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EIBS Case Study
“자동차에 미쳤다”
집념의 中 지리, 볼보를 삼키다
편집자주
이 글은 중국유럽국제경영대학원(CEIBS)의 케이스스터디 ‘Geely-Volvo: Road to a Cross-Country Marriage’를 발췌 번역한 것입니다.
본문
2002년 초, 중국의 자동차 제조업체 지리그룹의 설립자 리슈푸(李书福)는 사내 회의에서 북유럽 최대 자동차 생산업체 볼보를 사들이자는 대담한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2008년의 금융위기는 리슈푸에게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를 선사했다. 리슈푸의 입장에서 보면 지리의 볼보 인수는 ‘세계적인 영화배우와 중국 농민의 결혼’에 견줄 만한 일이었다. 리슈푸는 볼보가 중국의 자동차 산업을 세계 무대에 당당하게 세워 놓기 위해 필요한 혁신과 브랜드, 기술을 제공해 주는 매개체가 될 것이라고 판단했다.
문제는 볼보 직원들이, 그리고 지리 직원들이 자신의 아이디어를 진지하게 받아들이도록 만드는 것이었다. 대륙을 넘나드는 복잡한 거래를 성사시키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리슈푸는 이 일을 해냈다.
중국의 자동차 산업
중국의 자동차 제조 부문은 오랫동안 대형 국영기업들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그중에서도 중국제일자동차, 둥펑자동차, 상하이자동차가 시장을 장악하고 있었다. 제일, 둥펑, 상하이 등 중국의 3대 자동차 제조업체들은 브랜딩과 기술의 측면에서 협력관계에 놓여 있는 파트너 기업에 주로 의존하는 편이었다. 예컨대, 상하이자동차는 GM 및 폴크스바겐(Volkswagen), 중국제일자동차는 폴크스바겐 과 도요타(Toyota), 둥펑은 푸조(Peugeot) 및 혼다(Honda)와 각각 협력했다.
1990년대 말이 되자 지리, 비야디(BYD) 등 민간 소유의 자동차 제조업체가 중국의 자동차 시장에 등장해 경쟁 구도의 근본적인 변화를 야기했다. 자동차 시장의 후발주자였던 지리와 비야디는 대담한 모방, 저렴한 가격, 저가를 앞세운 시장 포지셔닝 등을 통해 단기간 내에 제품가격을 낮추고 생산 능력을 확대했다. 자동차 가격이 내려가자 과거에는 자동차를 살 엄두를 내지 못했던 소비자들이 관심을 갖기 시작했고 수요가 증가했다. 2009년에는 중국 국내 시장에서 1300만 대가 넘는 자동차가 판매되는 등 중국이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최대 시장으로 발돋움했다.
2010년 상반기에는 중국의 10대 자동차 제조업체는 무려 776만 대의 자동차를 판매해 전체 시장의 86%를 차지했다. 중국 현지 브랜드들은 중저가 시장을 집중 공략한 반면, 중국 회사와 외국 회사가 공동 설립한 합작기업들은 고가 브랜드에 주력했다.
지리의 성장
1984년, 21세의 리슈푸는 중국 저장성에서 동업자와 함께 냉장고 부품을 생산하는 소규모 공장을 차렸다. 리슈푸는 냉장고 증발기에 들어가는 핵심 기술을 확보하기 위해 상하이에서 전문가를 초빙하는 노력을 기울였고 그 결과 리슈푸가 운영하는 공장은 저장성에서 가장 뛰어난 냉장고 부품 공급업체로 발돋움했다. 1986년, 리슈푸는 베이지화라는 냉장고 공장을 설립했다. 당시 냉장고 시장에서 수요가 공급을 훨씬 초과했기 때문에 리슈푸는 짧은 기간 내에 엄청난 자본을 축적할 수 있었다. 하지만 1989년이 되자 중국 정부는 지정된 생산업체에만 냉장고를 생산할 수 있도록 허가를 내줬다. 베이지화는 정부로부터 냉장고 생산 허가를 받지 못했고 리슈푸는 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리슈푸와 같이 허가를 받지 못한 공장들 중 일부는 정부 정책을 외면한 채 계속 냉장고를 생산했고 이들은 냉장고 시장의 주요 업체로 성장했다.
이 같은 상황을 지켜본 리슈푸는 다른 사람들이 불가능하다고 여기는 것을 시도할 때에도 결코 포기하는 법 없이 끝까지 밀고 나가야 겠다고 생각했다. 1993년, 오토바이 시장이 호황을 누린다는 사실을 깨달은 리슈푸는 국영 오토바이 회사를 방문해 오토바이 바퀴를 공급하겠다고 제안했다. 제안을 거절당한 리슈푸는 가족의 반대를 무릅쓰고 직접 오토바이를 생산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정부의 허가를 얻기 위해 우체국에 오토바이를 공급하는 국영 공장을 매입했다. 그리고 공장을 인수한 지 단 7개월 만에 오토바이 커버의 주형을 개발했다. 리슈푸가 이 방법을 생각해내기 전에는 중국의 그 어떤 오토바이 공장도 주형을 만들어 오토바이를 생산하는 방법을 생각하지 못했다. 그는 4행정 스쿠터 엔진도 개발했다. 지리는 곧 일본과 대만 출신 경쟁업체들을 제치고 중국 내 스쿠터 판매 부문에서 선두를 달리고 32개 국가 및 지역에 스쿠터를 수출하기에 이르렀다. 1999년 한 해 동안 지리는 총 43만 대의 스쿠터를 판매했다. 이는 15억 위안에 달하는 물량이었다.
1997년, 리슈푸는 국영기업들이 장악하고 있는 탓에 민간업자들의 접근이 불가능해 보였던 승용차 시장에 진출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리슈푸의 형제들과 동료들이 강력한 반대 의사를 표시한 것은 당연지사였다.
리슈푸는 쓰촨성 더양에 위치한 교도소 소유의 자동차 공장을 매입할 수 있다는 정보를 얻은 후 당장 지분을 사들였다. 하지만 더양 공장은 세단이 아니라 2개의 문이 달린 쿠페형 자동차만 생산하도록 허가를 받은 공장이었다. 결국 리슈푸는 저장성 타이저우 린하이시에 ‘불법으로’ 세단 공장을 짓기로 했다. 1998년, 지리가 생산한 첫 번째 자동차 ‘하오킹(‘열정’이라는 뜻의 중국어)’이 출시됐다. 리슈푸는 100개의 테이블이 들어가는 대형 연회를 준비하고 각계각층에 초대장을 보냈다. 하지만 연회에 모습을 드러낸 사람은 소수에 불과했다. 2000년까지도 세단 생산 허가를 얻지 못했던 지리는 닝보에 신설 공장을 지으면서 오토바이 생산을 위한 공장이라고 거짓말을 해야만 했다.
리슈푸는 정부의 허가를 얻기 위해 베이징과 항저우를 자주 오가며 중앙 정부와 저장성 지방 정부 내의 여러 부처를 상대로 로비를 벌였다. 세단을 생산할 수 있도록 허가를 해달라는 요청을 번번이 묵살당한 리슈푸는 ‘자동차에 미친 사람’이라는 별명을 얻기에 이르렀다. 이후, 리슈푸는 언론의 힘을 이용해 ‘제게 실패할 기회를 주세요’라는 메시지를 전달했고 자동차 업계의 수많은 전문가들이 리슈푸의 호소에 지지를 보냈다. 자동차 업계 전문가들은 지리와 같은 민간기업들도 공정한 대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2001년 말, 지리는 국가경제무역위원회가 발표하는 공인 자동차 목록에 여섯 번째로 이름을 올렸다. 더 이상 허가 없이 자동차를 생산할 필요가 없어졌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던 날, 리슈푸와 경영팀, 수많은 직원들은 밤을 새우며 정부의 공식 허가를 자축했다.
저가 자동차 시장에 엄청난 잠재력이 있다는 사실을 발견한 리슈푸는 ‘누구든지 구매할 수 있는 차’를 만들고 양배추처럼 싼 값에 자동차를 판매’하기로 결정했다. 설립 초기, 지리는 마치 소규모 작업장처럼 인부들의 손재주, 망치, 접착제를 이용해 4만 위안 이하의 자동차를 생산했다. 자동차 자체는 형편없었지만 저렴한 가격 덕에 지리는 시장점유율을 확보할 수 있었다. 하지만 품질에 대한 의구심, 혼란스러운 경영, 충분치 않은 현금 흐름 등 많은 문제가 있었다. 2002년, 리슈푸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당시 저장성 세무국의 수석 회계사로 일하고 있던 쉬강을 지리 사장으로 임명했다. 리슈푸는 신임 사장을 존중하는 마음을 표현하기 위해 자신의 집무실을 쉬강에게 내주기까지 했다. 쉬강은 정부와의 관계를 개선하고 경영진을 구조조정하고 은행에서 돈을 빌릴 수 있도록 리슈푸에게 도움을 줬다. 리슈푸와 쉬강은 1000명이 넘는 중간급 관리자를 채용하고 고위급 경영진 중 3분의 2를 교체했다. 리슈푸의 친인척과 고위급 직원의 90%가 해고됐다.
2002년 8월, 지리는 상하이 지에스다를 인수한 후 상하이 메이플로 사명을 변경했다. 중가 및 고가의 자동차를 생산하는 메이플은 독립적으로 운영됐다.
2007년, 지리는 두 번째 변화를 꾀하며 자동차 부품 가격을 낮추도록 공급업체들에 압박을 가했다. 하지만 리슈푸는 저가 정책이 지리를 덫에 빠뜨리고 ‘저가-낮은 품질-좀 더 낮은 가격-좀 더 낮은 품질’로 연결되는 악순환의 고리를 만든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상황을 바로잡기 위해 리슈푸는 선양 진베이 자동차의 CTO 자오푸취안을 영입했다. 그런 다음 핵심 기술에 엄청난 금액의 자본을 쏟아부으며 CCVT 엔진, BMBS 타이어 펑크 경고 시스템 등 기술 개발에 나섰다. 또한 지리는 ‘가장 안전하고, 가장 친환경적이며, 가장 에너지 효율적인 차를 생산하고 지리 자동차가 전 세계에서 굴러 다니도록 만드는 것’으로 자사의 슬로건을 변경했다. 2007년 5월, 지리는 기존 장비와 형틀을 제거하고 중가/고가 자동차 시장에 진입했다. 지리는 오래된 공장을 허물고 9개에 달하는 구형 모델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지리는 2008년 4월에 열린 베이징 모터쇼에서 중가/고가 승용차, MPV(다목적 차량), SUV(스포츠형 다목적 차량), 스포츠카를 비롯해 새로 설계한 23종의 자동차를 선보였다. 뿐만 아니라 지리는 모터쇼에서 전기 자동차, 하이브리드 자동차, 포름알데히드 엔진을 선보였다. 2007년 18만 대에 불과했던 지리의 자동차 판매량은 2009년에 32만 대로 늘어났다. 하지만 지리가 생산한 고가 자동차는 시장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했다.
볼보를 노리다
2007∼2008년 무렵, 미국에서 금융위기가 발발했고 자동차 산업은 경기침체로 엄청난 손해를 입었다. 확장을 꿈꾸는 리슈푸의 입장에서는 이런 상황이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문화적인 부분에서부터 규제, 지적재산권 문제 해결에 이르기까지 넘어야 할 장애물이 많았다.
지리는 그때까지도 메이저급 자동차 회사로 여겨지지 않았다. 2007년, 리슈푸는 한 PR 회사를 통해 미국에 위치한 포드(Ford) 본사에 볼보를 인수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 서신을 발송했다. 이 서신은 거의 무시당했다. 2008년 초, 리슈푸는 디트로이트 모터쇼에서 포드의 CFO와 만남을 가졌다. 하지만 회의는 리슈푸의 기대와 달리 원활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지리가 작은 회사인 탓에 전혀 매력을 느끼지 못한 포드는 ‘돌아가서 가능성을 살펴보겠다’고 이야기했을 뿐이다. (그나마도 예의상 남긴 발언에 불과했다.)
하지만 리슈푸는 굴하지 않고 자동차 업계에서 가장 명망 높은 투자은행 로스차일드(Rothschild)에 볼보 인수를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로스차일드는 볼보가 보유한 자산을 전반적으로 조정하고 평가하며 분석할 책임을 맡았다. 지리는 로스차일드의 도움을 받아 서둘러 인수팀을 꾸렸다. 또 프레시필드 로펌(Freshfield Law Firm)에 법률 문제를, 딜로이트 투쉬 토마츠(Deloitte Touche Tohmatsu)에 재무 컨설팅/회계, IT, 연금, 자본 관리, 실사를 맡겼다. 지리는 유럽 및 미국 기업에서 두루 경험을 쌓은 점을 높이 평가해 당시 피아트 중국 법인(Fiat China) 부사장을 맡고 있었던 프리먼 센(Freeman Shen)에게도 인수팀에 합류할 것을 요청했다.
2009년 1월에 디트로이트 모터쇼에 참석한 리슈푸와 로스차일드 중화권 법인 사장 유리핑은 다시 포드를 찾아가 볼보를 인수하겠다는 의사를 명확하게 밝혔다. 포드의 CEO는 포드가 볼보 매각을 결정하면 반드시 지리에 알리겠다고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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