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 전쟁의 시대다. 시장의 글로벌화와 이종 제품 및 기술 간 컨버전스 현상이 심화됨에 따라 기술 차별화는 생존을 위한 필수 요소로 부상하고 있다. 시장이 필요로 하는 기술을 성공적으로 개발한 기업은 해당 산업에 처음 진출하더라도 성공을 구가할 수 있다.
한국에서 연구개발(R&D)은 중요한 의미를 갖고 있다. 한국은 자동차, 반도체, 정보기술(IT) 등 하이테크 제조업을 중심으로 성장해왔다. 한국의 하이테크 제조업은 국가 경제의 25%를 차지하고 있다. 제조업 강국인 일본과 독일도 하이테크 제조업이 불과 20%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으며 미국과 영국은 12% 수준이다. <그림1>은 ADL(Arthur D. Little)이 글로벌 기업을 대상으로 조사한 산업별 R&D 중요도 분석 결과와 국가별 하이테크 제조업 비중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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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지속적인 기술 차별화를 통해 차세대 영역을 선도하는 선진국과 막대한 내수 시장을 바탕으로 성장을 지속하고 있는 신흥국 사이에 낀 ‘샌드위치’ 신세가 될 수 있다. 중국산 제품의 품질이 떨어진다는 말도 이젠 흘러간 옛 이야기다. 차별적 부가가치가 더해지지 않은 범용상품(commodity) 영역에서 제품 및 서비스 품질의 상향 표준화가 전 세계적으로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추세라면 한국 기업이 범용상품 분야에서 원가 경쟁력을 갖춘 신흥국보다 경쟁력이 떨어지는 일은 시간 문제다. 특히 한국이 원천기술보다는 응용기술 개발에 주력했다는 점도 ‘아킬레스 건’이다. 삼성전자 같은 굴지의 기업들마저 막대한 예산을 기술 로열티로 지불하고 있다. 국가 기술수지 적자는 30조 원에 이른다. 특히 기술이 핵심인 부품 산업에서 대일 무역수지 적자는 15조 원 이상이다. 한국이 리더로 거듭나려면 기술력 측면에서 확고한 경쟁력을 가져야 한다.
어떤 기술을 확보할 것인가
과거에는 ‘독립적인 제품’ 및 ‘핵심 기술’ 이 경쟁의 단위였다면, 현재는 ‘솔루션’과 ‘융복합 기술’이 경쟁의 단위가 되었다. 고객의 욕구가 다변화됨에 따라 마케팅, 연구개발, 생산, 품질, 서비스 등 전체 영역 간 협력이 절실해지고 있다. 이제는 고객을 만족시킬 수 있는 총체적인 솔루션을 제공하는 일이 중요해졌다.
이에 따라 기업의 활동 범위도 넓어지고 있다. IT 산업에서 기존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간의 경계가 허물어졌듯 산업 간 경계가 불분명해지는 현상도 가속화하고 있다. 또 과거에는 시장 예측이 어느 정도 가능했지만, 현재는 시장의 다변화로 이 역시 매우 어려워지고 있다. 시장이 글로벌화하면서 아무리 좋은 품질과 기술적으로 가치가 있는 제품을 내놓아도 경쟁사보다 한발 늦으면 이미 게임은 끝난 뒤다.
R&D 분야는 상용화까지 상당한 기간이 소요되고, 성과를 직접적으로 측정하기도 어려워 불확실성이 더 크다. 한국 기업 R&D 투자는 과거 20년간 매년 20% 이상씩 성장을 거듭했으며, 현재 그 규모가 약 22조 원에 이르고 있다. 산업에 따라 차이가 있고, 기업의 전략에 따라 차이가 있지만 매출의 상당 부분이 연구개발비로 지출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R&D투자가 어느 정도의 가치를 창출했는지, 돈을 더 투자해야 하는지, 아니면 줄여야 하는지에 대한 고민은 경영자의 영원한 화두다.
R&D 투자수익률(ROI·Return on In-vestment)을 극대화하기 위한 치열한 고민이 지속되고 있는데, 이는 결국 ‘어떤 기술을 확보할 것인가’의 문제로 귀결된다. 물론 확보 대상 기술이 결정되면 ‘어떻게 기술을 확보할 것인가?’가 중요한 문제가 될 것이다.
확보 대상 기술을 결정할 때 2가지를 반드시 기억해야 한다. 첫 번째는 기술 그 자체만으로 의미가 없다는 점이다. 시장과 고객을 이해하지 못한 상황에서 개발되는 기술은 무의미해질 수 있다. 즉, 확보 대상 기술은 시장 파급 효과(market impact) 관점에서 결정되어야 하며, 기술적 가치(technological significance) 관점에서 결정되면 안 된다.
두 번째로, 플랫폼 관점에서 기술에 접근해야 한다. 단일 기술보다는 복합 기술로 제품 및 솔루션이 만들어지는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또 제품 수명 주기가 짧아짐에 따라 플랫폼의 중요성은 배가되고 있다. 예전 같으면 대박이 터진 제품 몇 개만 있으면 한동안 편하게 사업을 운영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히트모델을 내놓은 뒤에도 바로 다음 히트모델을 준비해야 한다. 아무리 좋은 제품을 선보여도 경쟁사의 모방 제품이 계속 나오기 때문에 지속적인 경쟁 우위를 유지하려면 특정 플랫폼을 기반으로 지속적으로 신제품을 시장에 내놓을 수 있는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따라서 플랫폼 관점에서 다양한 용도로 활용할 수 있는 기반 기술을 확보하기 위한 계획을 세워야 한다.
세계적인 화학소재 업체인 토레이(Toray)는 폴리머(Polymer), 유기합성화학(Organic Synthetic Chemistry), 생화학(Bio-Chemistry) 기술 플랫폼 중 기존 플라스틱 및 섬유 사업을 강화하는 동시에, IT와 환경소재를 비롯한 신성장동력을 성공적으로 육성하고 있다. 토레이는 각광받고 있는 탄소섬유 분야의 1위 기업이기도 하다.
기업들은 또 ‘보유한 기술’과 ‘확보할 기술’을 총체적인 관점에서 관리해야 한다. 이를 위한 핵심적인 방법론이 ‘R&D 포트폴리오 관리’다. 기업의 전사전략이 ‘비전 및 목표 달성을 위한 자원 배분의 우선 순위화’로 정의되는 것처럼, R&D 전략은 ‘현재 및 미래 제품 경쟁력 극대화를 위한 기술 자원배분의 우선순위화 및 최적화’로 정의할 수 있다. R&D 포트폴리오 관리는 서술된 R&D 전략과 일맥상통하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기술이 차세대 성장의 원천이 되는 만큼, R&D 포트폴리오 관리는 기업의 미래 정체성과 직결된다.
R&D 포트폴리오 관리: 최적화의 문제
‘서류가방, 자료 수집철’의 사전적 의미를 지닌 포트폴리오는 비즈니스 세계에서 ‘기업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의 구성 및 그 총체적인 합’으로 표현된다. 사업 포트폴리오는 1960년대 재무관리 이론에서 다수의 사업 및 자본 자산(capital assets)을 효과적으로 관리하기 위해 사업의 위험과 수익(리스크 & 리턴)을 측정하고 효율적으로 투자 의사결정을 하기 위해 개발된 ‘재무 포트폴리오’ 개념에서 유래됐다. 현재는 그 의미가 확장돼 다양한 사업들을 전체적으로 관리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있다.
전략적 의미에서 포트폴리오는 ‘시장매력도’ vs. ‘기업경쟁력’ 매트릭스와 같이 일정한 기준으로 다수 평가 대상의 위치를 결정하고, 개별 대상의 위치와 전체적인 균형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자원 배분 의사결정을 지원하는 도구다. 이런 전략적 포트폴리오는 단순하지만 매우 통찰력 있는 의견을 제시하기 때문에 많은 기업들이 활용하고 있다.
R&D 포트폴리오 역시 ‘전략적’ 포트폴리오가 지니는 단순하면서 강력한 통찰력과 실행으로 연결시킬 수 있다는 장점, 그리고 ‘재무적 포트폴리오’ 관점에서의 위험과 수익의 관리라는 특성을 함께 추구하는 도구다. 사전적 정의처럼 개별 기술이 아니라 기술 전체를 대상으로 포트폴리오의 위치와 구성 패턴에 따라 현재의 전략적인 방향과 향후 조정 방향을 판단하고, 전체 기술의 가치를 극대화할 수 있도록 조정하는 역할을 수행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