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조와 정조를 통해 본 리더십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조선시대엔 권세가들에게 집을 빼앗기고도 말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비일비재했다. 억울하게 집을 빼앗겼지만 권세가의 보복이 무서워 고발도 못하고 쉬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조는 이 같은 관행을 뿌리 뽑기 위해 여염집 탈취금지령을 내렸다. 심지어 도성 내 집 매매 자체를 금지시킬 정도로 초강수를 뒀다. 엄격한 법 집행으로 선의의 피해자가 발생할 정도였다. 영조가 이토록 무리수를 뒀던 건 여염집 탈취 문제 자체를 넘어서 고위층의 불법에 대해 일반 평민들도 두려움 없이 고발할 수 있는 관행을 정착시키기 위해서였다. 영조는 다소 무리다 싶을 정도로 강경하게 법령을 시행함으로써 백성들에게 양반도 고발할 수 있게끔 하는 용기를 심어줬던 것이다. |
영조와 정조가 다스리던 18세기는 조선 중흥의 시대라 불립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은 결코 쉽게 얻어진 게 아닙니다. 노론과 소론 간 권력 투쟁이 극에 달했던 시기에 즉위한 두 왕은 군왕의 소임이란 특정 당파의 이익을 대변하는 게 아니라 도탄에 빠져 있는 조선과 백성을 위해 있는 자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당시로선 너무나 혁명적인 선언인 탓에 수많은 방해와 반대에 직면했지만 이들은 포기하지 않고 자신들의 비전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지혜와 용기, 끈기로 무장해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끌어 낸 두 임금, 영조와 정조의 기록을 통해 진정한 리더의 자질에 대한 통찰을 얻어 가시기 바랍니다.
어느 날 잘 살고 있던 집에서 갑자기 쫓겨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법적 문제로 어쩔 수 없이 집을 비워줘야 하는 경우에도 내 억울함을 호소하며 버티는 경우가 많다. 하물며 버젓이 내 소유의 집인데도 쫓겨나게 된다면 어느 누구도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런 문제가 자주 발생했다. 아니 더 정확하게 말하면 집을 빼앗기고도 말 못하고 쫓겨나는 일이 많았다.
집을 빼앗기고도 말 못하던 조선 백성들
조선시대의 서울은 지금처럼 하나의 행정구역이 아니었다. 왕과 지배층이 거주하는 특별한 영역이었다. 여기에다 성벽으로 둘러져 있어서 서울의 공간은 더 이상 확대하기 힘든 영원불변의 공간이 됐다. 그런데 조선 후기가 되면 서울로 모여드는 인구는 끝없이 늘어나고 공간은 변함이 없어서 집을 늘리려면 주변 사람의 집을 헐어야만 했다.
조선 초부터 권세가들이 남의 집을 함부로 빼앗지 못하도록 금지하는 법이 마련돼 있었다. 하지만 권세가들은 갖가지 방법으로 민가를 차지하고 있었다. 전염병이 돌면 궁 안 사람들이 병을 피한다는 명목으로 민가에서 생활하는 것을 허용했는데 이때 아주 좋은 집으로 피난을 가서 원래 살고 있던 사람을 내보낸 뒤 그 집에서 안 나오고 버티는 등 별별 기상천외한 방법이 동원됐다. 세 들어 살다가 기한이 차도 나가지 않는다든가, 매매를 빙자해서 내 것으로 만드는 경우도 있었다. 처음엔 특별한 권력자들이 집을 빼앗곤 했지만 윗물이 흐리면 아랫물까지 오염되는 법이다. 점차 일반 관료들까지도 여기에 합류했다.
여염집 탈취금지령
억울하게 집을 빼앗긴 사람들은 권세가의 보복이 무서워서 고발도 못하고 쉬쉬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길거리에 나앉은 사람들의 고생은 말로 다 못할 정도였다. 가족이 뿔뿔이 흩어져서 남자는 남의 집에 머슴을 살러가거나 부녀자들은 허드렛일을 해주러 가는 경우도 많았다. 영조는 왕이 되기 전 궁 밖에 살면서 이런 광경을 여러 번 목격했다. 그래서 왕이 되자마자 강력한 법안 하나를 만들었다. 바로 ‘여염집 탈취금지령’이었다.
여염집 탈취금지령은 권세가들이 일반 백성들의 여염집을 빼앗는 불법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는 의지를 강력하게 드러낸 법령이었다. 영조는 노년에 “내가 왕위에 오르고 처음으로 여염집 탈취금지령을 내린 것은 백성들을 편안히 살게 하려는 뜻이었다”라고 회상하면서 이 법을 성공한 정책의 하나로 꼽을 정도였다. 실제로 그 처벌도 굉장했다. 이 법을 어길 시에는 양반뿐 아니라 왕족과 고급 관료들까지 예외 없이 유배를 보냈고 차후로도 고급 관료로의 진출길을 막아버렸다. 유생들은 6년간 과거시험도 못 보게 만들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당시로선 정말 엄청난 처벌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영조의 초강경책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궁 밖에서 자란 영조는 왕이 법령을 내려도 그것이 시행과정에서 어떻게 왜곡되고 형식화되는지 너무 잘 알았다. 탈취금지령을 내리면 분명히 매매나 전세로 위장할 거라는 사실도 미리 눈치 챈 영조는 아예 매매와 전세조차 금지시켜버렸다. 그러니까 도성 내의 집 매매 자체가 불법이 됐고 민가에 세를 내어 사는 것 또한 불법이 됐다. 쉽게 말하면 그냥 지금 사는 집에 평생 살 수밖에 없도록 만든 것이다. 물론 신하들은 너무 지나치다며 반대했지만 영조의 의지는 확고했다. 그러다 보니 선의의 피해자도 나타났다.
엄격한 법 집행으로 선의의 피해자까지 발생
대표적인 케이스가 박제가다. 1761년(영조 37년) 영조는 금지령 위반자에 대한 보고가 뜸하다는 생각을 하고 한성부 관리를 직접 불러서 즉시 보고하라고 했다. 그런데 이때 제출된 보고서에 박제가의 어머니 이 씨가 들어 있었다. 당시 박제가는 열두 살이었다. 아버지인 승지 박평(朴坪)이 사망하자 후처였던 박제가의 어머니는 박평의 집을 나와 필동에 집을 사서 이사했다. 이것이 양반의 권력을 이용해 민가를 빼앗은 경우라고 고발당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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