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직 융해와 유통·물류 산업

185호 (2015년 9월 Issue 2)

 

 

사물의 이치를 파악해 앎에 이른다는 뜻의 격물치지(格物致知)란 말은 <대학(大學)> 가운데, 혹은 동양철학 전체를 통틀어서 가장 난해한 문구 중 하나로 꼽힙니다. 해석도 그만큼 다양합니다. 저는 자연에서 나타나는 현상의 이면에 자리 잡은 원리를 파악하려는 노력이 학문의 본질이라는 뜻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실제 자연과학에서 발견된 수많은 원리나 이론들이 고스란히 인간과 사회 현상을 포함한 우주 전체의 원리를 이해하는 데 결정적 기여를 하고 있습니다. 제품수명주기(PLC·Product Life Cycle)는 생명체의 수명주기에서 그대로 따온 것입니다. 관성(inertia) 같은 물리학의 법칙은 조직과 인간의 행동을 이해하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습니다. 진화생태학, 단속평형이론 등은 생물학에서 발견된 원리가 사회과학에 그대로 적용된 사례입니다.

 

이런 맥락에서 조직의 변화와 혁신과 관련해 고민하는 분들은조직 융해(histolysis)’라는 생물학적 현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생명체 가운데 틀을 깨는 변화를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례가 곤충입니다. 알에서 부화해 애벌레로 자라다가 번데기로 탈바꿈한 뒤 성체로 변태하는 과정은 경이로움 그 자체입니다.

 

번데기에서 성체로 변할 때 곤충들은 애벌레 당시에 생존에 도움을 줬던 조직들을 없애고 새로운 조직을 만듭니다. 미래학자 마티아스 호르크스는 이에 대해사실상 스스로 자신을 먹고 소화시키는 과정이라고 말합니다. 예를 들어 애벌레 시절에는 여러 곳에서 왕성하게 양분을 섭취해야 하기 때문에 소화를 위한 침이나 효소를 만드는 기관이 조직의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하지만 성충이 돼서는 이 정도 비중을 차지할 필요가 없기 때문에 조직 융해를 통해 기존 조직을 없애고 새로운 조직을 만들어냅니다.

 

자기 자신을 소화시켜 새로운 조직을 만드는 것은 극한의 고통을 수반합니다. 이런 변화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애벌레 상태로 머물려는 조직들이 많습니다. 하지만 <단순하게 살아라>의 저자 베르너 티키 퀴스텐마허의 말대로 모든 것을 내려놓고 번데기가 되는 용기를 가진 사람이나 기업들만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습니다.

 

현재 한국의 유통업체들이 직면한 환경은 조직 융해의 교훈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생존하기 어려울 정도로 절박한 상황이라고 생각합니다. 과거 유통업은 본질적으로 부동산업과 큰 차이가 없었습니다. 요지에 부동산을 확보하고 건물을 올려 매장을 빌려주면 장사가 됐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인터넷과 모바일 기술의 확산으로 이런 모델에 치명적인 위기가 찾아왔습니다. 탈중개화(disintermediation)란 거대한 트렌드 속에 오픈마켓, 직구, O2O 등 파괴적 모델이 잇따라 등장하고 있습니다. 이 과정에서 부동산 개발이 아니라 IT를 활용해 총체적인 고객 경험을 설계하고 실행하는 능력이 훨씬 더 중요해졌지만 구조적으로()’ 위치에 있었던 유통업체들은 이런 역량을 갖추지 못했습니다. 다행스럽게 면세점 같은 성장산업 덕분에 당장의 생존 위기까지는 겪지 않고 있습니다. 하지만 면세점은 본질적으로 규제산업인데다 디지털 혁신 모델로 인해 고객들의 구매 행동에도 변화가 나타날 수 있습니다.

 

여러 유통채널 간 포인트를 공유하나 옴니채널을 실험하는 등 한국 유통업체들도 나름의 대책을 강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는 조직 융해와 같은 근본적인 변화에는 한참 미치지 못합니다. 더 큰 애벌레가 되기 위한 노력에 머물고 있다는 느낌입니다. 애벌레가 몸집이 커지면 포식자의 좋은 먹잇감이 될 뿐입니다. 스스로의 핵심역량을 해체할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DBR은 디지털 파괴전략 시리즈 두 번째로 유통 및 물류산업을 집중 분석했습니다. 유통산업 못지않게 물류 관련 산업도 신기술 기반의 혁신적 시도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가장 심각한 위기를 겪고 있는 산업인 만큼 이 분야에서의 고민과 대응은 다른 분야의 비즈니스 리더들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이번 스페셜 리포트를 통해 파괴적 변화를 주도할 아이디어를 찾아가시기 바랍니다.

 

 

김남국 편집장·국제경영학 박사 marc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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