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사건의 연속이다. 서로 떨어진 수많은 사건을 하나로 묶어내는 맥락을 이해해야 원인과 결과를 제대로 분석할 수 있다. 임오군란에서 시작해 을사늑약으로 끝나는 일본의 조선 병탄 과정도 마찬가지다. 치밀한 계획과 실행의 연속이다. 톈진조약을 빌미로 청일전쟁을 일으켜 청나라의 조선 종주권을 지웠고, 서구 열강을 자신의 편으로 돌린 후 러일전쟁을 벌여 경쟁자인 러시아를 제쳤다. 반면 조선 왕실과 지배층은 실책을 거듭했다. 내부의 분란이 생길 때마다 자기 세력의 안위만 따져 청나라, 일본, 러시아를 차례로 끌어들였다. 국제 정세엔 어두웠고, 침탈의 빌미만 내줬다. 을사늑약은 마지막 요식행위였을 뿐 여기에 도장을 찍은 자들만 매국노가 아니다. 늑약으로 가는 과정을 하나하나 밟아간 조선의 지배층 모두에 나라를 잃은 책임이 있다. 이 모든 과정은 억지 미화가 아닌 통렬한 반성의 대상이 돼야 한다.
이로써 청일전쟁이 발발했다.
청일전쟁은 일본의 정한론을 실현하는 데 걸림돌이 되는 청나라 종주권을 제거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전쟁이다. 청나라 군대를 철모르고 불러들인 친청 수구파는 결국 일본군에도 초청장을 보낸 셈이 됐다. 일본은 친일 개혁파의 순진함을 이용해 청나라 종주권을 제거하고 조선을 삼킬 기회를 현실화하는 첫 번째 관문을 통과했다.
5. 시모노세키조약과 3국 간섭:러시아와 일본의 대립, 아관파천청일전쟁이 일본의 승리로 끝나고 전쟁배상금 처리를 위한 시모노세키조약이 체결됐다. 일본은 대만과 펑후제도, 요동반도를 할양받았고 청나라는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하게 됐다. 모든 것이 일본에 유리하게 돌아가려던 차에 한 가지 걸림돌이 생겼다. 러시아가 독일과 프랑스를 끌어들여서 일본에 요동반도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넣은 것이다. 부동항을 얻기 위해 남만주와 조선에 관심이 있었던 러시아는 요동반도가 일본에 넘어가는 것이 향후 자신의 행보에 지장을 줄 것이라 판단했다. 일본의 국력으로 세 나라에 저항하는 것은 불가능하므로 일본은 추가로 전쟁배상금을 더 받기로 하고 요동반도를 청나라에 돌려줬다. 삼국 간섭은 일본이 조선을 취하려면 갈 길이 멀다는 현실을 인식하는 계기가 됐다. 또한 러시아의 간섭 요청을 거절한 영국과 미국에 일본이 적극적으로 다가가는 시발점이 됐다.
영국은 러시아의 남진을 저지하는 그레이트 게임(Great Game)에서 일본을 이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했다. 크게 보아 영국과 외교의 궤를 같이하는 미국은 고립주의 노선을 내세우며 러시아의 요청을 물리쳤다. 열강들이 러시아를 고립시켰지만 조선은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했다. 1895년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자 고종 임금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소위 아관파천)해 몸을 의탁한 사건이다. 아관파천은 조선이 러시아와 가깝다는 인식을 서구 열강들에 심어줌으로써 조선이 영국을 비롯한 서양 열강의 경계 대상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국제 감각이 없었던 고종의 실수로 조선의 국제적 입지가 더욱 좁아지면서 조선을 일본의 관리 아래에 둬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받게 된 것이다.6. 제1차 영일동맹: 러시아의 국제적 고립영국은 16세기 세계적인 은 생산국으로 떠오른 일본과의 교역에 관심을 가졌으나 인도 등 식민지 개척에 관심이 집중되면서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에 밀려났던 경험이 있었다. 영국과 일본이 다시 만나게 된 것은 19세기 중반 그레이트 게임의 전개가 태평양으로 확대되면서다. 러시아는 태평양 진출을 위해 일본에 접근했고, 영국은 러시아의 영토 야심을 두고 일본에 경고하는 입장이었다. 제임스 스털링 제독은 일본이 러시아를 멀리하도록 만들기 위해 나가사키에 입항했다. 그를 만난 나가사키 봉행(미국의 매튜 페리 제독과의 외교협상을 위해 임명한 관직) 미즈노 다다노리(水野 忠德)는 아편전쟁으로 현실화한 영국의 위협을 차단하기 위해 영국과 화친조약을 맺고자 했다. 스털링 제독 역시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일본에 기지를 둘 필요가 있어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1854년 10월 영일화친조약이 체결됐고, 막부는 시모다와 하코다테를 영국에 개항했다. 두 나라는 1858년 영일수호통상조약을 맺어 에도에 영국대표부를 설치하고 영국인의 에도 거주를 허용했다. 1863년에는 조슈 번에서 영국 유니버시티칼리지에 5명의 유학생을 보냈고 1871년에는 영국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이와쿠라 사절단이 영국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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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차 영일동맹(1902년 1월)은 이렇게 두 나라가 쌓아 올린 관계를 토대로 러시아 군대의 만주 진출이 직접적인 동인이 돼 맺어졌다. 러일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큰 도움이 됐고 조선 내 일본의 이익을 영국이 공식적으로 인정한 국제 조약이었다. 제1차 영일동맹은 영국 국민에게는 환영받지 못했지만 일본에서는 축제 분위기였다고 한다. 일본이 영국에 다가가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방증이다. 영일동맹이 이뤄지면서 독일 문제로 영국과 가까이 지내던 프랑스가 일본으로 기울었고 독일도 적극적으로 러시아 편에 서기 어렵게 됐다. 미국은 쭉 영국 편에 서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가 국제적으로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영일동맹을 맺은 후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협조를 받아 군비를 확충하면서 러시아와의 전쟁을 준비했다. 미국에서 발행한 전쟁 국채로 자금을 조달해 영국에서 최신식 전함을 건조하고 성능 좋은 대포를 구입했다.
7. 다시 보는 한일의정서:사실상 일본의 속국이 되다1904년 2월 일본 해군이 인천항에 있던 러시아 함대를 기습 격멸해 러일전쟁이 시작됐다. 인천해전이 끝나자 대기하고 있던 일본 육군이 제물포에 상륙했고 경복궁을 포위해 조선 조정을 위협하면서 한일의정서를 체결했다. 한일의정서의 내용을 보면 조선이 시정의 개선에 관한 일본의 충고를 따르도록 했고 일본이 군사전략적 필요에 따라 조선의 국토를 임의로 수용할 수 있도록 규정했다. 사실상 주권을 일본에 내어준 것이나 다름없는 항복 문서였다. 을사늑약과 한일합병은 국제적으로 한일 관계를 인정받으려는 국제법상 요식 행위였고 한일의정서에 의해 조선의 국권은 사실상 일본에 의해 탈취됐던 것이다.
한일의정서에 의해 일본은 용산, 평양, 의주 등 세 지역에서 약 1320만 ㎡(400만 평)의 땅을 일화 21만5000원, 평당 약 4전의 헐값으로 수용하고 러일전쟁 수행을 위한 군사기지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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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오군란 이후 체결된 ‘중국조선상민수륙무역장정’으로 조선이 청나라의 직할 속령이 되긴 했지만 무제한의 토지수용권 없이 최소한의 영토주권은 존중받은 것과 비교하면 상황이 훨씬 악화했다. 조선의 영토주권을 송두리째 부정했기 때문이다.
국사 교실에서 일본의 조선 침탈 과정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러일전쟁 전후의 일본의 국제적 움직임을 보다 자세하게 다뤄야 한다. 한일의정서의 내용과 역사적 비중도 더 강조돼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래야 조선왕조가 붕괴하는 과정을 보다 정확하게 이해하고 전후 인과관계와 책임의 소재를 정확하게 알 수 있다.
8. 가쓰라 태프트 밀약: 루스벨트의 편견필리핀, 괌, 사이판, 하와이 등 아시아태평양 지역에 관심이 있었던 미국은 러시아 견제를 위해 일본의 전쟁 국채를 구입해 줬다. 하지만 일본이 러시아를 이기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의 계산도 좀 더 복잡해졌다. 군사 강국으로 떠오른 일본을 더 가까이 두면서도, 동시에 경계할 필요를 느끼게 됐기 때문이다.
1905년 7월 29일 도쿄에서 미국은 일본과 가쓰라 태프트 밀약을 맺는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은 포츠머스 강화 조약이 체결되기 직전에 전쟁장관 윌리엄 하워드 태프트를 단장으로 하는 대규모 사절단을 일본에 보냈다. 다수의 국회의원과 장군이 대규모로 참여했는데 특기할 것은 대통령 영애인 앨리스 루스벨트와 그녀의 약혼남이 포함돼 있었다는 점이다. 화려한 파티가 열린 가운데 태프트 장관과 가쓰라 다로(桂 太郞) 일본 수상의 밀약은 체결됐다.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로 맺은 밀약의 내용은 ‘일본이 조선을 차지하고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한다’는 것이다. 조선의 식민지화를 명문으로 보장하는 대신 필리핀을 비롯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의 이익을 존중하라는 압력을 행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루스벨트는 평소에 조선을 일본에 넘겨줘야 한다는 소신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 러일전쟁이 일본에 유리하게 전개되는 것을 보고 속된 말로 선수를 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어차피 러일전쟁이 끝나면 조선이 일본에 넘어갈 것이니 조선에 대한 일본의 권리를 인정해 주면서 미국의 이익을 챙긴 것이다. 포츠머스 강화회담이 1905년 8월 10일에 개시되고 동년 9월 5일에 종결된 것을 보면 아마도 일본이 미국사절단 단장인 태프트 장관에게 강화를 중재해 달라는 요청을 했을 가능성이 있다. 아니면 반대로 미국이 일본에 중재 역할을 맡겠다고 제의했을 수도 있다. 일본의 전쟁 국채를 매입한 미국 입장에서는 일본이 이기고 있을 때 일본에 유리한 방향으로 강화가 성립되는 것이 미국의 이익에 부합한다는 판단을 했을 수 있다. 어쨌든 밀약을 맺은 미국이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를 중재하는 입장이 됐으니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조선의 운명을 어디로 끌고 갈 것인지는 명약관화했다.
9. 포츠머스 강화조약:조선은 식민지가 되다일본은 지루한 공방전 끝에 뤼순항을 점령하고 봉천에서 러시아군을 물리친 후 쓰시마 해전에서 러시아의 발틱 함대를 완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하지만 군사력은 바닥을 보이기 시작했고 러시아와의 전쟁을 더 이상 수행하기 어려웠다. 러시아 입장에서도 전쟁을 계속 끌고 가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담이 되는 상황이었다. 유럽의 열강들도 일본의 지나친 팽창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분위기를 타고 일본과 우호적인 관계에 있던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이 강화를 중재했고, 포츠머스 조약이 체결되면서 러일전쟁은 끝이 났다.
러시아는 북위 50도 이남의 남사할린섬을 할양하기는 했지만 한 푼의 배상금도 내지 않았다. 도쿄에서 러일전쟁 참전 상이용사들이 폭동을 일으키는 등 소요가 있었지만 일본으로선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조선에 대한 우선권을 확보하고 남만주에서의 러시아 기득권을 빼앗는 데 만족해야 했다. 하지만 조선 입장에선 혹독한 결과였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대립했던 강국 러시아, 청나라, 영국, 미국이 모두 조선에 대한 일본의 우선적 권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포츠머스 조약은 일본 정부가 조선을 관리, 감독하며 보호 조치를 할 수 있다고 규정해 국제법이 인정하는 식민지화의 길을 예정하고 있었다. 한일의정서에 의해 조선의 왕이 이미 일본의 식민지 강요에 사실상 굴복하고 있었던 상황에서 이제 조선의 식민지화는 요식행위만 남았다. 그리고 포츠머스 강화조약 2개월 후인 1905년 11월 17일, 조선을 일본의 보호령으로 하는 을사늑약이 체결됐다.
10. 앨리스 공주와 방미사절단:비극인가, 희극인가태프트 사절단에서 독신인 태프트 장관의 파티 호스티스(Party Hostess)라는 공식 직함으로 활동한 대통령 영애 앨리스는 여행 일정과 관련해 엉뚱한 고집을 피웠다. 공식 방문 일정에 포함되지 않은 조선을 꼭 가보고 싶다고 우긴 것이다. 그래서 태프트 장관은 앨리스와 앨리스의 약혼남인 니콜라스 롱워스(Nicholas Longworth Ⅲ) 하원의원만 조선을 방문하도록 했다.
1905년 9월 20일 무렵에 3박4일 일정으로 조선에 온 앨리스는 왕릉에 있는 석상에 올라타고 기념사진을 찍는 등 천진난만한 행동으로 조선 신민을 당혹하게 만들면서 장안의 화제가 됐다. 고종과 신하들은 미국 왕이 공주를 조선에 보냈다고 생각했다. 이는 미국이 조선에 우호적이라는 뜻이고, 일본의 마수에서 조선을 구해줄지 모른다는 강한 희망으로 이어졌다. 이미 도쿄에서 가쓰라 태프트 밀약이 체결된 사실은 까맣게 몰랐기에 헛된 희망을 가진 것이다.
한 가지 특이한 것은 앨리스의 여정만 물어보아도 그가 일본에 먼저 갔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을 터이다. 앨리스도 굳이 일본을 방문한 사실을 숨기지 않았을 텐데 왜 그런 엉뚱한 희망을 품었는지 이해하기 쉽지 않다. 이미 조선인 중에서도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하는 인재들이 있었고 한국말을 유창하게 하는 조선 거주 미국인도 있었다. 앨리스의 여정조차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은 한마디로 무능한 탓이었다고 할 수밖에 없다. 게다가 이미 앨리스가 조선에 오기 전인 9월 5일에 포츠머스 강화조약이 체결돼 조선에서의 일본의 권리가 국제적으로 인정된 상황이었는데도 조선 조정은 아무것도 파악하고 있지 못했다.
고종은 앨리스가 떠나자 곧바로 감사사절단을 워싱턴에 급파했지만 루스벨트 대통령이 한사코 접견을 거부했다. 이유는 조선은 이미 일본의 것이 됐으니 상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그야말로 산 넘고 물 건너 먼 길을 온 조선 감사사절단이 오갈 때 없는 상황이 됐을 때 측은히 여긴 국무장관이 루스벨트를 설득했다. 아직은 일본과 조선 간에 보호조약이 체결되지 않았으므로 조선은 국제법상 독립주권국가이고, 미국과 통상조약을 맺고 있으니 만날 의무가 있다고 말이다. 루스벨트 대통령 앞에 조선 예법대로 큰 절을 하고 엎드린 사절단은 조선을 도와달라고 간절하게 호소했지만 루스벨트는 의례적인 얘기만 하고 자리를 물렸다.
이 해프닝을 어떻게 봐야 하는가? 웃기에는 너무나 가슴이 먹먹해지는 장면이 아닐 수 없다. 우물 안 개구리로 바깥 정세를 파악하려는 노력도 없고 피를 흘려서라도 영토와 백성과 주권을 지키겠다는 매서운 의지도 없었던 조선 조정은 도대체 조선 백성들에게 어떤 존재인가? 앨리스의 조선 방문으로 벌어진 해프닝은 두고두고 되씹어 보며 성찰의 시간을 가져야 한다. 그래야 다시는 이와 같은 낯 뜨겁고 참담한 일이 반복되지 않는다. 왜 우리 역사 교실에서는 앨리스의 조선 방문에 대해 깊이 다루지 않고 있는지 이해하기 어렵다. 조선 말기 조선 지배층의 문제점을 집약해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앨리스의 조선 방문 해프닝이다.
11. 을사늑약: 누가 매국노인가제1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윌슨 대통령의 민족자결주의가 발표되고 국제연맹이 창립되기 전까지 세계 질서는 약육강식으로 요약되는 힘의 논리가 지배했다. 을사늑약은 갑자기 튀어나온 것이 아니라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결과물이었다. 한반도를 두고 대립했던 열강 중 최후 승리자인 일본은 영국과 미국의 승인을 받고 아무 걸림돌 없이 조선을 입맛대로 요리했다. 흔히 을사늑약 체결 당시에 경복궁 안에서 누가, 어떻게 행동했느냐를 기준으로 매국노와 충신을 구분하는 경향이 있는데 정작 중요한 것은 왜, 어떻게 그런 지경까지 이르게 됐는지를 철저히 파헤치는 데 있다.
실패의 출발점은 임오군란을 제압하기 위해서, 다시 말하면 고종 자신의 권력 유지와 민 씨 일족의 안위를 위해 청군을 불러들인 비열한 행태이다. 실패의 정점은 동학혁명을 진압하기 위해 다시 청군을 불러들여 일본군이 경성으로 진출할 구실을 조선 조정 스스로 내준 것이다. 이때도 역시 고종 자신의 권력 유지와 민 씨 일족의 안위를 위한 결정이었지 나라와 백성의 앞날을 생각한 결정이 아니었다. 청군 파병 요청을 위한 어전회의에서 김병시가 톈진조약에 따라 일본군이 진출할 것이라며 반대했다. 민 씨 일족은 일본군이 진출하기 전에 해치울 수 있다고 했다는데 어전회의가 거의 실시간으로 일본 공사관에 중계되는 현실과 일본이 한반도에 진출할 병력을 비상 대기시켰다는 사실을 모르고 한 얘기라면 이미 국가를 운영할 자격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민영준은 청군 파병과 관련해 “청의 속국이 되는 한이 있어도 가문만 번영하면 된다”는 망언을 서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을사늑약을 앞두고 일본 공사관에 특별활동비 5만 엔이 할당됐는데 지급명세서를 보면 고종과 일부 신하에게 거액의 특별활동비가 지급된 것으로 기재돼 있다고 한다. 일본 측 사료라 100% 신뢰하긴 어렵다. 다만 한일강제병합에 이르러 고종과 순종이 일본 황실의 일원으로 편입돼 왕으로 봉해지고, 왕실 운영비가 조선총독부 예산으로 지급됐던 사실, 왕실 종친과 조정의 고위 관료들이 일본의 작위를 받고 거액의 합병 하사금을 받았던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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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 비춰보면 일본 공사관 특별활동비 지급명세서는 사실에 더 부합된다고 봐도 될 것 같다.
흔히 이완용만 매국노의 대명사로 두들겨 맞는 가운데 다른 이들은 뒤에 숨어 있다. 가장 큰 매국노는 조선 왕실이고, 조선 왕실의 고관대작들이 모두 이완용이다. 고종은 1894년 경복궁을 침입한 일본군과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궁성수비대에 저항하지 말고 무기를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을사년에도 비분강개해 일본군을 공격하던 대한제국 군대의 저항을 막았다. 왜? 본인이 교전 중 사망할 가능성도 두렵고 일본에 심하게 저항해 밉보이면 일본 속국이 된 조선에서 왕 노릇 하기 어려울 것이라는 계산 때문이 아니었을까?
고종의 머리에 나라와 백성은 없었고 자기 자신만 있었다. “이 나라는 내 것이니라”는 그의 말이 그의 모든 행동을 예단하게 한다. 조선의 시작과 끝은 수미일관의 모습을 보인다. 처음엔 대륙 회복이라는 민족의 염원을 무시하고 위화도회군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스스로 명의 번방을 자원해 가문의 든든한 뒷배를 확보했다. 끝에 가선 일본이 중국을 누르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잡으니 가문의 지속적 번영을 위해 일본의 번방이 되는 일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순순히 받아들였다. 민족과 국가의 자존심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던 교활한 기회주의자가 가장 중요한 시기에 엉터리 왕 노릇을 한 것이 민족의 비극이었다. 만약 조선의 왕이 국제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고 태국의 왕이 했던 것처럼 영국 또는 미국을 끌어들여 러시아, 일본, 중국 사이에서 세력균형을 이루고 독립 국가를 유지했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일본에 납치돼 왜곡된 근대화의 길을 가지 않고 독자적으로 제대로 된 근대화의 길을 걸었을 것이다. ‘일본의, 일본에 의한, 일본을 위한 조선 근대화’가 아니라 ‘조선의, 조선에 의한, 조선을 위한 조선 근대화’를 이뤘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