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솜 전투의 교훈

기술맹신의 시대, 현실 외면한 전술 탁상 위 매뉴얼이 병사를 죽였다

남보람 | 157호 (2014년 7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 전략

1·2차 격전에서 100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낸 솜(Somme)전투는 1차 세계대전 역사상 최악의 비극으로 꼽힌다. 장교단은 과학과 이성의 발전을 맹신하고 낙관했으며 프러시아의 두 차례의 철도를 이용한 전투승리 방식을 따와 전략을 만들었다. 역사상 최초의대전략을 만들고 급격하게 시행했지만 세부적인 작전과 전투운용에서는 예전의 교리를 그대로 답습했다. 맹목적벤치마킹과 이성과 과학에 대한 맹신과 낙관, 그리고인간이 빠진 전략은 처절한 실패로 기록됐다. 오늘날 기업이 이 전투로부터 얻어야 하는 교훈이다. 

 

필자 주

이 글은 <전쟁이론과 군사교리(서울 : 지문당, 남보람, 2011)>의 일부, ‘군사교리 중심 접근법에 의한 전쟁사 연구를 참조해 재작성한 것임을 밝힙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 일렬로 진군하는 프랑스군

 

1차 세계대전 최악의 비극: (Somme) 전투1

1916 71일 오전 730. 손목시계를 들여다보던 수백 명의 소대장들은 일제히 호루라기를 불었다. 사전 브리핑에서 공유한 계획대로였다. 영국 제3, 4군의 병사들은 일제히 참호에서 나와 대열을 정비하기 시작했다. 정렬을 마친 영국군은 독일군이 방어하고 있는 곳을 향해 그들의 교범에 적힌 대로 똑바로 선 채 서서히 전진해 나갔다. 영국군의 공격 교리 그대로였다. 영국군 제4군의 <사단 공격훈련을 위한 전투 전술>에는공격부대는 일정한 속도로 줄지어 전진해야 하며 각 열은 선행 열에 새로운 추진력을 공급해야 한다고 쓰여 있었다. 이 무모한 공격 정신의 유래는 프랑스였다. 영국군이 스스로 공격 교리를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1915년부터다. 그 이전까지 영국군은 프랑스의 교리를 가져다 거의 그대로 썼다. 1년 만에 모든 교리가 바뀔 순 없었다. 프랑스군의 교리는 말 그대로 공격 그 자체였다. 프랑스의 포슈(Ferdinand Foch) 장군은전쟁을 한다는 것은 항상 공격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강조했을 정도였다.

 

아무리 그래도 이 공격은 정말로 무모했다. 도대체 영국군 장교들은 무슨 생각을 했던 것일까? 영국군은 공격 개시 전에 실시된 강력한 포병사격에 의해 독일군의 전투력이 대부분 상실될 것이라 판단했다. 무인지경이 된 평지를 진격해 상대방의 진지를 차지하고 나면 공격이 끝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 이전에 독일군은 연합국 군대보다 현실적이고 균형 잡힌 군사교리로 무장하고 있었다. 특히 전투의 현장에 있는 지휘자들에게 큰 융통성과 독립성을 보장함으로써 변화하는 상황과 위협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는 준비를 갖춘 상태였다.2 또한 독일군은 전쟁 수행 전 반드시 야전축성이나 참호구축과 같은 실전 훈련을 평소에 실시하고 있었다.3

 

따라서 연합국 군대가 공격전에 거의 300만 발의 포탄을 독일군 참호 위에 퍼부었지만 독일군은 일사불란한 지휘 아래 9m가 넘는 깊이의 대피호 속에서 거의완벽하게보호받고 있었다.4 독일군은 영국군의 포격이 후방으로 넘어가자 일제히 준비된 참호로 나와 새로 전장에 배치된 기관총을 참호 위에 올려놓은 채 거의 망가지지 않은 철조망 지대로 영국군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독일군의 기관총 한 정에 1개 중대 병력이 괴멸(壞滅)되는 상황이 반복됐다. 하지만 영국군은 공격 전술을 바꾸거나 상황을 타개할 만한 새로운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

 

결과는 끔찍한 대학살이었다. 공격 첫날 영국군 제29사단 선봉의 중대들은 공격개시선에서 50m도 전진하지 못하고 붕괴됐다. 피해는 계속해서 커져갔다. 전쟁지도 체계의 궤멸(潰滅)을 피하기 위해서라도 무언가 난국을 타개할 전환적 조치가 필요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교범에 쓰인 대로 더 많은 부대를 더 빨리 투입하는 것이 전쟁 지휘부의 유일한 결정이었다.

 

이것이 솜 전투에서만의 상황이었을까? 1914 11, 영국 원정군 7개 사단의 사상자는 9만 명에 달했다. 동원된 병력의 100%를 초과한 수치였다.5 전장에서 장병들이 사망하는 속도가 본국으로부터 새로운 병력을 투입하는 그것을 앞질렀다는 얘기다. 사상자는 줄지 않고 계속 늘어갔다. 그러나 전쟁과 관련된 어떤 의미 있는 결정도 이뤄지지 않았다. 1917년 영국군의 하루 평균 희생자는 2500명에 달했다.6

 

후일, 프랑스 총사령관을 지낸 조프르(Joseph Joffre) 장군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문서화된 어떤 작전 계획도 없었다. (…) 단호한 결심 외에 어떤 사전 계획도 갖고 있지 않았다.”7

 

물론 연합국 군대는 당대에 유행하던 방식의 정밀한 전쟁 계획을 갖추고 있었다. 온갖 직선과 곡선, 거리와 시간과 고도를 검고 푸르고 붉은 색으로 표현한 복잡한 작전 계획이 있었다. 조프르 장군이어떤 계획도, 어떤 사전 계획도 없었다고 한 것이 문자 그대로 아무 계획도 없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적 위협에 대한 잘못된 가정과 낙관적인 전제들, 전장 환경에 부합하지 않는 부적절한 군사교리에 대한 반성과 성찰의 표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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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보람

    남보람

    -(현) 육군본부 육군군사연구소 세계전쟁사 연구원
    -2011~2016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6.25전쟁사 연구원
    -2012 워싱턴 미국립문서관리청 파견연구원
    -2013 워싱턴 미 육군군사연구소 교환연구원
    -2016 뉴욕 유엔아카이브 파견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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