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드 ‘굿와이프(Good Wife)’의 여주인공 알리샤 플로릭은 검찰총장인 남편, 사랑스러운 두 아이와 시카고 교외의 부촌 하일랜드파크에 사는 전형적인 상류층 40대 주부다. 전직 변호사지만 외조를 위해 주부로 지내온 알리샤는 섹스 스캔들로 감옥에 갇힌 남편 때문에 졸지에 가장이 된다. 15년 만에 취업 전선에 뛰어든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한 로펌에 입사한다. 입사 첫날, 회사 공동대표인 다이앤 록하트는 알리샤에게 “남자는 게을러도 되지만 여자는 안 된다. 게다가 당신은 일반 여자 변호사보다 2배 더 일해야 한다. 15년 만에 법조계로 돌아왔고 먹여 살려야 할 식솔도 많으니까”라고 충고한다. 로펌 상황이 나빠져 해고될 위기에 처한 알리샤에게 살아남는 법을 조언한 사람도, 임대료 인상으로 집에서 쫓겨날 위기에 처한 알리샤의 연봉을 임원진 반대를 무릅쓰고 올려준 사람도 다이앤이다. 심지어 검찰총장으로 복귀한 알리샤의 남편이 아내가 직장 동료와 부적절한 관계에 빠졌음을 알고 회사에 보복을 가할 때 묵묵히 뒷수습에 나서는 사람 또한 그녀다.
15년간 법조계를 떠나 있었던 ‘40대 아줌마’가 잘나가는 변호사로 탈바꿈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의 노력 외에 다이앤과 같은 훌륭한 멘토, 특히 여성 멘토가 있었기 때문이 아닐 수 없다. 이는 똑똑하고 야심 찬 ‘알파 걸’이 ‘알파 우먼’이 되지 못하는 이유, 상당수 국내 기업에서 여성 임원을 찾아보기 어려운 이유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성의 교육 수준이 높아지면서 최근 대졸 신입사원의 절반 정도가 여성이다. 하지만 과장, 차장, 부장이 되면 여성 직원의 비율이 기하급수적으로 떨어진다. 임원이 되면 아예 씨가 마른다. 컨설팅회사 에이온휴잇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사원급에서는 여성 직원 비율이 42%지만 대리, 과장급으로 올라가면 30%로 줄고, 차장, 부장급에서는 8%로 뚝 떨어진다. 그 많던 여성 신입사원은 어디로 갔을까. 왜 사라진 것일까.
다양한 원인이 있겠지만 커리어에서 가장 중요한 30대에 임신 및 양육, 즉 ‘마미 트랩(mommy trap, 엄마의 덫)’에 처하는 여성들에게 먼저 이 길을 거쳤으며 경험에서 우러나온 조언을 해줄 수 있는 여성 멘토가 적다는 점을 꼽지 않을 수 없다. 아무리 훌륭한 상사라도 “출근할 때 애가 울고 불며 안 떨어져서 미치겠어요.” “새 프로젝트로 엄청 바쁜데 시댁에서 며칠 휴가 내고 명절 준비를 일찍 하라네요”류의 질문에 남성 상사가 현명한 답변을 내놓긴 어렵기 때문이다.
어느 덧 4년 차 변호사가 된 알리샤는 지분(equity) 파트너가 되라는 제안을 예상보다 일찍 받는다. 월급을 받지 않는 대신 로펌이 얻는 수익을 지분만큼 가져가는 지분 파트너는 일반 변호사보다 많은 돈을 벌지만 자신도 로펌에 상당 금액을 투자해야 한다. 알리샤는 4년 차 변호사 5명 중 자신만 제안을 받았으며 그만큼 자신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곧 동료도 같은 제안을 받았으며 로펌의 자금 사정이 나빠 그런 제안이 건네졌다는 사실을 알고 뿔이 나 회사의 중요 행사에 나타나지 않는다. 뿌루퉁한 얼굴을 하고 사무실에 앉아 있는 알리샤에게 다이앤이 또 천금 같은 충고를 한다.
“수십 년 전 내가 왜 지분 파트너로 승진한 줄 알아? 당시 로펌 대표가 성희롱으로 고소를 당했거든. 그는 ‘우리 회사에는 여자 파트너도 있어. 이것만 해도 나는 성희롱 따위를 할 사람이 아니야’라고 변명하고 싶었지. 어쨌든 덕분에 나는 임원이 됐고 결국 내 회사까지 차렸어. 기회의 문이 열리면 그 문이 왜 열렸는지는 묻지도 마. 그냥 문을 통과해. 당장 나가서 가장 환한 미소와 목소리로 임원들에게 ‘승진할 기회를 주셔서 정말 감사하다’고 말해. 아니면 문은 지금 이 순간 닫힐 거야.”
정말 어디 이런 상사 없느냐고 외치고 싶다.
하정민 동아일보 국제부 기자 dew@donga.com
필자는 고려대를 졸업하고 한국정책대학원(KDI)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5∼2007년 여기자 최초로 뉴욕특파원을 지냈다. 저서로 스포츠와 기업 경영의 공통점을 분석한 <건곤일척: 모든 것을 걸어라>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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