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건설

과감한 구조조정, 채권단이 투자자가 됐다

120호 (2013년 1월 Issue 1)

 

 

현대건설의 인수합병이 우여곡절 끝에 2011 1월 마무리됐다. 2010년 초부터 범()현대가의 일원인 현대상선·현대엘리베이터 측과 현대자동차 측은 현대그룹의 정통성을 둘러싸고 광고전까지 벌이며 현대건설 인수를 위해 치열하게 경쟁했다.

 

처음엔 55000억 원의 인수 금액을 제시한 현대상선 측이 현대건설을 인수하는 듯했다. 현대상선은 2010 11월 있었던 입찰에서 1순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현대상선은 채권단이 요구한 자금 출처를 증명하지 못해 우선협상자 지위를 박탈당했다. 상황은 이랬다. 인수조건에는자금조달의 적정성이라는 항목이 있었다. 재무제표상 현대상선이 자체적으로 보유한 현금은 그리 많지 않았다. 따라서 현대상선은 최소 4조 원 이상의 금액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할 것으로 예측됐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자 예측과는 달리 현대상선은 생각보다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었다. 자금조달에 별 다른 문제가 없어 보였다. 그런데 보유자금 중 이상한 내역이 발견됐다. 프랑스 나티시스은행에 현지 법인이 예치해뒀다는 자금 12000억 원이 문제로 불거졌다. 전년도 말 자산규모가 33억 원에 불과했던 작은 현지법인에서 갑자기 12000억 원이나 되는 예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사실은 설득력이 떨어졌다.

 

현대건설의 대주주인 채권단은 이 자금이 어떻게 마련된 것인지 밝히라고 현대상선에 요구했다. 현대상선은 이 요청을 거부하고 입찰에서 1위를 했으니 계약대로 현대건설을 넘기라고 주장했다. 채권단은 이 자금이 정상적인 회사의 자기자금이 아니라고 판단하고 결정을 번복했다. 51000억 원을 제시해서 입찰에서 2위를 차지했던 현대자동차에 현대건설을 넘기기로 결정했다. 이로써 고() 정주영 회장이 설립하고 현대그룹의 모태가 된 현대건설은 2000년 말 파산한 후 채권단 손에 넘어갔다가 10년 만에 아들 정몽구 회장이 경영하는 현대자동차로 돌아왔다. 현대상선에서 거세게 반발했으나 채권단의 결정은 뒤집히지 않았다.

 

이후 실제 인수가격은 실사과정에서 발견된 부실자산이 반영돼 49000억 원으로 조정됐다. 당초 시장에서 예상되던 현대건설 가치가 4조 원 초반이라는 점을 고려해보면 49000억 원이라는 인수대금은 싸지는 않지만 크게 비싸지도 않은 수준으로 볼 수 있다. 인수가격은 당시 시가에 약 70%의 프리미엄을 더한 가격으로 현대건설의 전체 지분 중 35%를 인수하는 금액이다. 참고로 금호아시아나그룹은 시가에 약 90%대 후반의 프리미엄을 더한 가격으로 2006년 말 대우건설을 인수한 바 있다.

 

 

현대건설의 경영권 분쟁과 파산

1947년 고 정주영 회장이 설립한 현대건설은 경부고속도로 건설과 중동 진출 등에 앞장서면서 국내 제1의 건설사로 우뚝 섰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가 발생하면서 위기가 시작됐다. 국내 건설경기가 급속히 위축됐고 시장 이자율이 20%선까지 치솟았다. 이라크에 건설 중이던 공사대금 약 1조 원도 받지 못했다.

 

악재가 겹치면서 현대건설의 경영상황이 급속히 나빠졌다. 1998년 현대건설은 290억 원의 흑자를 기록했지만 1999 1200억 원 적자, 2000 3조 원 적자를 내는 등 적자 규모가 눈덩이처럼 불어났다. 현대건설을 감사한 삼일회계법인은 현대건설이 계속기업으로 존속할 가능성이 불확실하다는 감사의견을 발표했다. 1996년 한때 최고 4만 원대까지 올랐던 주가는 2000년 들어 2000원대로 급락했다.

 

이 와중에 2000년 초 정주영 회장의 세 아들이 현대그룹 경영권을 차지하기 위해 분쟁을 벌이면서 현대그룹에 대한 평판이 급속히 나빠졌다. 고 정주영 회장이 2선으로 물러난 후 현대그룹은 정몽헌 회장의 현대건설/현대아산/현대상선/현대전자/현대증권 계열, 정몽구 회장의 현대자동차 계열, 정몽준 회장의 현대중공업 계열로 크게 삼()분된 상태였다. 그런데 정몽헌 회장의 계열사 경영 상황이 악화하면서 자금이 필요한 정몽헌 회장에 대항해 정몽구 및 정몽헌 회장이 반발했고 이는 소위 현대가() ‘왕자의 난이라고 불리는, 형제들 사이의 경영권 분쟁으로 비화됐다.

 

이런 분란이 발생하기 전만 해도 사실 정부는 정몽헌 회장 측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정몽헌 회장은 정부의 적극적인 도움을 받아 1999년 말 거의 전액 부채로 조달한 자금 26000억 원으로 LG반도체를 인수, 현대전자( SK하이닉스)에 합병시키기도 했다. 정부의 역점사업인 대북사업도 정몽헌 회장 측 계열사인 현대아산이 주도하고 있었고 당시 외부에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2000년 발생한 45000만 달러의 대()북한 비밀 송금이나 고위 정치인들에 대한 수백억 원대의 비자금 제공 등도 모두 정몽헌 회장 측 계열사에서 발생한 사건이었다.

 

하지만 현대그룹에 대한 여론이 급격히 나빠지자 정부도 현대 측을 보호할 수만은 없었다. 1999년 말 대우그룹 전체가 워크아웃에 돌입해 김우중 회장이 경영권을 박탈당하고 검찰 수사가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에 현대그룹만 계속해서 보호해 줄 명분이 없었다. 2000년 중반이 되자 정부도 적극 나서서 현대 계열사들을 압박하며 구조조정을 요구했다. 그중에서도 경영 상황이 가장 나쁜 회사가 현대건설과 현대전자였다. 2000년 중반 산업은행은 현대전자를 인수해서 현대그룹으로부터 분리시켰다. 이후 현대전자는 사명을 하이닉스반도체로 바꿔 현대라는 이름을 떼어냈다.

 

당시 노환으로 투병 중이던 정주영 회장은 이라크 공사대금 연체로 큰 위기에 처한 현대건설을 살리기 위해 통 큰 결단을 내렸다. 2000 11월 자신이 보유한 현대건설 회사채 1700억 원을 자본금으로 출자전환한 것이다. 즉 부채를 줄이고 그만큼 새로 발생한 주식과 부채를 교환했다. 783억 원을 추가로 회사에 출자하고 현대건설이 보유하고 있던 계열사 지분을 시장에 매각해 3431억 원의 자금을 마련했다. 이런 방법을 거쳐 마련한 자금으로 2000년 말까지 현대건설은 총 11700억 원의 부채를 상환하거나 출자전환을 통해 감소시켰다. 그러나 2000년 말 기준 현대건설의 유동부채는 무려 68000억 원, 자본은 -8572억 원, 2000년 당기순손실은 3조 원에 달했다. 더 이상 회사를 유지할 수 있는 형편이 안 됐다. 그 결과 현대건설은 2000 1230일 만기가 돌아온 기업어음 224억 원을 상환하지 못하고 파산했다.

 

채권단의 인수와 1차 무상감자

이런 상황에 처하자 현대건설에 자금을 댔던 은행들이 채권단을 구성해 현대건설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1 회계법인에 현대건설의 가치평가를 의뢰한 결과, 청산가치보다 계속기업가치가 높다는 판단이 나왔다. ‘청산가치란 회사를 현재 청산했을 때 부채를 지급하고 남는 현금을 말한다. 반면 회사에 자금을 좀 더 투자해서 회생하게 한 후 주식을 시장에 매각해서 현금을 회수할 수도 있는데 이처럼 회사를 계속 경영했을 때 상황을 추정해서 평가한 가치를계속기업가치’라고 한다. 현대건설은 회사를 청산했을 때 채권을 거의 회수할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채권단은 현대건설을 인수해서 직접 경영하고 회사를 살린 후 매각하기로 결정했다.

 

현대그룹의 창업자 정주영 회장이 사망한 직후인 2001 430, 현대건설은 무상감자를 공시했다. 대주주 일가의 보유지분인 15% 지분에 대해서는 경영실패 책임을 묻는 의미에서 완전감자를 하고 기타 소액주주들의 지분에 대해서는 5.99 1 비율로 감자하겠다는 내용이다. 이런 형식의 감자를차등감자또는비대칭감자라고 한다.

 

감자 결과 대주주 일가의 지분이 현대건설에서 완전히 사라져 대주주는 경영권에서 손을 떼게 됐다. 이런 무상감자 비율에 대해 소액주주들은 자신들은 경영실패에 책임이 없다며 거세게 반발하고 소송을 제기하기도 했지만 법원에서 모두 기각됐다. 손해를 본 소액주주들 입장도 이해는 가지만 모든 투자 책임은 투자자 자신에게 있다고 봐야 할 것이다. 5.99 1이라는 감자비율은 무상감자 이후 주가와 주식 액면금액 5000원을 거의 일치하게 만드는 수준에서 결정된 것이다. 즉 무상감자 후 기존 주식 5.99주가 신주 1주로 바뀌는데 기존 주식 5.99주 시가의 합이 주식 액면가액 5000원과 거의 일치하는 수준에서 감자비율이 결정됐다.

 

감자 직후 첫 거래일, 주가는 4290원으로 폭락했다. 실망한 소액주주들이 주식을 투매했기 때문이다. 3주 후인 2001 727, 채권단은 19750억 원의 대출금을 주식으로 전환했다. 그 결과 현대건설은 현대그룹의 품에서 벗어나 채권단을 새로운 최대주주로 맞이하게 됐다. 실제로는 출자전환 후에도 채권단 지분비율이 45% 정도로 55% 지분을 보유한 다수 소액주주들과의 협력을 통해 회사를 이끌어 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출자전환으로 부채가 대폭 줄어들고 자본이 증가하면서 2001년 말 기준 현대건설은 자본잠식 상태에서 벗어났다. 여전히 부채가 53000억 원이나 되는 반면 자본이 6800억 원에 불과하기는 했다(부채비율 790%). 2001년에는 8100억 원의 당기순손실을 기록했다. 그러나 출자전환 이후 부채 총액이 줄고 각종 비용절감을 위한 노력이 효과를 발휘하면서 회사 상황이 점차 개선되기 시작했다. 소폭이기는 하지만 2002 190억 원, 2003 790억 원 등 흑자를 내기도 했다. 2003년 기준 부채비율은 543%였다.

 

이 과정에서 채권단의 재무적 지원 이외에 다른 많은 요인들이 현대건설의 부활을 이끌었다. 직원들도 회사를 살리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우선 원가 절감을 위해 인원을 많이 줄였다. 2001 1월 총 7200명의 직원을 5200명으로 줄이는 1차 감원을 실시했다. 2001 12월에는 고위급 관리자 20%와 중간관리자 200명을 또 해고했다. 그 결과 임금과 복지비 지출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판매관리비가 2001 4480억 원(매출액의 7.12%)에서 2003 1670억 원(매출액의 3.23%)으로 줄어들었다. 판매관리비 비중을 절반 이하로 낮춘 것은 놀랄 만한 수준의 비용 절감으로서 구조조정을 하는 다른 기업들이 배울 만한 모범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비핵심사업도 정리했다. 엔지니어링과 철구 사업을 분사했고 시설관리는 아웃소싱했다. 불필요한 자산은 처분했다. 정주영 회장의 숙원사업이던 서산 간척지도 조각조각 나눠 팔았다. 오랫동안 현대건설의 본사였던 계동 사옥도 현대자동차에 처분했다. 마지막으로 현대건설에 남은 모든 임직원이 회사를 살리겠다는 일념 하나로 똘똘 뭉쳐 열심히 노력했다.

 

상장폐지 위험과 2차 무상감자

2003 8월 대북 송금과 비자금 조성, 정치인에 대한 뇌물 제공 등 혐의로 특별검사의 수사를 받던 정몽헌 회장이 현대 사옥에서 투신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자살이냐, 타살이냐를 놓고 논란이 있었지만 이 사건 이후 현대그룹에 대한 동정적 여론이 일기 시작했다. 현대그룹에 대한 정부 압박이 상당히 줄어드는 분위기가 감지됐다. 현대건설은 이미 현대그룹에서 분리돼 채권단 소유였지만 이런 분위기는 일부 긍정적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그러던 중 한국거래소의 상장폐지 규정이 강해졌다. 개정 내용이 적용되면 현대건설이 상장폐지 대상이 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이전에는 자본 전액이 잠식되면 상장폐지에 해당됐으나 규정이 바뀌면서 자본의 50%만 잠식돼도 상장폐지 대상이 되도록 바뀐 것이다.2  회사의 당기순이익 중 배당을 제외한 잔액을 사내에 유보하는데 이 금액을 이익잉여금이라고 한다. , 회사가 적자를 계속 기록해 이익잉여금이 음(-)인 상황에서는 이익잉여금이 아니라 누적결손금이라고 한다. 자본잠식이란 회사가 적자를 기록해 누적결손금이 재무상태표에 기록되는 것을 말한다. 자본 전액 잠식이란 누적결손금이 너무 커져서 자본 전체가 음(-)이 되는 상황이다. 자본이 잠식된 기업은 상장폐지 위험을 모면하기 위해 증자를 통해 자본금을 늘리거나 또는 누적결손금을 없애거나 대폭 줄여야 한다.

 

현대건설을 회복시켜 매각해야 하는 채권단 입장에서는 현대건설이 상장을 유지하도록 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 결과 현대건설 채권단은 2003 10, 2004 1월 기준으로 9.05 1의 무상감자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이 감자는 차등감자가 아니라 모든 주주들에게 균등하게 적용되는 균등 또는 대칭적 감자였다. 아울러 채권단은 감자 직후 전환사채 5889억 원을 출자전환하기로 했다. 여기서 9.05 1의 감자비율도 1차 감자 때와 유사하게 감자한 후 주식 한 주의 시장가격이 출자 전환하는 부채의 액면가와 비슷해지도록 하는 수준에서 결정된 것이다. 이런 결정에 소액주주들은 극심하게 반발했으나 이 감자안은 주주총회에서 80%의 찬성으로 통과됐다. 소액주주들이 제기한 소송도 법원에서 기각됐다.

 

 

 

감자안이 공표된 시점부터 주주총회 의결 때까지 현대건설 주가는 무려 40% 폭락했다. 9.05 1이라는 감자비율과 그 이후 출자전환으로 기존 소액주주들이 보유한 회사의 지분가치가 대폭 감소하기 때문에 소액주주들이 크게 반발한 탓이다. 5889억 원의 전환사채를 주식으로 전환하면 총 5300만 주의 주식을 받는다. 무상감자 이후 기존 주주들이 보유하는 주식은 총 5600만 주로 채권자들이 신규로 받는 주식은 전체 주식의 절반 수준에 육박하는 셈이다. 따라서 기존 주주들이 볼 때 지분율 희석이 엄청났다. 일부 소액주주들이 1차 감자 때처럼 소송을 제기하기도 하고 시위를 하기도 했지만 법원은 제소를 모두 기각했다. 소액주주들은 감자 전 55% 지분을 보유하고 있었으나 감자 후 32% 주식만 갖게 됐다. 채권단은 68% 지분을 보유하면서 현대건설의 대주주가 됐다.

 

현대건설은 감자를 통해 자본금을 줄이면서 동시에 이 금액을 누적결손금과 상계처리했다. 자본금과 누적결손금이 동시에 줄어든 것이다. 이후 출자전환을 통해 증자했으므로 자본금이 다시 늘어났다. 상장폐지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출자전환 결과로 부채가 줄어들면서 2004년 말 기준 총부채는 36000억 원, 총자본은 8800억 원으로 부채비율이 413%로 떨어졌다. 전년도 말 기준 543%와 비교할 때 재무구조가 상당히 개선된 것이다.

 

현대건설의 부활과 성공요인

2004년 내내 현대건설의 경영 상황은 미세하지만 조금씩 개선됐다. 여전히 상당한 부채가 남아 있었으나 2005년 전국에서 부동산 붐이 일면서 경영 상황이 크게 좋아지기 시작했다. 2006년에는 무려 4000억 원의 당기순이익을 냈다. 신용등급은 BBB+에서 A-로 상향됐다. 그리고 2006년 중 기업회생절차(워크아웃)에서 졸업하는 경사를 맞았다. 당시 차입금은 17000억 원대, 수주 잔고는 무려 25조 원대에 이르렀다. 시련의 터널을 헤치고 드디어 생환에 성공한 것이다.

 

그 후 2008년 세계 금융위기가 터지는 바람에 새 주인을 맞이하기까지는 몇 년의 시간이 더 걸렸다. 국내 건설시장이 꽁꽁 얼어붙는 중에도 우수한 기술력으로 해외 건설시장에 주력해 수주고를 유지했다. 덕분에 금융위기의 피해는 크지 않았다. 2010년 매각작업이 시작됐고 치열한 경쟁 끝에 현대자동차가 새 주인이 됐다.

 

재무적 측면에서 본 현대건설의 성공요인은 세 가지로 요약된다. 첫째, 과감한 인력 절감과 구조조정으로 비용을 대폭 감소시킨 점이다. 당시에는 마음 아픈 결정이었겠으나 이처럼 과감한 조치를 단행하지 않았다면 회사가 살아나지 못했을 가능성이 크다. 둘째, 소수의 은행들이 다수의 채권을 보유하고 있었다. 외환, 우리, 산업은행 등 3개 은행이 보유한 채권이 전체 채권의 20%나 됐다. 이들 은행이 주도적으로 중요 사항을 결정하고 쉽게 실행하는 일이 가능했다. 만약 다수 채권자들이 각각 소액의 채권을 보유했다면 이해관계가 서로 다른 채권자들 간 의견 통일이 어려웠을 것이다. 경영 계획을 앞장서서 수립하고 실천할 주도 세력이 없기 때문에 회사가 쉽게 살아나기 힘들었을 것이다. 과거 사례를 보면 기관에 비해 개인투자자들은 조금도 양보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높기 때문에 서로 다투다가 합의하지 못하는 경우가 상당하다. 그러다 보면 시간이 걸리고 그 사이 회사의 경영 상황은 더 나빠진다. 반면 은행들은 당장은 손해를 보더라도 장기적인 입장에서 논리적으로 판단해 감자나 출자전환 등에 대한 합의를 상대적으로 쉽게 이끌어낼 수 있다. 셋째, 출자전환이 큰 역할을 했다. 채권단이 단기적인 대금 회수보다 장기적인 회사 살리기를 위해 채권을 주식으로 전환하는 데 대승적으로 동의했다. 이를 통해 현대건설의 생환이 더욱 앞당겨질 수 있었고 채권단은 2011년 주식 매각을 통해 상당한 이익을 얻을 수 있었다.

 

재무적 요인 외에 다른 요인들도 현대건설의 생환에 기여했다. 우수한 기술력과 직원들의 노력, 고 정주영 회장 때부터 쌓아온하면 된다는 도전정신과 문화를 빼놓을 수 없다. 운도 따랐다. 2004년부터 2006년까지 국내 부동산 가격 폭등이 없었다면 완전한 회복에 시간이 좀 더 걸렸을 것이다. 고 정몽헌 회장 사후현대그룹을 돕자는 분위기로 여론이 선회한 점도 채권단 또는 정부의 신속한 출자전환 결정 및 여러 소송에서의 법원 판결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하지만 운도 준비하는 자에게만 의미가 있다. 우연이든, 필연이든 현대건설은 당시 찾아온 기회를 잡을 만한 역량을 갖고 있었다. 기회가 와도 기회가 있는지조차 모르고 지나쳐 버리는 경우가 더 많다. 금융위기 동안 많은 건설사들이 파산한 것으로 고려해보면 어려운 상황에서도 세계 시장에 진출해 발전을 멈추지 않은 현대건설의 역량은 대단하다고 할 수 있다.3 그리고 어려움을 헤쳐 온 그동안의 과정은 국내외 기업들에 의미 있는 시사점을 던져준다.

 

 

최종학 서울대 경영학과 교수acchoi@snu.ac.kr

필자는 서울대 경영대학 학사와 석사를 거쳐 미국 일리노이주립대에서 회계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홍콩 과기대 교수를 거쳐 서울대 경영대학 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서울대에서 우수강의상과 우수연구상을 동시에 받는 등 활발한 강의 및 연구 활동을 하고 있다. 저서로 <숫자로 경영하라> <재무제표 분석과 기업가치평가>가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8호 The New Chapter, Web 3.0 2022년 07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