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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공황 원인과 시사점

미국의 번영과 히스테리적 소비, 마침내 거품과 대공황을 낳다

고영건 |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 인문학

 1차 세계대전은 경제적으로는 미국을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바꿔 놓고 경기 호황을 이끌어냈다.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그랬다. 그러나 그전까지 겪어보지 못했던충격과 공포는 전 사회적 심리상태를히스테리적으로 만들었다. 히스테리적 소비가투기와 거품을 만들어냈고 대공황으로 이어졌다. 경제는 심리라고 말하면서도 이에 가장 민감해야 할 기업인들은 정작 얼마나심리적, 사회적 경제 예측 도구를 활용하고 불안의 징후를 감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인간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흐름은 언제나 유사한 형태로 반복된다. 그 지점에 현대인들과 지금의 기업인들이 주목해야 할 시사점이 존재한다. 100년 전의 경험에서 각자 상황에 맞게 교훈을 찾아내야 한다.

 

 

“최고의 비즈니스는 바로 전쟁이다라는 말이 있다. 외견상 1차 세계대전 후의 미국의 경제 상황은 이러한 주장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해 준다. 한마디로 1차 세계대전이 경제에 미친 영향은유럽의 몰락과 미국의 번영이라는 표현으로 요약될 수 있다.

 

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경제대국으로 성장했다. 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하더라도 미국은 세계 최대 채무국 중 하나였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미국의 해외 투자 금액은 35억 달러였던 반면 유럽이 미국에 투자한 금액은 72억 달러였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 직후 외국인이 보유한 미국 기업의 주식은 33억 달러였던 데 반해 미국인의 해외 투자액은 70억 달러에 달했다. 특히 미국은 영국과 프랑스에 96억 달러를 빌려준 채권국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기 전에는 37억 달러 수준의 채무국이었던 미국이 종전 후 126억 달러의 채권국으로 성장한 것이다.

 

게다가 유럽의 국가들은 전쟁 중에 대부분의 산업 시설들이 파괴됐기 때문에 전후에도 공산품을 제대로 생산할 수 없었다. 하지만 1차 세계대전의 전장이 유럽이었던 관계로 미국은 산업 시설의 피해를 보지 않았고 그 결과 자연스럽게 전후에 비즈니스에서의 주도권을 쥐게 됐다.

 

‘광란의 20년대(Roaring Twenties)’ 1차 세계대전 후의 1920년대 미국 사회를 표현하는 대표적인 용어 중 하나다. 1920년대에 미국은 경제적 번영과 미래에 대한 장밋빛 기대감이 사회 전반에 걸쳐 만연돼 있던 시대였다. 미국의 전후 생산량은 10년간 64%씩이나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그 결과로 경기는 호황이었고, 각종 비즈니스는 번창했으며, 주식시장은 급등했고, 생활수준도 높아졌다.

 

하지만 미국의 전후 영향으로서 광란의 20년대에 대한 실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기 위해서는 그 이후에 드러난 1929년의 대공황(Great Depression)으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흐름을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역사적인 흐름을 놓칠 경우, 미국의 1920년대는 전후의 단순한 경제적 부흥기로 오인될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 전후 1920년대 광란의 질주 시대는 미국 사회가 일종의집단 히스테리에 사로잡혀 있었던 시기며 이미 파국적인 미래에 대한 어두운 그림자가 깊게 드리워졌던 시기이기도 했다.

 

그림 1 1차 세계대전 중의 참호전 대치 장면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집단 히스테리

1차 세계대전이 전 세계 시민들에게 끼친 영향력은 엄청난 것이었다. 1차 세계대전 직후 전 세계는 가치관의 혼란을 경험했다. 1차 세계대전 때 표출된 인간 본성의 잔인함이 세계시민들을 충격과 공포로 몰아넣었던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대표적인 특징 중 하나는 사상 유례없는 참호전이었다는 점이다. 전쟁 초기에는 그 누구도 이 전쟁이 수년씩이나 지속될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현대식 기관총과 대포로 무장한 양측이 맞붙자 정면으로 돌격하는 보병전은 무의미한 일이라는 사실을 양측 모두 금방 깨닫게 됐다. 그 결과, 양측 모두 서부전선에서만 24000㎞에 이르는 참호를 구축한 상태에서 서로 공격해오는 적들의 공격을 분쇄하는 데 전력을 기울이는 지옥 같은 참호전을 벌이게 됐다. 따라서 수백만 명의 병사들이 이 좁고 길게 늘어선 황량한 전투구역에 오랫동안 갇힌 채 전투를 치러야 했다.

 

1460일 동안 참전한 병사들은 극한의 상황에서 육체적, 심리적인 공황 상태를 경험해야 했다. 프랑스의 한 장교는 이때의 참전경험을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미쳤다! 현 상태를 지속한다는 것은 미친 짓이다. 이 지독한 살육전이라니! 이 끔찍한 공포와 즐비한 시체를 보라. 지옥도 이렇게 끔찍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인간은 미쳤다!”

 

 

1차 세계대전의 특징적인 전투 양상은 사람들에게 유례없는 공포감을 심어줬다. 그중 하나가 바로 보이지 않는 적인 독가스 공포였다. 화학적으로 정제된 독가스가 최초로 사용된 것은 독일군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벨기에 전선에서 염소가스를 실전에 투입했을 때였다. 무색무취의 독가스에 노출된 병사들은 손쓸 겨를도 없이 그저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할 수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극도의 공포감을 경험해야 했다. 1915년에 독일군의 염소가스 공격으로 연합군 측은 사망 5000, 부상 15000, 생포 5000명이라는 엄청난 피해를 봤다. 불과 몇 분 사이에 약 2개 사단 병력이 궤멸하기도 했다. 독가스에 노출된 병사들은 온몸이 화상투성이로 돌변했고 겨자 색깔로 곪아터진 물집으로 범벅이 됐다. 그들은 숨조차 쉴 수 없는 고통 속에서 죽어나갔다.

 

1차 세계대전 무렵에 미국인들 중 독가스처럼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공포감을 경험한 것은 참전했던 군인들만은 아니었다. 전후에 유럽뿐만 아니라 미국 사회에서도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을 조장하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바로 스페인 독감이었다.

 

스페인 독감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인 1918년에서 1919년 사이에 주로 참전 군인들에 의해 전염됐다. 조류독감의 일종이었던 스페인 독감으로 전 세계적으로 5000만 명 이상이 희생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는 제1차 세계대전의 사망자 수보다 세 배나 많은 숫자였다. 이러한 스페인 독감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염병 중 하나로 기록되고 있다.

 

 그림 2 스페인 독감이 유행하던 시기에 마스크 미착용 승객의 탑승을 거부하는 장면

 

 

 

스페인 독감은 1차 세계대전에 참전했던 미군들이 귀환하면서 미국에까지 확산됐다. 미국에서 첫 환자가 발생한 지 한 달 만에 24000명의 미군이 독감으로 죽고 총 50만 명의 미국인이 사망했다. 스페인 독감의 영향으로 미국에서는 마스크를 쓰지 않은 사람은 아예 전차 탑승이 거부되기도 했다.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한 공포 반응은 1차 세계대전이 끝난 직후에 미국 사회에서 또 다른 형태의 집단 히스테리(hysteria)로 전환됐다. 미국적이지 않은 것(예컨대, 스페인 독감)에 대해 극도의 증오감을 나타내는 것이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적색 공포(red complex)’였다. 적색공포는 1920년대 초반 미국 사회를 특징지었던 현상 중 하나다. 1차 대전 중에 공산화가 된 소련이 갖는 파급력에 대한 공포심은 미국 사회를 크게 동요시켰다. 그 여파로 미국에서는 히스테리적 애국주의가 출현했고 대대적인 공산주의자 소탕전이 벌어졌다.

 

1919 11월에 미국의 법무장관 파머(Alexander Mitchell Palmer)는 미국 내 공산주의자들과 무정부주의자들을 잡아들인 후 강제추방 명령을 내렸다. 전시의 치안법에서는 과격한 외국인들을 추방할 수 있었는데 전쟁이 끝났는데도 파머는 치안법을 적용했다. 1920 11일에는 미국 전역에서 열린 공산주의자 집회를 경찰이 급습하기도 했다. 이때 집회 현장에 있던 사람들 모두가 연행대상이 됐는데 약 6000명이 체포돼 감옥으로 보내졌다. 하지만 이들 대부분은 나중에 공산주의자임을 입증할 수 있는 증거가 불충분하다는 이유로 방면됐다. 1920년대 초반의 공산주의자 소탕 작전에서는 모토가 “S. O. S(ship or shot: 추방이냐, 사살이냐)”였을 정도로 비합리적이고 히스테리적인 성격이 강했다.

 

전후 미국 사회에서 형성된 이러한 집단 히스테리는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극우 애국주의자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강렬한 공포 분위기를 조장했다. 특히 극우 애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제거하고 싶은 사람들이 있는 경우, 볼셰비키(Bolshevik)의 포장만 뒤집어씌우면 문제가 쉽게 해결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결과, 적색공포는 사람들로 하여금 급진주의로 오인받는 것에 대한 히스테리 반응을 유발했다.

 

결국 1920년대 미국 사회에서는 전쟁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모두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기이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적색공포 히스테리는 대단히 심각했다. 한 자유주의 저널리스트가 속마음을 주고받던 인디애나 주의 친구가 방문했을 때 사무실 문을 닫고도 엿듣는 귀를 염려해서 옆 사무실 쪽으로 나 있는 창문을 닫기 전까지는 정치 얘기를 못하게 할 정도였다. 1922년에 캐서린 제롤드(Katherine Gerould) <하퍼스 매거진(Harepr's Magazine)>에 다음과 같이 썼다.

 

“미국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은 의미의 자유국가가 아니다. 자유는 점점 더 단순한 수사적 표현에 불과한 것이 되고 있다. 감히 말하건대, 이제 생각하는 시민은 자신의 진실된 신념의 일부 이상을 자유롭게 표현할 수 없다. 물론 그 신념이 명백히 죄가 되는 것이 아님에도 말이다.”

 

적색공포 신드롬에 힘입어 1920년대 미국의 기업들은 오픈 숍(open shop)을 기반으로 한 미국적 자본주의 계획을 펼쳐나갈 수 있었다. 이것은 노조의 힘을 무력화시키는 전략이었다. 기업에 입사를 하면 의무적으로 가입해야 하는 유니온 숍(union shop)과는 달리 오픈 숍에서는 특정 노조 가입을 고용 조건으로 하지 않아도 됐다.

 

‘미국적이지 않은 것에 대한 반감에 기초한 집단 히스테리는 일종의 불관용(intolerance)을 미덕화하는 병리적인 문화를 창출하기도 했다. 전쟁 중에 확산됐던 자국에 대한 충성심과 적국에 대한 증오감은 내재된 관성으로 인해 전쟁이 끝난다고 해도 쉽게 사그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종전으로 인해 방향성을 잃어버린 백인 개신교도들의 내부 감정들(충성심과 적개심)은 비미국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처단하는 방향으로 에너지의 분출 방향을 바꾸었다. 그 결과 흑인과 유대인, 그리고 로마 가톨릭교에 대한 반감이 사회적으로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됐다.

 

이러한 불관용주의의 결정체는 바로 KKK였다. 일명 쿠 클럭스 클란(Ku-Klux-Klan)으로 불리는 KKK는 흑인, 유태인, 그리고 여타의 소수자들에 대한 적개심과 폭력을 선동하는 백인 남성 비밀결사 조직이었다. KKK는 미국의 대통령 워런 하딩(Warren Gamaliel Harding)과 해리 트루먼(Harry S. Truman)도 조직에 가담한 적이 있을 정도로 미국 사회 전역에 걸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림 3 1925 KKK의 워싱턴 시가 행진

 

사실 KKK 1920년까지만 해도 단원이 수백 명 수준에 불과했다. 하지만 회원모집책에게 회원 가입비의 일부를 지급하는 형태의 다단계판매 조직의 기법을 도입한 결과, 불과 4년 만에 단원 수가 450만 명으로 불어났다. 공산주의자 히스테리와 마찬가지로 비미국적인 것에 대한 공포에 뿌리를 둔 이러한 사회적 분위기는 내재된 공포를 지속시키고 온갖 종류의 변태적인 잔학 행위와 범죄를 양산했다.

 

비미국적인 것에 대한 반감에 뿌리를 둔 집단 히스테리적 사회 분위기는 인류 역사상 가장 기묘한 사회실험으로까지 이어졌다. 바로고귀한 금주법(禁酒法)의 시대를 연 것이다. 미국의 금주법은 1919 116일 미국 의회에서 미국 수정 헌법 제18조 수정안을 비준해 제정한 법으로서 술의 제조, 판매, 운반 및 수출입을 금지하는 법안이다. 미국이 1차 세계대전에 참전한 것은 금주법을 찬성하는 지도자들에게 좋은 기회가 됐다. 바로 1차 세계대전이 완전한 금주를 반대했을 사람들의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려준 것이다. 특히 전시 체제는 사람들로 하여금 정부에 폭넓은 권한을 양도하도록 하는 데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

 

그림 4 금주법 시행 전후의 미국인 알코올 소비량

 

사실, 금주법은 실현 불가능한 법안이었다. 1932년 컬럼비아대학팀의 연구에 따르면, 금주법이 시행된 직후인 1921년에는 알코올 소비량이 감소했으나 그 다음해부터는 예전의 평균치로 되돌아갔다. (그림 4)

 

비현실적인 법안인 금주법이 미국에서 무려 14년간이나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전후 미국 사회가 보였던 독특한 집단 히스테리 양상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첫째, 금주법은 비미국적인 것에 대한 공포와 적개심이 분출될 수 있는 일종의 감정적 통로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사실 금주법의 경우 표면적으로는 알코올 중독과 범죄를 줄이는 것이 법을 제정한 명분이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양조업과 증류업에 종사하는 독일 이민자들을 견제하기 위한 것에 가까웠다. 1차 세계대전 참전으로 인해 미국 내에서는 독일에 대한 감정이 좋지 않았는데 금주법은 독일 이민자들이 양조업으로 부를 쌓는 것을 방지할 수 있게 해줬다.

 

둘째, 금주법은 1차 세계대전의 승전국이자 세계의 패권국가가 된 것에 대한 선민의식과 비현실적인 형태의 낭만적 기대감을 반영하고 있다.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 대통령과 같은 정치인들에게 금주법은숭고한 동기와 원대한 목적을 지닌 위대한 사회-경제적 실험이었을지라도 현실적인 관점에서 본다면 그것은 유토피아적인 이상을 꿈꾼 것에 불과했다.

 

사실 1920년대 내내 미국 사회의 발목을 붙들었던 대표적인 사회문제는 금주법 문제, 갱단 문제, 공갈 협박 문제였다. 이러한 사회문제의 핵심에는 바로 금주법이 자리 잡고 있었다. 왜냐하면 금주법의 최대 수혜자는 당시의 대표적인 조직폭력배인 알 카포네(Al Capone)였기 때문이다. 1927년 알 카포네의 총수입을 분석해보면 맥주와 위스키에서 6000만 달러, 도박과 개경주에서 2500만 달러, 매춘과 기타 유흥업소에서 1000만 달러, 그리고 공갈 협박 등으로 1000만 달러를 벌어들인 것으로 나타났다.

 

전후 신인류의 등장: 집단 히스테리의 개인적 전환

1920년대 초반에 미국에서는 아주 특별한 성 문화가 창출된다. 이 시기에 미국의 대중들은 정신적으로 매우 피로해 했다. 전쟁의 흥분과 공산주의자 소동이 가져다준 과민한 긴장에 지친 미국인들은 심리적인 휴식과 더불어 치유를 간절히 열망했다. 하지만 적색공포로 인해 심리적인 욕구를 배출할 수 있는 통로는 매우 제한돼 있었다. 적색공포에 대해 사람들이 환멸을 느끼기 시작할 무렵에 미국의 젊은이들은 히스테리적인 애국주의자들이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공산주의와는 전혀 관련지을 수 없는 새로운 문화적 풍토를 창출해냈다. 1920년대 초반에 등장한뉴맨뉴워먼이 바로 그 새로운 문화의 주역들이었다.

 

그림 5 1919년 발표된아메리카 결혼행진곡악보 표지

 

미국 사회에서는 1차 세계대전 때 전쟁 결혼이 유행했다. 전쟁 결혼은 전쟁 소식에, 또는 참전을 앞두고 갑작스럽게 진행하는 결혼식을 말한다. 또 군인들과 연인들은 훈련소나 전선으로 출발할 때 특별한 정서를 경험했다. “내일 죽을 수 있으니 오늘은 즐기자는 정서에 감염되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 때 프랑스 등 유럽 지역에 참전했던 200만 명의 미군 병사들은 당시에 자신이 생활하던 곳에서 적용받던 도덕률로부터 벗어나 타락한 생활을 체험했다. 이 시기에 매춘 문제는 미군을 줄기차게 따라다녔던 문제 중 하나였다. 또 간호사 또는 군무원으로 파견됐던 미국 여성들 역시 전통적인 속박에서 벗어나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났을 때, 이러한 젊은이들의 심리적 세계 속에서는 관성이 작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쉽게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아갈 수 없었다. 이러한 조건하에서 1920년대 미국의 젊은이들은 전쟁을 포함한 세상사에 대한 환멸과 회의감, 그리고 세상의 속박으로부터 심리적 자유를 추구하고 싶어 하는 갈망을 적극적으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1920년대에 출현한 플래퍼(flapper)가 대표적인 예이다.

 

플래퍼는 독특한 외모와 성향을 지닌 미국의 신여성들로서 주로 그들이 입었던 주름 잡힌 짧은 치마가 춤추며 회전할 때 펄럭이는 모습을 빗대어 붙여진 이름이었다. 사실 플래퍼는 20세기 초에 프랑스에서 짧은 치마에 단발머리를 한 길거리 창녀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했다. 1차 대전 때 참전한 미군들이 이들과의 인상 깊었던 경험들을 기억에 담아 오게 됐고 그 후 미국에서는 또 다른 의미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이들 플래퍼는 1920년대 미국의 성혁명 시대의 주역으로 활약했다.

 

그림 6 플래퍼 룩

 

 

 

 

넓은 의미에서 플래퍼는 1차 세계대전 이후 사회참여가 늘어난 신여성을 뜻한다. 하지만 1920년대 대중들에게 비친 플래퍼의 전형적인 모습은 짧은 치마에 담배를 물고 재즈음악에 맞추어 몸을 흔들어 대는 일종의노는 여자였다.

 

플래퍼들은 단발머리 위에 군인들의 철모와 유사한 클로슈(cloche)라는 모자를 썼다. 클로슈 모자는 일종의 커뮤니케이션 장치이기도 했다. 모자 위에 화살같이 리본을 장식하면 사랑에 빠진 싱글 걸을 뜻하고 리본을 단단히 묶어서 장식하면 기혼녀, 나비처럼 리본을 묶어서 장식하면 자유로운 여성임을 상징했다.

 

플래퍼들은 재즈와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었다. 피츠제럴드(F. Scott Fitzgerald)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의 시대적 배경이었던 1919년 노동절(May Day)에서 1929 10월 경제 대공황까지의 10년간을 재즈시대(The Jazz Age)라고 불렀다. 피츠제럴드는 재즈시대의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재즈라는 단어는 첫째로 섹스, 그 다음 춤, 그리고 음악을 의미해왔다. 그것은 전선의 후방에 있는 대도시들의 상태와 다르지 않은 초조한 흥분 상태와 관련 있다.”

 

재즈(Jazz)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에 뉴올리언스에서 기원한 서양 음악의 기술과 이론을 바탕으로 흑인적인 요소와 백인적인 요소가 결합됨으로써 탄생한 새로운 방향의 음악 장르다. 이러한 재즈의 유행은 비미국적으로 보이는 모든 것들을 처단하는 방향으로 진행됐던 종전 직후 미국 사회의 에너지 분출 방향이 선회했음을 보여준다. 상징적인 의미에서 흑인과 백인의 문화적 결합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또 재즈의 유행은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한 비극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 하는 심리-사회적 욕구와도 밀접한 관계가 있다. 20세기 초 뉴올리언스의 장례식에서는 재즈가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때 장례식에서 가장 중요한 절차가 장례식을 마치고 돌아오는 과정이었는데 그때 장례 행렬은 출발할 때와는 달리 슬픔을 달래듯 즐겁고 활기에 넘치는 곡들을 주로 연주했다. 이것은 장례 절차를 마치고 귀가할 때 이제는 슬픔을 거두고 본래의 생활로 돌아가려는 사람들의 의지를 반영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장례식에서의 밴드 연주가 재즈 밴드의 효시에 해당된다. 다시 말해서, 1920년대 미국 사회에서 재즈가 유행하게 된 것은 1차 세계대전의 비극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싶은 내재된 욕구를 반영하는 것으로 보인다.

 

재즈의 가장 큰 특징은자유. 재즈에서의자유정신은 즉흥성을 중요시하는 연주 스타일과 연주 그 자체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재즈에서는 같은 사람이 똑같은 곡을 연주해도 분위기와 기분에 따라 연주가 크게 달라질 수 있다. 따라서 재즈에서는절대성이라는 것이 없으며 개인의 취향에 따라 자유로워질 수 있고 특히 때로는 어울리지 않는 불협화음도 아름답게 들릴 수 있다. 이러한 재즈의 특징을 고려해 볼 때 플래퍼들이 재즈로 무장했던 것은 백인 애국주의자들이 불관용을 외쳤던 집단 히스테리에 대해 반동적인(반대되는) 움직임을 나타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플래퍼들에게는 어울리는 반대 성의 짝들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바지 뒷주머니에 위스키 병을 넣고 남성다움을 뽐내는 셰이크(Sheik)족들이었다. 이 용어는 당시에 남성미의 새로운 기준을 확립한 영화배우 발렌티노(Rudolph Valentino)가 주연한 영화셰이크(The Sheik)’에서 따온 것이다.

 

 그림 7 영화배우 발렌티노

 

 

영화배우 클라라 보(Clara Bow)의 다음과 같은 말은 1920년대뉴맨뉴워먼의 생활모습을 상징적으로 잘 보여준다.

 

“우리는 하고 싶은 대로 다했다. 밤 늦게까지 놀고 입고 싶은 대로 입었다. 내 머리색과 어울리는 일곱 마리의 붉은 색 차우(중국 개)와 함께 오픈카 키젤을 몰고 선셋(Sunset) 대로를 바람처럼 달리곤 했다.”

 

이러한 신세대의 출현으로 미국에서 도덕률의 변화는 불가피해졌다. 당시 인디애나의 중소 도시에서 시행된 한 조사에 따르면, 남자 고등학생 241명과 여고생 350명에게 고등학생들의 90% 이상이 애무파티를 즐긴다고 믿는지를 질문했을 때 절반의 학생이 그렇다고 응답했다. 이처럼 도덕률이 변해감에 따라 이혼률도 꾸준히 증가했다. 1910년에는 100쌍 중 약 9쌍이 이혼한 반면 1928년에는 거의 2배에 가까운 17쌍이 이혼했다.

 

심리학적인 측면에서 볼 때 플래퍼들과 셰이크족들의 자유분방한 모습은 종전 직후의 집단 히스테리가 개인적 히스테리로 전환된 것으로 보인다. 기본적으로 히스테리적인 성격은 성적인 함의를 갖는 표현이다. 왜냐하면 히스테리는 어원(hyster) 자체가 자궁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히스테리적 성격은 대인관계(특히 이성관계)에서 애정욕구가 강하고, 외모에 대한 두드러진 관심을 나타내며, 유창한 언변을 보이고, 리액션이 커지며, 인상에 의지해 막연한 형태의 의사결정을 내리는 경향이 있다. 1920년대 미국 사회를 수놓았던 문화적 현상은 거의 대부분이 이러한 히스테리적 특성을 반영하는 것들이었다.

 

1920년대에는 스포츠가 미국 사회를 사로잡았다. 전후 10년간은 말 그대로 스포츠의 전성시대였다. 1921년 잭 컨즈(Jack Kearns)가 텍스 리카드(Tex Rickard)를 설득해 주최한 뎀프시(Jack Dempsey)와 카르펜티에르(Georges Carpentier)와의 복싱 대전에는 무려 75000명의 관중이 모였다. 이 경기는 미국에서 100만 달러 흥행 시합의 효시가 됐다. 1921년 미국의 월드시리즈는 최고 입장 수입과 최고 관객 수 기록을 경신했다.

 

스포츠에 굶주린 대중들은 대학의 미식축구 시합에도 몰려들었다. 특히 미식축구에 대한 열광은 매우 강렬했는데 5만 명 이상을 수용하는 스타디움도 유명 팀들이 경기를 할 때는 한 자리도 남지 않았다. 한 대학의 선수 연합회는 한 시즌에 입장료로만 100만 달러가 넘는 수입을 올리기도 했다.

 

테니스 클럽의 수도 과거에 비해 비약적으로 증가했고 골프를 즐기는 기업인들의 수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었다. 남성들은 스포츠를 즐기기 위해 펑퍼짐한 짧은 바지에 무릎에는 술을 달고 체크무늬 긴 양말을 신었다. 5000곳이나 되는 골프장이 생겼고 골프 인구는 200만 명을 헤아리는 수준이 됐다. 덕분에 1920년대에는 컨트리클럽이 사교의 중심지로 각광받았다. 컨트리클럽은 골프, 테니스, 및 수영 시설을 갖춘 교외시설을 말한다.

 

히스테리의 문화적 특성이 전형적으로 반영된 행사 중 하나가 1921년 애틀랜틱시티에서 열리기도 했다. 1회 미인대회가 바로 그것이다. 1927년 창설된 미국 영화예술과학아카데미 주관으로 1929년부터 매년 시상된 아카데미상(Academy Award) 역시 히스테리적인 특성과 불가분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미국인들이 즐겼던 취미생활과 유행 상품은 지나치게 빠르게 달아오르고 또 빠르게 식어버린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그만큼 이 시기의 미국인들은 소동에 휩쓸리기 쉬운 히스테리적인 정신 상태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시기의 가장 특징적인 현상 중 하나는 대중들이 별로 대단하지 않은 사건들에 열광하고, 관심을 집중시키며, 끊임없이 대화하는 데 놀라운 수준의 신속함과 일치성을 보여줬다는 점이다. 이 시기에 미국 전역을 수놓은 유명한 사건들 대부분은 전통적인 역사가의 시각에서 본다면 사실상 큰 의미를 갖기 어렵다.

 

예를 들면, 1925년 켄터키 주에서 발생한 동굴조난 사건, 일명 플로이드 콜린스(Floyd Collins) 구출사건은 일반 대중들의 삶과는 직접적인 연관이 없었다. 하지만 이 사건에 대한 대중들의 리액션은 히스테리적인 열정을 나타냈다. 나중에 이 사건은 책과 영화, 뮤지컬로도 제작됐다. 또 대중들의 히스테리적인 리액션을 반영하는 에피소드 중 하나는 앨빈 십렉 켈리(Alvin Shipwreck Kelly)가 볼티모어의 한 깃대에 23 7시간 동안 앉아 있었던 사건이었다. 이때 수천 명의 미국인들이 선 채로 그 현장을 지키기도 했다.

 

당시의 히스테리 문화의 특징은 타블로이드판 신문에 잘 반영돼 있었다. 타블로이드판 신문에는 미국인의 일상적 관심이 스포츠와 섹스, 범죄라는 세 개의 범주로 표현돼 있었다. 이 세 가지 범주는 상징적으로 히스테리적 성격 특징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전후 히스테리적 소비 사회의 탄생

1919년 미국에서는 여성의 참정권을 보장하는 헌법 수정안이 상하원 양원을 모두 통과했다. 그 결과, 21세 이상의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투표에 참여할 수 있게 됐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변화 중 하나는 여성들이 성가신 가사로부터 해방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이때 대규모로 진행된 작은 주택들 및 아파트의 보급은 주부가 가사에 쏟는 시간과 노력을 절약해 줬다. 사회적으로 통조림 판매가 증가했고 조제식품 판매점 수 역시 인구증가율의 3배 속도로 증가했다. 제과점에서 만드는 빵의 양도 1920년대 이후에 비약적으로 증가했다.

 

한때 주부의 가사였던 것들이 주로 집 밖에서 해결되거나 기계의 도움으로 간소화됐다. 1920년대 이후에 세탁소 이용률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으며 가정에서 세탁하는 사람들을 위해 전기세탁기와 전기다리미가 출시됐다. 1924년에 미국 인디애나의 한 소도시에서는 가정의 90%가 전기다리미를 소유하고 있었다. 이러한 변화에 힘입어 여성들은 서서히 일상에서 해방돼자신의 삶을 찾을 수 있게 됐다. 사회적으로 직업을 가진 여성도 크게 증가했다. 예전에는 한정된 분야에만 진출했던 여성들이 1920년대에는 거의 대부분의 사무실을 접수했다. 이처럼 여성들이 다양한 직업 세계에 진출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남편과 부모의 권위는 약화됐다. 미혼 여성들은 가정의 안식처를 떠나 간이 부엌이 딸린 자신들만의 주거공간인 소형 아파트로 이동했다. 그 결과, 도시인들에게 가정은 성역보다는 기숙사 같은 임시거처의 인상을 주는 것에 더 가까워졌다.

 

이러한 사회적 변화와 더불어 미국의 전후 경기는 1923년부터 최고의 호황을 맞이했다. 소비재들의 생산량은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로 급상승했다. 이러한 변화는 1차 세계대전이 국가적 총력전이었던 점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국가적 총력전하에서 과학자들은 집단연구를 진행하게 됐고 그 결과 개인 단위에서는 이룰 수 없는 수많은 과학적 성과를 이뤄냈다. 전시의 이러한 집단적 프로젝트 수행방식은 전후에 기업에도 전수됐고 전후에 생산기술을 비약적으로 증대시키는 배경이 됐다.

 

한편 전국적인 유통 배급망을 갖춘 대형 상품들이 등장해 대량 소비 사회로의 진입이 가능해졌다. 이 무렵 거의 모든 미국인들은 자신들 앞에 경제적 번영의 길이 펼쳐져 있으며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1900∼1940년 미국의 경제동향을 보여주는 다양한 산업지수는 7년에 걸친 전대미문의 풍요로움을 보여준다. 아마도 이 시기의 번영을 수치로 가장 잘 표현해주는 자료가 자동차 대수일 것이다. 1919년에 미국에는 약 677만 대의 승용차가 운행되고 있었는데 10년 후에는 2312만 대로 약 3.4배 증가했다. 1923년 말에 이미 미국의 한 전형적인 도시에서는 세 가정에 두 대꼴로 자동차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리고 1922년부터 라디오가 대유행했다. 1929년에 이르렀을 때 라디오 판매량은 1400%라는 경이적인 증가율을 기록했다. 세 집에 한 대꼴로 보급된 라디오, 전국적인 중계망을 갖춘 거대 방송국, 안테나 숲으로 뒤덮인 임대 아파트는 1920년대 미국 사회의 모습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풍경 중 하나였다.

 

1928년에 대통령 후보였던 허버트 후버(Herbert Clark Hoover)는 후보 수락 연설에서오늘날 미국은 이전의 어느 때보다도, 이전의 어떤 지역에서보다도 가난에 대한 최종적 승리에 근접했다. 아직은 완전하게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지만 우리는 머지않아 빈곤이 이 나라에서 영원히 사라지는 날을 보게 될 것이다라고 선언했다.

 

후버 대통령의 주장처럼 사실 1920년대 미국의 많은 사회-경제적 지표들은 호황기의 특징을 보여준다. 대표적인 예가 바로 다우존스(Dow-Jones)지수다.

 

그림 8 미국의 다우존스지수 변화

 

1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의 다우존스는 단기 급등하는 양상을 나타냈다. (그림 8 A 지점에서 B 지점으로의 이동.) 1920년에서 1950년 사이의 지수 평균선을 고려해 볼 때 엄청나게 단기적으로 급등했음을 알 수 있다.

 

그림 9 치마길이와 미국의 다우존스지수 간 관계

 

<그림 9>에서처럼 치마 길이와 주가지수 간 관계를 고려해 보더라도 1920년대를 호황기로 부르는 데는 주저할 필요가 없어 보인다. 그림이 보여주듯이 호황기에는 여성들의 치마 길이가 짧아지는 반면 불황기에는 여성들의 치마 길이가 길어지는 경향이 있다.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1920년대는 여성들의 치마가 짧아지는 시기에 해당된다.

 

경제적 번영을 단순히 몇 가지 경제 지표가 상승하는 자료만을 가지고 판단할 경우 속단에 빠질 위험성이 있다. 이런 점에서 경제적 번영에 대한 정밀한 평가를 위해서는 심리적 안정감과 관련된 평가지표를 함께 고려할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대중들의 심리적 안정감을 동반하지 않는 형태의 히스테리적 활황 장세는 가까운 미래에 거품이 빠져버렸을 때 그 사회의 경제적 기반 자체가 송두리째 파괴돼 버릴 수 있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경제적 번영 여부를 진단내릴 때는 적절한 심리-사회적 측정기를 활용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하겠다.

 

그림 10 미국의 다우존스지수와 출생률

 

<그림 10> 1920년대 미국의 단기 급등 장세가 전형적인 호황기의 모습이 아니라 미국 대중들의 히스테리적인 사고와 감정이 반영된 결과물이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1930년대 중반 이후에는 다우존스지수의 상승과 연간 출생아 수의 상승 패턴이 일치한다. 하지만 대공황 이전의 1920년대에는 다우존스지수의 상승이 연간 출생아 수의 상승을 동반하지 않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대중의 직관>의 저자 존 캐스티(John L. Casti) 박사에 따르면, 1920년대 중반의 미국인들은 이미 경제 대공황이 일어나기 오래전부터 아기를 갖는 것이 불안하다고 느껴질 정도로 심리적으로 불편한 상태에 있었다.

 

존 캐스티 박사의 주장은 1920년대에 나타난 다우존스지수의 급등이 전형적인 호황기의 모습과는 다른 의미를 갖는 것일 가능성을 시사한다. 다시 말해서, 1920년대의 사회측정기는 주가지수가 1929년까지 최고점을 향해 올라가다가 그 이후에 바닥없는 심연으로 추락할 가능성을 이미 내포하고 있는 형태의 불안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는 것이다.

 

비단 1920년대의 사회측정기 자료를 활용하지 않더라도 대공황이 발생하기 직전까지의 미국 사회의 자본 피라미드는 그 자체로 매우 위태위태한 곡예비행을 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시기에 미국의 세일즈맨과 광고업자는 소비사회의 대행자이자 전도사 역할을 수행했다. 그들은 소비자가 아낌없이, 그리고 끊임없이 무언가를 계속 사도록 부추겼다. 점차 경쟁이 심화됨에 따라 물건을 진열대 위에 전시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양한 방법들이 추가로 동원됐다. 예컨대, 광고업자는 치밀하게 전국 캠페인을 기획하고 갖은 미사여구를 동원함으로써 소비자의 저항을 분쇄해 나갔다. 그 결과, 1920년대 미국의 히스테리적 소비사회를 지탱하는 두 가지 핵심요소가 등장했다.

 

첫째, 월부 구입의 증가였다. 구매력을 소지하고 있는 현금에 맞추는 일은 낡은 시대의 산물로 취급했다. 이런 맥락에서 신용판매는 당연한 일로 간주됐다. 둘째, 주식시장 투기였다. 주가가 급등하는 시기에 사람들이 물건을 구매하는 데 사용했던 돈은 주식 투자로 기대되는 미래의 수익이었다. 이것은 사실상 일종의 도박이나 다를 바 없었다. 하지만 거품이 꺼지기 전까지는 이러한 도박조차도 순조로운 경제활동 같은 인상을 줬다.

 

1920년대 내내, 특히 1925년을 전후로 사실상 미국 도시의 교외 지역에도 투기붐이 일었다. 도시의 규모는 증대됐고 도심 교통은 더욱더 복잡해졌다. 자동차는 교외의 산림지역과 들판들을 기차역 등을 포함한 도시의 반경 안으로 끌어들였다.

 

당시 플로리다에서는 부동산 투기 바람이 불어 심지어 부동산을 산 사람이 그 자리에서 되팔아 투자액의 10배를 남기기도 할 정도였다. 또 마이애미에서는 전국에서 몰려드는 투기꾼들을 맞이하기 위해 중개인들이 부동산 전단지를 들고 길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이 시기에는 미국 전역에 플로리다의 토지로 막대한 돈을 벌었다는 이야기가 널리 유포됐다. 예를 들면, 개발 초기에 구획당 800달러에 팔렸던 마이애미의 상업 중심가가 1924년에 15만 달러에 판매됐다는 식이다. 그리고 플로리다 해변 지역에 땅을 소유하고 있던 어느 변호사는 붐이 일어나기 전에는 24만 달러에 팔라는 제안을 받았는데 그 후 1923년에 80만 달러를 받고 땅을 팔았으나 이듬해에 이 땅은 빌딩 부지로 무려 150만 달러에 팔렸다는 식이었다. 이러한 부동산 과잉 열기로 인해 1925 <마이애미 데일리 뉴스>는 부동산 관련 광고로 인해 신문 역사상 최대 규모인 1부당 504면을 인쇄하기도 했다.

 

1920년대 부동산 붐의 최후 단계는 도시 내 마천루를 쌓는 것이었다. 광란의 고층 건물 붐은 뉴욕의 그랜드센트럴 지구에서 절정에 달했다. 전후 약 10년 사이에 이 지역의 현대식 건물에서 사무실로 일할 수 있는 공간은 열 배로 증가했다. 이러한 시대적 자신감의 결정체는 바로 엠파이어스테이트 빌딩(Empire State Building)이었다. 이 빌딩을 정점(頂點)으로 하는 마천루군은 1920년대 뉴욕의 부동산 투기 붐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림 11 대중들의 무분별한 히스테리적 주식 투자 행태를 풍자하는 그림

 

 

 

1920년대 내내 미국에서는 투기 열풍이 온 나라를 감염시켰다. 그 중심에는 대활황 증시가 있었다. <그림 11>은 대중들의 히스테리 형태의 무분별한 주식투자 모습을 풍자적으로 보여준다.

 

1927년에 주식중개인들이 증권거래원에게 증거금을 치르기 위해 대출한 금액은 1년 사이에 약 80%가 증가했다. 그리고 투자신탁회사도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 잡화상, 전차 운전수, 재봉사, 신문팔이 소년에 이르기까지 모두 주식시장에 참여하는 데 열을 올렸다. 대활황 주식 시장은 전 국민적인 열광거리였다.

 

1920년대에 미국의 대중은 요동치는 증권시장의 매력에 빠져들었다. 그들은 하루아침에 부자가 되고 싶다는 자연스러운 욕망하에서 황금빛 미래를 약속하는 것이면 무엇이든지 믿는 경향이 있었다. 세일즈맨이 소비자에게 신상품을 판매하는 동안 주식 세일즈맨은 투자신탁 주식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 투자신탁은 지주회사의 주식을 소유하고, 지주회사는 은행의 주식을 소유하며, 은행은 지주회사를 통제하는 협력기관을 소유하는 식으로 자본의 피라미드 구조는 상호 간에 끝없이 이어지는 위험한 연결망을 갖추고 있었다.

 

이처럼 위험한 투기 열풍이 지속되던 시기에 도처에서 지혜로 포장된 기이한 주장들이 등장했다. “번영은 쇠퇴하기 마련이라고? 우린 겨우 시작했을 뿐이라네.” 오히려 사람들은 1919년에 GM 주를 100주 구입해서 계속 보유하고 있었더라면 수백만 달러를 벌었을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나아가 뉴저지 주 주지사였던 에드워드 스톡스(Edward C. Stokes)는 미국을 대표하는 모든 인물들은 모두 투기꾼이었다며 망설이지 말고 부자가 되는 길에 동참하라고 선동하기도 했다.

 

이러한 히스테리적 투기 광풍의 시대에는 교회조차도 사업만능풍조를 극복하기 힘겨워했다. <아메리칸 머큐리(American Mercury)>지 보도에 따르면, 뉴욕의 한 교회에서는 교회 건립 자금으로 100달러를 기부한 사람들에게하늘나라 우선주에 대한 투자증명서를 발급하기도 했다. 또 뉴욕의 한 교회는교회로 오십시오. 그리스도를 믿으면 능률도 오릅니다라는 홍보 전단을 만들었다.

 

전후의 정신적 황폐화와 집단 히스테리, 그리고 대공황

엘리엇(T.S. Eliot) 1차 세계대전 후의 피폐해진 정신세계를 상징성 짙은 시어로 노래했다. 20세기 시 중 가장 중요한 시라는 찬사를 받는황무지(The Waste Land)’에서 그는 “4월은 잔인한 달(April is the cruellest month)”이라고 노래했다. 옛날에는 주로 전쟁을 3월에 시작했기에 ‘3(March)’의 어원이전쟁의 신(Mars)’과 관계있다는 점을 고려해 보면 그의 시에서 4월은 상징적으로 전쟁 직후의 시기를 뜻한다고 할 수 있다. 이 시에서 엘리엇은 전후 서구의 황폐한 정신적 상황을 황무지로 형상화해 표현했다. 이처럼 1차 세계대전 이후에 사람들의 정신세계를 사로잡았던 핵심어 중 하나는 바로 환멸이었다.

 

1920년대 미국인들은 한때 자신들에게 의미가 있었던 구시대적 가치들이 1차 세계대전의 종전과 더불어 모두 사라져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더 안 좋은 일은 과학 그 자체에서도 확실성이 사라져버렸다는 점이다. 과거에는 기독교적 세계관을 부정하는 사람도 자연의 질서에 의존할 수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조차 흔들렸다.

 

스콧 피츠제럴드는 1920년대 젊은이들의 모습을모든 슬픈 젊은이들이라고 표현했다. 이런 점에서 <그림 10>에 담겨 있는 대중들의 심리적인 불편감을 통찰력 있는 시인과 소설가들은 정확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저널리스트 월터 리프만(Walter Lippmann)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전쟁 말기 이상주의가 붕괴한 이래로 성년이 된 세대를 기성세대와 구분해주는 가장 좋은 특징은 종교와 부모의 도덕적 계율에 대한 반항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반란에서 스스로 환멸을 느낀다는 점이다. 젊은 남녀가 반항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그러나 확신 없이 슬프게 반항해야 한다는 것, 그리고 옛 확실성만큼이나 새로운 자유도 불신하는 것. 이것이 새로운 점이다.”

 

대다수의 미국인들은 자신들의 정신세계 속에서 환멸의 심리기제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다만 사람들은 삶에 대해 기묘한 형태의 실망감을 느꼈고 그렇기 때문에 자신의 삶에 대해 불평하며 지냈을 뿐이었다. 삶의 방향성을 제공해주는 지표를 상실한 상황 속에서도 오히려 1920년대의 미국인들은 외견상 여전히 즐겁고 활기가 넘치는 것처럼 행동했다. 이들이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것은 자신의 정서적 불안감을 히스테리적으로 억압했기 때문이다.

 

사실 히스테리 성격 자체는 건강한 특성과 병리적인 특성을 모두 나타낼 수 있는 중립적인 표현에 해당된다. 하지만 1920년대 미국 사회를 특징지었던 히스테리적 성격은 내면의 우울감을 강하게 억압하는 동시에 이를 반동형성(reaction formation)의 형태로 표출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 반동형성은 내면의 우울감으로 고통받는 청년이 마치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미래에 대한 장밋빛 기대감 속에서 웃고 즐기는 모습을 보이는 것을 말한다.

 

1차 세계대전 종전 후 1920년대의 미국은 외견상 호황기를 구가하는 것처럼 보였다. 상품은 넘쳐났고 새로운 수준의 소비와 여가생활이 가능했으며 미국은 세계 최강대국으로 자리 잡았다. 또 정부와 기업은 가난의 시대가 끝이 났다고 홍보하는 데 열을 올렸으며 주가는 천정부지로 솟구쳤다.

 

하지만 실상은 <그림 10>이 보여주는 것처럼 주가의 급등 속에 이미 불황의 어두운 그림자가 깊이 드리워진 상태였다. 실질임금상승률이 물가상승률을 따라잡지 못한 상태여서 노동자의 구매력은 감소하고 있었으며 생산시설에 대한 투자 없이 모든 여유자금과 신용거래가 증시를 중심으로만 돌아가고 있었다. 1920년대 호황의 실체는 상환에 문제가 생길 수 있는 형태의 신용구매와 대출에 의존한 거품 경제였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투자가치에 대한 합리적인 검토 없이 마구잡이로 계속됐던 미국인들의 히스테리적 투기 열풍은 1920년대 소비문화의 결정판인 동시에 당시 미국인들의 불안한 심리상태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기도 했다. 손에 쥔 돈 없이 신용이나 앞으로 발생할 것으로 기대되는 이윤에 의지해서 도박 형태의 투자를 하는 풍조는 대공황을 예고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스스로도 어렴풋하게 감지하고 있었던 심리적 불안감(그림 10)에 대해 히스테리적으로 눈을 감고 지낼 뿐이었다.

 

마침내 1929 1029일 미국 역사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이 일어난다. 이날 벌어진 주가의 대폭락을 신문은 이렇게 보도했다. “월가가 망했다.” 드디어 1920년대 다우존스지수의 급등 양상에 숨겨져 있던 심리적 불안감의 정체가 제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결과, 사람들이 확실하다고 믿고 있었던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서류상의 기대 이윤이 일시에 허공으로 사라져버렸다. 또 주식시장에 뛰어들었던 거의 모든 대중들이 자본을 잃었다. 그리고 매일매일 신문들은 우울한 자살 소식들을 보도하기 시작했다.

 

외견상 1차 세계대전과 경제 대공황은 별로 관계가 없어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전후에 파생된 미국인들의 집단 히스테리 반응은 그 둘 사이를 매개하는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시 말해, 1929년의 경제 대공황은 1차 세계대전이 미국인들에게 심어준 심리-사회적 유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다만, 1차 세계대전이 직접적으로 1929년의 경제 대공황을 야기했다는 것은 아니다. 그보다는 전후 미국인들이 경험했던 내부의 정신적 공황이 히스테리적 소비 사회를 구축하게 되고 그 필연적 종착점이 바로 경제대공황이었다는 것이다.

 

1920년대 히스테리적인 투기 열풍 속에서도 이미 심리-사회적 측정기는 대중들의 심리-사회적인 불안감을 민감하게 감지해낼 수 있었다. 하지만 정부도, 기업도, 소비자 자신들도 모두 이를 놓치고 말았다. 그리고 그 대가는 경제적 대공황이었다.

 

1929년의 경제 대공황이 오늘날 한국 사회에 주는 시사점

존 캐스티 박사에 따르면, 미래의 사건을 예상(anticipating)하는 것과 예측(forecasting)하는 것 간에는 미묘한 차이가 있다. 일기예보에서비올 확률이 80%라고 말하듯이 예측은 사건에 대한 확률적인 정보를 제공하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일기예보를 하듯이, 우리가 미래의 경제 상황을 예보(혹은 예측)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 하지만 적절한 측정도구(혹은 지표)를 이용해서 미래의 경제적 상황을 예상하는 것은 가능하다. 이때 중요한 문제는 어떤 심리-사회적인 측정기를 사용할 것인가 하는 점이다. 존 캐스티 박사가 추천하는 예상 방식은 바로사회적 분위기를 정밀하게 측정할 수 있는 심리-사회적인 측정기를 사용하는 것이다.

 

1929년 경제 대공황 때 당시 경제전문가들은 서로 상반되는 전망들을 내놓았다. 미국의 후버 대통령은 1929 10월 말에 주가 대폭락이 진행되던 상황에서도제반 상황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다고 낙관적인 평가를 내렸다. 또 라몬트(Robert P. Lamont) 상무장관은현 상황은 우려할 것이 없다. 올해는 정상적인 해가 될 것이라고 가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다고 말했다. 심지어 그는 한 달 후에 2개월 안에 정상화될 것이라고까지 호언장담했다.

 

정부 인사들의 낙관적 전망과는 대조적으로, 투자상담 고문 로저 밥슨(Roger W. Bobson)은 주가가 폭락하기 한 달 전에 이미 주가가 폭락할 것이라며 미래의 위험을 경고했다. 또 스탠다드 무역상담소는 고객들에게 초보수적 운용전략을 조언하면서 향후 지속적으로 주가가 하락할 것이라고 예측했다. 특히 푸어스(Poor’s)의 주간 사업투자 레터(Weekly Business and Invest Letter)주식의 대환상에 대해 경고하면서 향후 주식시장의 파산을 직접적으로 예고했다.

 

이들의 상반된 경제적 전망 중에서 사회적 분위기를 바탕으로 예상한 것은 쉽게 구분할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분명히 1929년 당시의 미국 경제 상황은 근본적으로 건강하다고 평가하기는 어려웠고 우려할 만한 상황도 다분히 존재했다. 따라서 후버 대통령과 라몬트 상무장관은 사회적인 분위기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은 상태에서 섣부른 전망을 내놓았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도 주가는 반등하기는커녕 낙관적인 전망을 내놓았던 시점의 다우존스지수의 약 20% 수준으로 폭락해 이전보다도 더 큰 낙폭을 보였다.

 

한국 경제에서도 상반된 전망은 늘 존재해 왔다. 올해도 마찬가지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올해 1∼4월 누적 경상흑자는 222억 달러로 지난해 같은 기간보다도 719000만 달러나 더 많았다. 이 때문에 일부 연구기관에서는 이미 작년의 경상수지 흑자규모를 뛰어넘는 대규모 흑자를 예상하는 장밋빛 전망을 내놓기도 했다. 하지만 현재 한국 경제에서는 수출기업들이 막대한 이익을 올렸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대규모 흑자가 기업의 투자 확대 및 내수 활성화로는 연결되지 않고 있어 국민 체감과는 거리가 먼 상황이다. 바로 이러한 점 때문에 하반기 한국 경제에 대한 비관적인 전망도 공공연하게 흘러나오고 있다.

 

이러한 상반된 경제 전망들 중에서 존 캐스티 박사가 지적한 사회적인 분위기를 바탕으로 미래 한국의 경제 상황을 예상하고 있는 것은 후자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은 정부와 기업, 개인 모두 현재의 한국 경제 상황과 관련해서는 후자의 목소리에 귀 기울여야 할 때라고 할 수 있다.

 

경제는 심리라고 말하면서도 이에 가장 민감해야 할 기업인들은 정작 얼마나심리-사회적 경제측정 도구를 활용하고 불안의 징후를 감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100년 전의 대공황 직전 미국 사회 분위기가 현재 세계 분위기, 은 한국 사회의 심리상태와 유사하다고 끼워 맞춰 주장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그러나 인간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와 흐름은 언제나 유사한 형태로 반복된다. 그 지점에 현대인들과 지금의 기업인들이 주목해야 할 교훈과 시사점이 반드시 존재한다. 이제 각자의 상황에서 그 교훈을 찾아내는 건 독자들의 몫이다.

 

고영건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 elip@korea.ac.kr

필자는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삼성병원 정신과 임상심리레지던트를 지냈고 한국임상심리학회 임상심리전문가와 한국건강심리학회 건강심리전문가 자격을 따기도 했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에서 박사 후 과정을 했으며 현재 고려대 심리학과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 고영건 고영건 | 고려대 심리학부 교수

    필자는 고려대 심리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서울삼성병원 정신과 임상심리 레지던트를 지냈고 한국임상심리학회 임상심리 전문가와 한국건강심리학회 건강심리 전문가 자격을 취득했다. 미국 예일대 심리학과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쳤다. 한국임상심리학회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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