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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ditor’s Letter

서랍 속 기술을 꺼낼 열쇠는?

김현진 | 447호 (2026년 8월 Issue 2)

박사과정 시절, 데이터를 남들보다 멀리 전송하는 기술로 반도체 칩 창업에 나선 연구자가 있었습니다. 논문 중심의 학계에서는 전송 거리가 길수록 우수한 기술로 인정받았기에 그는 ‘더 멀리’에 집착했습니다. 그러나 창업 후 만난 고객사는 최대 전송 거리 대신 표준 거리에서의 안정적인 성능에 집중했습니다. 20여 년간 다섯 개 딥테크 스타트업을 세워 모두 성공시킨 배현민 KAIST 창업원장은 이처럼 첫 창업에서 ‘연구실의 이상’과 ‘시장의 수요’ 사이의 간극을 뼈저리게 배웠습니다.

이 일화는 “좋은 기술을 많이 보유한 조직이 반드시 미래 산업을 주도하는가”라는 질문에 힌트를 줍니다. 한국은 글로벌혁신지수와 GDP 대비 연구개발(R&D) 투자 비중에서 세계 최상위권이지만 세계 시장을 뒤흔드는 딥테크 기업 가운데 한국의 존재감은 기대만큼 크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이 공통적으로 지적하는 한국의 병목은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사업화, 즉 지식 생산과 가치 창출 사이의 ‘전환 실패’입니다.

왜 지금 딥테크 얘기를 꺼내야 할까요. 2000년대가 인터넷, 2010년대가 모바일·플랫폼의 시대였다면 2020년대는 원천기술 중심의 딥테크 시대입니다. 딥테크는 이미 산업 생태계의 판도를 바꾸고 있습니다. 비슷한 체급이던 미국과 유럽의 경제는 유럽이 전통산업에 머무는 동안 미국의 딥테크 기업들이 성장하며 30년 만에 크게 갈라섰습니다. ‘세계의 공장’에서 딥테크 생태계로 진화한 중국 선전에서는 대학이 아니라 R&D 투자의 90% 이상을 담당하는 기업이 혁신을 주도합니다.

딥테크는 자본 집약적이고 개발 기간이 길어 실험실 기술을 제품화하려면 양산·인증·판로처럼 기업만이 가진 보완 자산이 필요합니다. 딥테크 창업의 성패를 대기업이 쥐고 있는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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