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말 새몸짓

244호 (2018년 3월 Issue 1호)

새롭지만 해묵은

3월이다. 해마다 이맘때면 새 책, 새 친구, 새 교실로 설렌 기억을 누구나 가지고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오랜 수험 생활을 마치고 대학에 막 들어간 새내기 시절. 새로운 캠퍼스에, 새로운 환경, 새로운 커리큘럼, 새로운 활동들…. 모든 것이 새롭다. 무엇보다 자유를 만끽할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 행복하다.

그러나 조금만 시간이 지나면 대학이 더 이상 새롭지 않은 곳임을 깨닫게 된다. 고등학교 때와 근본적으로 달라진 게 없기 때문이다. 책이 두꺼워지고 원서가 추가됐을 뿐 ‘수업 듣고 공부해서 시험 보고 평가받는 입시구조’는 지난 12년간 해왔던 그대로다. 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대학이라는 환상에서 깨지게 된다.

왜 이럴까? 왜 대학에서조차 입시의 그림자를 떨칠 수 없는 것일까? 그것은 대학이라는 교육기관이 다른 교육기관과 근본적인 차별이 없기 때문이다. 대학이 고등학교나 입시학원과 별반 다를 바 없는 학습기관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학에 들어가 봤자 또 다른 ‘학습’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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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와 연구

이러한 현상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말이 ‘공부’다. 우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 “공부하라!”는 말을 지겹게 듣고 살아왔다. 심지어는 대학원생에게까지도 교수들은 “공부하라”는 말을 서슴지 않는다. 그러나 바로 그 말이 대학의 새로움을 방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다.

대학은 공부하는 곳이 아니라 연구하는 곳이다. 대학은 학습하는 곳이 아니라 생각하는 곳이다. 만약 대학이 공부와 학습만 하는 곳이라면 학원과 다를 바 없을 것이다. 거기에 연구와 생각이 동반돼야 대학이 대학일 수 있는 것이다.

공부는 기존의 지식을 습득하는 행위이고, 연구는 새로운 지식을 창조하는 활동이다. 그래서 학습자와 연구자는 지식을 대하는 태도가 근본적으로 다르다. 학습자는 지식을 늘리기 위해서 공부를 하고, 연구자는 지식을 만들기 위해서 상상을 한다.

그런 점에서 연구자는 아티스트와 통한다. 기존 질서에서 사고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질서를 모색하기 때문이다. 이 새로운 질서를 노자는 ‘학(學)’에 대해서 ‘도(道)’라고 했다. 그리고 ‘도’, 즉 새로운 질서를 추구하면 기존 지식이 날로 줄어든다고 했다. 왜냐하면 새로움은 낡음의 심연에까지 내려가서 미지의 영역에 도달했을 때 비로소 돋아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새로움을 모색하는 사람은 낡음을 축적하는 대신 그것의 근원을 탐구한다. 그래서 지식은 줄어들고 통찰이 풍부해지는 것이다.

학습의 연원

지금의 대학은 아티스트를 양성하기보다는 학습자를 양산해내고 있다. 이처럼 대학에서조차 ‘학습’을 강조하는 이유는 우리 사회에 아직도 유교문화가 뿌리 깊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유교는 ‘성인의 말씀’을 학습하고 받아들이는 데서 출발한다. 그래서 유교를 다른 말로 ‘성인의 가르침(聖敎)’이라고도 한다.

이런 전통에서 선생의 역할은 성인의 말씀을 충실히 전달하는 데 있다. 이것을 공자는 ‘술(述)’이라고 했다. 반면에 학생은 선생에 의해 전달받은 성인의 말씀을 열심히 익히고 실천하면 된다. 이른바 우등생이자 모범생이다. 이러한 구조는 사회에 나가도 근본적으로 달라지지 않는다. 교사가 상급자로, 학생이 하급자로 바뀌었을 뿐이다.

우리의 근대화란 이 성인을 ‘공자’에서 ‘서양’으로 바꾸는 과정이었다. 학습내용만 바뀌었을 뿐 학습한다는 태도 자체는 전혀 변하지 않은 것이다.

사고의 박제화

이러한 학습 일변도 문화가 지니는 치명적인 약점은 사람들의 사고를 박제화한다는 것이다. 자기 머리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이 아니라 성인의 말씀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게 만든다. 그래서 자유로운 상상력은 거세되고 창조가 아닌 모방과 변용이 반복되게 된다. 이러한 문화의 공통점은 근본적인 질문이 없고, 기존 권위에 약하며, 새로운 도전을 꺼린다는 것이다.

장자의 성인 비판은 여기에 있다. 장자의 첫머리는 구만리 창공을 가르는 대붕의 소요에서 시작된다(『소요유』). 이어서 “나는 나를 잃었다(吾喪我)”고 하는 진인(眞人)이 등장한다(『제물론』). 그렇다면 ‘대붕의 소요’와 ‘자아의 상실’은 어떤 관계에 있을까?

여기에서 ‘상실된 자아’는 성인의 말씀에 매여 있는 속박된 자아를 가리키고, 소요하는 대붕은 속박 상태에서 벗어난 자유로운 자아를 상징한다. 성인의 말씀은 하나의 틀을 제시하고, 그 틀이 나의 생각을 제한하고 구속한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되어진다’. “내가 나를 잃었다”는 말은 나의 생각을 구속하고 있던 틀을 자각함으로써 “생각되어지던 나를 버렸다”는 뜻이다.

이것이 장자가 생각하는 진정한 ‘자유’다. 장자에게 있어 자유란 고정된 틀 안에서의 주체적인 판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틀 바깥으로 나아가서 사유할 수 있는 힘, 더 나아가서는 틀과 틀을 넘나들면서 새로운 틀을 만들어낼 수 있는 사고의 유연성을 의미한다. 그런 점에서 노자가 말한 ‘도’와 일맥상통한다.

자기다움은 이러한 ‘도’의 추구에서 나온다. 틀과 틀을 넘나드는 방식, 융합하는 방식에서 각자의 개성이 발현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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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의 자유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하면 이런 정신의 자유, 사고의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을까’이다. 그것은 지배적인 틀을 상대화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상대화를 통해서 ‘하나’의 틀에 대한 집착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장자는 여기에 이르는 방법을 다양한 우화를 통해 비유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인간과 동물 사이의 미(美)의 기준의 차이, 서로 다른 가치관을 지닌 두 사람 사이의 끊이지 않는 시비논쟁, 바다 이야기를 들은 우물 안 개구리의 충격, 감각기관으로 상징되는 ‘하나의 틀’이 주입되자마자 죽어버린 혼돈의 이야기 등등. 이런 철학 우화를 통해 박제된 마음을 풀어주려는 것이 장자의 의도다.

이렇게 해서 나를 지배하고 있던 틀이 상대화됐을 때 우리는 비로소 현실을 지금까지와는 다른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된다. 보다 넓고, 깊고, 많은 눈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대붕의 시선이다. 이 시선에 올라갈 때 비로소 변화에 자유자재로 대처할 수 있게 된다.

이 대응 과정에서 종래와는 다른 새로운 ‘도’가 생겨난다. 마치 원숭이 조련사가 원숭이를 대하는 방식(道)을 ‘조삼모사’에서 ‘조사모삼’으로 바꾸었듯이. 그래서 장자의 철학은 하나의 ‘도’(체계)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 ‘도’ 그 자체를 디자인하는 길을 제시하는 메타철학이자 디자인철학이다.

인문정신과 인문교육

인문정신이란 지배적인 틀을 상대화해 새로운 틀을 디자인할 수 있는 정신적 역량을 말한다. 그리고 인문교육은 그러한 힘을 길러주는 지속적인 훈련을 의미한다. 인문학이 강조돼 인문학강좌는 늘어나는데 인문교육이 동반되지 않는다면, 인문학적 지식은 늘어날지언정 인문정신은 함양되지 않는다.

인문정신을 함양하는 인문교육의 핵심은 말하기와 글쓰기다. 선생님의 말씀을 수동적으로 듣고 외우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자기 생각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고, 그것을 글로 다듬어 보는 것이다. 이렇게 자기 ‘소리’를 내고 자기 ‘글씨’를 쓰는 훈련을 반복하는 과정에서 비로소 참다운 자기와 만나게 된다. 그리고 거기에서 종래에는 없던 자기만의 ‘새말’과 ‘새몸짓’이 나오게 된다.

새로운 틀은 바깥에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서 만들어가는 것이다. 바깥에서 이미 만들어진 것이라면 그것은 더 이상 새로운 것이 아니다. 내가 나의 생각을 디자인하는 과정에서 새로움이 탄생한다. 그래서 디자인은 새로움으로 나아가는 사유의 여정이다.

생각과 개념의 디자인

디자인경영은 이러한 ‘생각을 디자인하는 힘’을 경영의 핵심 원리로 삼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그것은 인문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다. 기존 틀을 넘어서 생각할 수 있는 힘을 기르는 것이 인문학이고, 그러한 사고력을 바탕으로 새로운 틀을 구상하는 정신적 활동이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근대화는 ‘잘살기’ 위해 숨 가쁘게 달려온 역사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인문정신과 디자인사고는 배제돼 있었다. 물질적으로 잘사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생각은 근대화를 선취한 선진국의 틀을 따라가기만 하면 됐다. 굳이 자신의 틀을 새로 디자인할 필요는 없었다. 이것은 산업경영 시대의 이야기다.

반면에 디자인경영 시대에는 ‘생각’이 잘살기 위한 수단이 된다. 이것을 츠타야의 마쓰다 무네아키 회장은 ‘지적 자본’이자 ‘기획력’이라고 했다. 생각을 잘 디자인하는 것이 경쟁력이 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그동안 별개로 여겨져 왔던 인문학과 디자인과 경영이 이제는 더 이상 다른 것이 아님을 의미한다. 오히려 이 삼자가 융합했을 때 비로소 새로운 틀이 생성될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우리의 창조를 가로막는 것들

지난 1세기 동안의 한국은 산업경영시대의 개념과 생각으로 달려왔다. 이 시대의 지배적인 가치는 성장과 효율이었고, 거기에 도달하기 위한 수단은 공부와 학습이었다. 공부와 학습으로 기존의 틀을 익혀서 빠른 시간 안에 정해진 목표를 달성하는 것이다.

지금은 이러한 학습형 패러다임이 오히려 우리의 창조를 가로막고 있다. 틀 그 자체를 만들지 않으면 안 되는 시대에 여전히 기존의 틀을 답습하고 있기 때문이다. 스스로 생각하고 연구해서 자신만의 언어와 사상과 몸짓을 디자인해야 다원화되고 급변하는 시대와 어우러질 수 있다.

바로 여기에 인문학의 역할이 있다. 그러나 이때의 인문학은 동서양의 고전이나 역사에 관한 지식으로서의 인문학이 아니라 기존의 틀에서 벗어나서 새로운 틀을 구상할 수 있는 생각의 힘을 기르는 훈련으로서의 인문학이다.

우리의 창조는 분명 인문학과 함께 시작돼야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인문학’의 개념 자체를 바꾸지 않으면 안 된다. 학습하는 인문학에서 생각하는 인문학으로. 그래서 공부하는 대한민국에서 사유하는 대한민국으로 탈바꿈하지 않으면 안 된다. 

조성환 인문학공장 편집팀장 hansowon70@nate.com
동아비즈니스리뷰 350호 Smart Worcation 2022년 08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