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 DBR Case Study: 150일간의 시내면세점 대전(大戰)
Article at a Glance
2015년 7월10일, 연초부터 시작된 ‘2015 1차 면세점 대전’이 끝났다. 현대산업개발과 신라의 합작법인 HDC신라, 그리고 한화갤러리아가 각각 용산아이파크몰과 63빌딩을 중심으로 한 입지와 개발전략을 제시하면서 전쟁의 승자가 됐다. 글로벌 수주제안전략 전문 컨설팅 업체 쉬플리 코리아에 따르면 일반적인 B2B사업과 달리 면세점처럼 B2B2C로 이어지는 사업은 ‘비전 제시’가 ‘확실한 운영 솔루션’만큼 혹은 그 이상으로 중요하다. HDC신라와 한화갤러리아는 바로 이 지점에서 성공했다. 핵심 성공 요인은 다음과 같다. 1) 고객의 숨은 니즈를 발견해 먼저 의제를 설정했다. - ‘실패한 개발지역의 부활’이라는 욕구를 자극하고 충족시켰다. - 새로운 기업과 합작하고 새로운 입지를 제시해 ‘식상함’을 ‘신선함’으로 바꿨다. 2) 진지전과 기동전을 적절히 활용했다. - 매스미디어 전략, 이슈전쟁을 통해 유리한 여론을 조성했다. - 적절한 시점마다 ‘공식행사’와 ‘오너의 등장’을 통해 실제 전장에서 싸움을 주도했다. |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이예림(이화여대 국어국문학과 4학년) 씨와 이민정(중앙대 경영학부 4학년) 씨, 윤창민(단국대 중어중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2015년 7월10일 오후 3시, 면세점을 운영하는 한 중소기업 대표에게 모 일간지 기자로부터 다급하게 전화가 걸려왔다. 발표결과가 5시에 나오는데 마감시간 때문에 미리 선정 소감을 받고 있다는 얘기였다. 그런데 그 면세점 업체는 이번 추가 시내 면세점 운영 업체로 선정되지 못했다. 불과 2시간 전에도 ‘누가 될지’ 기자들조차 알기 어려운 상황이었다는 의미다. 같은 날 오후 5시, 영종도 인천공항 세관에서 서울지역 3곳과 제주지역 1곳의 신규 면세점에 대한 특허 심사 결과가 나왔다. 대기업 중에서는 범현대가의 정몽규 현대산업개발 회장과 손잡은 이부진 호텔신라의 HDC신라와 63빌딩과 여의도 권역 활용을 내세운 한화가 사업권을 거머쥐었다. ‘중소기업 몫’으로는 하나투어 컨소시엄인 SM면세점이 승자가 됐다. 대한민국 유수 유통기업은 전부 다 뛰어들었다고 하는 이른바 ‘면세점 대전(大戰)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DBR이 ‘면세사업권 수주전쟁’이 주는 경영학적 교훈을 집중 분석했다.
전쟁의 서막
2014년 말, 대한민국 유통업계 전체가 술렁였다. 오랜 시간 롯데와 신라가 양분하고 있던 한국 면세점 시장에 ‘시내 신규 면세점 허가가 날 것’이라는 소문이 기정사실화됐기 때문. 온라인 마켓과 소셜커머스 확산에다 장기간의 불경기로 기존 ‘오프라인 스토어’ 중심의 유통기업들은 돌파구가 필요한 상황이었다. 이런 유통기업들에 ‘시내 면세점 사업’은 눈에 보이는 분명한 해법 중 하나였다.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초반에 서울 광화문과 명동 등 중심지에 들어선 시내 면세점은 세계 최초의 ‘브랜드별 매장 구색’으로 오랜 시간 일본인 관광객, 그리고 현재는 주로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공을 세웠고, 면세점 사업은 ‘황금알을 낳는 거위’로 불렸다. 관세청 자료를 살펴보면 국내 면세점 시장 규모는 2010년 4조5000억 원 규모에서 2014년 11월 말 기준 7조5000억 원(유통업계 추산 8조 원 이상)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두 배 가까이 성장했다. 이 중 시내 면세점이 차지하는 비중은 역시 같은 2014년 11월 말 기준으로 4조9000억 원에 육박했던 것으로 추산되고(그림 1), 롯데백화점 소공동점의 면세점 2개 층 매출은 약 2조 원으로 전체 시내 면세점의 절반에 육박했다. 중국인 관광객은 중국 경제의 대내외적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으로 늘어 2014년 방한한 중국인이 2013년보다 41% 증가한 612만 명(전체 외래 관광객의 43% 가까운 비중)이었고, 2015년에는 메르스 여파에도 불구하고 700만 명을 넘어설 것으로 보인다.
이 상황에서 정부가 15년 만에 서울 시내 면세점 추가 특허(대기업 2, 중소기업 1)를 내주기로 결정한다는 게 기정사실화되니 업계에는 전운이 감돌 수밖에 없었다.
2015년 1월18일, 관세청은 서울 지역에 3개, 제주 지역에 1개의 시내 면세점을 추가 설치한다는 계획을 마침내 공식발표했다.1 2월2일 정식으로 ‘추가 설치 공고’가 이뤄졌고 약 일주일 뒤인 현대백화점이 입찰 참여를 선언하면서 전쟁은 시작된다. 쉐라톤워커힐호텔과 호텔 내 면세점을 운영하는 SK네트웍스가 3월25일 선전포고를 했고 신세계도 일찌감치 참전를 선언했다. 비교적 조용하던 기존 사업자 신라는 4월7일 ‘현대산업개발과 공동법인을 설립해 ‘용산 아이파크몰’ 입점을 목표로 하겠다’는 선언을 했다. 정부(관세청에서)에서 RFP(Request for Proposal·제안요청서)를 내고 특허 심사표와 평가 배점 기준을 공개한 바로 그 시점이다.이어 롯데면세점과 이랜드면세점까지 각각 입지를 선정하고 ‘수주전쟁’에 뛰어든다. 한편 중소·중견기업군에서는 세종호텔의 세종면세점, 유진기업의 유진 DFC, 청하고려인삼, 신홍선건설(제일평화컨소시엄), 파라다이스, 그랜드동대문DF(중원산업), 동대문DF(한국패션협회), SM면세점(하나투어컨소시엄) 등 14개 업체가 경쟁했다.
개전(開戰), 그리고 전개
1. 기습: ‘HDC신라’의 탄생
면세점 사업권을 둘러싼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사건은 현대산업개발과 신라의 합작이다. 다른 기업 입장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일종의 ‘기습’이었다. ‘HDC신라 면세점’은 현대산업개발과 계열사 현대아이파크몰이 각각 25%, 호텔신라가 50%의 지분을 출자해 200억 원을 초기 자본금으로 시작해 1차 년도에만 총 3500억 원을 투자하기로 했다. 조용하던 기업들의 대결양상은 이로 인해 격화되기 시작했다. 이 합작 발표로 인해 ‘면세점 대전’의 판이 흔들린다. 언론의 대대적인 보도로 사람들의 관심이 쏠리면서 정부(관세청)도 더욱 ‘공정성’과 ‘투명성’에 신경을 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됐고, 전통적인 한국의 라이벌 재벌 2세들의 손을 맞잡은 장면은 그 자체로 뉴스거리가 됐다. 보는 눈이 많아졌고, 이 과정에서 HDC신라는 단숨에 ‘가장 유력한 후보’라는 이미지를 얻게 됐다.
합작을 했다는 사실만큼이나 사람들을 놀라게 한 건 입지였다. 대부분 중국인 관광객들이 몰리는 명동과 동대문을 위주로 고민하고 있을 때 현대산업개발과의 합작을 통해 신라는 ‘용산 아이파크몰’을 중심으로 한 용산 역세권을 입지로 제시했다. 약 두 달 뒤에 열린 합작법인 출범식 역시 해당 장소에서 이뤄지면서 많은 이들의 뇌리에는 ‘HDC 신라=용산 부활’이라는 인상을 심어줬다.당시 HDC신라의 발표내용을 보면 세계 최대의 도심형 면세점 ‘DF랜드’를 콘셉트로 해서 총 6만5000제곱미터의 면적을 면세점 사업에 활용해 일종의 ‘동북아 거점형 면세점’을 만들겠다는 포부를 밝히고 있다. 전체 면적 중 2만7400제곱미터는 400여 개의 브랜드가 들어서는 국내 최대 면세점을 만들고, 나머지
3만7600제곱미터에는 한류 공연장, 한류 관광홍보관, 관광식당, 교통 인프라와 주차장 등의 연계시설을 조성한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2. 전투: ‘입지’의 정당성을 확보하라
HDC신라의 기습으로 ‘면세점 대전’의 양상은 격화되기 시작했다. 다른 대기업들도 적극 반격에 나섰다. 면세점 사업의 특성 때문이기도 하지만 HDC신라의 ‘색다른 입지 전략’의 제시로 인해 ‘입지’는 이번 면세점 대전의 최대 화두가 됐다. 일종의 ‘프레임 선점효과’가 나타난 것이다. 당연히 이는 HDC신라가 원했던 그림이었다.
신세계는 관광객이 많이 찾는 기존 명동 상권을 활용하는 ‘신세계 본점 활용 전략’을 내세우고 있었으나 HDC신라의 ‘용산 상권 부활’이 이슈가 되자 곧 이어 ‘남대문 상권 부활’이라는 화두를 내세우며 대응했다. 신세계는 당시 “신세계 본점이 명동과 남대문 시장을 잇는 가교 입지에 해당 한다”며 “현 신세계백화점 명품관에 면세점이 들어서면 외국인 관광객들에게 더욱 다양한 쇼핑환경이 조성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또 면세점 영업 활성화를 위해 명동과 면세점, 남대문시장과 남산을 도보로 돌아보는 ‘관광 둘레길’을 만들고 신세계 계열 쇼핑/숙박시설을 적극 활용해 전통시장인 남대문시장과의 시너지를 극대화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했다. SK네트웍스는 ‘동대문’에 면세점을 내겠다고 발표했는데, 서울시 동대문 패션문화관광지구 개발계획과 연계해 관객 1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초대형 공연장 및 문화시설을 건립하는 문화 인프라 구축에 투자하겠다고 약속했다. 또한 ‘옛 동대문 영광의 상징’ 거평프레야(현 케레스타)와 재래시장, 기타 복합쇼핑몰, 그리고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하나의 상권으로 묶어 현재 JW메리어트호텔 개장으로 늘고 있는 관광객들이 동대문에서만 하루 이상 즐겁게 돌아다니며 쇼핑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겠다는 아이디어도 구체화해 내놓았다.
비교적 늦은 5월22일에 입찰 참여를 선언한 롯데는 ‘동대문 피트인’을 후보지로 내세웠고, 중소면세사업자인 중원면세점과 함께 지상/지하 총 11개 층에 복합 면세타운 형태로 운영하겠다는 비전을 제시했다. 특히 중소 면세점 사업자와 상생하는 모델을 만들어 주목을 끌었다.
현대백화점은 강남 삼성동 무역센터점에 면세점을 내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강북 지역에 시내 면세점이 몰려 있다는 것을 강조하면서 역으로 강남으로 관광객을 끌어들일 수 있다는 점에 방점을 찍었다. 이는 꽤나 설득력이 있는 주장이었고 이런 이유로 몇몇 전문가들은 현대백화점의 수주(사업권 획득) 가능성을 높게 보기도 했다. 또한 중소기업과 중견기업을 주주사로 참여시키겠다는 의지를 표명하면서 ‘상생’이라는 화두에도 적극 응답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이랜드는 ‘홍대상권’을 공략하겠다는 입지 전략을 발표했다. 이랜드는 “최근 홍대입구에 구매력 높은 개별 관광객들이 몰리고 있지만 면세점이 없어 불편을 겪고 있다”며 “서교자이갤러리 부지에 이랜드 면세점을 만들겠다”고 제안했다. 또한 자신들이 중국에서 성공한 만큼 중국 관광객들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는 것을 강조했다.
한화갤러리아는 HDC신라가 주도한 ‘입지 이슈’의 최대 수혜자 중 하나였다. 이미 ‘색다른 입지’가 화두가 된 만큼 한때 서울의 상징과도 같았던 ‘63빌딩’의 활용과 IFC의 각종 몰, 금융과 정치의 중심지를 탐방할 수 있고, 한강 유람선 선착장도 가까워 관광객들을 끌어들이기 좋다는 주장을 펼쳤다. 또한 인천공항에서든, 김포공항에서든 서울로 들어섰을 때 가장 처음 나타나는 상징적 건물을 활용하고, 출국 전에도 역시 ‘공항 가는 길의 즐거운 쇼핑 경험’을 제안함으로써 다른 기업들과는 차별화된 입지 전략을 내세울 수 있었다.
3. 협공: 주차문제의 제기
5월25일. 면세점 사업자 최종 심사와 발표가 한 달 반 정도 남은 시점에서 HDC신라의 합작법인 출범식이 열린다. 이때 발표된 다양한 비전과 내용 중 특히 업계에서 화제가 된 건 ‘대형버스 400여 대 수용 가능한 주차장’이었다. 서울 중심부 시내 면세점의 고질적인 문제인 ‘대형버스 주차난’을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는 설명도 이어졌다. HDC신라의 이러한 발표는 ‘용산아이파크몰 입지 선정’에 이은 사실상 두 번째 공격이었다. 안 그래도 복잡한 명동 지역, 고질적 교통체증에 시달리는 동대문 지역, 역시나 주차문제를 안고 있는 현대백화점그룹은 해법을 제시하지 못했던, 의도적으로 이슈화를 피하고 있었던 ‘대형버스 주차’ 문제를 ‘우리는 400대를 수용할 수 있다’는 내용의 발표를 통해 사실상 전면에 부각시킨 셈이다.명동-남대문 상권을 중심으로 한 개발계획을 내세운 신세계, 동대문의 SK네트웍스와 롯데, 홍대 인근을 입지로 택했던 이랜드그룹 등은 이런저런 대형버스 주차난 해소 계획을 내놓았지만 실제로 부지 확보는 만만치 않은 과제였다. 한화갤러리아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한강 둔치가 있습니다”라는 한마디는 정부나 업계 관계자들에게 실제로 대형버스 주차장을 확보할 수 있다는 이미지를 각인시켰다. HDC신라가 적극적으로 제기하기 시작한 주차장 문제 역시 이 문제를 현실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상황에 있던 한화갤러리아가 협공을 펼치는 양상이 이어졌다.‘입지’의 프레임으로 초기 경쟁의 판을 짰던 HDC신라의 두 번째 프레임, ‘대형버스 주차장 이슈’는 다시 한번 ‘면세점 대전’의 양상을 격화시키면서 세간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효과를 낳았다.
4. 중소·중견기업 간 전쟁
언론의 큰 주목을 받지는 못했지만 중소·중견기업 몫으로 배정된 1개 사업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도 치열했다. 총 14개의 참여기업 혹은 컨소시엄 중에서 가장 강력할 것으로 예상된 업체는 유진기업의 유진DF, 세종호텔의 세종면세점, 동대문DF, 하나투어 SM면세점 등이었다. 유진기업은 하이마트를 처분했기 때문에 ‘중소/중견 기업’판에 뛰어들 수 있었지만 여전히 ‘대기업’의 이미지가 강하다는 점이 부담이었다. 유진기업을 제외하면 규모는 크게 차이 나지 않는다는 분석이 많았다. 그래서 경쟁 양상은 더욱 치열했다. 동대문DF는 유일하게 APM 건물의 구분 소유자들 전원으로부터 면세점 사업 진행과 관련된 동의와 합의를 이끌어내면서 가장 유력한 후보로 떠올랐다. 하지만 동대문에는 너무 경쟁자가 많았다. 심지어 ‘대기업 몫 2개’를 놓고 벌이는 전쟁에서도 SK네트웍스와 롯데면세점 모두 동대문을 입지로 선정했고, ‘중소기업 대전’에서도 많은 컨소시엄이나 기업들이 ‘동대문’을 입지로 내세웠다. SM면세점은 특이하게 ‘인사동 상권’을 내세우면서 주목을 끌었다. 업계에서는 ‘누가 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딱히 차별화된 기업이 안 보이는 상황’이라는 말이 나돌고 있었다.
승자와 패자
1. 승자들
HDC신라와 한화갤러리아가 150일간 벌어진 혈투의 승자가 됐다. 두 기업이 승리한 요인은 무엇일까? 수주 및 제안 컨설팅 업체인 쉬플리 코리아의 김용기 대표는 B2B2C 사업이라는 면세점업의 특성상 단순히 ‘누가 해봤고, 잘해왔으며, 좋은 솔루션을 냈는가’를 넘어서는 다른 측면이 승패에 영향을 끼쳤다고 분석했다. 일반적인 B2B 사업 수주에서와 달리 면세점 사업은 ‘비전 제시’가 큰 힘을 발휘한다. 마지막에 평가자들이 고객(소비자)의 관점에서의 효용을 따지고, 정부도 국민들에게도 비전을 보여줌으로써 사업자 선정의 정당성을 확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국민들이 정부가 허가해 준 사업의 최종 소비자이자 고객이 되는 측면도 있다.
한화갤러리아는 인천공항에서, 혹은 김포공항에서 서울로 들어서는 순간과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하고 공항으로 가는 길에 위치한 63빌딩과 대한민국 정치와 금융의 중심지를 돌아다보고, 한강에서 유람선까지 타는 ‘그림이 그려지는’ 비전을 제시했다. HDC신라는 KTX를 타고 외국인 관광객이 전국으로 퍼져나가는 비전을 제시했고, 전자제품의 메카였던 용산을 부활시켜 일본의 아키하바라처럼 만들겠다는 계획도 발표했다. ‘대한민국 관광 베이스캠프’라는 콘셉트를 이미지화해서 각인시켰다는 얘기다.
1) HDC신라: ‘판’을 흔들어 유리한 ‘프레임’을 형성하다.
김용기 대표는 ‘제안요청서(RFP)’가 나오기 전 단계에서의 전략에서 HDC신라가 초반 기선을 잡았다고 분석한다. 김 대표에 따르면 RFP를 내기 전의 발주자(혹은 허가권자)는 ‘병원에 간 환자’로 볼 수 있다. 어떤 제안요청서를 통해 어떻게 발주하는 것이 좋을지를 확정하지 못한 상태에서 많은 고민을 하며 심지어 안절부절 못한다는 것. 이때가 수주(혹은 허가권)를 원하는 기업들에게는 가장 할 수 있는 일이 많은 시기다. 즉 제안요청서의 방향에 대해 여러 가지 의견을 제시하면서 아예 그 제안요청서의 핵심 이슈를 함께 세팅할 수 있는 기회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발주자 혹은 허가권자들은 제대로 된 RFP를 만들어내기 위해 정보를 적극 수집하고 업계의 의견을 듣는다. 보통 기업이 발주를 한 경우는 ‘제대로 된 사업자 선정과 사업 진행’을 위해 노력을 기울이고, 정부 차원의 허가나 발주의 경우에는 국민 대중의 눈과 여론을 의식해 ‘투명성’ ‘합리성’ ‘공정성’을 확보하는 게 중요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납득이 되는’ RFP를 만들고 사업을 진행하고 싶어 하는 니즈가 존재한다.
김 대표는 “일반적으로 수주 전쟁, 허가권 취득 전쟁의 경우 ‘RFP’ 이전 단계에 결정적인 기회가 찾아오는데 HDC신라의 경우 이미 그 단계에서 고객의 숨은 니즈를 발굴해 자극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했다. 즉 사실상 정부조차 두 손 들고 나온 ‘용산 역세권 개발’을 ‘면세점 사업’과 연결해 일거에 해소할 수 있다는 메시지를 암묵적으로, 그리고 지속적으로 전달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그림 2>를 보자.2
RFP에서 드러나는 각종 심사기준, 배점표, 요구 조건은 ‘눈에 드러난’, 말 그대로 ‘빙산의 일각’이다. RFP가 나온 이후에는 주로 수면 위로 드러난 기준을 누가 더 잘 충족시킬 수 있느냐의 싸움이 된다. 그러나 수면 아래에는 다양한 정치적 논리, 고객이 생각하는 다양한 리스크(이 경우에는 정부), 관료 개인의 리스크 등 전혀 다른 ‘고객 니즈’가 존재한다. 바로 수면 아래에 있는 이 니즈와 ‘unstated requirement’를 알아내고, 때로는 먼저 ‘세팅하고 함께 형성해 나가는 것’이 수주 전략의 시작이다. 사실상 전세는 이때 기울 수도 있다.
이제 <표 1>을 보자. 이번 면세점 허가를 앞두고 정부가 내놓은 ‘배점표’다.
배점표를 보면 특이한 점을 발견할 수 있는데 이익의 사회 환원 및 상생협력 부분이 150점으로 배정돼 있다. 그런데 유사해 보이는 ‘경제·사회 공헌도(중소기업 지원, 경제사회발전 기여)가 150점으로 또다시 배정돼 있다. ‘경제사회발전 기여’와 ‘관광인프라 및 주변 환경요소’를 합치면 총 300점이 되는데, 일단 면세점 운영을 해본 경험이 있는 기업들의 경우 경영능력이나 관리역량 등의 측면에서 큰 차이가 나기 어렵기 때문에 승부는 사실상 이 두 가지 요소가 결정할 가능성이 컸다. 그런데 용산의 부활은 ‘경제 사회발전’에 추가점을 얻을 수 있는 요소이고, 관광인프라 및 주변 환경요소의 측면에서 용산이 갖고 있는 가능성, 즉 ‘아키하바라와 같은 전자제품 쇼핑과 체험의 천국’ ‘KTX를 타고 관광객이 서울을 벗어난 전국 관광까지 할 수 있다’는 논리 역시 높은 배점을 받을 수 있는 요소였다는 것이다.
김 대표에 따르면 RFP가 나온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기업이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적으로 변한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수주를 하고 싶으면 우선 RFP 이전에 움직여야 하고, 경쟁자보다 먼저 움직여 ‘자신의 의도와 강점에 맞는 프레임으로 발주자/허가권자를 설득’해 자신에게 유리한 판을 짜야 이길 확률이 높아진다.
RFP(특허 심사표·평가 배점 기준 공개) 이후의 HDC신라의 행보 역시 주목해볼 만하다. HDC신라는 RFP가 나오자마자 ‘용산 아이파크몰’을 중심으로 한 입지 및 개발전략을 공개하고 ‘현대산업개발과 신라면세점의 합작’으로 큰 이슈를 만들어낸다.
김용기 대표는 HDC신라는 ‘매스미디어 전략’을 효과적으로 실행했다고 설명한다. HDC신라의 매스미디어 전략은 총 세 번에 걸쳐 구체화돼 나타났다. 우선 첫 번째는 ‘컨소시엄 구성 그 자체’였다. 라이벌 재벌 후계자들이 손을 잡은 모습 자체가 갖는 효과는 컸다. 특히 이를 두 번에 걸쳐서 활용했는데, 첫 번째는 4월의 컨소시엄 발표, 두 번째는 용산 아이파크몰에서의 출범식이었다. 매스미디어 전략의 두 번째는 ‘K-디스커버리’ 협력단 발족이었다. 면세사업 허가 발표와 이를 위한 프레젠테이션을 불과 일주일 앞둔 시점에서 터뜨린 이 뉴스 역시 대대적인 언론 보도를 통해 ‘HDC신라가 잘 준비돼 있다’라는 이미지를 심어줬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HDC신라면세점이 지방자치단체(강원도, 전라북도, 충청북도, 전라남도, 서울 용산구) 관계자들과 코레일 관계자, 용산전자상가연합회 이사장까지 참석한 자리에서 HDC신라와 지방자치단체, 코레일이 협력해 외국인 관광객을 대상으로 한 철도관광상품을 개발하겠다는 게 핵심이었다. 또 침체된 용산전자상가 활성화를 위해 용산역과 전자상가와의 접근 인프라를 개선하고 용산 지역 명소화를 위한 관광 콘텐츠 공동 개발에 합의하면서 ‘용산 발전’과 ‘용산 KTX에서 시작하는 외국인의 전국 관광’이라는 두 가지의 프로젝트를 다시 한번 제시하고 한발 구체화시키는 모습을 보였다.
마지막 매스미디어 전략은 이부진 호텔신라 사장의 ‘PT 현장 방문’이었다. 7월9일, 신규 면세점 사업권을 위해 각 기업들의 뜨거운 PT 전쟁이 펼쳐지던 그날 이 사장은 바로 그 PT가 진행되는 현장을 방문한다. 이는 사업에 대한 ‘오너의 의지’를 평가단과 국민들에게 보여주는 효과가 있었다. HDC신라는 이처럼 ‘면세점 대전’ 초기부터 막바지까지 지속적으로 좋은 타이밍에 언론 노출을 했고 ‘적극적으로 준비하고 있는 기업’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내는 등 세련된 ‘매스미디어 전략’을 구사했다는 것이다.
HDC신라가
‘실패한 용산 역세권 개발’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을 때 한화갤러리아는
이에 편승하는 전략을
활용했다.
2) 한화갤러리아(타임월드):
‘band wagon’, 그리고 ‘ghosting’
HDC신라가 적극적이고 치밀했다면 한화갤러리아는 영리했다. 전문가들은 RFP 이전 단계에서 HDC신라가 움직이던 만큼이나 한화 역시 특유의 ‘뛰어난 대관업무’ 능력을 활용해 적극적인 ‘RFP 세팅’에 나섰을 것이라 분석한다. 어떤 사업이 발주되거나 신규 사업 허가권 입찰이 시작된다는 정보가 나오는 그 순간부터 RFP와 배점표가 공개되고, PT가 이뤄지고 승자가 결정되는 일련의 과정에서 필요한 게 수주전략(capture strategy)다. 이 수주전략의 가장 끝 단에 필요한 게 제안전략(proposal strategy)이고 제안전략의 마지막 단에 필요한 게 PT전략(presentation strategy)이다.
한화갤러리아는 HDC신라와 마찬가지로 전체적인 수주 전략의 시작점, 즉 RFP 이전 단계에서의 ‘세팅’과 ‘유리한 프레임 형성’에 성공했던 것으로 보인다. HDC신라가 ‘실패한 용산 역세권 개발’의 문제를 해결하겠다는 솔루션을 제공하고 있을 때 한화갤러리아는 이에 편승하는 전략을 활용했다. 용산만큼은 아니지만 공실률 높은 IFC 문제, 이젠 더 이상 ‘서울의 상징’까지는 되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활용 여지가 높은 63빌딩을 적극 활용하겠다는 의지를 밝히면서 HDC신라가 만들고 있던 ‘색다른 입지’ ‘정부의 실패한 난개발 고민에 대한 해법’의 프레임에 적극 동참해 이를 확대 재생산했다는 설명이다. ‘편승(bandwagoning)’이란 일반적으로 약소국이 강대국이 요구하는 부분적인 조건을 들어주면서 강대국 전체 전략의 틀 안에 들어가 안전을 보장받거나 강대국이 짜놓은 틀 안에 말 그대로 ‘편승’해 최대한의 이익을 추구하는 전략을 의미한다. 한화는 이처럼 면세점 업계의 기존 강자인 HDC신라가 만들어내는 새로운 전략과 ‘입지와 난개발 문제 해결을 위주로 새롭게 짠 면세점 전쟁 구조’에 편승해 자신의 이익을 최대한 추구하는 모습을 보였고, 또한 수주(사업권 획득)에 성공했다. 이러한 한화갤러리아의 전략은 HDC신라가 합작법인 출범식에서 제기한 대형버스 주차장 문제에 적극 동참한 것에서도 잘 드러났다.
앞서도 서술했듯, HDC신라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던, 혹은 의도적으로 회피하고 있던 ‘대형버스 주차장 확보 여부’를 면세점 대전 안으로 끌고 들어온 당사자다. 누군가를 공격하는 모양새도 아니고, 그저 “우리는 용산 아이파크몰 인근에 대형버스 400대 주차 가능 장소를 확보했다”고 선언함으로써 동대문, 명동 지역 등을 입지로 선정했던 다른 업체들을 당황시켰다. 경쟁자의 이름을 밝히지 않으면서 경쟁자의 솔루션을 공격하는, 수주 전쟁에서 종종 쓰이는 ‘Ghosting’ 전략이다. 한화갤러리아는 곧바로 “일단 100대의 대형버스 주차가능 공간을 비롯해 총 1607대의 주차공간을 확보했다”고 발표한 뒤 “한강 둔치를 활용하면 대형버스 추가 100대의 주차 공간을 확보할 수 있다”고 밝혀 다시 한번 HDC신라의 ‘이슈 제기’와 ‘프레임 세팅’에 편승하면서 적극 지원 사격하는 형세를 만들었다.
그 밖에도 여의도 인근에 위치한 방송국 등과 콘텐츠 및 관광코스 공동개발을 하겠다는 계획을 내며 ‘여의도만의 강점’을 내세웠고, 여기에 더해 황금을 좋아하는 중국인들 사이에서 63빌딩이 ‘골드바’ 건물로 불린다는 점에 착안, 이를 활용한 마케팅 전략까지 발표하며 발주자(허가권자)와 업계 관계자, 그리고 국민들의 주목을 끌었다. ‘국민들의 주목’은 면세점 허가 같은 분야에서는 중요할 수밖에 없는데, 유권자/국민 눈치를 보는 정부와 정부 관료들은 면세점의 소비자이기도 하면서 정부의 감시자이기도 한 일반 국민들에게 ‘비전이 그럴 듯하다’ ‘될 만한 업체가 됐다’고 인정받는 분위기를 만들어야 ‘공정성’ 시비에 휘말리지 않기 때문이다. 한화 역시 HDC신라의 적극적이고 치밀한 전략에 적절하게 편승하면서 이 부분에서 분명한 ‘설득력’을 만들어냈다는 평가다. 한강둔치 수상스포츠와 유람선-한강공원 수영장-KBS홀과 한류 콘텐츠-노량진수산시장과 여의도 식도락-국회의사당과 IFC몰-대형 수족관/극장 등을 갖춘 63빌딩으로 이어지는 관광코스의 완성도 역시 적극 홍보하면서 ‘설득력’을 높였다.
3) SM면세점: “약점이 많아도 이길 수 있다?”
중소중견기업 간 면세점 경쟁의 승자는 SM면세점(하나투어 중심의 컨소시엄)이 됐다. 지분율을 살펴보면, 하나투어가 76.5%를 갖고 있고, 여기에 홈앤쇼핑과 로만손, 토니모리 등 8개 업체가 합류했다. 아직 오픈하지 않았지만 인천공항의 면세점 사업권을 땄다는 점, ‘하나투어’ 중심으로 여행사의 역량을 최대한 활용해 관광객 유치 등에 도움을 얻을 수 있다는 논리를 내세웠다. 사실 SM면세점은 약점이 많았다. 인사동 하나투어 빌딩은 인근에 버스를 댈 곳도 없고, 건물 자체도 일부 층만 상업시설로 분류돼 있어 전체 빌딩을 면세점 사업에 활용하기 위해서는 용도 변경을 신청해야 하는 등 수많은 약점이 있었다. 또한 가장 큰 지분을 가진 하나투어는 사실 국내 여행객들을 해외로 데리고 나가는 ‘아웃바운드’ 중심의 여행사여서 ‘중국인 관광객을 끌어들인다’는 개념에 잘 부합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SM면세점은 이런 약점에도 결국 사업권을 따냈다. 약점이 있을 땐 약점을 감추려하기보다 ‘강점을 더 강조하는 것’이 좋은 대처법이다. SM면세점은 바로 이 전략을 활용했다. 기본적인 전제는 ‘약점이 많긴 하지만 치명적인 약점은 없다’는 부분이었다. 버스를 댈 곳이 부족하다는 건 명동과 동대문 지역의 어느 면세점이나 겪고 있는 문제였다. 오히려 상습 정체구간인 동대문이나 명동 인근에 대형버스가 늘어서는 모습보다는 좀 더 한적한 인사동 지역이 낫다는 것도 강점이 될 수 있었다. 하나투어가 ‘인바운드’ 중심의 여행사업자가 아니라는 것 역시 다른 컨소시엄이나 업체들은 세종호텔을 제외하고 ‘관광/호텔업’에 대한 경험 자체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역시 큰 문제가 되기 어려웠다. 건물 용도 변경도 면세점 허가 자체가 난다면 지자체나 정부 차원에서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점에서 역시나 큰 약점은 아닐 수 있었다.
오히려 ‘서울의 4대 고궁’에 둘러싸인 절묘한 위치에 있다는 것, 이 지역 역시 외국인 관광객만 843만명이 찾고 중국인만큼이나 다른 나라 관광객도 많아 ‘요우커 중심’의 다른 면세점과 차별화할 수 있다는 것 등은 분명한 강점이었다. 중국인 관광객 중에서도 또한 ‘젊은 층’을 주로 공략하겠다는 생각과 이를 구체화한 전략들(엔터테인먼트 회사들과의 제휴 등) 역시 높은 점수를 받을 만한 부분이었다. 단체관광, 깃발관광 위주의 중장년층 중국인 관광객이 아니라 지도책을 들고 다니는 젊은 중국 관광객들이 고궁과 인사동을 구경하다가 찾을 수 있는 명소로 차별화하겠다는 ‘비전’이 상당 부분 어필했다는 분석이다.
2. 패자들
1) 신세계
신세계는 이번 면세점 사업권의 판을 최초에 만든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들에 따르면, 애초에 국회에서 발의한 관련법은 중소기업에 면세점 사업권을 줘야 한다는 취지였다. 2013년 홍종학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대표 발의한 ‘관세법 개정안’의 핵심은 ‘중소기업의 면세점 사업권’이었다. 이명박 정부 말부터 추진돼왔던 법안으로 여야 공감대도 형성된 상태였다. 그러나 박근혜 정부로 넘어오면서 바뀐 관세청장이 ‘면세점 사업은 대기업의 자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갖고 있어 ‘대기업에 2개의 추가 사업권을 주고, 중소기업 1곳에 허가를 내주는 형태’로 변형됐다. 이 과정에서 ‘대기업 2곳 추가 허용’이라는 틀을 만든 데 공헌을 한 게 ‘신세계그룹’이라는 설명을 하는 전문가들이 상당수 있다. HDC신라면세점의 ‘기습’ 이전에 가장 유리한 기업이었고, ‘최초의 판을 짜 놓은’ 기업이라는 얘기다. 하지만 HDC신라가 시작하고 한화갤러리아가 공조하면서 만들어진 프레임에 대한 대처에서 아쉬움이 남는다. 신세계그룹은 사실 강남 센트럴시티점과 명동 본점 명품관을 놓고 입지를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와중에 롯데와의 대결구도, 그리고 관광객 수가 많은 곳에서 남대문 상권으로 승부를 내겠다는 전략으로 본점 명품관을 입지로 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만약 이런 전략이었다면 롯데면세점과의 차별화 방안, 해당 지역의 주차난, 정체 등에 대한 대책 등이 보다 명확하게 제시돼야 했다는 게 전문가들의 지적이다. 이런 면에서 ‘강남 센트럴시티’를 내세웠다면 코엑스몰보다 우수한 시내와의 접근성 등으로 인해3 선정 가능성을 높일 수 있었다는 분석도 나온다.
몇몇 정부 관계자들은 ‘신세계가 이번 면세점 추가 사업권 판을 짰다’라는 소문이 돌았던 것도 큰 문제였다고 지적한다. 사실이든, 사실이 아니든 이 같은 얘기가 업계와 정치권에 도는 순간, 실제 허가권자인 관세청과 평가단은 ‘공정성’ 시비에 대한 부담으로 해당 업체에 더욱 ‘까다로운’ 기준을 갖게 된다는 것이다. 신세계그룹은 강남센트럴시티 입지를 좀 더 고민해보거나, 명동 상권을 입지로 정한 직후 ‘RFP 이전 단계에서의 프레임 세팅’을 ‘남대문 부활’과 ‘대한민국 중심부의 면세거리’라는 콘셉트로 하고 보다 설득력 있는 논리를 만들어냈다면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었을 것이란 분석이 나오고 있다.
2) SK네트웍스
일부 전문가들은 SK네트웍스도 상당히 유리한 상황이었다고 본다.4 부유한 중국인 관광객 유치에 큰 기여를 한 게 바로 SK네트웍스가 운영하는 그랜드 쉐라톤 워커힐 호텔이었고, 면세점 사업을 좀 더 키워서 연계시키면 되는 상황이었기 때문. 그런데 SK네트웍스에는 몇 가지 문제가 있었다. 그랜드 쉐라톤 워커힐이 약간 고립된 지역에 있고 시내 접근성이 떨어지는 것을 감안해 ‘동대문’ 지역에 입지를 선정하겠다고 했는데 동대문 지역은 중소기업들의 혈투가 벌어지던 곳이었다. 안 그래도 중소기업들의 혼전이 벌어지는 곳에 대기업이 뛰어든 격이니 허가권자로서는 애매한 상황이 될 수밖에 없었다. 중소기업들이 반발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자칫 ‘국민정서’를 자극할 수도 있다. 주차장과 관련해서 HDC신라와 한화갤러리아의 공세가 이어지는 가운데 대형버스 주차장 확보도 가능하고 차량도 수천 대 댈 수 있는 공간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설득력을 더 높일 필요가 있었다는 분석이다. SK네트웍스는 관광객이 많은 ‘동대문’이라는 지역, 그럼에도 불구하고 명동과는 거리가 떨어진 지역에 입지를 선정하고 자사의 워커힐호텔과 면세점 고객은 물론 동대문의 인프라를 활용한 비즈니스 전략을 짤 수 있는 점 등의 장점이 있었다. 상당수 전문가들은 ‘SK네트웍스는 모든 면에서 무난하다’고 평가하고 있었다. 그 무난함은 ‘전략적 모호성’으로 연결될 위험이 있었다. 즉 동대문 상권을 활용하겠다는 다른 중소기업, 롯데면세점 등과의 차별점, 워커힐 호텔의 면세점과는 어떻게 다른 전략을 활용하겠다는 점 등을 보다 명확하게 하는 게 바람직했다는 분석이다. 최종 PT 역시 그 자체로만 놓고 보면 굉장히 잘했다는 평가가 흘러나왔음에도, 이런 점이 발목을 잡았다는 게 전문가들의 설명이다.
3) 현대백화점
전문가들은 서울 강남구 삼성동 무역센터에 입지를 선정한 현대백화점에 대해 ‘목표설정’과 관련한 문제를 제기한다. 앞서 제시한 <표 1>을 다시 살펴보면 경제/사회 공헌도와 이익의 사회환원 및 상생협력 분야의 점수가 총 300점으로 전체 점수의 30%에 육박한다. 하지만 그 안에 숨겨진 의미가 더 중요하다. 현대백화점은 이를 ‘CSR’ 점수로 인식해 큰 사회환원 금액을 약속한다. 영업이익의 20%를 사회환원하겠다는 선언을 하고, 중소기업과의 ‘상생합작 법인’을 설립하겠다고 했다. 그러나 전술했듯 ‘중소기업 몫’을 놓고 별도의 경쟁이 펼쳐지고 있었으며 정부의 면세점 허가 기조는 ‘대기업 위주’로 이미 바뀌어 있는 상황이었다. 중소기업 몫이 별도로 있었기 때문에 ‘중소기업과의 상생’ 자체가 허가권자에게 크게 어필하기 어려웠다는 얘기다. 사회환원을 약속한 건 분명 의미가 있을 수 있지만 이미 HDC신라와 한화갤러리아에 의해 ‘난개발 실패지역 부활’의 어젠다가 세팅된 상황에서는 참신성 면에서 점수를 받기 어려웠다는 분석이다. 또 불과 10분 거리에 롯데면세점이 자리한 입지를 선택했는데 롯데면세점도 어려워했던 지역에서 어떻게 관광객을 끌어들여 성공적으로 운영을 할지에 대한 비전을 보다 명확하게 제시해 대중들을 설득했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5
4) 기타 대기업들
면세점 업계의 최강자인 롯데면세점은 5월22일에서야 입찰 참여를 선언한다. 동대문 피트인을 입지로 선정하고 중소면세사업자인 중원면세점과 함께 11개층 복합 면세타운 형태로 면세점을 운영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한다. 그러나 이미 30년 넘게 사업을 운영해 온 롯데 입장에서는 ‘떨어진 적도 있다’는 명분을 축적하기 위해 나온 것 아니냐는 말이 돌 정도로 전략적 차별점이 부각되지는 않았다는 평가다. 이랜드 역시 홍대 상권을 활용하는 ‘서교자이갤러리’ 입지를 선정하고 입찰전에 뛰어들었으나 경영진부터 ‘지금이 면세점 사업을 할 때인지’에 대해 확신이 부족한 상황이었다는 얘기가 나온다. 업계에 정통한 관계자는 “이랜드그룹은 중국에서 크게 성공한 상태이고, 중국 소비자들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있는 기업이기 때문에 홍대 인근의 ‘젊음’ 이미지를 갖고 젊은 중국인 관광객을 공략하는 방식으로 전략을 짜면 다음에는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5) 중소기업:
혼전이 부른 난맥상
중소기업 입찰전의 승자는 SM면세점으로 결정됐지만 사실 누가 되거나, 누가 떨어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혼전이었다. 다만 관광객이 많고 기반시설이 있어 사업하기 쉬워 보이는, 그러나 사실은 주차장이나 교통체증 해소 등의 해결해야 할 어려운 과제가 많은 ‘동대문’을 중심으로 경쟁이 벌어진 게 SM면세점을 승자로 만들었다는 분석이 많다. 더군다나 롯데면세점과 SK네트웍스까지 동대문에 들어가겠다고 선언하다 보니 허가권자는 ‘중소기업에게 주자니 대기업이 울고, 대기업에 주자니 중소기업이 우는 상황’에 처했다. 골치 아픈 동대문 지역 대신에 HDC신라나 한화갤러리아와 마찬가지로 ‘색다른 입지’를 선정한 SM면세점이 눈에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
정리해보면, 동대문에 주로 몰렸던 중소기업들의 입지 전략과 대기업까지 뒤엉킨 혼전상황은 각 참여자들의 ‘차별성’을 희석시켰고, 오히려 전혀 다른 입지를 제시하는 쪽의 차별성을 부각시키는 효과를 만들어냈다는 것이다.
지난
대전에서 ‘새로운 입지’와
‘난개발 문제 해소’가
HDC신라와 한화갤러리아에
승리를 안겨다줬다면,
이번 면세대전은 전혀 다른 부분에서
의제가 설정되고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시사점
1) 고객의 숨은 니즈를 발견해 먼저 의제를 설정하라
초기 단계에서 자신들에게 유리한 ‘싸움판’을 만드는 건 수주 전쟁에서 매우 큰 효과를 발휘한다. 김용기 쉬플리 코리아 대표는 한 방산업체의 성공스토리를 제시했다. H사는 군에서 전투차량을 개발하는 데 상당히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신라면세점이 ‘기존 사업자’라는 이유로 그다지 유리하지 않았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아니 H사는 훨씬 불리했다. 당시 군에서는 ‘튼튼한 궤도형 차량’ 이외의 대안은 생각하고 있지 않았다. 이는 D기업의 특기였다. H사는 궤도형 전차를 만들어 본 경험도 적었고 관련한 기술력에서도 확실히 뒤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그러나 H사는 RFP 이전 단계에서부터 ‘프레임’을 바꾸기 시작했다. RFP를 내기 전 어떤 식으로 RFP를 내야 하고, 어떤 사업자를 선정해야 할지 고민하던 관계자들을 만나 ‘현대 시가전에서 기동력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현대전에서는 그저 단순히 ‘튼튼한 것’보다 ‘생존’이 중요한 데 생존을 보장하는 건 ‘기동성’이라는 논리였다. 그러니 시속 100㎞ 이상의 속력을 낼 수 없는 궤도형 차량보다 일반 바퀴 차량이 훨씬 전투에 유리하다는 사실을 설명하고 설득시켜나갔다. 그리고 성공했다. RFP에서 ‘바퀴형 전투차량’ 제조 사업을 발주한다는 내용이 나왔다. H사가 사실상 이때 수주게임에서 이긴 셈이 됐다.
2) 진지전과 기동전을 적절히 활용하라
이탈리아의 혁명가이자 이론가였던 안토니오 그람시는 ‘혁명의 성공을 위한 방법’으로 두 가지 전략을 제시한 바 있다. 바로 ‘진지전’과 ‘기동전’이다. 진지전이란 사회 내에 이론적/이념적 진지들을 구축해놓고, 지속적이고 다양한 이슈전과 ‘이데올로기전’을 통해 사회 전체가 공유하고 있는 기존의 이념 프레임과 ‘보편적인 믿음’ 등을 바꿔나가는 전략이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진지전을 통해 분위기가 무르익었을 때, 그리고 상황에 따라 필요할 때 적절히 ‘기동전’을 통해 실제 혁명을 완수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HDC신라는 ‘진지전’부터 시작하며 ‘150일간의 면세점 대전’에 뛰어들었다. 전문가들이 ‘유일하게 매스미디어 전략을 갖고 임했다’고 평가하는 것과 궤를 같이한다.
HDC신라는 ‘기존 독과점 기업이 다시 사업을 맞는 건 문제가 있지 않을까’라는 문제의식을 ‘현대산업개발’이라는 전혀 새로운 업체를 합작사로 끌어들이면서 1차로 뒤엎는다. ‘식상함’이 ‘새로움’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여기에다 ‘중요한 건 새로운 업체가 아니라 새로운 입지’라는 프레임을 제시한다. 신라가 기존에 지니고 있던 ‘식상함’ ‘기존 독과점 사업자’라는 이미지는 희석되고 전쟁의 양상이 바뀐다. 또 의도적으로 경쟁자들이 회피하고 있는 대형버스 주차장 확보 이슈를 선제적으로 제기하면서 두 번째 ‘이슈 전쟁’을 벌여낸다. 이 과정에서 마치 혁명가들이 새로운 사회의 비전을 보여주듯 ‘KTX를 타고 전국 방방곡곡으로 퍼지는 요우커’라는 놀라운 비전을 만들어냈다.실제 전장에 나와서 벌이는 ‘기동전’ 역시 적절했다. 실제 비전 발표를 ‘용산 아이파크’에서 벌이고, PT 시작일에 오너가 직접 현장을 방문하는 기민함은 유리해진 전세를 공고히 하는 효과를 만들어냈다. HDC신라가 만들어내는 ‘이슈 전쟁’에는 이에 편승해 항상 든든하게 지원사격을 하는 원군이 존재했는데, 그게 바로 한화갤러리아였다. 한화갤러리아의 계속되는 지원사격은 이슈의 폭발성을 높이고 설득력을 높이는 데 크게 기여했다.
서울시내 면세점 특허를 둘러싼 2차 대전이 다가오고 있다.6 이번에는 사업권을 연장받아야 하는 롯데와 지난 대전에서 패배한 기업들의 한판 승부가 예상된다. 지난 대전에서 ‘새로운 입지’와 ‘난개발 문제 해소’가 HDC신라와 한화갤러리아에 승리를 안겨다줬다면, 이번 면세대전은 전혀 다른 부분에서 의제가 설정되고 전투가 벌어질 가능성이 크다. 최근 형제 간 다툼을 경험한 롯데의 경우 ‘사회공헌’을 이슈로 내걸 가능성도 있고, 다른 기업들 역시 지난번의 패배를 통해 교훈을 찾고 다시 뛰어들 것이다. 롯데면세점 대표를 지낸 최영수 리인터내셔널 상임고문은 “다들 황금알을 낳는 거위라고 하지만 면세점 사업은 결국 중국과 일본의 관광객을 지속적으로 지금 이상으로 끌어들여올 수 있느냐에 따라 향후 사업 전망이 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현재와 같은 장밋빛 전망이 지속되기 어려울 수 있다는 얘기다. 따라서 다음 대전에서는 ‘사회공헌’ 등의 이슈는 물론 ‘관광객 유치의 비전’을 제시하는 게 핵심 의제로 떠오를 수 있다. 앞서도 설명했듯 면세점 대전은 다른 수주 전쟁과 달리 ‘솔루션’ 이상으로 ‘비전 제시’가 중요하다. 항공사, 여행사, 면세점은 사실 ‘꿈’과 ‘설렘’을 파는 업종이다. 제대로 꿈을 그려내는 자가 꿈을 이룰 것
이다.
고승연기자 seank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