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명의 역사

오래 가려면 ‘확실한 무기’ 하나쯤은…

342호 (2022년 04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오이와 마늘, 커피, 은행나무와 같은 수많은 식물은 자신만의 생존 무기로 ‘독’을 갖고 있다. 식물만이 아니라 작지만 오래 살아 온 꿀벌이나 개미와 같은 곤충들도 효과가 강력한 독으로 자신을 보호한다. 크기가 작아도 확실한 자기만의 무기가 있다면 장수할 수 있다.



“아니, 왜 못 먹어?”

“진짜 못 먹는 거야?”

자장면을 먹을 때면 이런 말을 듣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생선 뼈 발라내듯 고명인 오이를 샅샅이 발라내기 때문이다. 대체로 이런 말을 하는 이들의 표정엔 미처 다 하지 못한 말들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보인다. ‘거 참 유난하네. 몇 조각 되지도 않은 걸. 그냥 먹어도 될 텐데, 굳이 그렇게까지….’ 시원하고 맛도 좋은데 말이다. 하지만 이건 오이를 골라낼 수밖에 없는 사람들의 마음을 몰라서 그러는 것이다.

우리는 미각 수용체를 통해 맛을 인지하는데 기본적으로 쓴맛에 민감하다. 단맛과 감칠맛을 감지하는 미각 수용체는 한두 종류인 데 반해 쓴맛을 느끼는 수용체는 수십 가지나 되기 때문이다. 오이를 싫어하는 이들은 이에 좀 더 예민한 유전자를 갖고 있는데, 특히 오이에 들어 있는 쿠쿠비타신(cucurbitacin)이라는 박과 식물 특유의 쓴맛 나는 성분에 유난히 민감하다. 입맛이 까다롭거나 편식을 하는 게 아니라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마치 우리가 비린내를 맡으면 고개를 돌리지 않을 수 없는 것처럼 말이다.

2016년 미국 유타대 연구팀의 연구 결과에 따르면 사람의 7번 염색체에 있는 특정 유전자(TAS2R38)는 쓴맛에 민감한 유형(PAV형: 프롤린-알라닌-발린)이 있고 둔감한 유형(AVI형: 알라닌-발린-이소류신)이 있는데 민감형은 둔감형에 비해 쓴맛을 100∼1000배 정도 더 잘 느낀다. 몇십 배도 아니고 수백 배 정도인 셈이니 아무리 맛있는 자장면도 오이를 샅샅이 발라내지 않고는 먹기 힘들 수밖에 없다.

이뿐만이 아니다. 오이를 싫어하는 이유가 하나 더 있다. 오이에는 특유의 향을 내는 성분(Nonadienal)이 있는데 후각 수용체가 이 성분에 민감하면 그럴 수 있다. ‘그럴 수 있다’고 한 건 이 향기 물질과 결합하는 후각 수용체의 유전자 정보를 아직 찾지 못했기 때문인데 학계에서는 대체로 사실이라고 여기고 있다. 현재까지 밝혀진 결과에 따르면 어떤 후각 수용체를 가졌느냐에 따라 같은 향을 다르게 느낀다. 같은 냄새인데 누군가는 향기롭다고 하고, 다른 누군가는 역겹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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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이 나온 김에 오이에 대한 상식도 알아 두면 좋을 듯하다. 우리가 오이를 피부 마사지용으로 쓸 수 있는 건 향을 내는 성분이 알코올의 일종이기 때문이다. 얼굴에 붙이면 시원한 느낌이 드는 게 이래서다. 또 구취 제거제가 없을 경우 오이를 대체재로 쓸 수도 있다. 얇게 썬 오이 조각을 한동안 물고 있으면 입 냄새가 사라지니 말이다.

그건 그렇고 오이는 왜 쓴맛을 내고, 우리는 왜 이런 쓴맛에 예민할까?

사실 오이만이 아니라 많은 식물이 쓴맛 성분을 갖고 있고, 익지 않은 열매들도 그러한데 이유는 하나다. 곤충들과 초식동물들에게 뜯어 먹히지 않기 위해서다. 식물들은 움직이지 못하기에 자신들을 향해 무지막지하게 달려드는 포식자를 격퇴하는 방어 무기를 지속적으로 개발해왔는데 그중에서도 쓴맛은 효과가 검증된 유력한 무기다. 그런데 왜 하필 쓴맛일까? 독(毒) 성분이 쓴맛을 내는 까닭이다.

독이라고? 그러면 우리가 독을 먹고 있다는 건가? 그렇다. 다행히 우리는 식물들이 겨냥하는 곤충이나 작은 동물보다 워낙 덩치가 크기에 ‘간의 기별’만 살짝 느끼지만 말이다. ‘쌉싸름하다’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덩치가 작은 곤충들에겐 말 그대로 독극물이다. 이런 성분을 많이 먹으면 신경계에 이상이 생겨 신체가 변형되기도 하고, 호르몬 분비가 왜곡돼 죽음을 맞기도 한다.

오이만이 아니다. 수많은 음식에 들어가는 마늘의 알싸한 맛이나 때아닌 눈물을 줄줄 흐르게 하는 양파의 성분(allicin) 역시 본질은 독이다. 독은 주먹 같은 타격과 달리 나를 못 살게 굴고 해치려는 상대에게 심각한 내상을 입힐 수 있어 움직일 수 없는 식물들에는 아주 효과적이다. 주로 핵심 장기를 노리는 까닭이다. 인간들이 암살용으로 쓰이는 독극물이 그렇듯이 말이다.

우리가 즐기는 커피의 카페인과 담배의 니코틴 역시 마찬가지인데 그럼에도 멀쩡한 건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이들이 겨냥한 ‘적’들보다 우리의 덩치가 훨씬 큰 덕분이다. 그래서 독이 아니라 ‘독특한’ 맛으로 느낀다. 더러는 ‘중독’까지 되고 말이다. 식물들의 관점으로 보면 애써 만든 독을 즐기는 아주 독한 존재들이 인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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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본질이 독이니 많이 섭취하면 사람에게도 ‘충분한 효과’를 발휘한다. 니코틴 농축액을 주사해 사람을 죽이는 니코틴 살해 사건이나 옛날 임금이 내리던 사약 등이 좋은 예다.

장수 생명체들이 하나쯤 갖고 있는
강력한 생존 무기

어쨌든 수많은 식물이 이런 독을 가지고 있다는 건 그만큼 효과가 뛰어나다는 것인데 이는 수억 년을 살아온 장수 식물들이 증명한다. 이들에게도 흔하다는 건 검증됐다는 뜻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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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알다시피 1945년 8월, 일본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맞고 항복했다. 원자폭탄이 떨어진 두 곳은 사람이 다시 살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폐허가 됐는데 이듬해 봄이 됐을 때 놀랍게도 두 식물이 싹을 틔웠다. 사람들이 여기서도 살 수 있겠구나 하는 희망을 가졌을 정도로 감동을 준 ‘사건’의 주인공은 이제는 유명해진 은행나무와 쇠뜨기였다.

특히 히로시마의 은행나무는 8월6일 폭탄이 떨어진 곳에서 불과 800m밖에 떨어지지 않는 곳에 있었다. 8만여 명이 즉사할 정도로 사방 2㎞ 내의 모든 생명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렸고, 이 은행나무도 새까맣게 탔는데 그 이듬해 싹을 틔웠던 것이다. 보통 생존력으로는 어림도 없는, 정말이지 놀랄 만한 일이었다. 이 은행나무는 지금도 살아 있다는데 물론 우연이 아니었다. 지난한 시간 동안 강인한 생존력을 키워 온 결과였다.

은행나무의 기원은 멀리 2억6000만∼2억8000만 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정도면 장수 생명체 중에서도 상위급에 속하는데 기간이 기간인 만큼 별의별 일을 다 겪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1 생명이 본격적으로 활동을 시작한 이래, 지구는 다섯 번의 대멸종을 겪었는데 그중 가장 강도가 심했다는 페름기 대멸종(2억5000만여 년 전)은 물론이고, 이후로 이어진 트라이아이스기 대멸종(2억1000만여 년 전), 공룡이 사라진 백악기 대멸종(6500만여 년 전)을 다 경험한 것이니 말이다.

이런 대멸종은 직접적인 피해만 해도 수백 년씩 이어지고, 후유증은 몇천, 몇만 년씩 간다. 수많은 화산 폭발로 인해 세상이 불덩이로 가득 차는 건 기본이고, 이것들이 지나간다고 해도 이산화황 같은 독성가스로 가득 찬 지옥 같은 세상이 끝날 줄 모르게 이어진다. 연기가 하늘을 가려 햇빛을 볼 수 없는 날 또한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페름기 대멸종의 경우, 이전 상태로 회복되는데 2000만∼2500만 년이 걸렸고(2000년이 아니라 2000만 년이다!) 백악기 대멸종 때는 1000만 년 정도가 걸렸다. 이 기간에 형성된 지질을 보면 석탄이 없는데, 이는 숲이 없었다는 뜻이다. 숲이 만들어지지 못할 정도로 환경이 나빴던 것이다. 그러니까 은행나무는 이런 과정을 거치며 살아남았단 것인데 특별한 비결이 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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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이 비결의 일부를 날마다 쉽게 볼 수 있다. 도시의 가로수로 많이 심어진 것 자체가 비결인 까닭이다. 알다시피 서울 같은 대도시의 도로변은 식물의 서식지로서는 최악에 가깝다. 오염과 공해, 소음 같은 장애물들이 한둘이 아니다. 그런데도 은행나무는 멀쩡하게 잘 산다. 다른 나무들과 달리 살충제를 뿌리지 않아도 말이다. 가을이 되면 수많은 은행잎이 인도를 덮는데 혹시 벌레 먹은 은행잎을 본 적이 있는가? 거의 없을 것이다. 물론 이유가 있다.

뿌리를 깊이 뻗어 건조에 강하고 내한성이 좋아 추위에 잘 견디기도 하지만 은행나무를 가로수로 많이 쓰는 건 병충해에 강하기 때문이다. 이유는 역시 독 덕분인데 은행산(Ginkgolic acid)이나 마취를 일으키는 펜토산(pentosan) 같은 독성 물질이 있어 곤충들이 얼씬거리지 못한다. 은행나무 아래에 여느 나무 아래와 달리 풀들이 없는 것도 이런 독성과 무성한 잎 때문이다. 독으로 침입을 물리치고 무성한 잎으로 햇빛을 다 받아버리는 것이다.

개미가 들끓는 곳에 은행잎을 깔아 놓으면 개미들이 조용히 사라지는 것도 그렇고, 예전 문묘나 향교, 사찰이나 관가(官家)에 신목(神木)이라고 해서 은행나무를 많이 심은 것도 마찬가지 이유에서였다. 특히 관가에 이 나무를 심은 건 벌레들이 들끓지 않은 은행나무처럼 처신을 잘하라는 의미였다고 한다. 한마디로 독한 방어 물질을 개발한 덕에 자신을 잘 지켜온 것이다.

그러면 이 은행나무와 같이 싹을 틔운 쇠뜨기도 그럴까? 초식동물들이 쇠뜨기를 볼 때마다 슬쩍 피해 가는 걸 보면 그럴 것 같은데 사실 쇠뜨기에는 독이 없다. 그런데 왜 풀 전문가인 초식동물들이 다들 못 본 척 피해 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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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은 없지만 다른 무서운 무기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모래가 많은 곳에서 잘 자라는데 모래 토양에 많은 실리콘(규소)을 흡수, 농축해서 줄기를 만든다. 우리가 식품에서 칼슘을 섭취해 뼈를 만드는 것처럼 하는 것이다. 이들이 이렇게 하는 건 줄기를 단단히 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동시에 아주 무서운 무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흡수한 실리콘으로 실리카라는 결정 화합물을 만드는데 실리카는 우리가 아는 유리의 원재료다. 그러니까 유리를 만드는 재료로 가득한 줄기를 만드는 것이다. 생각해보자. 유리를 만드는 재료로 가득한 줄기를 초식동물들이 먹으면 어떻게 될까?

당장은 아삭아삭 씹는 맛이 좋아 무슨 상관이냐고 하겠지만 뒤늦게 결과를 아는 순간, 후회막급한 일이 일어난다. 이빨이 다 닳아 버리기 때문이다. 풀을 씹어서 넘겨야 하는 초식동물들에게 이빨은 생명이나 다름없는데 이 이빨이 닳아버리면 남은 건 죽음뿐이다. 그래서 초식동물들은 쇠뜨기를 피한다. 그냥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절대 안 먹는다. ‘독’하지 않다면 이에 준하는 삶의 무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자연의 메시지다.

이 때문에 옛날 사람들은 그릇을 씻을 때 쇠뜨기를 애용했다고 한다. 실리카들이 표면에 거칠게 돋아 있어 잘 닦이는 까닭이다. 영어권에서는 쇠뜨기를 ‘horsetail’이라고 하는데 가시가 텁수룩한 게 말(horse)의 꼬리(tail)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역시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3억 년이 넘는 장수 식물 중 하나인 고사리도 마찬가지다. 현재 우리가 보는 고사리의 80%는 8000만여 년 전에 출현한 것이다. 예를 들어 염소들은 아주 순하게 생겼지만 먹성 하나는 어마 무시할 정도다. 풀이 가득한 섬에 데려다 놓으면 그 풀들이 다 없어져 섬이 황폐해질 때까지 무작정 뜯어먹을 정도인데 이 염소들도 고사리는 피한다. 소 역시 고사리를 먹으면 뱉어내는데 그도 그럴 것이 4가지나 되는 독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100종 이상의 곤충이 시도 때도 없이 자신들을 노리는 것에 대한 대비책이다.

고사리가 갖고 있는 독은 보통이 아니다. 탈피호르몬(ecdysone)은 자신을 먹은 곤충들이 무차별적으로 탈피를 하도록 해서 조만간 죽게 하고, 티아민 분해효소(thiaminase)는 덩치 큰 말들까지 비틀거리게 할 정도다.2 염소와 소들이 대체로 독이 없는 부드러운 새순만 먹고, 우리가 고사리를 먹을 때 하룻밤 찬물에 담갔다가 삶아서 불린 다음, 다시 씻은 후에 먹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덩치가 커도 위험할 정도로 독이 강한 것이다. 참고로 이렇게 독한 고사리를 나물로 먹는 곳이 전 세계에서 딱 두 군데 있는데 한국과 일본이다. 연구에 따르면 장기간 다량으로 먹으면 위암 가능성이 높아지니 조심할 필요가 있다.

크기가 작아도 장수할 수 있다

장수 식물들이 하나같이 이런 걸 가지고 있다는 건 필요한 정도가 아니라 필수적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강력한 삶의 무기를 보유한 식물들만 살아남았다는 것인데 움직이지 못한 약자라고 감내하기만 해서는 제대로 살아갈 수 없다는 뜻이고, 자신을 해치는 침입자를 격퇴할 수 있어야 계속 살아갈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서인지 대체로 덩치가 작은 동물들도 독이나 독과 비슷한 효과를 내는 생존 무기를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육지에서 가장 덩치 큰 동물은 코끼리인데 이 코끼리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동물은 누굴까? 코끼리들이 사자보다 더 무서워하는 게 꿀벌들이다. 역설적이게도 워낙 작아서 대적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약하고 아픈 곳만 골라, 그것도 독이 든 침을 사정없이 쏘는 까닭이다. 그래서 사자가 다가오면 대체로 맞서기도 하지만 벌떼들이 밀려들면 도망가는 일이 허다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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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꿀벌의 침은 낚싯바늘처럼 끝에 미늘이 있어 한 번 박히면 빠지지 않고 침에 있는 독이 다 빠져나갈 때까지 살 속을 파고든다. 단순히 미늘만 있어서가 아니다. 꿀벌이 ‘발사’한 침은 인공지능을 탑재해 목표물을 알아서 찾아가는 최첨단 미사일처럼 자체적으로 역할을 수행하는 기능이 있다. 믿기 어렵지만 침 속에 독이 든 주머니와 독을 주입하는 데 필요한 근육계는 물론 침의 움직임과 독의 방출을 통제하는 신경절까지 갖추고 있어서다.3 그래서 침을 쏜 꿀벌은 상대에게 내팽개쳐져도 ‘발사’된 침은 남은 독을 전부 주입한다.

그런데 이 독이 생각 이상으로 강하다. 다양한 연구에 의하면 꿀벌의 독은 두 가지 주요 단백질과 여러 가지 미량 성분으로 이뤄져 있다. 주성분은 작은 펩타이드인 멜리틴(melittin)인데 이 물질은 꿀벌 독을 제외하고는 자연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는다. 다시 말해 그 누구도 개발한 적 없는, 완전히 차별화된 성분을 개발했다는 뜻이다. 벌에 쏘이는 순간, 외마디 비명을 지르게 하는 게 바로 이 성분인데 미국 워싱턴대 의과대학 연구팀에 의하면 멜리틴은 에이즈 바이러스의 보호막을 뚫었을 정도로 효과가 독특하다.

이 멜리틴은 더 나아가 독 성분의 20%를 차지하는 두 번째 독, 포스폴리페이스(phos-pholipase)를 지원해 효과를 증폭시킨다. 심장 근육을 직접 공격, 세포막의 핵심 성분인 인지질을 파괴하도록 말이다.4

이 때문에 현재까지 꿀벌 독은 해독제가 없다. 뱀독의 해독제는 개발했지만 꿀벌 독의 해독제를 개발하지 못하는 이유는 주요 독인 멜리틴을 중화시키는 방법을 발견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쥐를 대상으로 실험한 연구에 의하면 죽음을 부르는 성분은 멜리틴인데 우주선을 만드는 첨단 기술도 어쩌지 못하는 유일무이한 무기를 갖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뱀독이 훨씬 더 독성이 강하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은 벌 독이 더 강하다는 뜻이고, 꿀벌의 집단 공격을 받으면 치료제가 없다는 말이다. 이러니 천하의 코끼리들이라도 도망가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1억여 년 전 벌에서 진화해 번성 중인 개미들 역시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곤충들에게 수없이 침을 쏘여 가며 쏘인 느낌과 아픈 정도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곤충 침 통증 지수’를 만든 생물학자 저스틴 슈미트(미국 사우스웨스턴 생물학연구소 소속)에 의하면 일반적인 수확 개미의 독은 꿀벌 독보다 6배나 더 치명적이고, 미국 애리조나주 윌콕스에 서식하는 마리코파수확개미의 독은 꿀벌 독보다 20배쯤 더 유독하다. 곤충의 독 중 최고다. 단지 부지런함이나 협력만으로 지금까지 살아남은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일전에 시작을 잘한 덕분에 초기의 형태를 변경시키지 않고도 3억 년 넘게 살아온 투구게를 소개한 적이 있는데 이들 역시 확실한 방어 무기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 식물들이 벌레들에게 당하듯 동물들은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같은 병원균에 시도 때도 없이 시달리는 게 일상적인데 투구게는 이에 대한 확실한 대비책이 있다. 대장균•살모넬라균•콜레라균 같은 그람음성균을 물리치는 ‘특효 약’(항균 물질)이 그것이다.

우리 눈에는 보이지 않지만 바닷물 1 안에는 이런 병원균들이 수십만 마리씩 있는데 이들은 생물체에 해가 되는 내독소를 갖고 있어 염증을 일으킨다. 알다시피 염증은 만병의 근원이다. 투구게의 피는 이들 독소가 체내로 들어오면 특별히 만든 ‘변형 세포’를 터트려 포획한다. 변형 세포 안에 있는 응고 물질(단백질)이 독소에 엉겨 붙어버리는 것이다. 확산되지 못하도록 말이다. 그 덕분에 상처가 나도 멀쩡하다. 역시 2억 년 이상 살아온 덕분에 이 시리즈에서 자주 소개하는 악어들도 수많은 세균을 물리치는 항생 물질을 갖고 있다. 이런 능력이 있으니 흙탕물 비슷한 곳에서도 평온하게, 오랜 시간 살아남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덩치가 작으면 눈에 덜 띄기에 좀 더 용이하게 위기를 피할 수 있겠지만 언제까지나 그럴 수는 없다. 작은 세계에도 나름의 생태계가 형성되기 때문이다. 작더라도 확실한, 자기만의 삶의 무기가 있어야 한다. 덩치가 작다고 작고 미미한 무기만 갖고 있어서는 효과적으로 생존할 수 없다. 꿀벌과 개미들의 독은 이들이 이런 생존의 이치를 일찌감치 깨달았다는 뜻이다. 우리 역시 꿀벌과 개미를 얼마나 무서워하는가? 다르게 보면 번성은 그냥 오지 않는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일까? 수백 년씩 강하게 생존해 오고 있는 장수 기업들의 비결 역시 다르지 않다. 한때 고(故) 이건희 삼성그룹 전 회장이 임원들에게 선물해 ‘이건희 와인’으로 유명했던 ‘티냐넬로’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와인 회사인 안티노리(Antinori)가 만든 것이다. 1385년 창업해 역사가 637년이나 된 이 이탈리아 회사는 비록 규모는 작지만 최고의 와인을 만든다. 영화 ‘007 시리즈’의 초기 제임스 본드가 가지고 다니던 권총은 1526년 설립한 파브리카 다르미 피에트로 베레타(Fabbrica D’armi Pietro Beretta)에서 생산한 것이다. 흔히 ‘베레타’로 불리는 이 회사는 오로지 총만 만들어 온 강소 기업이다. 1526년이면 임진왜란(1592년)이 있기 한참 전이다. 1613년 창업한 프랑스의 작은 보석 회사 멜레리오 멜러(Mellerio Meller) 역시 ‘멜레리오 컷’ 같은 최고의 세공술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 있다. 작아도 확실한 자기만의 무기가 있다면 충분히 장수할 수 있는 것이다. 생존의 원리는 어디에서나 같다.


서광원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 araseo11@naver.com
필자는 경향신문, 이코노미스트 등에서 경영 전문 기자로 활동했으며 대표 저서로는 대한민국 리더의 고민과 애환을 그려낸 『사장으로 산다는 것』을 비롯해 『사장의 자격』 『시작하라 그들처럼』 『사자도 굶어 죽는다』 『살아 있는 것들은 전략이 있다』 등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0호 Smart Worcation 2022년 08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