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략’의 탄생”
Article at a Glance – 전략, 혁신
인간의 역사는 도구 발달의 역사다. 인간이 도구를 발명하고, 도구가 사회구조와 인간의 생각과 가치관까지도 바꾼다. 이런 도식 자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영화 ‘모던타임즈’에서 찰리 채플린은 기계가 인간을 지배하는 사회, 인정사정없는 자동기계에 의해 인간다움이 소멸돼 가는 삶을 자극적으로 묘사했다. 그러나 모던타임즈는 기계의 소음과 검은 연기를 통해 인간다움을 얻는 것도 많다는 사실은 간과했다. 인간다움과 기계(도구)는 얻는 것과 잃는 것이 항상 공존한다. 이 진리는 인간이 신석기를 발명했을 때부터 그랬다. 장자크 루소는 신석기 시대, 인간이 땅에 경계선을 긋기 시작하면서부터 가진 자와 없는 자가 나뉘어 지고 부와 권력의 차별이 시작됐다고 부르짖었다. 하지만 가장 인간다운 장면, 가족이 저녁 식탁에 둘러 앉아 음식을 나누고, 어두운 조명 아래서 아버지는 내일 사용할 농기구를 다듬고 어머니는 잠든 아이를 바라보면서 반죽을 하거나 옷을 꿰매는 원초적인 정경도 신석기의 선물이라는 사실은 간과한다.
도구의 발달은 변화를 요구한다. 안타깝게도 그 요구는 늘 이중적이다. 긍정적 요인과 부정적 요인이 공존한다. 인간 역시 이중적이다. 변화가 주는 욕구와 편안함은 삼키려 하면서 과거의 삶과 익숙함에 안주하려고 한다. 이 모순의 간극이 커질 때 개인이든 사회든 심각한 위기와 파괴에 직면한다. 이 발전의 법칙 역시 인류 역사가 시작된 이래 존재했다. 그러나 산업화는 발전의 속도는 몇 백, 몇 만 배 이상으로 높이고 대응과 변화의 시간은 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은 인류 역사상 그 간극이 주는 파괴의 피해가 가장 크고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서부전선에서만 1000만 명이 전사했다. 영국, 프랑스, 독일은 15세에서 50세 사이의 성인 남자 중 55% 정도가 참전했고 그중 25%가 전사했다. ‘모던타임즈’와 사회주의 혁명은 그 충격의 산물이다. 인류는 산업화 시대를 경영하기 위한 교훈도 비로소 얻었다.
대전략의 시대
1차 세계대전의 상징은 참호전이다. 독일과 프랑스 국경에 10중이 넘는 참호망을 깔고 연합군과 독일군은 4년 동안 살육전을 벌였다. 참호 생활은 끔찍했다. 하늘에서 내린 비와 땅에서 솟아나는 지하수로 바닥은 물이 흥건했다. 땅은 차진 진흙으로 끈적거렸다. 병사들은 물과 흙이 범벅이 된 상태로 살아야 했다. 진흙에 발이 달라붙어 1㎞를 전진하는 데 몇 시간이 걸리기도 했다. 포탄보다 무서운 것이 포탄구덩이였다. 빗물이 고인 구덩이는 개미지옥같이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 됐다. 그곳에 미끄러지면 익사했다. 시체로 배를 불려 고양이만큼 비대해진 쥐들이 바글거리고 아무리 빨고 살균을 해도 군복에서는 이와 벼룩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 끔찍한 삶이 4년 동안 이어졌다. 하지만 이 전쟁이 6주 만에 끝날 뻔도 했다. 독일의 슐리펜 계획이 성공 일보직전에 실패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슐리펜 계획은 정면의 독일군이 프랑스군을 독불 국경에 붙들어 놓고 그 사이에 주력이 프랑스 북쪽의 벨기에로 우회해 프랑스군의 뒤로 돌아 들어가 단숨에 파리를 함락하는 것이었다. 이 계획은 작전도만 보면 단순하다. 우회기동을 이용한 측면기습은 태고 이래 ‘전술의 고전’이었다. 하지만 200만의 예비군을 동원해 1주도 안 되는 사이에 전선에 배치하고 병사 1인당 60개가 넘는 보급품이 필요한 현대 보병을 400㎞ 이상 진격시키며 보급을 유지해야 한다면 이 전술의 의미는 전혀 달라진다.
이것을 가능하게 한 것이 철도였다. 철도로 군대를 이동시키는 전술은 남북전쟁에서 처음 시도됐다. 이것을 전략적으로 승화시킨 전투가 1866년 7월3일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군 사이에 벌어진 쾨니히그래츠 전투였다. 프로이센은 25만의 군대를 세 방향으로 분리해 쾨니히그래츠로 진격시켰다. 전투 당일 오스트리아군은 승리를 자신했다. 전선의 프로이센군은 12만 명, 오스트리아군은 20만 명이었다. 가장 멀리 우회한 9만7000명의 프로이센 제2야전군은 감감 무소식이었다. 오스트리아군 기병은 쾨니히그래츠 반경 수십㎞를 철저히 정찰했는데 전투 참여가 가능한 범주 내에서 접근해 오는 원군은 없다고 확신했다.
프로이센군이 패배하기 직전 제2야전군이 나타났다. 오스트리아군은 비명을 질렀다. “저들이 어디서 나타난거야?” 프로이센은 철도를 이용해 오스트리아군의 예상 범위를 훨씬 넘는 속도로 이동했던 것이다.
서기 1세기 중국 신나라 황제 왕망(?∼23)은 30만 명을 투입해 흉노를 정벌할 계획을 세운다. 작전 기한은 약 3개월이었다. 하지만 병력을 전투 개시선에 배치하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이 사정은 18세기까지도 달라지지 않았다. 동양에서는 50만, 100만이라는 병력을 쉽게 이야기하지만 그것은 총동원병력을 과장해서 이야기하는 것이다. 병참과 이동속도 때문에 하나의 전투에 10만 명을 투입하기도 불가능했고 투입한다고 해도 장기간의 배치기간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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