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인이 나치의 피해자이기도 했던 여성 철학자 한나 아렌트(1906∼1975)의 평생 화두는 나치즘이 대표하는 전체주의(totalitarianism)를 철학적으로 해명하는 일이었다. 그녀가 1951년에 <전체주의의 기원(The Origins of Totalitarianism)>이라는 책을 쓴 일도 단순히 우연만은 아니다. 그렇지만 이 책은 우리에게 많은 아쉬움을 남긴다. 제목과 달리 이 책은 나치즘과 같은 전체주의가 생긴 이유를 속 시원히 말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다행스럽게도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그녀의 성찰을 다른 책에서 확인할 수 있다. 1961년 12월 예루살렘에서 열렸던 카를 아돌프 아이히만(1906∼1962)의 재판을 기록한 저서 <예루살렘의 아이히만(Eichmann in Jerusalem)>이 중요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학살에 핵심적으로 관여했던 인물로, 히틀러 치하에서 ‘유대인 이주국’을 총괄한 관료였다.
이스라엘 비밀경찰 모사드는 전범 수배를 받고 있던 그를 1960년 5월 아르헨티나에서 체포, 이스라엘로 강제 송환했다. 마침내 1961년 12월 그는 유대인 600만 명을 학살한 혐의로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았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의 재판 과정을 직접 살펴볼 기회를 얻었다. 그리고 1963년 자신이 보았던 것과 생각했던 것을 잡지 ‘뉴요커(New Yorker)’ 2월 호와 3월 호에 두 차례 기고문 형식으로 싣는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은 이 두 기고문을 토대로 집필됐다.
‘뉴요커’에 아렌트의 기고문이 실리자마자 그녀의 동포, 즉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살고 있던 유대인들은 심한 거부 반응을 보였다. 유대인들에게 아이히만은 악마와 같은 인물이어야만 했다. 그런데 아렌트의 기고문은 아이히만이 악의에 가득 차 있는 잔혹한 인물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이라고 이야기하고 있었다. 이런 내용들은 유태인들을 당혹스럽게 했고, 나아가 분노하도록 만들기에 충분했다.
아렌트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기대와는 달리 아이히만은 살아가면서 우리가 흔히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이웃집 아저씨에 지나지 않았다. 그렇다면 아이히만이 관여했던, 유대인 학살이라는 전대미문의 악은 어디에서 온 것일까?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서 아렌트가 숙고하고자 했던 점은 바로 이 문제였다. 그녀의 대답을 직접 들어보자.
자신의 개인적 발전을 도모하는 데 각별히 근면한 점을 제외하고 아이히만은 어떤 동기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근면성 자체는 결코 범죄가 아니다. 그는 상관을 죽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살인을 범하려 하지는 않았다. 이 문제를 흔히 하는 말로 하면 그는 단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결코 깨닫지 못했을 뿐이다. (중략)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그를 그 시대의 엄청난 범죄자로 만든 건 ‘철저한 무사유(sheer thoughtlessness)’였다. (중략) 이러한 무사유가 인간 속에 존재하는 모든 악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대파멸을 가져올 수 있다는 점, 이것이 사실상 예루살렘에서 배울 수 있는 교훈이었다.
-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중에서
방금 읽은 구절은 아이히만이 저지른 범죄에 관한, 즉 전체주의의 기원에 대한 아렌트의 최종 진단을 담고 있다. 아렌트는 아이히만이 준법과 근면을 철저하게 실천한 관료였다는 사실에 주목했다. 아이히만은 승진을 위해 사악한 음모를 꾸민 적도 없고, 관료 사회에 주어진 법규를 어긴 적도 없다. 오히려 자신의 소임에 대해 근면하고 성실하게 임했다. 아이히만이 법정에 선 건 그가 나치 치하 독일 관료라는 자신의 소임에 최선을 다했기 때문이다. 관료가 조직이 부여한 임무를 수행한 게 과연 죄일까? 최고 통치권자가 히틀러가 아니라 선한 인격자였다면, 아이히만은 절대로 법정에 설 일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렇다면 아렌트는 과연 아이히만에게 면죄부를 줘야 한다고 주장했을까? 절대 아니다. 아이히만은 유대인 수백만 명을 학살한 데 책임을 져야 할 전범이다. 그렇지만 지금 그는 단지 상부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라고 자신의 죄를 부인하고 있다. 우리는 아이히만을 어떻게 설득할 수 있을까? 이게 바로 아렌트가 직면한 문제였다. 스스로 책임이 없다고 주장하는 아이히만에게 그녀는 ‘철저한 무사유’의 책임을 부가한다. 아이히만은 자신에게 주어진 상부의 명령이 유대인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 유대인의 입장에서 자신이 수행할 임무가 어떤 의미로 다가올지 성찰하지 못했다. 아렌트는 삶에서 ‘사유’란 하지 않아도 상관없는 ‘권리’가 아니라, 반드시 수행해야만 할 ‘의무’라고 주장했다.
막스 베버(1864∼1920)가 지적했듯, 현대 사회의 특징은 분업화와 전문화다. 분업화와 전문화가 심해질수록 우리는 서로에 대해 무관심해지기 마련이다. 우리는 같은 조직에 속해 있어도 서로가 무슨 일을 하는지조차 알지 못하며, 심지어 알려고도 하지 않는다. 모든 일들이 너무나 전문화, 분업화돼 있어 우리는 자신이 지금 도대체 어떤 성격의 일을 하고 있는지 반성할 틈도 별로 없다. 아렌트가 지적했듯 우리 모두는 언제든지 아이히만이 될 수 있다. 우리가 아이히만처럼 무사유의 상태에 빠져 있다면, 아이히만이 저지른 악, 즉 무사유로 발생한 악은 도처에서 일어날 수 있다.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에 ‘악의 평범성(banality)에 대한 보고서’라는 부제가 붙어 있는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아렌트는 우리에게 묻고 있다. “당신의 삶은 사유의 의무를 방기하고 있지 않나?” “당신은 생각해야만 할 것을 생각하고 있는가?”
필자는 서울대 철학과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연세대 철학과에서 ‘장자철학에서의 소통의 논리’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등에서 강의하고 있으며, <장자: 타자와의 소통과 주체의 변형> <망각과 자유: 장자 읽기의 즐거움> 등 다수의 저서가 있다. 장자의 철학을 조명하고, 철학을 대중화하는 데 힘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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