대변혁을 사주하고 있는 메디치 가문을 향해 이런 유쾌한 시를 날렸던 것이다.

 

“줄리아노(메디치 가문의 수장), 당신은 아시는가요? 내 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있음을!

뒤로 팔이 묶인 채 여섯 번이나 들어 올려 졌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음을!

그 밖에 내가 당한 고생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시인인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지요.

바르젤로 감옥 벽으로 이가 오밀조밀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일으키는 징그러운 이 동물은 나비처럼 살이 오동통 올랐군요.

론체스바예스(Roncesvalles) 학살 사건 이후의 악취처럼, 고약한 냄새가 이곳에 가득해요.

, 내가 있는 이곳은 소 잡는 백정들이 있는 사르데냐(Sardinia)의 작은 숲,

나의 정겨운 오두막이 있는 곳,

이곳에서 들리는 신음소리는 마치 지상의 끝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요.

주피터는 번개를 내리치고, 에트나(Etna) 산을 쩌렁쩌렁 울립니다.

어떤 사람은 쇠사슬에 묶여 있고, 다른 이들은 쇠고랑을 차고 끌려가네요.

쇠사슬과 쇠고랑, 그리고 문짝이 털컥거리는 소리,

어떤 사람은 뒤로 팔을 묶어 들어 올리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소릴 지릅니다.

이 나쁜 놈들아, 너무 높이 들어 올리지 마! 이건 너무하잖아!

이 순간에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새벽 미명쯤, 가까스로 잠들려는 시간에,

수도사들의 이런 기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당신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어요(Per voi s’ora)’

제발 당신의 자비로운 은총이 내게 임하기를!

그래서 당신의 조상들이 베풀었던 은총보다 당신의 것이 더욱 크기를!2

 

마키아벨리가 고문을 당했던 바르젤로 감옥의 전경. 지금은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전시돼 있는 이탈리아 국립 조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 <군주론> 25, 운명은 인간사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며,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2) Michael White, Machiavelli: A Man Misunderstood, 177.

 절망의 끝에 서다

1512년은 마키아벨리에게 비극의 한 해였다. 공직으로부터의 파면과 반역 혐의로 인한 체포, 바르젤로 감옥에서 당한 고문은 그의 삶을 파국으로 이끌었다. 마키아벨리는 1512년에 대한 기록을 정리하면서 이런 제목을 달아 놓았다. ‘1512, 모든 것이 완전하게 박살이 나버린 해.’ 바르젤로 감옥에서 겨우 목숨을 건진 마키아벨리는 산탄드레아의 시골집에서 은둔의 삶을 시작한다. 멋있게 표현해서은둔이지 사실유배나 다름없는 비참한 삶이 펼쳐진다. 그는 시골에서 은둔하며알고 지내던 어떤 사람도 다시는 얼굴을 보지 않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할 만큼 절망에 빠져들었다.3 모든 것이 완전하게 박살 난 것이다.

 

1513 46, 유배지에서 쓴 편지는 마키아벨리가 자신의 처지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지 보여준다. 페트라르카의 글을 풍자해 쓴 시를 통해 그는 자신의 눈물을 감추기 위해 웃고 노래한다고 고백하고 있다.

 

“만약에 내가 웃거나 노래하고 있다면,

그렇게 하는 이유가 있기 때문이라네.

만약 내가 그것마저 할 수 없다면,

나의 쓰라린 눈물을 숨길 수가 없기 때문이지.”

 

1514 610일자 편지는 마키아벨리가 스스로에게 가졌던 자조(自嘲)의 강도가 더해지는 느낌을 준다. 앞의 편지처럼 로마에 있던 친구 베로리에게 쓴 편지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근황을 이렇게 알려준다.

 

“나는 오늘도 우리 시골 마을의 촌놈들과 함께 시간을 보낸다네. 어떤 놈도 내가 왕년에 피렌체의 공직자였다는 사실을 전혀 모르고, 내가 뭔가 근사할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을 아는 놈은 하나도 없어. <중략> 하지만 이런 생활도 얼마가지 못할 것 같네. 집을 나가서 세상으로부터 버려진 아무데나 가서 가정교사나 하면서 입에 풀칠을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다네. 우리 식구들은 내가 그냥 죽은 사람이려니 생각했으면 좋겠어. 아무짝에서 쓸모없는 내가 생활비만 축내고 있으니 우리 식구들은 내가 없는 편이 더 나을 거야.”

 

이것은 가장(家長)의 입에서 나올 말이 아니다. 가정을 책임지고 있는 아버지, 아내를 돌 볼 책임이 있는 남편이우리 식구들은 내가 없는 편이 더 나을 것이라고 말할 때는 그의 절망이 이미 극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마키아벨리는 차라리 나가서 죽어버리고 싶다는 절망감에 빠져들었다. 계속되는 1514 1220일자 편지는 마키아벨리의 마지막 탄식처럼 들린다. “나는 솔직히 더 이상 자신이 없다네. 다른 사람에게나 나 자신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난 아무 것도 줄 수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야.”

 

마키아벨리를 무자비한 악의 교사(敎師)라 믿는 사람들에게는 충격적인 내용일 것이다. 마키아벨리가 철저한 약자의 삶을 살았고 강자들의 횡포에 맞서서 살아남는 법을 모색했다는 이 글의 논지가 이제는 조금 이해가 될 것이다. ‘음모술수의 교과서로 불리는 <군주론>은 사실 마키아벨리가 절망의 끝자락에서 쓴 책이다. 세상의 무관심과 배척,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던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서문을 쓴 것은 1516년의 일이다. 이 책은 널리 알려진 대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었던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헌정됐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의 서문 말미에 이렇게 말한다. (메디치) 군주의 은총을 받으려는 사람은 군주가 받아서 기쁜 선물을 가져가는 것이 관습인데 자신도전하에 대한 보잘 것 없는 충성의 표시를 가지고 찾아뵙고싶다고 애걸한다. 그리고 그 애절한 <군주론>의 헌정사는 이렇게 끝이 난다.

 

“전하께서 그 높은 곳에 계시면서도 때로는 (제가 있는) 이러한 음지에도 눈을 돌려주신다면 본인이 얼마나 부당한 학대를 견디고 있는지도 헤아리실 수 있을 것입니다.”

 

한때 피렌체를 대표하는 외교관으로 명성을 날리던 마키아벨리는 졸지에 비극의 끝자락으로 내몰렸다.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을 밤낮으로겪어야 했으며 날개꺾기 고문을 당하고 부당한 학대를 견뎌야만 했다. 그런 시련의 깊은 와중에서 마키아벨리는 이렇게 노래했다. “그 밖에 내가 당한 고생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시인인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지요.” 이 무슨 해괴한 논리인가? 어떤 강심장을 가진 사나이가 감옥에서 이런 시를 노래할 수 있단 말인가?

 

익살은 나의 힘!

시련이 극에 달했을 때 우리는 보통 실의에 빠지거나 남 탓하기에 바쁘다. 고난의 이유를 남에게 돌리고 외부로 손가락질해 대는 것이 우리들의 보통 모습이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극에 달했던 고난의 수렁에서도 익살을 부리는 놀라운 여유를 보여줬다. 그는 동료들이 죽어나가는 바르젤로 감옥에서시인인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운운하면서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되받아친다. 피할 수 없다면 차라리 즐기겠다는 태도, 이것이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가 고난을 극복하던 방식이었다. 웃음 한 번 크게 웃고 눈물은 날려 버리자. 그래, 비가 오면 그 비를 맞고, 눈이 오면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자!

 

쾌활한 성격을 가지고 악동처럼 늘 야릇한 미소를 짓고 있던 마키아벨리에게 시련은 잠시 스쳐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었다. 지독한 고난이 닥쳐도 마키아벨리의 유쾌함과 긍정적인 삶의 태도를 바꾸지 못했다. 시간이 흘러 1521 5월의 일이다. 마키아벨리가 실업자가 된 지 어언 10년을 바라보는 시점이 됐다. 10년쯤 백수로 지내다 보면 기가 죽었을 법도 한데 마키아벨리는 그렇지 않았다. 그의 유쾌한 삶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익살꾼 마키아벨리는 오랜만에 맡겨진 사소한 일거리를 받아들고 길을 나선다. 피렌체의 모직 조합에서 내린 임무라고 해 봐야 카르피(Carpi)라는 곳에 가서 부활절 미사 때 피렌체 두오모(대성당)에서 설교할 신부를 물색하라는 것이었다. 마키아벨리에게는 시답지 않은 일이었지만 그는 이 순간에도 쾌활함과 익살을 부리는 여유를 잊지 않았다.

 

그는 카르피로 가는 도중에 모데나(Modena)에 잠시 들렀다. 그곳에는 프란체스코 귀차르디니라는 피렌체 귀족 가문 출신의 지방장관이 주재하고 있었다. 그는 마키아벨리와 절친한 사이였다. 이 두 명은 카르피의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한바탕 유쾌한 익살을 부리기로 했다. 위선적인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원장과 수도원들을 실컷 골려주기로 한 것이다. 먼저 모데나에 있던 귀차르디니가 카르피에 도착한 마키아벨리에게 편지를 보냈다. 카르피에서 될 수 있는 대로 일을 빨리 끝내라는 조언이 담겨져 있었다. ‘샌들을 신은 녀석들’, 즉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위선적이므로 조심해야 한다는 충고도 곁들였다. 그 편지를 받은 마키아벨리의 답신은 이렇게 시작된다.

 

“선생 편지를 가진 전령이 이곳에 도착했을 때 나는 마침 화장실에서 변을 보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선생께서 편지에 쓰신 내용과 똑같은 생각을 골똘히 하면서 쭈그려 앉아 있었지요. <중략> 오늘 보내주신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 전령이 이곳에 와서 머리가 땅에 닿도록 크게 인사를 하자 이곳 인간들 사이에서 일대 소동이 일어났답니다. 물론 나 같은 인간이 그런 기회를 놓칠 리 없지요. 황제는 지금 트렌토에 대기 중이나 스위스 용병이 어쩌니, 프랑스 왕이 전쟁을 일으키려고 하는데 참모들이 막고 있다느니 하면서 한참 지껄여 댔더니 그들은 입을 헤 벌리고 모자를 손에 든 채 멍청한 얼굴로 서 있었습니다. 나는 이들을 더 놀려 주려고 이따금 펜을 멈추고는 생각을 정리하는 것처럼 깊은 숨을 들이키기도 했지요. 그러면 이들은 줄곧 입을 벌린 채 놀라고 있었습니다. 만일 이들이 제가 지금 이런 내용을 쓰고 있다는 것을 안다면 기절초풍하겠지요.” (1521 517, 카르피에서 쓴 편지)

 

카르피의 현재 모습. 2011년 여름 촬영. 마키아벨리는 카르피에 있는 프란체스코 수도원에서 설교자를 물색하라는 임무를 띠고 이곳에 파견됐다.

 

마키아벨리는 한때 유럽 각국을 누비며 놀라운 통찰력으로 피렌체 정국을 주도해 가던 유능한 외교관이었다. 그는 프랑스의 왕과 대신들, 체사레 보르자, 교황 율리우스 2세 등과 개인 면담을 했을 정도로 화려한 경험을 가진 외교의 베테랑이었다. 그런 화려한 스펙을 가진 외교관에게 설교자를 구해오라는 모직조합의 지시는 마키아벨리의 자존심에 상처를 남겼을 법도 하다. 그러나 그는 이런 사소한 임무에도 주저함 없이 길을 나섰고 유쾌한 추억을 남기기 위해 친구와 익살의 편지를 주고받을 만큼 낙천적이고 쾌활한 사람이었다.

 

아무리 지금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을 밤낮으로 보고 있다하더라도 우리는 삶의 희망과 기쁨, 긍정적인 에너지와 미래에 대한 낙관을 버릴 수 없다. 불운했지만 늘 유쾌함을 잃지 않았던 마키아벨리가 우리들의 삶을 돌아보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군주론>의 끝부분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의 자유로운 의욕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잃어서는 안 된다. 가령 운명이 인간 활동의 절반을 주재한다고 해도, 적어도 나머지 반은 우리의 지배에 맡겨져 있기 때문이다.” <군주론> 25.

 

절망의 끝자락에서 마키아벨리는 희망과 웃음을 놓지 않았다. 비극의 구렁텅이로 내몰렸지만 그는 유쾌함을 유지했고 익살과 여유로 곤고한 시대를 버텨냈다. 그는 고난으로 점철된 자신의 운명을 사랑했다. “너 자신의 운명을 사랑하라!” 이를 고대 로마의 철학자들은 아모레 파티(Amor fati)라고 표현했다. 절망이여, 와라! 시련이여, 내게 덤벼라!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시련을 견디던 방식이었다.

 

마키아벨리는 로마의 피렌체 대사이자 절친한 친구이기도 했던 프란체스코 베토리에게 이런 편지를 보내기도 했다. 당신도 나처럼 사랑의 신, 아모레(Amore)를 따라 살라고! 1514 24일 산탄드레아의 유배지에서, 절망의 끝자락에서, 마키아벨리가 친구에게 보낸 편지다.4

 

“자넨 아모레(사랑의 신)가 쏜 화살이 나에게 했던 일을 상기하며 나처럼 될까 두려워하기 때문에 내가 그를 어떻게 다루었는지 자네에게 한마디 하지 않을 수 없네. 사실 난 그를 제 하고 싶은 대로 가만히 놔두었다네. 그리고는 그를 따라 계곡이며, 숲이며, 벼랑이며, 들판이며, 어디든 쫓아다녔지. 이렇게 하는 편이 그를 구박하는 것보다 나를 더 어루만져 준다는 걸 알았어. 그러니 안장도 치워 버리고 굴레도 벗어 버리고 눈을 감은 뒤 이렇게 말하게나. ‘네 뜻대로 해. 아모레. 날 인도하고 이끌어 줘. 일이 잘되면 네가 칭찬받고, 일이 잘못되어도 네가 욕을 먹겠지. 난 너의 노예야.’ <중략> 그러므로 나의 친구여, 즐겁게 지내게나. 두려워하지 말고 운명과 당당히 맞서며, 천체의 회전과 시간이며 인간의 상황이 자네 앞에 가져다주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따르게!”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15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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