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R2. 윤종신의 음악 창작 및 유통 플랫폼 전략
Article at a Glance
지난 8월, 각종 음악 차트에서 1위를 달리고 있던 건 시사주간지 표지에까지 등장했던 남성 아이돌 그룹도, ‘삼촌팬’들이 새 음반 나오면 ‘힘내라’며 소속사 주식 매입으로 ‘팬질’을 한다는 여성 아이돌 그룹도 아닌, ‘옛날 사람’ 윤종신의 노래였다. 예능인 윤종신이 아닌 ‘뮤지션 윤종신’을 다시 사람들에게 각인시킨 이 사건은 우연이 아니다. ‘월간 윤종신’으로 상징되는, 그가 7년 가까이 묵묵히 만들어오던 음원 플랫폼 전략이 만들어 낸 성과다. 협업과 개방의 플랫폼을 통해 자신의 강점과 외부 참여자의 강점을 효과적으로 접목했기 때문에 얻어낸 결과다. 세상이 아무리 급변해도 결코 변하지 않는 ‘이별의 감정’을 시대에 맞는 코드로 재해석한 것도 성공 요인으로 분석된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경민(연세대 경영학과 4학년) 씨와 정하영(서울시립대 도시사회학과·경영학부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청와대의 선곡과 대중의 선택
2017년 8월17일 청와대 영빈관에서는 문재인 대통령 취임 100일 기자회견을 앞두고 ‘걱정말아요 그대’ ‘야생화’ ‘오르막길’ ‘지친 하루’ 등 4곡의 가요가 흘러나왔다. 당시 청와대 측은 “기자회견이 무겁고 건조해지는 것을 막고자 했다”며 “노래에 담긴 메시지가 국민에게 잘 전달되길 바란다”고 밝혔다. 노래의 메시지는 심상찮았다. 이적이 리메이크해 부른 전인권의 ‘걱정 말아요 그대’는 2016년 겨울부터 2017년 봄까지 진행된 촛불집회 때 가장 많이 불린 노래였고 ‘눈물 머금고 기다린 떨림 끝에 다시 나를 피우리라’는 가사가 담긴 ‘야생화’(박효신)는 10년 만에 정권 교체로 들어선 새 정부를 은유하는 듯했다. 특히 문 대통령이 탁현민 행정관과 함께 히말라야에 갔을 때 즐겨 들었다는 ‘오르막길’은 ‘굳이 고된 나를 택한 그대’와 함께 앞으로 닥칠 오르막길을 오르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옳은 길 따위는 없는 걸 내가 택한 이곳이 나의 길’이란 가사가 담긴 ‘지친 하루’도 의미심장하게 다가왔다.
자타공인 ‘윤종신 덕후’로 통하는 필자(유성열)는 이 네 곡의 노래 중에서 두 곡이 귀에 확 들어왔다. ‘오르막길’과 ‘지친 하루’이다. 이 두 노래는 ‘월간 윤종신’1
2012년 6월 호와 2014년 12월 호를 통해 각각 발표한 곡이다. 두 곡 모두 윤종신이 직접 작사, 작곡했으며 ‘지친 하루’는 곽진언, 김필, 윤종신이, ‘오르막길’은 정인이 불렀다. 한국어의 맛을 가장 잘 살린다는 윤종신의 작사 실력을 청와대도 인정한 것 아니냐는 ‘농반진반’의 분석이 뒤따랐던 이유다.
진짜 놀라운 사건은 따로 있다. 윤종신이 워너원, 방탄소년단 등 엄청난 팬덤을 가진 아이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며 음원 시장의 강자로 자리 잡은 것이다. 2017년 6월에 발표한 ‘좋니’가 입소문을 타고 인기를 얻으며 멜론 월간 차트에서 8, 9월 두 달 연속 1위를 차지했고, 지상파 음악방송 차트 1위에도 올랐다. 1990년 015B의 객원 보컬로 가요계에 데뷔한 윤종신의 음악방송 1위는 그의 27년 음악 인생에서 처음이었다. 음악계에서는 1993년 ‘애모’의 김수희가 ‘하여가’의 서태지와 아이들을 이기고 음악방송에서 1위를 차지한 것과 비견되는 ‘혁명적 사건’이라는 평가가 쏟아졌다.
그렇다면 윤종신의 ‘혁명’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아이돌 음악이 무차별적으로 소비되는 시대에 대중의 마음을 움직인 ‘옛날 사람’ 윤종신의 ‘전략’은 과연 무엇이었는지 분석했다.
보컬리스트 윤종신과 살리에리 콤플렉스
윤종신은 한국 대중음악의 황금기인 1990년대를 대표하는 보컬리스트이자 뮤지션이다. 1990년 서울대 출신 작곡가 정석원과 기타리스트 장호일이 결성한 015B의 1집 타이틀곡 ‘텅 빈 거리에서’의 보컬(객원)로 데뷔한 그는 1992년과 1993년 각각 발표한 솔로 2집 ‘너의 결혼식’과 3집 ‘오래전 그날’로 대중에게 이름을 각인시켰다. 지금은 예능인으로 더 유명하지만 당시에는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닐 만큼 가수로서의 인기가 상당했다.
두 곡 모두 실연당한 남자의 심금을 울리는 ‘찌질 감수성’의 대표곡으로 지금도 널리 불린다. 하지만 두 곡의 가사는 박주연이 썼으며 작곡 역시 정석원의 도움을 받았다. 이처럼 1, 2, 3집은 윤종신 본인보다는 작곡가 정석원과 김형석, 작사가 박주연의 역량이 더 돋보이는 앨범이다.
90년대를 주름 잡은 신승훈, 서태지, 신해철, 김동률, 정석원, 유희열 등 ‘천재 뮤지션’들이 1집부터 싱어송라이터 또는 프로듀서로 데뷔한 것과 비교하면 데뷔 초창기 윤종신은 ‘뮤지션’이란 단어와는 다소 거리가 있었던 게 사실이다.
윤종신이 뮤지션으로서 알려지기 시작한 건 1995년 발표한 4집 ‘공존’부터다. 이 앨범에서 윤종신은 타이틀곡 ‘부디’를 비롯해 거의 모든 곡을 직접 작사, 작곡했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을 거뒀다. ‘부디’가 KBS 가요Top10 차트 3위까지 오르고 디스코곡 ‘내사랑 못난이’가 히트를 쳤다. 하지만 평단은 ‘뮤지션’ 윤종신에게 높은 점수를 주지 않았다. 이때도 윤종신의 대표 앨범은 4집이 아니라 여전히 2집과 3집이었다. 보컬리스트 윤종신이 아닌 싱어송라이터 윤종신은 대중을 휘어잡는 역량이 부족하다는 평가가 나오기도 했다.
보컬리스트와 싱어송라이터의 경계에서 방황하던 윤종신은 1995년 ‘광기 어린 천재’ 유희열을 운명처럼 만난다. 서울대 작곡과 출신으로 1992년 유재하음악경연대회 대상 수상자인 유희열은 군 제대 후 무작정 윤종신을 찾아갔다. 유희열의 재능을 한눈에 알아본 윤종신은 선뜻 프로듀서를 맡기고 5집 앨범 ‘우(愚)’를 함께 만들어 1996년 발표했다. 윤종신의 ‘음악 노예’로 불리는 유희열의 음악 인생도 이때부터 꽃을 피웠다.
타이틀곡 ‘환생’을 비롯해 9곡이 담긴 이 앨범은 윤종신 앨범 중 최고의 수작(秀作)으로 꼽힌다. 평단의 찬사와 상업적 성공의 두 마리 토끼를 모두 잡았으며 음악 웹진 ‘100BEAT’가 선정한 2010년 ‘90년대 100대 명반’ 27위에 오를 정도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5집 앨범은 한국 대중음악 최초의 발라드 콘셉트 앨범(어떤 하나의 주제나 스토리를 가지고 구성한 음반)이다. 사랑에 눈을 뜬 대학생이 ‘그녀’에게 첫눈에 반한(환생) 뒤, 마음을 얻기 위해 노력한 다음(여자친구), 성공해서(의지) 교제를 시작하지만(club에서), 어머니가 반대하면서 헤어진 뒤(너의 어머니), 1년이 넘도록 괴로워하다가(아침, 일년, 오늘), 결국 다른 여자와 결혼(바보의 결혼)하면서 끝난다. 음악 앨범이 기승전결의 구조를 갖춘 하나의 ‘소설’인 셈이다. 평론가들은 유희열과 윤종신의 이런 실험에 매우 높은 점수를 줬고, PC통신 나우누리의 대중음악 비평동호회 ‘Muse’ 출신 평론가 4명(신승렬, 김영대, 박찬우, 오준환)은 2006년 ‘90년대를 빛낸 명반 50’(동명의 책으로도 출간)을 선정하면서 이 앨범을 포함시켰다. 음악적 재능이 뛰어나지 않은 ‘살리에리’가 ‘모차르트’를 곁에 두고 최고의 자리에 오른 셈이다. 이들 평론가 4명은 5집 앨범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2
“이 앨범은 그의 최고작일 뿐 아니라 다른 가수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왜인가? 사실 윤종신은 보컬리스트의 재능만으로 판단할 때 최고의 소리꾼은 아니다. 다른 015B 객원 가수 출신들과 비교해 봐도 감성적인 전달력은 이장우, 독창적인 면에서는 김태우에 비해 다소 처진다는 것이 솔직한 평가일 것이다. 그러나 자신이 하고 싶은 것과 할 수 있는 것을 적절히 구분해, 모자라는 재능은 다른 실력 있는 음악인을 영입해 채워 넣는 프로듀서로서의 능력, 그리고 최고의 재능이 주어지지 않았더라도 후천적인 노력으로 단점을 최대한 극복하려는 노력은 자신의 발전에 게으른 음악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살리에리가 되지 말자”
다소 실험적이고 무모해 보였던 5집 앨범이 평단의 찬사는 물론이고 대중적 성공까지 거두자 윤종신의 ‘작법(作法)’은 180도 달라진다. 본인 스스로 모든 걸 해내려는 욕심을 버리고 적재적소에 최고의 인재를 활용하는 방식으로 앨범을 만드는 게 자신과 같은 ‘보통 뮤지션’이 성공하는 지름길이자 유일한 방법이라고 깨달은 것이다.
실제로 윤종신은 정석원과 같은 ‘천재성’이 부족했고, 유희열처럼 전문적인 음악 교육도 받지 않았다. 대원외고 졸업 후 인문학(국문학)을 전공하며 통기타를 들고 스스로 음악을 익혔다. 우연한 기회에 학내 가요제에서 입상한 뒤 정석원의 눈에 띄어 보컬리스트로 데뷔했고 국문학 전공자로 작사에는 탁월한 능력을 발휘했지만 어깨너머로 배운 음악 실력은 당대 뮤지션들보다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지속적으로 앨범을 내면서 작사, 작곡 능력은 일취월장했지만, 편곡 작업은 윤종신에게 넘기 힘든 벽이었다.
윤종신이 5집 앨범을 내놓은 90년대 중반은 한국 대중음악의 변혁기였다. 서태지의 등장으로 대중의 수준은 높아졌고, 컴퓨터를 활용한 음악들이 대거 등장하면서 작곡 못지않게 편곡이 중요해졌다. 음악적 재능과 편곡 실력이 떨어지는 윤종신에겐 위기였다.
하지만 윤종신은 5집을 만들 때 유희열을 통해 익힌 공식으로 이런 변혁에도 슬기롭게 대처해왔다. 윤종신은 1996년 발매한 6집부터 최근의 ‘월간 윤종신’까지 하림, 이근호, 조정치, 포스티노 등의 ‘신예 천재’들을 지속적으로 발굴해 ‘음악 노예’로 곁에 두고 작곡과 편곡을 대거 맡기는 전략을 고수하고 있다.
뮤지션이라면 누구나 앨범 제작의 모든 과정을 스스로 해내려는 욕심이 있다. 또 평단은 그걸 해내는 뮤지션에게 좋은 평가를 내린다. 하지만 윤종신은 정반대의 전략으로 음악계에서 생존했고 ‘월간 윤종신’까지 궤도에 올렸으며 ‘청와대’까지 입성했다.
물론 윤종신도 남에게 절대 맡기지 않는 작업이 있다. 바로 작사다. 이별한 남자의 감성을 글로 표현하는 데 일가견이 있는 윤종신은 가사만큼은 지금도 직접 쓴다. 자신이 제일 잘하는 일까지 굳이 ‘천재’들을 활용할 필요는 없다는 판단에서다. 27년 만에 가요차트 1위를 점령하게 해준 ‘좋니’ 역시 신예 작곡가 포스티노가 만들었지만 가사는 윤종신이 직접 썼다. 윤종신의 이런 전략은 스티브 잡스가 없는 삼성전자가 각 분야의 최고 인재들을 적재적소에 영입해 스마트폰 시장을 개척한 것과 유사하다. 윤종신은 2012년 SBS ‘힐링캠프’에 나와 유희열을 만난 뒤 갖게 된 생각을 이렇게 증언했다.3
“나는 정석원을 보면서 어깨너머로 음악을 배웠다. 정석원은 말 그대로 천재다. 학창 시절 곡 쓰면서 할 거 다 하면서 서울대를 갔다. 처음에는 열등감이 있었다. 내 곡은 후져 보였다. 사실 티는 되게 안 냈지만…. 015B의 후광을 나도 입었다. 신문에는 학력과 음악적 실력을 겸비한 ‘엘리트 그룹’으로 나왔고, 나도 항상 같이 나왔다. 나는 엘리트가 아닌데 말이다. (그때는) 천재가 싫었다. 유희열도 천재였다. 내가 뭘 시키면, 그건 별로라며 새 곡을 써오는데 (내 곡보다) 더 좋았다. 영화 ‘아마데우스’를 보면서 나는 살리에리가 되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모차르트에게 왜 열등감을 느끼나. 모차르트의 매니저가 되면 되는 거 아닌가. 살리에리는 (모차르트의 곡을 듣고) ‘아냐, 이게(내 곡이) 더 좋다’고 얘기하지만 난 (유희열의 곡이 더) 좋다고 받아들였다. 그때부터 천재란 친구들, 잘하는 친구들과의 시너지를 맛보게 됐다. 무조건 열등감을 느끼고 돌아설 게 아니었다. 그런 사람들과 친화력이 있는, 그런 색깔(능력)을 내가 가졌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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