빅데이터와 전략
서브프라임 사태의 그림자가 미국 경제를 뒤집기 시작하기 직전인 2007년 초까지만 해도 경제학자들은 당시의 경기 불안정이 지난 수년간 이어온 경기 상승세로 인한 단순 조정인지, 초대형 경제 위기의 서막인지 명확히 판단하지 못했다. 2007년 4월, 미국의 2위 서브프라임 모기지 대출회사인 뉴샌츄리 파이낸셜이 파산을 선언하자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업계와 학계가 깨달았지만 이미 너무 늦은 상황이었다. 놀라운 사실은 대형 모기지 회사가 파산에 이르는 최악의 상황이 터지기 직전까지도 거대 투자은행을 비롯한 금융권 모두가 서브프라임 관련 투자규모를 경쟁적으로 확대해갔다는 점이다. 이쯤 되면 상황 판단을 못한 게 아니라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1
불확실성의 시대다. 서브프라임과 같은 경제 위기, 기후 변화로 인한 기상의 불확실성과 그로 인한 원자재 및 농수산물 가격의 변동, 급변하는 사회 정치적 상황, 기술 고도화 시대에서 새로운 기술의 혁신이 가져 온 파괴적 창조와 그 미명 아래 벌어지는 수많은 기업들의 파산과 신사업의 부상, 예측할 수 없는 미래와 불확실성이 일상화된 시대다.
과연 우리는 이런 불확실성에 대처할 수 있을까? 다시 서브프라임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미국 경제는 3조 달러의 도박을 하고 있습니다!”
미국 부동산 경기가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초활황의 정점에 이르렀던 2005년 당시 <뉴욕타임스> 토요일 부동산 면에 데이비드 레온하츠 기자가 쓴 기사의 제목이다.2 그는 이 기사에서 2005년 부동산 경기가 왜 활황을 이어가고 있는지 서브프라임 모기지의 원리를 통해 명료하게 설명했다. 한편으로는 서브프라임 구조가 가진 치명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정부의 저금리 정책이 종료되는 순간 부동산 시장과 관련 금융시장에 큰 재앙이 닥칠 수 있다고 예견했다. 서브프라임이라는 불투명한 시스템 사이에 숨겨진 인간의 탐욕에 대한 설명만 빠졌을 뿐 서브프라임 사태 이후 경제학자들과 관련 전문가들이 분석한 사후 진단과 문제점을 이미 2년 전에 간파하고 있었다. 그렇다면 레온하츠 기자는 우리가 보지 못한 것을 볼 수 있는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일까?
사실 돌아보면 그의 기사가 그리 놀라운 것은 아니다. 그가 예일대 수학과 출신이라는 점에서 독특한 경력을 갖고 있긴 하지만 이것만으로 전문가나 학자들이 파악하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을 홀로 알아차릴 만큼 출중했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다. 그의 기사를 읽어보면 그는 단지 다양한 사실을 근거로 당시 부동산 시장의 급팽창 원인을 차근차근 설명했을 뿐이다. 부동산 시장 팽창의 원인을 파악하고 나면 그 문제점을 도출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사실 서브프라임 사태 이전의 신문이나 경제 분석을 뒤져보면 서브프라임이라는 모기지의 위험성에 대한 경고를 예상보다 훨씬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자산규모로 미국 내 4위 은행인 웰스파고(Wells Fargo & Company) 역시 서브프라임 사태의 위험을 예견하고 대처한 대표적인 기업이다. 2000년 중반 거의 모든 금융권에서 서브프라임 관련 서비스와 투자로 소위 눈먼 돈 잔치를 할 때 웰스파고는 서브프라임이라는 상품의 위험성과 불투명성을 간파하고 보수적으로 대응했다. 실제로 2006년 웰스파고의 주택 대출에서 서브프라임 대출은 1.6%에 불과했다.3 덕분에 금융위기로 금융권이 초토화된 당시 금융권에서 유일하게 S&P에서 AAA 신용등급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는 항상 의사결정의 기로에 선다. 하지만 판단의 상당 부분은 사실적 기대보다 감정과 기대치가 뒤죽박죽 혼합된 상태에서 이뤄진다. 2008년 세계 5위 핸드폰 제조업체로 군림하던 국내 모 전자회사에서 스마트폰 전략 로드맵을 짜기 위해 글로벌 컨설팅업체에 시장 분석을 의뢰했던 일화가 유명하다. 이 컨설팅사는 스마트폰을 일부 마니아와 전문가들만 사용할 뿐 대중은 피처폰을 계속 원할 것이라는 보고서를 냈다. 보고서를 바탕으로 이 전자회사는 스마트폰에 대한 적극적인 투자를 보류했고 1년 후 핸드폰 시장의 패러다임이 완전히 바뀌면서 상당한 타격을 받았다. 재미있는 것은 당시 이 보고서를 작성한 컨설팅사의 팀원들 중 아무도 스마트폰을 사용해본 적이 없다는 이야기가 업계에 전해진다는 점이다. 이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해볼 수는 없다. 하지만 당시 국내 핸드폰 제조업체뿐만 아니라 세계 핸드폰 시장의 강자들도 스마트폰으로 발생할 혁신과 변화의 바람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2007년 이후 아이폰이 선풍적인 인기를 바탕으로 전 세계 핸드폰 시장을 잠식할 때도 핸드폰 시장의 1위였던 노키아가 팔짱만 끼고 이를 태풍의 눈으로만 취급했던 것 또한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것이야말로 분석을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하지 않았다는 표현이 맞을 것 같다. 스마트폰으로의 패러다임 전환은 2008년 이미 상당히 진행됐고 이를 알려주는 시그널이 도처에 깔려 있었지만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고 외면했다고 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전략이라고 하면 디테일한 분석과는 거리가 멀고 먼 미래를 통찰하는 혜안 정도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다. 이런 맥락에서 우수한 직관력이 전략적 사고의 주 능력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즉 ‘전략적 사고=직관력’이라는 등식이 통용되고 직관력은 자료를 바탕으로 검증 및 분석하는 분석적 사고와는 상반된 의사결정 방식으로 이해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자연주의적 의사결정(naturalistic decision making)>의 저자인 게리 클라인(Gary A. Klein)은 저서 4 에서 직관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추상적 혜안이 아니라 경험과 고도의 사고가 복합해 결정되는 매우 복잡한 의사결정 과정으로 설명한다. 신속한 판단을 내려야 하는 상황에서의 직관일수록 그 즉시성 때문에 복잡한 분석과정을 뛰어넘은 ‘감’으로 평가되지만 사실 직관이란 두뇌 내 축적된 경험인 데이터와 순간적인 사고력으로 진행된 결과물이다. 이처럼 직관이 사실의 경험에 의한 의사결정이라면 결국 직관 역시 사실에 근거한 프로세스라고 할 수 있다. 과거 인간의 직관은 맹수로부터 피해야 하는 위험한 상황에 순간적인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하는 과정에서 발달됐다. 그리고 이런 직관은 현대 컴퓨팅 기술과 폭발적으로 쌓이는 데이터를 통해 한 단계 업그레이드된 빅데이터 시대의 직관으로 진화하고 있다. 즉 인간 머리 안에 있는 경험이라는 데이터에만 의존했던 과거의 직관이 이제는 경험하지 않은 방대한 외부 데이터와 컴퓨팅 속도가 결합된 빅데이터 시대의 직관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빅데이터 직관의 의미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예가 바로 게리 클라인의 조산아(이른둥이) 병동에서의 연구다. 게리 클라인은 연구실이 아닌 소방화재 현장, 걸프전 전투 현장, 응급실 등 긴박하게 전개되는 실제 상황에서 사람의 직관적 의사결정 관련 실험 및 분석을 시도하는 학자로 유명하다. 그는 조산아 병동 중환자실의 간호사들 중 경험이 많은 몇몇이 조산아가 어떤 위험에 빠지기 전에 이상 징후를 사전에 파악하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 간호사들은 인터뷰에서 위험한 조산아를 미리 알아채는 능력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했다. 단지 육감 혹은 아이들의 병세를 파악할 수 있는 타고난 능력이 있겠거니 하는 추측 등으로 대답했을 뿐이다. 그러나 게리 클라인은 수년 동안 조산실에서 일하면서 자신들만의 경험이 축적됐고 자신도 모르게 이런 정보가 순간적인 사고력과 어우러져 우수한 판단능력을 지니게 됐다고 분석했다. 이 같은 다년간의 경험과 사고력은 간호사 개개인에게 의지할 수밖에 없고 다른 간호사에게 물리적으로 전수하기 어렵다는 것도 설명했다.
놀라운 직관력은 빅데이터에 의해 새롭게 창조되고 있다. 온타리오 대학병원의 조산아 병동은 온타리오 기술대학의 케럴린 맥그리거(Carolyn McGregor) 박사와 IBM이 공동 개발한 빅데이터 솔루션을 도입해 신생아의 모든 생체 시그널을 실시간으로 모니터링하고 위험 징후를 사전 포착한다. 아기들의 생체 패턴을 바탕으로 일반 상황과 위험한 상황을 구별하는 기계학습 알고리즘(machine learning algorithm)을 통해 우수한 간호사의 직관력을 재생산하는 것이다.5 노력한 간호사의 직관력과 기계적인 분석 시스템에는 각각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직관력이 대용량 데이터와 빅데이터 분석 기술을 통해 새로 창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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