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주의 거울

소박한 장군의 가난해도 자유로운 삶 인색한 장군의 너무나 엄격한 삶

164호 (2014년 11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인문학

플루타르코스는 <영웅전>에서 그리스의 장군 아리스테이데스와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카토를 비교한다. 두 사람 모두 전쟁에서 자신의 가치를 드러낸 인물이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정의롭게 살았지만 평생 가난했다. 하지만 시민들이 나서서 그의 장례비용을 마련할 정도로 존경을 받았다. 카토도 간단한 식사와 검소한 의복, 누추한 집 한 채에 만족하는 사람이었다. 하지만 그는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플루타르코스는 아리스테이데스의온화한 성품과 카토의엄격한 성품’이 현격한 차이를 만들었다고 판단했다. 카토는 야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다. 자신을 위해 평생 봉사한 하인이 늙거나 아프면 노예시장에 내다 팔았다. 삶을 바라보는 작은 차이가 전혀 다른 결과물을 만들어 내기도 한다. 

 

편집자주

고전의 지혜와 통찰은 현대의 지성인들에게 여전히 큰 교훈을 줍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과 마키아벨리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군주의 거울을 연재합니다. 인문학 고전에서 시대를 뛰어넘는 깊은 통찰력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 위인과 로마의 위인을 서로 짝을 지어 비교하면서, 은근 슬쩍 그리스인들을 추켜세우는 것으로 자기 조국에 대한 긍지와 자부심을 드러냈습니다. 비록 그리스도 막강한 로마의 군사력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었던 약소 국가였지만 로마라는 위대한 제국조차 그리스라는 어머니가 제공해준 문명의 젖을 먹고 자란 신생아라는 생각을 드러냈던 것입니다. 이번 글의 로마 쪽 주인공인 마르쿠스 카토는 로마의 젊은이들이 과도하게 그리스 문화에 심취하는 것을 보고 역정을 냅니다. 카토는 그리스 문화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인물로 유명합니다. 여기서 플루타르코스는 다시 한번 그리스에 대한 자신의 긍지와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카토는 로마가 그리스 문자에 전염되면 제국이 무너질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그의 예언이 얼마나 잘못된 것이었는지는 시간이 보여줬다. 로마 제국은 그리스의 모든 학문과 문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면서 전성기를 맞았기 때문이다(카토 편, 23).”

 

이렇게 헬레니즘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쳐 있던 플루타르코스가 그리스의 장군 아리스테이데스(Aristeides, BC 530∼468)와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카토(Marcus Porcius Cato, BC 234∼149)를 비교하면서 그리스 사람을 더 높이 치켜세우는 것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일일 것입니다. 우리 이순신 장군과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 장군의 리더십을 비교하라면 우리는 당연히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고 외치셨던 이순신 장군을 우리의 모범으로 선택할 것입니다. 모름지기 팔은 안으로 굽기 마련이지요. 문제는 그 선택이 논리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각각 대규모 전쟁이 촉발됐을 때 전투를 직접 지휘했던 두 명의 장군을 서로 비교하면서 다시 한번 노골적으로 그리스 편을 듭니다. 여기서 상찬(賞讚)하고 싶은 것은 두 인물을 비교 검토하는 플루타르코스의 탁월한 문장력과 논리 구사 능력입니다. ‘아리스테이데스 vs. 마르쿠스 카토를 비교하면서 우리는 다시 한번 플루타르코스의 탁월한 글 솜씨와 논리적인 상상력에 감탄하게 됩니다. 그리고 동의의 뜻으로 고개를 끄떡이며 그의 합리적이며 타당한 주장에 설복 당하게 되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이런 종류의 글을 썼다면 우리는 아마 그리스 사람이었던 아리스테이데스보다 로마 사람이었던 마르쿠스 카토가 더 위대한 인물이라 생각했을 것입니다. 우리는 플루타르코스의 <영웅전>을 통해서군주의 거울이라는 변치 않는 지도자의 모범을 발견하게 될 뿐만 아니라 탁월한 문장 실력과 합리적인 논의 전개 방식까지 덤으로 배울 수 있습니다.

 

빌헬름 폰 카울바흐살라미스해전’. 살라미스해전 당시 아리스테이데스는 정적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의 작전을 지지함으로써 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다. 작품 중앙에서 작전을 지휘하는 주인공이 테미스토클레스라면 작품 하단 오른쪽에서 서 있는 장군이 아리스테이데스일 것이다.

 

지지리도 가난했던 아리스테이데스

오늘의 주인공은 그리스의 장군 아리스테이데스와 로마의 장군 카토입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한마디로 테미스토클레스의 명성에 가려 불행했던 인물이었습니다. 테미스토클레스가 누굽니까? 살라미스해전 당시 필살기(必殺技)의 작전을 구사해 페르시아의 왕 크세르크세스를 격파했던 그리스의 이순신 아닙니까? 아리스테이데스 장군은 살라미스해전 때 테미스토클레스와 함께 싸웠던 역전의 노장이었습니다. 사실 아리스테이데스가 테미스토클레스의 기발한 작전을 지지해줬기 때문에 그리스 해군은 예상치 못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당시 그리스 연합군들은 살라미스를 포기하고, 즉 해상 방어를 포기하고, 육군의 전력으로 페르시아와 맞대응하자는 주장이 지배적이었습니다. 그런데 아리스테이데스가 테미스토클레스의 해상 작전을 지지해줬기 때문에 주력 부대가 살라미스에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아리스테이데스 편 8). 아리스테이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는 평소에 앙숙관계였는데도 말입니다.

 

그러나 잔혹한 역사의 횡포 때문인지 우리는 이인자(二人者)를 잘 기억하지 않습니다. 1등만 기억하는 더러운 세상입니다. 우리는 영웅 이순신을 기억하지 그의 직속군관이었던 송희립(宋希立, 1553∼1623) 장군이 누군지 잘 모릅니다. 그래서인지 아리스테이데스의 전기를 쓰고 있는 플루타르코스는 아리스테이데스 장군의 탁월한 군사적 용맹에 주목하지 않고 있습니다. ‘아리스테이데스 편의 앞부분은 뜬금없이 그가 지독하게 가난했다는 언급으로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리스테이데스가 극심한 가난 속에 살았으며 그가 죽고 난 뒤 그의 두 딸은 빈곤으로 인해 한동안 혼처를 찾지 못했다고 한다(1).”

 

가왕(歌王) 조용필의 시대에 가수로 살아야 한다는 것은 비극일 것입니다. 스티브 잡스의 시대에 스마트폰을 만들어 팔아야 하는 회사는 불행합니다. 얼마 전에 한 책방에서 와인에 대한 소개 책자를 보면서 웃음을 터트렸습니다. 언필칭 와인에 대한 거의 모든 정보를 담고 있기 때문에 두꺼운 책 두 권으로 편집됐는데 제1권은 <프랑스의 와인>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제2권의 제목은 <나머지 와인>이었습니다. 압도적 1위의 힘이 이런 것입니다. 기원전 5세기 초반, 페르시아전쟁이라는 절체절명의 위기가 닥쳤을 때 아테네의 압도적인 영웅은 테미스토클레스였습니다. 그가 비록 지나칠 정도로 권력을 탐하고 재물 욕심이 많았다는 치명적인 약점을 가지고 있었지만 역사가들은 그를 그리스의 영웅으로 대접해 왔습니다. 이런 테미스토클레스의 장점과 단점의 모든 대척점에 아리스테이데스가 서 있습니다. 한마디로 그는 권력욕도 없었고, 재물 욕심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어릴 때부터 성정(性情)이 달랐던 테미스토클레스와 사사건건 부딪혔습니다. 학창시절도 같은 학교에서 보냈는데 두 사람은 늘 치열한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차라리 적대적인 관계라고 하는 것이 더 정확할 텐데, 이 두 사람은 서로 정적(政敵)이었을 뿐만 아니라 정적(情敵)이기까지 했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스테실라오스라는 잘생긴 아테네의 미소년을 좋아했기 때문입니다. 스테실라오스도 나이가 들어 얼굴에 주름이 가득해 졌지만 두 사람은 잘생긴 미소년의 외모 대신 아테네 정치권력을 차지하기 위해 서로 거칠게 힘겨루기를 했습니다. 아리스테이데스와 테미스토클레스는 아테네의 민회에서 사사건건 대립했습니다. 한 사람이 법안을 발의하면 다른 사람이 무조건 그 법안을 부결시키는 일이 거듭됐습다. 아리스테이데스는 아테네 시민들에게 다소 불편을 끼치더라도 테미스토클레스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고 확신했습니다. 한 번은 아리스테이데스가 제안한 법안을 테미스토클레스가 극렬하게 반대하자 민회 장소를 걸어 나오면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테미스토클레스와 나를 함께 지옥으로 보내지 않는다면 아테네라는 나라는 절대로 평온해지지 않을 것이다(3).”

 

에른헤스트 일마셰(Ernest Hillemacher) ‘시골 농부에게 자기 이름을 적어주는 아리스테이데스’, 1867, 프랑스 디종 예술박물관

 

이런 아리스테이데스의 행동은 한마디로 정의감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그는 정의로움을 가장 중요한 삶의 덕목으로 삼았습니다. 그래서 별명조차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였습니다. 한 번은 어느 연극배우가 무대 위에서그는 정의롭게 보이려고 애쓰지 않고 진짜로 정의로웠으며…”라는 대사를 큰 소리로 읊자 아테네의 관객들은 일제히 객석에 앉아 있던 아리스테이데스를 쳐다보았다고 합니다(4). 그가 얼마나 정의로운 사람이었는지는 다음 일화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아테네에서는 개인이나 소수가 권력을 독점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도편추방제를 도입하고 있었습니다. 반드시 시민 6000명 이상이 깨진 도자기에 추방돼야 할 사람의 이름을 적어야 하고 그중 가장 많은 시민들의 지목을 받은 사람이 아테네를 10년간 떠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특정 개인에 대한 형사적인 처벌이 아니라 아테네 민주제를 수호하기 위한 고육책이었는데 우중(愚衆)정치의 폐해가 자주 나타나곤 했습니다.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였던 페리클레스도 한때 도편추방을 당한 적이 있으니까요. 아리스테이데스도 이런 위험에 놓였습니다. 도편추방을 위한 투표를 하던 날, 어느 시골 농부가 지나가던 아리스테이데스에게 이런 부탁을 했습니다. “제가 글을 쓸 줄 몰라서 그러는데 절 대신해서 도자기 파편에 아리스테이데스의 이름을 좀 적어 주시겠습니까?” 아리스테이데스는 그 농부에게 그 사람이 어떤 잘못을 저질렀기 때문에 도편추방되길 원하는지 물었습니다. 그랬더니 그 농부는저는 아리스테이데스가 누군지, 어떤 일을 했는지 아무 것도 아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시민들이 그가 정의롭다, 정의롭다 하니 이제 그 말을 듣는 것도 지겨울 정도입니다(7)”라고 했다고 합니다.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는 평생 가난이라는 지긋지긋한 악마와 싸웠지만 늘 인정이 많고 자애로웠으며, 결국 명예라는 천사의 손에 이끌려 멋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이렇게 정의로운 인물로 널리 알려졌기 때문에 페르시아전쟁이 끝난 다음 전후 복구의 과정에서 그는 그리스 동맹의 주도적인 역할을 맡게 됩니다. 여기서 아리스테이데스는 그의 정적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와 확연한 차이를 보여줍니다. 페르시아전쟁이 끝난 다음 테미스토클레스는 동맹국들에게 거의 해적질이나 다름없는 행동을 한 반면, 아리스테이데스는 정의로운 품성에 걸맞게 행동했습니다. 각 동맹국들의 사정에 맞게 동맹 분담금을 책정하는 업무를 정직하게 수행했습니다. 각 동맹국들이 자진해 아리스테이데스를 초청해 자국의 분담금을 책정해 달라고 부탁할 정도였습니다. 원하기만 했다면 그는 이 과정에 엄청난 부를 축적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동맹국의 분담금을 낮춰주는 조건으로 쉽게 뇌물을 받을 수 있었겠지요. 그러나 그는 “(분담금 책정) 임무를 수행하러 나갈 때도 가난했고, 돌아와서는 더욱 가난해져 있었다고 합니다(24). 뇌물을 받기는커녕 출장에 드는 비용조차 자비로 부담했습니다. 결국 그는 가난하게 살다가 죽습니다. 너무 가난해서 장례식에 드는 비용조차 마련할 수 없었기 때문에 시민들이 그 비용을 추렴해야 할 정도였고 그의 두 딸은 결혼 지참금을 마련하지 못해 오랫동안 결혼하지 못했습니다. 결국 시민들은 나라의 세금으로 두 딸의 지참금을 대신 지불해 줬다고 합니다. ‘정의로운 아리스테이데스는 평생 가난이라는 지긋지긋한 악마와 싸웠지만 늘 인정이 많고 자애로웠으며, 결국 명예라는 천사의 손에 이끌려 멋진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너무 엄격했던 장군, 마르쿠스 카토

정의롭게 살았지만 평생 가난에 휘둘렸던 아리스테이데스와 비교할 인물은 로마의 장군 마르쿠스 카토(BC 234∼149)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카토 장군이 정의롭지 않았다거나 평생 부자로 살았다는 것은 아닙니다. 아리스테이데스가 가난하게 살면서도 늘 인정이 많고 자애로웠던 반면 비슷한 삶의 덕목을 추구했던 로마의 카토 장군은 지나치게 엄격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고 너무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카토 장군의 생애를 이런 관점에서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로마사에 관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당혹스럽게 만드는 것 중 하나는 같은 이름이 계속 반복된다는 것입니다. 명문가일수록 한 집안에서 같은 이름을 사용하는 사람이 너무 많아 헛갈리기 일쑤입니다. 카토(Cato)도 그런 이름입니다. 로마사에는 수많은 카토가 등장하는데 이번 글의 주인공인 마르쿠스 카토는 이른바대 카토(Cato the Elder)’로 불리는 인물입니다. ‘대 카토가 있으면소 카토(Cato the Younger, BC 95∼46)’도 있겠지요? ‘대 카토의 증손자가 바로소 카토란 인물로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반란에 끝까지 항거하다가 자살로 삶을 마쳤던 로마공화국의 마지막 인물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아리스테이데스 편을 시작하면서 지독한 가난 때문에 두 딸이 결혼조차 하지 못했다는 이야기로 그의 삶을 한마디로 요약했습니다. ‘마르쿠스 카토 편을 시작하면서 플루타르코스는 어느 시인의 시구를 인용합니다. 카토는쌀쌀맞고 트집 잡기를 좋아하는 빨강머리였다는 것입니다(카토 편 1). 카토는 그런 사람이었다는 것이지요.

 

카토가 닮고 싶었던 삶의 모델이 있었다면 그것은 마니우스 쿠리우스(Manius Curius, BC 270년 사망) 장군의 초연한 삶이었을 것입니다. 마니우스 쿠리우스는 세 번이나 승전 개선식을 했던 로마의 뛰어난 장군이면서 동시에 세 번이나 집정관을 지낸 인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 직접 작은 밭뙈기를 일구며 검소하게 살았던 은자(隱者)였습니다. 마침 카토의 옆집에 마니우스 쿠리우스가 살던 작은 집이 있었습니다. 한 번은 전쟁을 앞둔 삼니타이족이 마니우스 쿠리우스에게 뇌물을 바치기 위해 꽤 많은 황금을 가져왔습니다. 마니우스 쿠리우스가 자기 나라를 공격하지 말아 달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마침 순무를 요리해 끼니를 해결하려던 마니우스 쿠리우스는순무로 만족하는 사람에게는 황금이 필요 없다. 황금을 갖는 것보다 더 영예로운 일은 황금을 가진 자를 정복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그들을 돌려보냈다고 합니다. 카토는 이런 마니우스 쿠리우스를 닮아 평생 검소하고 절약하는 삶을 살고 싶었습니다. 카토는 실제로제 손으로 땅을 일구고, 찬 아침 식사, 간단한 저녁식사, 검소한 의복, 누추한 집 한 채로 만족하는 사람이었습니다(4). 카토는 정말 혀를 내두를 만큼 근검절약이 몸에 배인 사람이었습니다. 스페인에서 원정을 마치고 돌아올 때(2차 카르타고 전쟁), 타고 갔던 말()을 현지인들에게 팔고 돌아왔다고 합니다. 말을 이동시키는 데 드는 비용을 줄이기 위함이었습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카토의 행동을 두고정신이 위대한 것인지, 아니면 그냥 속이 좁은 사람인지 생각하기 나름이라고 일침을 가합니다(5). 카토는 평생 3번밖에 후회를 해 본 적이 없다고 공공연히 밝혔는데 아내를 믿고 비밀을 말했을 때, 걸어 갈 수 있는 거리를 괜히 배를 타고 갔던 때, 그리고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빈둥거렸던 하루였다고 합니다(10). 정말 특이한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리스테이데스의 일생이 테미스토클레스라는 불세출의 영웅과 함께 꼬였다면 카토의 일생도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Scipio Africanus)라는 로마 최고의 장군과 함께 꼬이게 됩니다.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를 물리쳤던 그 유명한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최고 경쟁자이자 정적(政敵)이 바로 카토였습니다. 카토는 스키피오의 능력과 인물됨을 잘 알고 있었지만 단지 한 명의 손에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를 탄핵하는 일도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있던 스키피오를 당장 로마로 소환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기도 했습니다.

 

감찰관으로 임명된 카토는 로마 시민들의 도덕적인 타락을 막기 위해 지나칠 정도로 엄격한 기준을 적용했고, 심지어 딸이 보는 앞에서 아내를 뒤에서 껴안았다고 원로원 자격을 박탈하는 등의 엄격한 조치를 취한 것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로마적인 가치(Roman values)가 최고의 것이라 자부하던 사람이었었습니다. 그래서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로마를 방문했을 때 보여준 로마 청년들의 지나친 관심과 열광에 못마땅한 시선을 보내게 됩니다. 카토는 로마의 거리에서 그리스 철학자들을 몰아내기 위해 원로원 회의를 소집했고 큰목소리로 자신의 주장을 펼쳤습니다.

 

“어서 빨리 그리스 사절단의 제안에 대해 투표로 결정을 내립시다. 그래야만 이 그리스의 철학자들이 자기 나라로 돌아가 그리스 젊은이들을 학교에서 가르칠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그래야만 로마의 청년들이 정신을 차리고, 지금까지 그렇게 해 왔듯이 법률이 정한 바와 관리들의 결정에 따를 것 아닙니까(22)?”

 

카토는 지나치게 성격이 엄격했으며, 그리스 문화를 폄하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카토의 또 다른 결점은 노인이 다 된 나이에 늦장가를 들어 과다하게 여색을 밝혔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아예 그가왕성한 성욕을 가졌다는 노골적인 기록을 남겼습니다(24). 상처(喪妻)를 하고 난 뒤에도 노예 소녀와 함께 침실에 붙어 있다가 아들과 며느리가 이 광경을 목격하는 불미스러운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들과 며느리는 당연히 불쾌한 표정을 지었을 것입니다. 그러자 카토는 로마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광장으로 가서 어느 신분이 낮은 사람에게 딸을 자신의 아내로 맞게 해 달라고 공개적으로 요청했습니다. 그 사람은 카토에게 여러 차례 신세를 졌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차마 거절할 형편이 아니었습니다. 카토는 결국 자기 딸보다 어린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됐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카토의 아들이 아버지를 찾아가, 혹시 자신의 행동 때문에 기분이 나빠서 이렇게 어린 양어머니를 집안에 들이시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카토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합니다.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구나. 너는 언제나 내게 훌륭한 아들이었고, 따라서 나는 네게 아무런 불만이 없다. 다만 나 자신을 위해서, 그리고 우리 조국을 위해서, 너와 같이 훌륭한 아들을 더 낳고 싶을 뿐이다(24).”

 

카토는 이렇게 핑계를 잘 대는 색정광이었고(그의 언변은 유명했습니다), 지나치게 성격이 엄격했으며, 그리스 문화를 폄하하는 우를 범하기도 했지만, 그래도 역사에 길이 남을 업적을 남기기도 했습니다. 그가 공직에 있을 때 남긴 최고의 업적은 제2차 카르타고전쟁을 몸소 이끌었고, 결국 카르타고를 멸망시킨 일이었습니다. 물론 실제로 카르타고의 숨통을 끊어놓은 것은 소 스키피오(Scipio the Younger)였지만 로마의 안위를 위해 카르타고 잔존 세력을 발본색원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킨 사람은 카토였습니다. 카토의 정치적 판단과 수완이 없었다면 카르타고가 다시 지중해의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권토중래(捲土重來)했을지도 모릅니다. 실제로 카르타고를 현장 답사하면서 그들의 잠재적인 재기역량을 확인했던 카토는 엄청나게 큰 무화과 열매를 로마 원로원 건물 바닥에 떨어트려 사람들을 놀라게 하는 술책까지 부렸습니다. 이렇게 큰 무화과가 자라는 적국이 로마에서 사흘밖에 걸리지 않는 곳에 있다고 주장하면서 로마 원로원들에게 카르타고 정벌을 독촉했던 것입니다. 카토는 제3차 카르타고전쟁(포에니전쟁이라고도 함)이 한창 진행될 때 노환으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토록 바라던 카르타고의 몰락은 직접 목격하지 못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습니다.

 

장 기욤 무아트(Jean Guillaume Moitte), ‘삼니타이족의 황금을 돌려보내는 마니우스 쿠리우스’, 1796, 뉴욕 메트로폴리탄박물관 소장

 

소박하게 살 것인가, 인색하게 살 것인가?

두 사람의 이야기는 여기까지입니다. 그리스인 아리스테이데스와 로마인 카토는 둘 다 전쟁의 와중에 자신의 존재가치를 드러냈던 인물이었습니다. 장군의 지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두 명 다 한 시대를 이끄는 정치가로 활동했다는 것도 공통점입니다. 둘 다 강력한 정적(政敵)을 가졌던 것도 공통점입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살라미스해전의 영웅이었던 테미스토클레스와 평생 힘겨루기를 해야 했고, 카토는 카르타고 전쟁을 지휘했던 스키피오 아프리카누스의 세력을 견제하는 정치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플루타르코스는 이 두 사람을 마지막으로비교하면서 그들이 발휘했던 군사적 리더십이나 정치적 감각을 주목하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 대신 부와 가난에 대한 두 사람의 극명했던 입장 차이를 강조하고 있습니다.

 

아리스테이데스는 정의감이 지나쳐, 그의 정의감 자체가 대중의 비난을 받을 정도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결국 도편추방까지 당하게 되지요. 플루타르코스는 아리스테이데스의 이런 지나친 정의감 때문에 결국 가정까지 망쳐버렸다고 안타까워합니다(‘비교 편’). 반면에 엄격함과 인색함을 겸비했던 카토는 후손들이 4대에 걸쳐 로마의 집정관을 지내는 등 가문의 영광을 일궜다고 높이 평가하고 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우리는 아리스테이데스보다 카토가 결과적으로 더 위대했다는 결론에 이르게 됩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다른 위인들의비교보다 더 많은 지면을 할애하면서 이 두 사람의 차이에 대해 집중적으로 분석합니다. 플루타르코스가이것은 논의해 볼 가치가 있는 문제다라고 쓴 것을 보면 이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고민했다는 뜻입니다.

 

플루타르코스는비교 편에서사소한 일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큰일을 도모하기 어렵다고 하면서 카토에 대한 본격적인 비판을 시작합니다. “자신에게 필요한 것이 많으면 남이 필요한 것을 가져다줄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플루타르코스의 유명한 구절이 바로 그 다음에 이어집니다. “공익에 봉사하기 위한 가장 좋은 방법은 부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족함에 있다.”

 

자족(自足)한다는 것은 물질에 대한 모든 소유욕에서 벗어나라는 뜻이 아니라고 덧붙입니다. 무릇 신()만이 모든 소유욕과 욕망에서 자유로울 뿐 인간은 물질을 소유하고 싶은 욕망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합니다. 플루타르코스는욕구를 최대한 줄이는 능력은 가장 완벽한 인간의 미덕이라고 강조하면서 절제의 정신을 높이 평가했습니다.

 

그러나 플루타르코스는 카토가 근검절약하고 절제한 것이 아니라 단지 인색했을 뿐이라고 평가합니다. 스스로 인색해 삶의 즐거움을 본인 스스로 박탈한 채 살았던 카토는 불행한 인간이었다는 것입니다. 지나치게 인색해 순무를 삶아먹는 삶을 살았던 카토는 그저 불행한 삶을 살았던 것뿐이라는 것입니다. 아리스테이데스도 평생 하인들과 같은 포도주를 마시고, 허름한 자줏빛 옷을 입고 다녔으며, 평생 평범한 빵으로 허기를 채웠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아리스테이데스가소박한 삶을 살았다면 카토의 삶은인색한 삶이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소박한 삶을 살고, 어떤 사람이인색한 삶을 살게 될까요? 둘 다 사치를 몰랐고, 둘 다 평생 절제하는 삶을 살았는데 왜 한 사람은소박한 삶을 살았고, 또 다른 한 사람은 그저인색한 삶을 살게 되었을까요? 플루타르코스는 아리스테이데스의온화한 성품과 카토의엄격한 성품이 그 현격한 차이를 만들었다고 판단합니다. 두 사람의 이런 성품 차이 때문에 아리스테이데스는 부에 대해완전히 자유로운 삶을 산 반면 카토는야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게 됐고, 결국 인색한 인간이 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카토는 야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았기에 효율성을 중심으로 모든 것을 판단하고 행동했습니다. 심지어 평생 부려먹었던 하인이 나이가 들거나 병이 들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 하인을 노예시장에 팔아버렸다고 합니다. 더 이상 효용가치가 없다는 것이지요. 플루타르코스는 이런 카토의 행동을 매섭게 비판합니다.

 

카토의 정치적 판단에 의해 카르타고는 로마에 완전히 점령당했다. 사진은 튀니지아(카르타고) 사막도시인 엘젬에 건축된 로마의 원형경기장.

 

“우리는 살아 있는 생물을 신발이나 솥, 냄비처럼 다루어서는 안 된다. 제 몫을 다하느라 멍이 들고 닳아빠진 뒤에라도 치워버려서는 안 된다. 나는 소 한 마리라도 나를 위해 일했다면 나이가 들었다고 해서 팔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나이 든 사람이라면 푼돈이나 받자고 그 사람으로부터 고향이나 다름없는 집, 익숙한 삶의 방식을 빼앗을 수는 없는 것이다(카토 편 5).”

 

한국에도 부자들이 많습니다. 힘 센 사람도 많지요.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부자인데다 힘도 셉니다. 자신의 영역에서 최고가 된 사람도 많고, 덕분에 막대한 부를 축적한 사람도 많습니다. 세계 명품 시장의 판세에 영향을 미칠 만큼 우리나라 부자들의 경제력도 대단합니다. 우리 사회에 부디검소한 삶을 살아가는 온화한 성품의 사람들이 더 많이 나왔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추한 것 중에 하나는 부자가 지나치게 인색한 것입니다. 엄청난 권력을 가진 사람들이 강호의 서민들을 무서운 호랑이처럼 대하는 것도 천하의 꼴불견입니다. 부자들은 가난한 이웃들을 위해 지갑을 열고, 권력을 가진 사람들은 힘없는 서민들을 위해 마음을 열었으면 합니다. 아리스테이데스처럼소박한 삶을 살라고 강요하지 않을 테니 부디인색한 삶을 살지 말았으면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국의 번영을 구가하던 로마를 향해 품었던 플루타르코스의 바람이었습니다.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이 어디 플루타르코스 한 사람뿐이겠습니까?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미국 사우스캐롤라이나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를,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로 재직 중이며 ()플라톤아카데미 연구책임 교수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사람의 마음을 얻는 법> 20여 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1호 Diversity in Talent Management 2022년 08월 Issue 2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