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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변기의 국가경영

높은 연봉·좋은 근무 환경보다 중요한 것은?

김준태 | 389호 (2024년 3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유교에서 ‘출처(出處)’란 선비라면 출사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돼 끝내 도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물러나 때를 기다리는 줄 알아야 한다는 뜻이다. 출처가 논란이 된 것은 병자호란 때 김상헌의 처신 때문이다. 김상헌이 왕이 청나라에 항복하자 제멋대로 관직을 버리고 떠난 것을 두고 조정에서는 ‘임금에 대한 불충이다’와 ‘그럴 수 있다’로 나뉘어 의견이 분분했다. 이 시기를 기점으로 ‘충성’이라는 명목으로 임금이 신하를 마음껏 쓸 수 있던 시대에서 신하가 원하는 여건을 조성해 줘야 비로소 신하를 쓸 수 있는 시대로 전환이 이뤄진다. 이후 17세기 군주들은 조정에 나오길 꺼리는 인재를 포섭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쏟아냈는데 대표적으로 ‘산림(山林)’ 우대책이 있다.



1638년(인조 15년), 조선 조정에서는 병자호란 때 김상헌(金尙憲, 1570~1652)의 처신을 둘러싸고 거센 논쟁이 벌어졌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상헌은 청나라와의 화친에 반대하고 결사 항전을 주장했던 인물이다. 그는 항복이 결정되자 강하게 반발하며 임금에게 아뢰지도 않고 낙향해 버렸다. 아무리 자신의 신념과 배치되는 상황이 왔더라도 신하가 제멋대로 관직을 버리고 떠난다는 것은 도리에 어긋나는 행동이다. 임금에 대한 불충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하물며 임금이 ‘오랑캐’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을 당하고 나라가 존망의 갈림길에 선 상황에서 그렇게 처신한다는 것은 자기 한 몸만 깨끗하게 하려는 이기심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었다. 이에 전쟁이 끝나고 잘잘못을 가리는 과정에서 김상헌을 비난하는 신하들과 그를 옹호하는 신하들이 치열하게 공방을 벌인 것이다.

얼핏 생각하면 김상헌이 임금에게 무례했으니 당연히 처벌받았을 것 같지만 4개월에 걸친 논쟁은 김상헌을 지지하는 측의 승리로 끝났다. 인조는 김상헌이 “위급한 조정을 버리고 편안한 곳에서 유유자적했다”1 라며 불만을 토로하면서도 그를 다시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도대체 왜 이런 결과가 나왔을까?

이는 ‘출처(出處)’에 대한 유교의 인식에 기인한다. 출처란 관직에 출사하는 것[出]과 물러나 은거하는 것[處]을 합쳐 부르는 말로, 출처의 기준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느냐를 통해 당사자의 가치관과 실천 의지를 엿볼 수 있다. 이 ‘출처’는 공자와 맹자를 통해 다듬어졌는데 공자는 현실에 참여해 어지러운 세상을 바로잡아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동시에 “위태로운 나라에는 들어가지 않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살지 않으며, 천하에 도가 있으면 자신을 드러내고 도가 없으면 숨는다”2 라고 했다. 선비는 우선 출사해 나라와 백성을 위해 최선을 다하되 끝내 도를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면 물러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다.

맹자도 선비가 출사하는 조건을 제시했는데 첫째, 도를 실천하려는 군주가 있어야 하며, 둘째, 그 군주가 선비를 예우하고 그 선비의 말을 받아들여 시행해 줘야 한다.3 셋째, 그 선비도 의를 행하고 도를 추구할 준비가 돼 있어야 한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헛되이 몸을 더럽히지 말고 물러나라는 것이 맹자의 출처론이다. 요컨대 선비는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할 수 있는 조건이 달성되지 않으면 주저 없이 물러나도 되는 것이다. 김상헌이 보기에 ‘문명국’ 조선이 ‘오랑캐’인 청에게 굴욕적으로 항복하고, 명나라에 대한 의리(義理)를 저버림으로써 조선은 이제 나라답지 못한 나라가 됐다. 이런 세상에서는 본인의 뜻을 펼치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은거를 선택한 것이다. 인조로서는 자신의 통치를 부정하고, 자신을 섬기지 못할 임금이라 말하는 것이나 다름이 없었지만 김상헌의 처신이 공자와 맹자가 말한 출처의 가르침에 부합한다는 신하들의 주장을 반박할 논리가 없었다.

그런데 병자호란 이전까지만 해도 김상헌처럼 행동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유학자로서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책무를 완수하기 위해서는 마땅히 공직에 나서야 하고, 공직자로서 책임과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인식이 넓게 퍼져 있었다. 여기에 임금에 대한 ‘충성’이 매우 중요한 윤리였기 때문에 자기 뜻과 맞지 않는다고 해 임금을 거스르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일생의 대부분을 향리에 은거했던 퇴계 이황(李滉, 1501~1570)조차도 임금이 출사를 명하면 일단 조정에 올라와 임금을 알현하고 사직하거나 짧은 기간이라도 재임한 후 물러나곤 했다. 출사를 아예 거부하게 되면 임금을 섬길 수 없는 임금, 즉 폭군이나 혼군으로 간주하는 셈이 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출처 문화가 병자호란을 겪으며 변화한 것이다. 유학자들은 삼전도의 굴욕을 국가의 정통성과 도덕적 권위가 상실된 사건으로 받아들였다. 이들이 보기에 이제는 도를 펼칠 수 없는 세상이 도래한 것이고, 출사해야 할 이유도 사라져 버린 것이다. 이와 같은 인식을 단적으로 보여준 것이 김상헌의 처신이다. 비단 김상헌뿐만이 아니라 이 사건을 계기로 상당수 신하가 조정을 떠났는데 장현광이 “종전부터 봉직해 왔던 사람들은 자기 몸을 깨끗이 하려고 영영 떠나서는 안 된다”라고 비판할 정도였다.4 이 사태가 벌어지는 동안 조정에 있었던 사람은 외면하지 말고 책임을 다하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후 조정이 안정된 후에도 선비들의 출처 문화는 달라지지 않았다. 나라나 임금에 대한 충절보다 자신의 신념과 가치관을 지키는 일이 갈수록 더욱 중시됐다. 왕이 관직을 내려도 사양하기 일쑤였고, 왕이 간곡히 불러도 꼼짝하지 않았다. 아예 출사할 뜻을 접어서일까? 그것은 아니다. 효종과 현종 대에 활동했던 송준길(宋浚吉, 1606~1672)의 말을 보자.

신하의 도리로 볼 때 달려 나아가서 직무에 힘을 다해 성은의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만 … 선비가 이 세상에 살아감에 있어 각자 품은 뜻이 다르기는 하지만 몸을 초야에 묻고 살아가는 것은 본래 원한 바가 아니라 실로 부득이해서입니다. 주자가 말하기를 “사대부의 출처의 득실(得失)은 비단 선비 한 몸의 사사로운 일일 뿐이 아니라 실로 풍속의 성쇠와 관계된다”라고 했습니다.5

조정에 출사할 뜻은 있지만 그럴 수 있는 환경이 갖춰져 있지 않으니 이 문제부터 해결하라는 소리다. ‘충성’이라는 명목으로 임금이 신하를 마음껏 쓸 수 있던 시대에서 신하가 원하는 여건을 조성해 줘야 비로소 신하를 쓸 수 있는 시대로 전환된 것이다. 임금은 자신이 섬길 만한 군주임을 신하에게 증명해야 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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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17세기의 군주들은 조정에 나오길 꺼리는 인재들을 포섭하기 위해 여러 정책을 쏟아냈다. 대표적인 것이 ‘산림(山林)’ 우대책이다. ‘산림’이란 학문과 덕망이 높지만 벼슬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던 선비를 부르는 말로 지식인 사회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들을 대과(大科, 관리 선발 시험)를 거치지 않고 등용해 파격적으로 대우한 것이다. 기존에도 덕행이나 학문, 음덕을 이유로 과거를 보지 않고 벼슬에 나설 수 있는 길이 있긴 했지만 명예직이나 하위직이 주어질 뿐 요직에 오를 수는 없었다. 한데 명망 있는 산림을 등용해 임금과 세자 교육이라는 중책을 맡겼을 뿐 아니라 나아가 조정의 핵심 포스트에 임명함으로써 이들을 예우하고 이들의 의사를 국정에 반영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준 것이다. 산림의 어젠다인 북벌과 숭명(崇明)6 을 국시로 채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 덕분에 관직을 외면하던 송시열, 송준길, 윤증, 윤휴, 허목, 박세채, 권시 등 뛰어난 인물들이 대거 조정에 유입되게 된다.

또한 효종과 현종의 경우, 재위 기간 대비 ‘구언(求言)’7 의 빈도가 잦았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8 이 시기 대기근 등 국가적인 재난이 많긴 했지만 평온했던 해에도 구언 전교를 내리는 일이 자주 있었다는 것은 그만큼 여론에 귀를 기울이겠다는 뜻이었다. 왕의 능력을 표출하는 일도 소홀하지 않았는데 효종은 대동법 시행을 둘러싼 신하들과의 토론을 주도했고, 현종은 2차 예송논쟁에서 신하들의 논리를 압도하는 모습을 보였다. 즉, “도를 실천하려는 군주가 있고, 그 군주가 선비를 예우하고 그 선비의 말을 받아들여 시행해 주어야 한다”는 맹자가 말한 출사의 전제 조건을 충족시키고자 노력한 것이다. 왕이 나서서 적극적으로 인재를 끌어들이고 자발적인 충성을 유도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이상의 사례는 우리에게도 시사점을 준다. 오늘날은 조직이 구성원에게 무조건적인 충성을 요구할 수 없다. 이러한 경향은 불확실성이 가중되고 나의 이익과 성장을 최우선시하는, 이른바 ‘미미미 제너레이션(Me Me Me Generation)’이 전면에 등장하면서 더욱 심화했다. 그러나 구성원의 로열티는 조직의 원활한 운영과 성장을 위해 없어서는 안 될 요소다. 따라서 자발적인 충성을 끌어내야 하는데 높은 연봉과 좋은 근무 환경도 도움이 되겠지만 그보다는 자기 뜻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 줘야 한다. 구성원의 비전과 바람을 적극 수용해야 하며 합당하게 존중하고 대우해야 한다. 여기에 신뢰할 만한 리더십이 펼쳐진다면 인재가 자연스레 유입될 것이다.
  • 김준태 |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필자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 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akademie@skku.ed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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