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의 미디어 트레이닝
사례 1 2007년 10월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열린 국회정무위원회 국정감사장. 외국인 은행장으로는 최초로 존 필메리디스 당시 SC제일은행장이 증인으로 출석해 눈길을 끌었다. 신학용 열린우리당 의원은 SC제일은행의 문제를 국감에서 철저히 파헤치겠다고 공헌한 터였다. 언론이 보도한 당시의 질의응답을 인용해보자.
신 의원: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 본사가 SC제일은행의 국내기업 대출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국내 기업의 정보까지 입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필메리디스 행장: “모든 기밀문서에 대한 보안은 영업의 핵심이다…. 제3자(SCB 본사)와 문서를 공유한 것은 한국 법 내에서 합법적으로 한 일이다.”
신 의원: “SCB 본사가 SC제일은행 경영에 사사건건 간섭한다.”
필메리디스 행장: “그 같은 얘기는 완전히 근거 없는 소문이다…. SC제일은행은 SCB그룹 내에서 완전한 독립 법인이며, 모든 권한은 나에게 위임돼 있다.”
신 의원: “결국은 하나은행에 SC제일은행을 팔고 떠나는 것 아니냐?”
필메리디스 행장: “완전히 근거 없는 루머다.”
필메리디스 전 행장은 국감장에서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응답했으며, 매번 ‘서(Sir)’라는 경어체를 붙였다. 그는 “증인 출석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의원님의 제안에 감사한다”는 말로 답변을 마쳤다. 당시 한 일간지 기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증인 출석을 요구했던 신학용 열린우리당 의원은 ‘SC제일은행의 문제를 국감에서 철저히 추궁하겠다’고 별렀다. 결과는 신 의원의 ‘완패’였다. 필메리디스 행장의 논리 정연한 답변에 신 의원은 제대로 된 추궁 한 번 못하고 ‘증인으로 출석해줘 고맙다’는 말로 질의를 마쳐야 했다.”
사례 2동아일보(2007년 12월 26일자)는 일본 정부 부처의 기자회견 트레이닝에 대해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외상을 비롯해 외무성 간부 중 언론을 대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미디어 트레이닝’을 도입했다.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실제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 언론 앞에서 정부의 입장을 어떻게 핵심 메시지 위주로 전달할지 등에 대해 세부적인 훈련을 받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 경제산업성이 2008년 기업 30만 곳에 <리콜 핸드북>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기업의 기자회견 실무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부 책자에는 기업이 리콜을 할 때 기자회견을 ‘귀찮고 번거로운 일로 생각하지 말고,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신뢰 관계의 유지 및 회복을 위한 기회의 장’으로 여기라고 써 있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가 놀랍다. 일본에서 기업의 미디어 트레이닝 수요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 기술을 익혀라
필메리디스 전 행장의 질의응답 태도나 메시지 전달 기술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정석을 따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사실과 의견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메시지 기술을 활용했다. 선진 기업의 임원들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일대일 혹은 소규모 미디어 트레이닝을 매년 정기적으로 받고 있다.
언론사 기자들은 인터뷰하는 기술을 선배 기자나 언론사 매뉴얼, 특정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는다. 그런데 정작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기업 임원들은 이에 대해 특별한 교육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부 언론과 인터뷰를 해본 기업 임원 중에는 기자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 많다. 기업이 때론 공격적으로 영업을 하듯, 기자들은 특히 기업의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게 마련이다. 이는 기자의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기업 입장에서도 프로페셔널하게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필메리디스 전 행장의 답변을 다시 눈여겨보자. 그는 신 의원의 ‘부당한 개입’ 의혹에 대해 “부당하게 개입한 적이 없다”고 답하기보다는, 보안이 영업의 핵심이며 한국 법 내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진 사실임을 부각했다. 이로써 필자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41호에서 이야기했던 ‘코끼리의 오류(질문의 부정어를 다시 반복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부정성을 불러일으키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또한 신 의원이 루머를 들이대며 추궁할 때도 사실을 들어 단순 명료하게 부정했다. 국감이나 청문회, 인터뷰 등에서는 보통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더 큰 파워를 갖게 돼 있고,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일간지 기자들은 슬쩍 찔러보기에 능하다. 평이하거나 긍정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지만, 질문자는 부정어로 비틀거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물론 평이하게 물으면 인터뷰의 ‘맛’이 살지 않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언론의 이러한 속성을 잘 파악하고, 이에 적절하게 무리 없이 대응하기 위해 자주 연습을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