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기업의 ‘공유가치 창출(CSV·Creating Shared Value)’ 활동이 날로 진화하고 있다. 기존 ‘사회적 책임(CSR·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 활동에 한계를 느낀 국내 기업들이 CSV 개념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인 결과, 실질적인 성과들이 나타나고 있다. 해외에서도 국내 기업의 CSV 사례를 주목하기 시작했다. CJ대한통운은 ‘실버 택배’ 사업의 CSV 성과를 인정받아 최근 세계적 경제 전문지 <포천(Fortune)>이 선정하는 ‘세상을 바꾸는 혁신기업(Change the World)’에 국내 기업 최초로 이름을 올렸다.
CSV는 세계적인 경영 전략의 대가인 마이클 포터 하버드대 교수가 2011년 <하버드비즈니스리뷰(HBR)>를 통해 발표한 개념이다. CSV는 기업이 사회 문제를 해결하는 가운데 사회적 이익과 기업 이익이 공유되는 영역에서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CSV 이전에 기업의 사회 공헌은 경제적 이익을 낸 일부를 사회에 재분배하는 CSR 활동이 주를 이뤘다. 하지만 CSR은 기업의 이익 창출 목표와 분리돼 있어 생색내기에 그치거나 지속성이 떨어진다는 한계가 노출됐다. 마이클 포터 교수는 CSV란 개념을 통해 기업이 수익성을 획기적으로 높이면서 동시에 공동체가 직면한 다양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마이클 포터 교수는 9월18일 열린 ‘제4회 CSV 포터상’ 시상식에 참석해 “한국 기업들이 적극적인 CSV 활동을 통해 사회적·경제적 가치의 총량을 키워가고 있다”고 평가했다. 올해 13개 기업 및 기관이 CSV 포터상을 수상했다. 이 가운데 6개 기업의 사례를 요약한다.
CJ대한통운 실버택배노인 일자리 창출+고객 접점 서비스 강화CJ대한통운의 실버택배는 택배 차량이 아파트 단지에 물건을 싣고 오면 인근에 사는 노인들이 물건을 동별로 분류하고 전동카트를 이용해 집 앞까지 배송하는 허브 앤 스포크(Hub and Spoke) 방식의 비즈니스 모델이다.
실버택배는 주로 해당 지역에 거주하는 노인을 택배기사로 채용함으로써 지역 사회에 시니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실버택배 배송원은 하루 약 4시간 정도, 보통 월수금, 화목토로 조를 나눠 교대로 근무한다. 월급은 최저 시급을 적용해 한 달에 약 50만 원 정도다. 큰 금액은 아니지만 노년에도 일을 할 수 있다는 즐거움에 택배원들의 만족도가 높은 편이다.택배 이용 고객들의 만족도도 높다. 택배회사에서 택배원은 고객을 직접 만나는 접점으로 택배원 서비스의 질이 곧 업체에 대한 평가로 연결된다. 배송 방식을 합리화함으로써 관리비를 줄이는 동시에 운송의 질을 높이는 게 중요한 과제다. 실버택배는 지역마다 동일한 택배원, 더군다나 친숙한 노인이 물건을 배달해 고객 신뢰도를 높이고 있다.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는 동시에 고객 접점 관리를 강화하는 식으로 CSV 효과를 높인 것이다.정부, 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 모델도 눈여겨볼 만하다. CJ대한통운은 2013년 보건복지부와 ‘시니어 일자리 창출 MOU’를 체결한 후 본격적으로 실버택배 사업을 시작했다. 기업, 시군구 자치단체,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이 삼각 협업 체제를 이뤄 시니어 일자리를 창출하는 구조를 만들었다. CJ대한통운이 택배 물량 공급과 장비 제공 및 운영을 맡고, 지자체는 행정적·예산적 지원을, 한국노인인력개발원은 시니어 인력 수급과 교육 등을 담당한다. 별도의 비용을 들이지 않고도 자체 운영비와 인건비로 선순환할 수 있는 지속가능형 사업 모델을 확립했다.
물론 처음부터 실버택배 사업이 순항했던 것은 아니다. 시작 당시, 지역 주민들을 택배원으로 모집하려 했지만 인력을 안정적으로 수급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CJ대한통운은 노인인력의 일자리 창출을 지원하는 ‘고령자 친화기업’이라는 제도를 활용해 2013년 6월 고령자 친화기업인 실버종합물류를 설립했다.
실버종합물류가 설립되고 기업-지방자치단체-국가기관이 삼각 협업체제를 구축하면서 실버택배 사업은 성장하기 시작한다. 부산에서 시범지역 4개로 시작한 거점은 현재 서울, 부산, 경남 등 전국 각지에 150개로 늘어났고 참여 인력 역시 41명에서 1100명으로 증가했다.
CJ대한통운의 고령자 친화기업을 통한 선순환, 지속가능형 사업모델은 노인 실업 문제가 심각한 지방자치단체들에 매력적으로 다가갔다. CJ대한통운은 서울, 부산, 인천, 파주시를 비롯한 지자체는 물론 SH공사, 국내 최대 노인단체인 대한노인회와 업무협약을 맺음으로써 전국 지역 확대의 교두보를 확보했다.
실버택배는 기업과 사회가 동반 성장할 수 있는 대표 사례로 자리매김하며 대내외적으로도 큰 조명을 받았다. 지난 2015년에 이어 올해에도 CSV 효과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제4회 CSV 포터상 효과성 부문에서 수상했다. 이외에도 영국 경제 전문지 <더 이코노미스트>가 ‘세계적으로 증가하는 기대 수명’을 주제로 한 리포트에서 실버택배 모델을 한국의 대표적 노인 일자리 창출 사례로 소개했다. UN 산하 전문 기구인 UNGC(United Nations Global Compact)가 발간하는 지속가능발전목표(SDGs) 사례집에 수록되기도 했다.
CJ대한통운은 현재 실버택배의 CSV 성공 모델을 기반으로 서울 노원 구립 장애인 일자리센터와 함께 발달장애인 택배 사업을 시범적으로 진행 중이다. CJ대한통운 관계자는 “민관협력을 통해 고안한 실버택배 모델은 양질의 노인 일자리를 창출하고 빈곤문제를 해결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며 “앞으로 실버택배 모델을 발달장애인과 저소득층 등 사회적 취약 계층까지 확대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KT 기가스토리국내 외딴 섬에 이어 신흥국에 신시장 창출KT는 정보화 소외지역에 기가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기가 스토리’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있다. 핵심 역량인 네트워크와 정보통신기술(ICT)을 활용해 지역사회 발전과 경제 활성화에 기여하는 CSV 활동이다. 지난 2014년 10월 전라남도 신안의 작은 섬 임자도에서 시작해 최근 방글라데시까지 진출하면서 신흥국에 기가 네트워크를 확대하는 교두보를 마련하고 있다. KT는 저개발 공동체나 개도국의 잠재돼 있던 수요에 부응하는 제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면서 새로운 시장도 창출하는 CSV의 모범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지난 4월 말,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서 남서쪽으로 400㎞ 떨어진 외딴 섬에서 KT의 기가 아일랜드 프로젝트가 시작됐다. 방글라데시 오지이자 낙도인 모헤시칼리섬에서 시작된 이 프로젝트는 KT 최초의 해외 ‘기가 아일랜드’이자 글로벌 CSV 프로젝트였다. 제주도의 5분의 1 크기의 이 섬에는 30만 명의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데 인터넷 사용이 불가능한 ‘정보화 낙도’였다. KT는 이곳에 각종 첨단 기가 네트워크 시설을 구축했다. 우선 주민의 30%에 해당하는 3개 지역 25개 공공기관이 그 대상이다. 그 결과 화상회의, 원격교육과 진료, 전자상거래가 시작됐다.
KT는 이 섬에 사는 초등학생들의 교육환경 개선에 특히 신경을 썼다. 12개 교육기관에 풀HD 화질로 영상회의를 할 수 있는 솔루션 ‘케이박스’를 보급했고, 현지 학생들은 이 케이박스를 통해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 있는 교사들로부터 일주일에 세 번씩 영어수업을 받는다. 의료 낙후 지역인 점도 고려해 모바일 초음파기와 모바일 소변 진단기를 활용한 디지털 헬스케어 서비스도 제공했다. 이 섬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방글라데시 전역으로 판매할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도 가능해졌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건국 50주년인 2021년까지 ICT를 통해 교육과 의료환경 개선, 빈곤퇴치, 실업률 개선 등을 목표로 중진국에 진입하는 ‘디지털 방글라데시 2021’ 프로젝트를 추진 중이다.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KT는 방글라데시와 ‘방글라데시 기가아일랜드 추진을 위한 MOU’를 체결하고 전략적 파트너십을 맺었다. 방글라데시의 빈곤 탈출과 경제 성장이 곧 KT의 성과로도 돌아오는 ‘윈윈’ 구조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국내에서도 KT의 기가스토리 프로젝트는 지역사회 발전과 기업 이미지 제고에 기여하고 있다. KT는 임자도 프로젝트로 인해 교육, 문화, 의료 분야 등에서 약 11억 원의 사회적 가치를 창출한 것으로 추정되며 기업 이미지 홍보 효과는 약 15억 원에 이른다고 밝혔다. 경기도 파주시 비무장지대(DMZ)의 대성동 기가 스쿨에서는
1만4293건의 교육이 이뤄졌다. 대성동 기가 스쿨은 정부 4개 부처와의 협업하는 ‘통일맞이 첫 마을 대성동 프로젝트’로 발전했다. 사실상 기업의 CSV 활동이 정부 정책을 이끌어 낸 셈이다.
인천 강화군의 휴전선 근처 섬, 교동도도 정부, 지방자치단체와의 협력이 돋보인 사례다. KT는 지난 3월 교동도에서 행정자치부, 통일부, 인천시 등과 ‘교동 기가 아일랜드’ 조성을 위한 다자간 업무협약(MOU)를 맺었다. 개발에 뒤처진 휴전선 접경 지역을 통일에 대해 고민하는 관광특구로 변모시키기 위한 프로젝트다. 교동도는 한국전쟁 당시 황해도 주민 3만여 명이 피난 와 정착한 강화도 북서쪽 섬으로 북한과 직선거리가 2.6㎞밖에 안 된다. 현재도 100여 명의 실향민이 교동 대룡시장 인근에 거주하고 있다.
KT는 중앙정부, 지방자치단체와 협의해 여전히 1960∼1970년대 분위기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이 대룡시장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기로 했다. 옛 분위기를 유지하고 관리하되 시장 내외에서의 각종 서비스는 첨단 기가네트워크로 제공한다는 것이 핵심 아이디어다. 관광객뿐 아니라 현지 주민들을 위한 서비스도 마련된다. KT는 거동이 불편한 독거노인 30가구의 전기사용량 패턴을 분석해 오랫동안 사용량이 감지되지 않는 등 이상 징후가 발견될 경우 즉각 지역 내 복지 담당 공무원에게 연락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기로 했다. 농가 환경 개선과 생산성 향상을 위한 스마트팜 시스템도 지원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