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디어 트레이닝, 이제 선택 아닌 필수

43호 (2009년 10월 Issue 2)

선진국의 미디어 트레이닝
사례 1 2007년 10월 금융감독위원회에서 열린 국회정무위원회 국정감사장. 외국인 은행장으로는 최초로 존 필메리디스 당시 SC제일은행장이 증인으로 출석해 눈길을 끌었다. 신학용 열린우리당 의원은 SC제일은행의 문제를 국감에서 철저히 파헤치겠다고 공헌한 터였다. 언론이 보도한 당시의 질의응답을 인용해보자.
 
신 의원: “영국의 스탠다드차타드은행(SCB) 본사가 SC제일은행의 국내기업 대출에 부당하게 개입하고, 국내 기업의 정보까지 입수한 이유는 무엇인가?”
 
필메리디스 행장: “모든 기밀문서에 대한 보안은 영업의 핵심이다…. 제3자(SCB 본사)와 문서를 공유한 것은 한국 법 내에서 합법적으로 한 일이다.”
 
신 의원: “SCB 본사가 SC제일은행 경영에 사사건건 간섭한다.”
 
필메리디스 행장: “그 같은 얘기는 완전히 근거 없는 소문이다…. SC제일은행은 SCB그룹 내에서 완전한 독립 법인이며, 모든 권한은 나에게 위임돼 있다.”
 
신 의원: “결국은 하나은행에 SC제일은행을 팔고 떠나는 것 아니냐?”
 
필메리디스 행장: “완전히 근거 없는 루머다.”
 
필메리디스 전 행장은 국감장에서 흥분하지 않고 차분하게 응답했으며, 매번 ‘서(Sir)’라는 경어체를 붙였다. 그는 “증인 출석을 영광으로 생각하며 의원님의 제안에 감사한다”는 말로 답변을 마쳤다. 당시 한 일간지 기자는 다음과 같이 평했다. “증인 출석을 요구했던 신학용 열린우리당 의원은 ‘SC제일은행의 문제를 국감에서 철저히 추궁하겠다’고 별렀다. 결과는 신 의원의 ‘완패’였다. 필메리디스 행장의 논리 정연한 답변에 신 의원은 제대로 된 추궁 한 번 못하고 ‘증인으로 출석해줘 고맙다’는 말로 질의를 마쳐야 했다.”
 
 
 
사례 2동아일보(2007년 12월 26일자)는 일본 정부 부처의 기자회견 트레이닝에 대해 보도했다. 이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외상을 비롯해 외무성 간부 중 언론을 대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이들을 대상으로 ‘미디어 트레이닝’을 도입했다. 단순한 강의가 아니라 실제 카메라 테스트를 거쳐 언론 앞에서 정부의 입장을 어떻게 핵심 메시지 위주로 전달할지 등에 대해 세부적인 훈련을 받는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일본 경제산업성이 2008년 기업 30만 곳에 <리콜 핸드북>을 만들어 배포하는 등 기업의 기자회견 실무에 대해 조언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 정부 책자에는 기업이 리콜을 할 때 기자회견을 ‘귀찮고 번거로운 일로 생각하지 말고, 피해자에 대한 사죄와 신뢰 관계의 유지 및 회복을 위한 기회의 장’으로 여기라고 써 있다. 일본 정부의 적극적인 태도가 놀랍다. 일본에서 기업의 미디어 트레이닝 수요도 급속히 늘어나고 있다고 한다.
 
언론 인터뷰 기술을 익혀라
필메리디스 전 행장의 질의응답 태도나 메시지 전달 기술은 커뮤니케이션 전문가들이 보기에도 정석을 따르고 있다. 그는 자신이 파악하고 있는 사실과 의견을 바탕으로 전문적인 메시지 기술을 활용했다. 선진 기업의 임원들은 일본과 마찬가지로 일대일 혹은 소규모 미디어 트레이닝을 매년 정기적으로 받고 있다.
 
언론사 기자들은 인터뷰하는 기술을 선배 기자나 언론사 매뉴얼, 특정 프로그램을 통해 교육받는다. 그런데 정작 기자들의 질문을 받는 기업 임원들은 이에 대해 특별한 교육을 받는 경우가 거의 없다.
 
일부 언론과 인터뷰를 해본 기업 임원 중에는 기자에 대해 부정적인 선입견을 가진 사람이 많다. 기업이 때론 공격적으로 영업을 하듯, 기자들은 특히 기업의 위기 상황에서 새로운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공격적으로 질문을 던지게 마련이다. 이는 기자의 프로페셔널리즘으로 이해해야 한다. 중요한 것은 기업 입장에서도 프로페셔널하게 기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는 점이다.
 
필메리디스 전 행장의 답변을 다시 눈여겨보자. 그는 신 의원의 ‘부당한 개입’ 의혹에 대해 “부당하게 개입한 적이 없다”고 답하기보다는, 보안이 영업의 핵심이며 한국 법 내에서 합법적으로 이뤄진 사실임을 부각했다. 이로써 필자가 동아비즈니스리뷰(DBR) 41호에서 이야기했던 ‘코끼리의 오류(질문의 부정어를 다시 반복 부정함으로써 오히려 더 큰 부정성을 불러일으키는 오류)’에 빠지지 않았다. 또한 신 의원이 루머를 들이대며 추궁할 때도 사실을 들어 단순 명료하게 부정했다. 국감이나 청문회, 인터뷰 등에서는 보통 질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더 큰 파워를 갖게 돼 있고, 이들에게서 공통적인 특징을 발견할 수 있다.
 
일간지 기자들은 슬쩍 찔러보기에 능하다. 평이하거나 긍정적으로 물어볼 수도 있지만, 질문자는 부정어로 비틀거나 민감한 부분을 건드린다. 물론 평이하게 물으면 인터뷰의 ‘맛’이 살지 않는다. 기업 입장에서는 언론의 이러한 속성을 잘 파악하고, 이에 적절하게 무리 없이 대응하기 위해 자주 연습을 해야 한다.
 
기자의 특성을 이해하지 못하고 감정적으로 싸우는 임원도 문제지만, 기자에게 무조건 잘 보여야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있는 것도 문제다. CNN의 토크쇼 사회자로 유명한 래리 킹은 저서 <대화의 법칙(How to talk to anyone, anytime, and anywhere)>에서 “미국의 어떤 법도 기자의 질문에 모두 답변해야 한다는 강제 사항은 없다”고 조언했다.
 
이런 사례를 2008년 2월 미국의 여배우 앤젤리나 졸리와 CNN의 인터뷰에서 확인할 수 있다. CNN 기자는 국제연합(UN)의 자원봉사자로 이라크를 방문한 졸리에게 임신 여부에 대해 물었다. 기자가 “할리우드에서 나오는 보도에 따르면…” 하고 말을 꺼내며 살짝 웃자, 졸리는 정색을 하며 “그만 해요. 기자님은 CNN에서 나오셨잖아요. CNN의 전통에 맞춰 그런 질문은 하지 말아주세요”라고 응수했다. 그래도 기자가 한 번 더 웃으며 살짝 묻자, 졸리는 “제가 꼭 대답해야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라고 말했다. 그제야 기자는 “물론이다. 더 이상 묻지 않겠다”고 답했다.
 
인터뷰를 훈련받지 않거나 언론의 생리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기자의 질문에 모두 답변하다가 기업의 비밀 정보나 개인 신상 정보 등을 발설해 문제를 일으키곤 한다. 혹은 무조건 ‘노코멘트’로 일관해 사태를 오히려 악화시킨 사례도 있다. 나아가 기자의 카메라 렌즈를 막거나 밀치는 것은 언론 대응의 기본을 모르는 자세다. 때로 최고경영자(CEO)나 임원들의 어이없는 실수는 흥미로운 뉴스거리로 등장한다.
 
기자에게 말하는 것은 곧 대중에게 말하는 것
사례 3 2008년 5월 당시 김성이 보건복지가족부 장관은 미국산 쇠고기 수입 협상과 관련해 개인적 의견을 기자에게 이야기했다가 곤욕을 치렀다. 보건복지가족부 보육정책관과 출입기자의 오찬 자리에 예고 없이 참석해 비보도를 전제하고 의견을 밝힌 것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지금까지 30개월이 안 된 소를 먹는 줄 몰랐다” “(외교통상부의) 잘못을 농림수산식품부가 대신 지적받고 있는 것이다”와 같은 사견(私見)을 취재진에게 전달했다. 또 당시 조류 인플루엔자 이슈와 관련해서는 “농림수산식품부가 최초 대응을 잘못했다”고 말했다.
 
자신이 책임을 맡고 있는 부처 이외의 사항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대언론 커뮤니케이션의 기본에 어긋나는 사항이다. 이러한 발언이 기사화되자 김 전 장관은 “비보도를 전제로 부담 없이 나온 말들이었음을 이해해달라” “와전됐다”며 불을 끄려 했지만 이미 늦었다. CEO나 장관 등 리더의 말 한마디는 때로 우리 사회에 엄청난 영향력을 미친다. 수백 명의 대중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하는 리더에게는 연습이 필요하다. 기자 한 사람과 나누는 이야기는 수백 명이 아니라 수십만 명, 수백만 명에게 기자를 ‘통해(through)’ 이야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기본적인 사항도 이해하지 못한 리더들은 너무나 어설픈 실수를 저지르곤 한다.
 
필자는 한국외대 불어과를 졸업하고 미국 마켓대에서 PR 전공으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KAIST 문화기술대학원 박사 과정에서 ‘위기 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연구 중이다. 글로벌 PR 컨설팅사인 에델만 한국 대표를 거쳐 현재 오길비헬스 파트너와 더랩에이치 대표로 있으면서 기업의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에게 위기관리 노하우를 전하는 코칭과 워크숍을 진행하고 있다.
 
편집자주 위기는 ‘재수 없는 일’이 아니라 어느 기업에서나 언제든지 발생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위기관리 시스템을 철저히 정립해놓고 비상시에 현명하게 활용하는 기업은 아직 드뭅니다. 위기관리 전문가인 김호 더랩에이치 대표가 실제 사례들을 중심으로 기업의 위기관리 노하우를 전합니다. 독자 여러분께서 직접 겪은 위기관리 사례를 공유하고 싶거나 궁금한 점이 있으면, 김 대표의 e메일로 보내주십시오. 좋은 사례를 골라 본 글에서 다룰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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