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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시간을 멈추는 예술

진동선 | 22호 (2008년 12월 Issue 1)
사진은 1839년 프랑스 파리에서 공식적으로 발명돼 1840년대부터 전 세계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당시에는 사진 한 컷을 찍는 데 무려 8시간이나 걸렸다. 사진에 찍히는 사람은 8시간 동안 꼼짝 않고 있어야 해서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당시의 사진관은 빛을 들이기 위해 천장을 유리로 만들어 태양광을 직접 받았다. 사진관 안이 너무 뜨거워 사진을 찍는 사람이나 사진에 찍히는 사람이나 모두 땀이 비 오듯 쏟아졌다.
 
단발령, 조선에 사진을 퍼뜨리다
기록에 따르면 한국에는 갑신정변을 전후해 사진이 들어왔다고 한다. 신사유람단으로 일본에 갔던 김옥균과 박영효가 국내에 사진을 들여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개화파는 조선을 개화하기 위해 고종의 어진(御眞)을 찍는 게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조선의 왕을 서양문물인 카메라 앞에 노출시킴으로써 개화에 상징적 의미를 더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1880년대 당시에는 사진을 한 컷 찍으려면 58분이 걸렸다. 게다가 실내는 너무 어두웠기 때문에 사진을 찍으려면 고종을 밖으로 모시고 나와 5분 동안 햇볕 아래에 서 있도록 해야 했다. 당시 수구파가 이 계획을 알고는 고종의 사진을 찍지 못하도록 개화파를 견제했다. 그러다 1884년 3월 16 조선의 외교문서를 담당한 퍼시벌 로웰이 마침내 가장 먼저 고종의 사진을 찍게 되었다. 뒤이어 조선인으로는 처음으로 지운영이 고종의 어진을 촬영했다.
 
우리나라에서는 전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사진이 토착화하기 어려웠다. 특히 단발령 전까지는 사진에 관한 유언비어가 난무했다. 사진에 찍히면 혼을 빼앗긴다는 소문에서부터 필름에 바르는 아교는 아이들을 잡아다 그 뼈를 고아서 만든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다양했기에 사진관이 수난을 겪었다. 그러다 고종이 단발령을 내리자 사람들은 조상이 물려준 머리카락을 사진으로나마 영원히 간직하고 싶어 했고, 사진관이 하나둘 생겨나기 시작했다.
 
사진은 시간의 화석
인간이 발명한 모든 물건 가운데 인간이 시간으로부터 저항하고 독립하게 해주는 것은 카메라뿐이다. 인간은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시간의 흐름을 거역할 수 없지만 사진은 어느 한 순간을 정지시킴으로써 그 순간을 영원히 사라지지 않게 한다. 그래서 서양에서는 사진 발명이 불의 발견에 비견될 정도라며 그 과학적 업적을 높이 평가한다.
 
사진은 시간의 화석이다. 집집마다 앨범이 있고, 가족사진에는 모든 가족사가 다 들어있다. 사람들은 나이를 먹고 시간이 흐르면 옛 사진을 통해 지나간 시간을 되돌아본다. 실존자와 사진 속 인물이 함께 있는 것이다. 사진 속 인물은 이미 사라진 사람이며, 사진을 찍는다는 것은 그 순간부터 죽음이 된다는 뜻이다. 사진은 항상 미래의 어느 시점에서 과거를 돌아보는 매개체다. 사진을 찍는 순간부터 사진 속 장면은 이미 과거가 된다. 사진 속 시간과 지금 그 사진을 보고 있는 시간의 차이가 클수록 과거는 더 애잔하게 다가온다. 우리가 계속 사진을 찍는 것도 부단히 나의 존재를 증명하고, 내가 그동안 어떻게 살아왔으며 어떤 공간에 가봤는지를 알려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념이 될 만한 장소에서 으레 사진을 찍으며 그 순간을 영원히 간직한다. 시간의 의미를 사진으로 자각하는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는 유형의 사진이 바로 증명사진이다. 파리에서는 사진이 발명된 지 1년 만에 도시 안에 1200개의 사진관이 생겼다고 한다. 자신이 어떻게 생겼는지를 깨닫고, 자신이 죽은 뒤에도 자식들에게 자신의 얼굴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서양 역사에서도 영주들의 집 거실에는 초상화가 큼직하게 걸려 있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부르주아 정부는 서민들도 자기 초상화를 가질 수 있도록 장려했다. 국민들은 사진을 찍기 위해 사진관 앞에서 줄을 섰다. 사람들은 나라는 존재는 어떻게 생겼는지 알고 싶어 사진관에 갔다. 또한 자신이 죽더라도 사랑하는 여인의 지갑이나 목걸이 속에 사랑의 징표로 사진을 남기기 위해서였다. 한마디로 서로의 약속과 정체성의 산물이 바로 사진이다. 그래서 사진이 잘 못 나오더라도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들의 사진을 많이 찍는 게 좋다. 특히 서양에서는 거실과 주방 곳곳을 가족의 사진으로 꾸며 놓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아직 사진 찍히길 두려워하고 부자연스러워 하는 문화가 남아 있다.
 
왜 나는 사진만 찍으면 이리도 못 나올까’하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이 사진을 거부하는 이유는 지금까지 마음에 드는 사진을 한 장도 못 가져봤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누구에게나 최상의 앵글을 줬다. 사진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아직 자기가 지닌 가장 아름다운 앵글을 모르기 때문이다. 사진을 잘 찍든 못 찍든, 구도나 초점이 잘 맞든 안 맞든 중요하지 않다. 부모님들이 자식의 어린 시절 사진이 초점이 많이 흔들렸다고 해서 안 보진 않는다. 그저 ‘내 아이가 벌써 이렇게 컸구나’ 하고 느낄 뿐이다. 요즘 젊은이들은 지하철이나 공원에서 ‘셀카’를 찍고, 근사한 레스토랑에 가서 좋은 음식을 먹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 음식 사진을 찍어 블로그나 미니홈피에 올린다. 이걸 보면 일기가 따로 없다. 사진을 통해 그 사람이 뭘 좋아하는지, 어떤 감성을 갖고 있는지 다 알 수 있는 시대다.
 
법이 인정한 사진의 예술성
이 땅에서 법으로 예술성을 인정받은 예술 장르는 사진이 유일하다. 19세기 사진가들은 사진을 예술로서 당당히 인정받고 싶어 했지만 화가들은 사진을 업신여겼다. 회화와 사진의 싸움이 시작된 것이다. 사진이 예술인지에 대한 논란이 일어난 이유는 사진이 가진 숙명적 한계 때문이다. 즉 인간은 카메라를 손으로 누르기만 할 뿐이지 나머지는 모두 기계가 하기 때문이다. 재능을 가진 장인의 손을 거쳐 숭고하게 발현되는 그림과는 차이가 있는데, 기계가 찍어주고 인화해 주는 사진이 어떻게 예술일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862년 프랑스 파리에서 사진가들이 회의를 열어 사진이 예술인지 아닌지 법으로 심판하기로 했다. 그들은 파리지방법원에 소송을 걸어 사진의 예술성 여부를 판결해 달라고 했지만 1심에서 사진은 예술이 아니라는 판결이 났다. 파리보통법원은 “사진은 기술에 의한 도구적 산업이며, 결코 센스와 영감에 의해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는 이유를 댔다. 사진가들은 이에 저항해 파리고등법원에 항소했으며, 결국 법정은 “사진은 분명한 예술적 표현 수단이며, 사진의 저작권도 창작품으로 인정된다”며 사진의 예술성을 명확히 했다. 아이러니하면서도 슬픈 사진의 역사다.
 
20세기에 들어와 화가들은 다른 건 몰라도 다큐멘터리 사진만은 예술로 인정하는 분위기였다. 사진의 발명 이래 인간을 울고 불게 한 것들은 다큐멘터리와 보도사진이었다. 1950년 프랑스의 사진작가 로베르 두아스노가 파리 시청 앞에서 찍은 ‘시청 앞의 키스’(사진)라는 작품이 사진저널 라이프에 실렸다. 전쟁 후 파리 시민들이 다시 활력을 찾았음을 보여 주는 이 사진은 인류가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 새 희망을 찾자는 의미를 전했다. 문화가 다른 여러 나라는 이 사진 한 장을 통해 정의와 진실을 공유할 수 있었다. 우리나라에서는 4·19 혁명 당시의 사진을 통해 이 땅에 정의를 구현했다. 이렇듯 사진은 진실과 정의의 대변자이자 시대의 목격자로서 가치를 지닌다.
 
오늘날 다큐멘터리나 보도사진이든 퓰리처상을 받는 사진이든 가족사진이든 지구의 사람들이 찍는 모든 사진의 90%는 일상을 찍은 사진이다. 모든 사람은 카메라를 통해 일상을 말하고자 하는 욕구를 가지고 있다. 일상 속에서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사진을 통해 타인과 교감하고 소통하고 싶어 하는 것이다. 일상 속에서 가장 자기다운 모습을 드러내는 게 바로 사진이다. 사진은 시간의 자식이자 시간의 그림자이며, 어떤 이는 시간의 해골이라고도 한다. 인간은 시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어 사진을 만들었다. 사진이 비로소 시간을 멈추게 했다.
 
정리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편집자주 IT전략연구원과 동아일보가 인문학적 상상력과 문화·예술적 창의력 배양에 초점을 둔 최고경영자(CEO) 교육 과정 ‘퓨처코드 CEO포럼’을 공동으로 진행하고 있습니다. 동아비즈니스리뷰(DBR)가 포럼의 일부 강의를 요약해 독자 여러분께 전합니다. 인문학, 과학, 문화콘텐츠, 디자인 등에 특화한 강의를 만나 보십시오. 이번 호에는 진동선 사진평론가의 강의 ‘사진, 시간을 멈추는 예술’을 전해 드립니다.
 
사진평론가 진동선은 미국 위스콘신대 예술학과(사진전공)를 졸업하고 홍익대 미술대학원(사진전공)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뉴욕주립대 예술대학원(사진비평전공)과 홍익대 미술대학원(미술비평전공)에서 각각 석사 과정과 박사 과정을 수료했다. 2000년 광주비엔날레 전시팀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사진평론가 및 현대사진연구소 소장으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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