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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terview: 루카스 베드나르스키 S&P글로벌 애널리스트

“리튬 보유국, 배터리 기술 구축엔 한계
품질-규모 앞선 한국이 배터리 경제 강자”

신민기 | 371호 (2023년 06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 자동차를 대체하면서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 산업도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배터리 핵심 원료 광물의 채굴부터 소재 생산과 공급에 이르기까지, 배터리 밸류체인을 둘러싸고 기업·국가 간 파워게임도 치열하다. 리튬 매장국들은 리튬을 손에 움켜쥔 채 가치사슬의 위로 올라가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고, 배터리 전쟁에 한발 늦은 미국과 유럽은 강력한 무역 규제로 판을 뒤집어 보려 하고 있다. 규모와 우수한 품질을 결합한 한국의 배터리 산업은 글로벌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중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는 한편 배터리 재활용 산업과 같은 새로운 기회를 잘 포착해 내야만 배터리 전쟁에서 승자로 남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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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2월 1일, 테슬라의 첫 전기차 로드스터가 빨간 몸체를 뽐내며 미국 캘리포니아 팔로알토 101번 고속도로를 질주했다. 엔진 없이 제로백 3.7초, 최고 속력 201㎞로 달리는 빨간 스포츠카의 당당한 모습은 그동안 대중들이 전기차에 대해 가졌던 부정적인 인식, 즉 짧은 주행거리와 배터리에 대한 불안함을 씻어내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른 지금, 도로 위를 달리는 차 10대 중 한 대는 순수 전기차일 정도로 전기차 시장은 급격히 성장했다.1 모건스탠리는 2030년이면 전 세계 자동차 시장에서 순수 전기차가 차지하는 비중이 31%에 달할 것으로 내다봤다.

전기차 보급이 확대되면서 전기차의 핵심인 배터리 시장 역시 급격히 성장하고 있다. 전기차뿐 아니라 모바일 기기용 소형 배터리부터 발전소를 대체하는 대용량 에너지 저장 장치(ESS)에 이르기까지 배터리는 우리 삶을 바꿔놓고 있다. 탄소중립을 달성하기 위한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자 전동화·무선화로 변화하는 미래 산업에서 배터리는 핵심 동력원이다.

다행히 국내 업체들도 발 빠르게 배터리 산업에 뛰어들어 세계 시장을 선도하고 있다. 지난해 중국을 제외한 글로벌 배터리 시장에서 LG에너지솔루션, SK온, 삼성SDI 등 국내 빅3 업체의 점유율은 53%로 절반을 넘어섰다. 이에 발맞춰 정부도 전폭적인 지원사격에 나섰다. 지난 4월 윤석열 대통령 주재로 ‘2차전지 국가전략회의’를 열고 국내 배터리 기업과 함께 최첨단 2차전지 기술 개발에 2030년까지 20조 원을 투자하겠다고 발표했다.

하지만 글로벌 배터리 시장의 강력한 선두 주자인 중국과 일본을 비롯해 뒤늦게 맹추격에 나선 미국과 유럽의 견제도 무시할 수 없다. 배터리의 핵심 원료인 리튬은 ‘새로운 석유’로 불리며 이를 지키려는 제2의 산유국들과 광물 확보에 나선 기업들 간에 총성 없는 전쟁을 일으키고 있다.

S&P글로벌의 수석 애널리스트인 루카스 베드나르스키(Lukasz Bednarski)는 글로벌 배터리 시장의 손꼽히는 전문가다. 그는 리튬 등 배터리 원자재 시장 및 배터리 산업에 대한 분석과 전망 등을 담아 2021년 책 『Litium』을 출간했다. 이 책은 지난해 한국에서 『배터리 전쟁』이라는 제목으로 번역돼 출간됐다. DBR이 e메일 인터뷰를 통해 글로벌 배터리 산업의 현재와 미래에 대한 그의 생각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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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터리 산업의 현재 규모와 전망은 어떤가.
전기자동차로의 완전한 대체, 산업의 전기화는 현실화될 것인가.

오늘날 전 세계에서 소비되는 원유의 약 79%가 자동차와 비행기, 선박의 연료로 쓰이는데 지금 기술로도 배터리가 석유 수요의 50%를 대체할 수 있다. 최신형 전기자동차는 단 한 번의 충전으로 500㎞ 이상 주행할 수 있고, 충전에 걸리는 시간은 급격히 단축되고 있다. 업계에 정통한 이들 대부분이 더는 전기자동차가 내연기관차를 대체할 수 있을지 묻지 않는다. 대신 대체하는 시점이 언제가 될 것 같냐고 묻는다. 가장 신중한 이들조차 이제는 자동차 산업의 전기화가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배터리 산업은 석유산업이나 반도체 산업에 비하면 아직 작은 규모지만 엄청난 속도로 성장하고 있다. 리튬과 배터리 산업의 성장세는 초기부터 지금까지 꺾인 적이 없다. 리튬 이온 배터리의 수요는 2000년부터 2015년까지 30배 이상 증가했고 2015년부터 2025년까지 10배 더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실제로 리튬 가격은 한때 현물시장에서 팬데믹 이전보다 1000% 가까이 치솟으며 엄청난 상승세를 보였다.

물론 저 때의 활기찬 수준과 비교해 지금은 조정을 받고 있지만 이 또한 예측 가능한 수준이다. 현재 리튬 시장은 수요와 공급이 딱 맞아떨어진 상황인데 내년까지 전 세계적으로 근본적인 공급 부족 이슈가 발생할 것 같지는 않다. 하지만 단기적인 불균형은 발생할 수 있고, 이 때문에 가격 변동성은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


리튬을 새로운 석유, ‘하얀 석유’라고들 말한다. 배터리 산업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리튬과 같은 광물 수요도 늘고 있는데 광물 보유국들은 빗장을 걸어 잠그고 있다. 중국을 비롯한 각국의 자원 확보 경쟁은 어떻게 벌어지고 있는가.

최근 배터리 광물들은 지정학적 쟁점이 됐다. 여러 나라가 리튬을 국유화하겠다던 위협을 행동으로 옮겼고, 이에 맞서 리튬을 확보하려는 외국 자본의 투자 시도는 좌절됐다. 한쪽에서는 자원민족주의가 기승을 부린다고 불평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배터리 광물이 국가의 경제와 안보 관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자원이 됐을 뿐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자원 경쟁이 시장 전체에 좋지 않을 수 있지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리튬이 풍부한 국가들이 매장량을 걸어 잠그고 있다”라고 했는데 그렇다면 이것이 실제로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일단 중국 기업들이 리튬 자원을 확보해 공급망을 통제할 수 있다는 우려가 존재한다. 이러한 두려움이 완전히 근거 없는 것은 아니지만 상황을 좀 더 합리적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중국의 신장 지역에도 리튬이 묻혀 있기는 하지만 기존 기술을 활용해 저렴하게 채굴할 수 있거나 배터리용 고품질 화학물질로 사용할 수 있는 리튬 자원은 거의 없다. 따라서 중국 기업들은 해외에서 자원을 찾아야만 한다. 실제로 중국 자본의 해외 광업 진출은 거침없이 진행돼왔다. 하지만 리튬이 풍부한 호주에 광산을 건설할 경우 여러 가지 제약이 따른다. 호주 정부는 리튬에 수출세를 부과하거나 수출 쿼터를 적용할 수도 있다. 아예 중국으로의 리튬 수출을 콕 집어 이러한 조치를 적용한다 해도 막을 방법은 없다.

중국 자본이 리튬 산업을 누비는 사이 일본이나 한국 등 다른 국가들도 서둘러 자원 확보 경쟁에 나서고 있다. 언젠가 일본 출신 기업가와 대화할 기회가 있었는데 라틴아메리카, 아시아, 아프리카, 호주 어디에나 중국 자본이 한발 앞서 협상 중이거나 이미 거래가 끝났기 때문에 유럽에서 프로젝트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엄청난 자본력을 가진 일본조차도 리튬 쟁탈전에서 중국인들에게 뒤처진 것이다.


리튬 보유국들이 자원의 국유화에 나선 배경과 목표는 무엇인가.

칠레와 아르헨티나, 볼리비아에 펼쳐진 황량하고 아름다운 소금 평원에는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리튬 8000만 t 중 4700만 t의 리튬이 녹아 있다. 리튬 매장이 풍부한 라틴아메리카의 이 지역을 일컬어 ‘리튬 삼각지대’라고 부른다. 리튬 생산업체인 웰스미네랄스의 CEO인 팀 맥커천(Tim McCutcheon)이 ‘리튬의 사우디아라비아’라고 한 칠레에는 세계 최고의 리튬 산지인 아타카마 염원이 있다. 리튬 삼각지대에 속한 또 다른 나라인 아르헨티나는 리튬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많이 묻혀 있는데 그 양이 1700만 t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된다. 볼리비아는 세계에서 가장 많은 리튬을 보유하고 있다. USGS(미국지질조사국)가 추산한 이 나라의 리튬 매장량은 2100만 t이다. 볼리비아 자체 추산치는 훨씬 더 큰데 자국 내 최대 소금 평원인 우유니염지에만 리튬이 1억 4000만 t 있다고 본다.

이들에게 리튬은 혼란한 정치와 빈약한 경제를 타개할 기회다. 이 새로운 석유는 볼리비아의 국민감정이나 국가 전략에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볼리비아인들에게 리튬은 자국의 GDP를 끌어올리는 수단 이상으로 과거의 상처를 씻어내고 새로운 미래를 열어줄 희망이다. 사실 ‘자원의 저주’2 의 대표적인 사례로 꼽히는 볼리비아는 천연자원에 대한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이 지역에 풍부하게 묻혀 있던 은과 주석, 가스에 이르기까지 여러 천연자원이 볼리비아에 가져다준 것은 전쟁과 침략, 내분이었다. 2006년 대통령에 취임한 모랄레스는 이를 극복하려 했고, 2008년 일찌감치 리튬 국유화를 선언했다.

리튬이 풍부한 국가들은 가치 사슬에서 위로 올라가려는 경향이 있다. 이들은 단순한 원자재 수출국에 머물러 있기를 거부한다. 그들은 풍부한 광물을 기반으로 배터리 경제를 구축하기를 원한다. 칠레는 리튬 추출을 중심으로 일련의 산업들을 구축하면서 가치 사슬의 위쪽으로 올라가려는 야심을 드러내고 있다. 태양광으로 얻은 값싼 전기와 막대한 구리 생산량을 등에 업고 직접 배터리와 전기자동차를 생산하겠다는 꿈을 꾸고 있다. 이러한 야망의 실현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매우 어렵다. 우선 자국 내에서 리튬을 배터리 등급의 탄산리튬, 또는 수산화리튬으로 가공(정제)해야 한다. 이마저도 사실상 쉽지 않다고 생각한다. 특히 주요 리튬 생산국인 칠레와 같은 국가에서는 매우 어려울 것이다. 배터리를 만들려면 많은 화학물질과 부품, 장비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무리 리튬이 풍부한 나라라도 전체 공급망을 처음부터 구축하겠다는 건 잘못된 판단이라고 본다.

현대 경제학에서 널리 알려진 기초 이론 중 하나가 이를 뒷받침한다. 바로 데이비드 리카도(David Ricardo)의 비교우위 이론3 이다. 비교우위 이론의 핵심은 교역국들보다 더 낮은 기회비용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생산할 수 있는 산업에 집중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제적으로 칠레는 리튬 추출에 높은 비교우위를 지니고 있다. 리카도의 비교우위 이론에 따르면 칠레만의 독특한 환경과 리튬의 좋은 품질은 추출에 집중할 확실한 근거가 된다. 배터리 공장을 짓는 대신 거기에 집중하는 게 낫지 않을까 싶다.


현재 배터리 산업의 메이저 플레이어는 누구이며 그들이 앞서게 된 이유는 무엇인가.
그 밖에 배터리 시장의 다크호스들은 누구인가.

한국이 진정한 ‘배터리의 나라’다. 배터리를 발명하지는 않았지만 상용화 수준을 새로운 단계로 끌어 올렸다. 일본의 덕목으로 유명한 ‘품질’과 중국의 덕목으로 유명한 ‘규모’를 동시에 구현했다. 특히 양극재에 매우 강한데, 이는 다른 부품들의 경쟁력도 강화하고 있다. 한국의 기업들은 다른 나라의 기업들이 원가 절감 원칙을 밀어붙이던 코로나19 팬데믹의 암흑기에도 생산량을 늘리고 더 나은 내일을 준비하며 전기화에 대한 믿음을 드러냈다. 한국 고유의 배터리 공급망은 이 나라를 배터리 강국으로 자리 잡게 한, 유일무이한 가치를 창출하는 플랫폼이다.

중국은 배터리 기술이 정점을 찍기 전부터 대대적인 전기자동차 보급에 나섰는데 기술의 품질이나 우아함에서는 일본에 뒤처질지 몰라도 신에너지 혁명을 대중에게 전파하는 측면에서는 대단한 성과를 올렸다. 전기 자전거에서부터 출발한 중국의 신에너지 혁명은 외국 회사와의 합작을 통한 노하우 이전, 정부의 보조금 지원 등 그동안 다른 산업을 키우며 효과가 입증된 방식을 통해 배터리 산업을 발전시켰다. 정부가 주도하는 강력한 산업 육성책에 힘입어 CATL과 비야디(比亞迪, BYD) 같은 강력하고 큰 배터리 회사가 탄생했고, 그 외에도 주목할 만한 여러 생산업체가 있다.

특히 일부 중국 기업은 수직 계열화를 통해 전기차 산업과의 연계 가능성을 극대화하고 있다. 리튬과 기타 핵심 자원들을 채굴하고, 화학물질로 가공하며, 부품으로 만들고, 자국 내에서 생산된 배터리에 설치하는 모든 단계가 중국 국경선을 넘지 않고 이뤄지는 것이다. 과거 스탠더드오일이 석유를 채굴한 뒤 가공, 운송, 판매하는 모든 과정을 통합해 석유 왕국을 건설한 것과 같은 전략이다. 이렇게 완성된 배터리들은 비중국인들은 들어본 적도 없을 여러 전기자동차 브랜드에 공급된다. 실제 비야디는 리튬 채굴부터 자동차 생산까지 사업을 다각화한 끝에 지난해 테슬라를 제치고 전기차 판매량 세계 1위를 달성했다. 테슬라도 배터리 자체 생산을 목표로 기가팩토리를 세웠지만 기가팩토리의 실제 운영은 파나소닉이 맡은 만큼 테슬라의 수직 계열화는 아직 갈 길이 멀다고 볼 수 있다.

일본 배터리 산업의 오랜 역사를 생각하면 이 나라가 배터리 경쟁에서 방관자 신세가 됐다는 사실이 매우 놀랍다. 일본은 배터리를 대규모로 생산하기 시작한 첫 번째 나라였다. 일본은 여전히 중요한 기업들을 보유하고 있지만 잠재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호주, 칠레, 아르헨티나는 최고의 리튬 매장국으로 여전히 전망이 밝다. 인도네시아와 필리핀은 주요 니켈 매장국이다. 콩고민주공화국은 여전히 코발트 시장을 지배하고 있다. 모잠비크와 마다가스카르는 배터리 산업의 중요한 흑연 공급국이다.

인도 역시 다크호스를 꿈꾼다. 설사 내세울 만한 리튬이나 전기자동차 시장이 없다고 해도 리튬을 둘러싼 게임에 참가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인도는 군사력과 경제 규모 때문에 미래에 신흥 세력으로 자리매김할 나라 중 하나로 꼽히며 세계적인 강국으로 부상하고 있다. 2019년 인도에서 판매된 전기자동차는 1500대가 조금 넘는 수준으로 미미하고 국경선 안에서 리튬 매장층이 발견된 적도 없다. 하지만 이 나라는 특히 심각한 오염 수준과 수입 석유에 대한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서라도 언젠가는 이 많은 인구가 저렴하게 전기 모빌리티를 이용할 방법을 마련해야 한다. 게다가 인도가 석유를 많이 수입하는 이라크, 이란, 베네수엘라 등은 대부분 정치적으로 불안정하다.

인도의 경제인과 정치인들은 이처럼 배터리에 집중해야 할 이유는 잘 알고 있지만 이 기회를 잘 활용할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의문이다. 인구 규모에 비해 국내 전기자동차 시장은 여전히 걸음마 수준이다. 전력망도 개선해야 할 점이 많다. 인도에도 광업, 화학 처리 및 자동차 부문에 강력한 기업들이 있지만 현재 배터리 산업은 초기 단계에 있다. 기업의 경우 올바른 기회를 선택하는 것이 중요하다. 많은 인도 기업에 이러한 기회는 다른 곳에 있을 수 있다.


미국과 유럽은 배터리 경쟁에서 한발 늦은 것으로 보인다.
왜 그렇게 됐고, 현재 이들은 어떤 전략을 취하고 있나.


몇 년 전만 해도 유럽연합(EU)의 의사결정권자들과 거대 기업들은 배터리는 하나의 상품일 뿐이라고 공개적으로 떠들었다. 배터리 산업은 규모와 노동력에서 경쟁력을 갖춘 아시아 국가들의 작업장에 떠넘기는 게 낫다고 판단했고 설비 과잉을 우려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EU는 이후 천천히 새로운 현실에 눈뜨기 시작했다. EU 집행위원회 부회장은 2017년 10월 열린 회의에서 “유럽 내에 셀 생산 기지가 없다는 사실은 공급망 안보와 운송으로 인한 비용 상승, 시간 지연, 품질 관리 약화, 설계 한계로 EU 내 업계 고객들의 위상을 위태롭게 할 수 있다”라고 지적했다.

사실 유럽 기업들보다 먼저 유럽에 자리 잡고 전기자동차 산업이 태동한 초기부터 이익을 낸 것은 한국인들이었다. LG화학(현 LG에너지솔루션)은 2018년부터 폴란드 브로츠와프(Wroclaw)에서 배터리 공장을 가동했는데 유럽에서 유일하게 제대로 된 전기자동차 배터리 생산업체라 할 수 있는 스웨덴의 노스볼트가 2021년에서야 가동을 시작한 것과 비교하면 훨씬 발 빠른 움직임이었다. LG에너지솔루션의 폴란드 배터리 공장은 지난해 한 해에만 테슬라 모델3를 기준으로 200만 대분의 배터리를 생산하는 등 엄청난 생산량을 올리고 있다. 이에 더해 관련 설비들이 잇달아 생겨나면서 폴란드를 비롯한 유럽의 배터리 산업 생태계를 확장시키고 있다. 실제로 벨기에의 배터리 기업 유미코아는 LG에너지솔루션에 배터리에 들어가는 양극재를 납품하려 폴란드에 공장을 따라 세웠다.

배터리 공장을 원하지 않은 EU였지만 여전히 혁신을 선도하고 싶어 하긴 했던 만큼 배터리 산업의 중요성에 관한 많은 연구와 논의를 진행해왔다. 많은 연구 논문이 발표되고 있고 정치적으로도 강력한 지원이 이어지고 있다. 또한 NGO와 무역협회의 생태계도 매우 강력하다. 하지만 어찌 된 일인지 유럽에서 배터리 산업을 도약시키기 위한 실질적인 ‘자금’은 책정되지 않았다. 배터리 산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세제 혜택이나 정부의 지원금은 없었던 것이다.

미국은 인플레이션 감축 법안(IRA, Inflation Reduction Act)을 통해 중국 등 배터리 시장에서 앞서 나간 다른 나라를 견제하면서 자국의 산업을 보호하는 일을 가장 먼저 해냈다. IRA의 골자는 완제품은 물론이고 배터리를 이루는 부품과 물질 모두 미국이나 미국과 FTA를 맺은 나라에서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나는 미국인들이 더 실용적이라고 생각한다.

대신 EU는 배터리 재활용을 지원하기 위해 가치 있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환경적 관점에서도 옳은 일이다. 곧 유럽 시장에 출시되는 모든 전기자동차 배터리는 법에 따라 원재료의 상당 부분을 재활용으로 만들어야 한다. 이는 배터리 재활용 생태계가 성숙하기 위해 필요한 법적인 조치로, 현재 시점에선 EU가 이 문제에 가장 발 빠르게 대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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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석유산업의 중심이었던 서구 세계에서 아시아, 라틴아메리카로의 경제 패권이 이동하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석유산업의 역사는 미국이 주도하는 가운데 서구 세계와 중동을 중심으로 흘러왔다. 반면에 리튬 산업은 아시아와 라틴아메리카에 집중돼 있으며 그 선두에는 중국이 있다. 중국, 한국, 일본이 리튬 이온 배터리 산업에서 차지하고 있는 위상은 정치적·경제적 영향력의 중심이 서구에서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는 또 다른 신호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 석유 중심의 헤게모니가 바뀌었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본다. 석유와 가스 산업은 여전히 왕이고 당분간은 그럴 것이다. 물론 나는 교통수단의 전기화와 재생에너지원 개발을 지지하고, 인류의 미래가 여기에 달려 있다고 보는 입장이다. 하지만 현실 감각을 잃지 않으려면 수치와 통계를 바탕으로 산업별 균형을 잘 유지해야 한다.

다만 나는 서구 국가들이 배터리 공급망 구축에서 결정적인 기회를 놓쳤다고 생각한다. 오랫동안 서구는 각종 산업에서 연구개발(R&D)에만 집중하면서 제조는 다른 지역 기업들에 맡겨왔다. 이는 여러 가지 이유로 잘못된 접근 방식이다. 무엇보다 수많은 혁신은 생산 현장에서 일어나기 때문이다. 조직은 비용과 규모에 맞게 제조하는 방법을 알아야 한다. 서구는 이러한 노하우를 아시아에 빼앗겼다. 이제 아시아 기업들이 유럽에 배터리 공장을 세우고 있다. 가령 오늘날 유럽의 배터리 공급망이 확실히 자리 잡게 된 계기 자체가 한국의 유럽 내 배터리 공장 건설 덕이었다. 그러면서 관련 업체들이 유럽으로 몰려들었다. 중요한 고객을 따라온 것이다. 이로써 유럽인들은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는 기회를 얻게 됐다. 1990년대 유럽의 하이테크 기업들이 아시아에 투자하며 노하우를 전수했던 것과는 정반대의 상황이다. 이제 서구 사회가 아시아에서 배워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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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배터리 산업은 어떤 도전에 직면해 있나. 공급 과잉을 우려하는 목소리도 있다.
앞으로 배터리 산업에서 주도적 역할을 하려면 어떤 전략이 필요하다고 보는가.

병목 현상과 공급 부족에 대한 지속적인 걱정은 매우 빠르게 성장하는, 복잡한 공급망을 가진 산업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이다. 용량을 계획하기가 어렵고, 산업의 한 부문에서는 오버 슈팅(시장가격의 폭등, 또는 폭락)이 발생하고 다른 부문에서는 과소 투자가 발생할 위험이 항상 존재한다. 다만 주목할 만한 몇 가지 흐름이 있다. 배터리 원료 정제 산업의 발전, 아프리카 등 새로운 리튬 광산 개발, 마지막으로 중국에 대한 공급망 의존도를 낮추려는 노력 등이 그것이다.

전기차 외에 다른 전기 모빌리티로 눈을 돌려볼 수도 있다. 이스라엘의 스타트업인 이비에이션은 배터리를 이용하는 전기 여객기를 만든다. 지난해 이비에이션이 설계하고 제작한 9인승 여객기 ‘앨리스’는 첫 시험 비행에 성공했는데 한국의 배터리 기업 코캄이 여기에 들어가는 배터리를 납품하고 있다. 노르웨이의 비료 생산 기업인 야라(Yara)는 비료 컨테이너를 운반하는 자율 항해 전기 화물선을 세계 최초로 선보이기도 했다.

배터리 재활용 산업도 새로운 기회다. 지금 달리고 있는 전기차용 배터리의 수명이 평균 15년 정도라고 치면 2030년부터는 폐배터리가 폭발적으로 쌓여갈 것이다. 한정된 자원과 환경 문제를 고려하면 배터리 재활용은 당연한 수순이다. 일본의 JX금속과 중국의 거린메이(格林美, GEM)와 같은 회사들이 이 분야에서 앞서 있는데 중국은 아예 전기차용 배터리의 재활용을 의무화하는 등 정부가 나서서 폐배터리 재활용 산업의 발전을 촉진하고 있다.

차세대 배터리 개발도 계속되고 있다. ‘꿈의 배터리’라고 불리는 전고체 배터리는 전해질이 액체 상태인 리튬이온배터리와 달리 전해질이 고체인 데다 인화성 물질이 포함되지 않아 충격을 받더라도 발화할 가능성이 낮아 안전하다. 또 액체 전해질보다도 에너지 밀도가 높고 충전 시간도 짧다. 이렇듯 배터리 산업 내에도 새로운 시장과 기술 발전을 통한 시장 개척의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이 기회를 누가 선점하느냐에 따라 앞으로 배터리 시장의 승자와 패자가 갈리게 될 것이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배터리 산업에 전하는 제언이 있다면.

나는 영국 런던에 살며 글로벌 배터리 시장을 분석하고 있지만 조국인 폴란드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대해서도 민감할 수밖에 없다. 폴란드에서 배터리 산업을 일으키고 발전시킨 것은 다름 아닌 머나먼 한국의 배터리 기업들이었다. 한국의 LG에너지솔루션이나 SK온, 삼성SDI는 세계에서 가장 거대하면서도 혁신적인 배터리 회사다. 여전히 과감한 투자와 품질 개발에 나서고 있는 만큼 당분간 이런 위상이 바뀌지 않을 것으로 본다.

최근 미국 IRA 시행으로 배터리 업계에는 폭풍이 불어닥치고 있다. 미국이 강력한 무기를 꺼내 들면서 그간 중국을 중심으로 흘러온 글로벌 배터리 산업의 지형도에 큰 변화가 예고된 것이다. IRA에 따르면 중국은 물론이고 일본과 EU 모두 미국과 FTA를 체결하지 않아 최혜국 대우를 받지 못하지만 운이 좋게도 한국은 미국과 FTA를 맺고 있어 배터리 산업에 있어서는 법안의 혜택을 볼 것으로 전망된다. 한국이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앞서 나간다면 배터리는 반도체에 이어 한국의 미래를 책임질 먹거리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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