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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브랜드 경영, ‘거리 관리’의 미학

김현진 | 451호 (2026년 10월 Issue 2)
프랑스 대학원에서 럭셔리 산업을 공부하던 시절, 크리스찬 디올의 오트쿠튀르(고급 맞춤복) 부문에서 오랫동안 일했던 교수님이 전해준 이야기가 지금도 생생합니다. 당시 디올의 아틀리에에는 전 세계 VIP의 신체 치수를 재현한 ‘토르소(torso)’가 즐비했다고 합니다. 고객이 방문하지 않아도 맞춤복을 제작할 수 있도록 만든 마네킹입니다. 교수님은 “고객의 이름이 새겨진 토르소들이 마치 세계 곳곳의 VIP들을 대신해 브랜드의 살롱에 머물러 있는 듯했다”고 전했습니다. 고객이 어디에 있든 그의 몸을 기억하고 오직 그를 위한 옷을 짓는 일. 당시 제겐 그것이 럭셔리의 본질처럼 느껴졌습니다.

럭셔리는 누구나 쉽게 다가갈 순 없지만 문턱을 넘은 고객에게는 누구보다 친밀한 존재가 됩니다. 이 역설적인 친밀함이 럭셔리의 가치를 만들어왔습니다. 과거 온라인 판매를 경계하던 업계가 결국 인터넷을 수용하면서 선택적 유통과 차별화된 경험으로 희소성을 지킨 것도 이러한 균형 유지를 위해서였습니다.

이제 럭셔리 산업은 다시 희소성을 고민할 시점에 왔습니다. 럭셔리만의 ‘특별함’이 흔들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최근의 성장세 둔화도 경기 침체와 중국 시장 부진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습니다. 맥킨지와 비즈니스오브패션(BoF)은 무리한 사업 확장과 지속적인 가격 인상이 럭셔리의 배타성과 창의성, 장인정신을 약화시켰다고 지적합니다.

여기에 AI의 등장은 럭셔리의 희소성에 또 다른 도전 과제가 됐습니다. 그동안 소수의 VIP에게만 제공되던 맞춤형 서비스(personalization)가 AI를 통해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경험으로 바뀌고 있기 때문입니다.

개인화마저 보편화되는 시대, 그렇다면 럭셔리는 어디에서 새로운 희소성을 찾아야 할까요. 이번 스페셜 리포트는 AI로도 무한히 복제할 수 없는 것들에 주목했습니다. 장인의 시간, 소수에게만 허락되는 프라이빗한 경험, 오랜 관계를 통해 쌓인 판매 직원의 안목 등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활용하면 개인화를 넘어 고객에 대한 ‘인정(recognition)’ 단계로 나아가게 됩니다. AI가 고객의 취향을 분석해 “당신에게 잘 맞습니다”라고 추천한다면 브랜드 담당자는 “오직 당신을 위해 준비했습니다”라며 특별한 제품과 경험을 선사한다는 뜻입니다. 고객의 취향을 기억하고 그에 맞춰주는 것과 고객을 위해 한정된 시간과 자원을 기꺼이 내어주는 것은 다른 차원의 특별함입니다.

특별한 배타성을 지키기 위해 고객과 무작정 거리 두기를 해서도 안 됩니다. 이제는 AI에 발견되지 않으면 선택받을 기회조차 잃을 수 있는 시대입니다. 럭셔리는 모든 것을 드러내기보다 아는 사람만 알아보는 은밀한 신호로 특유의 매력을 발산해 왔습니다. 그러나 사람에게는 매력적인 은근한 암시와 맥락적 신호도 AI에는 해석할 정보가 없는 ‘빈칸’으로 인식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신비로움을 유지하면서도 그 안에 담긴 브랜드의 가치를 충분히 전달하는 일입니다. 브랜드의 역사와 장인정신을 일관된 이야기로 풀어내 AI도 그 맥락을 이해하도록 해야 합니다.

결국 AI 시대 럭셔리 경영의 핵심은 새로운 ‘거리 관리’에 있습니다. 고객이 브랜드를 발견하고 서비스를 이용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거리는 AI 기술로 좁히되 한정된 시간과 특별한 접근권, 깊은 관계가 만들어내는 가치만큼은 지켜내야 합니다.

한때 고객의 몸을 기억하는 토르소가 럭셔리의 특별함을 상징했다면 이제 고객을 기억하는 일은 AI가 더 잘할지도 모릅니다.

그렇다면 인간은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요. 이는 럭셔리뿐 아니라 모든 브랜드가 고민해야 할 문제입니다. AI 시대, 기술을 통해 고객과의 거리는 어디까지 좁히고, 인간의 시간과 정성이 만들어내는 가치는 어떻게 지켜낼 것인가. 이번 스페셜 리포트를 통해 브랜드 경영의 새로운 과제가 된 ‘현명한 거리 관리’의 해법을 함께 모색해 보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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