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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개발국 기업, 세계경제 지도를 바꾼다

나준호 | 6호 (2008년 4월 Issue 1)
세계 경제에서 브릭스(BRICs) 등 신흥개발국이 차지하는 영역은 이미 작지 않다. 지난해에는 중국의 일개 지방에 불과한 광둥(廣東)성의 GDP(4220억 달러)가 대만 수준(3700억 달러)을 넘어섰다. 이런 추세가 이어지면 2015년에는 한국을 추월할 수도 있다.

신흥개발국의 실질구매력 환산 GDP는 1990년 세계 전체의 40%에 불과했지만, 올해 50%, 2015년에 57%까지 늘어날 것으로 전망된다. 세계 경제의 다극화가 계속 진행 중이란 의미다.

최근 선진국의 미래전략 보고서는 신흥개발국이 실물은 물론 금융 등 다양한 시장에서 세계 경제를 뒤흔들 것이란 전망을 쏟아내고 있다. 도이치방크 자산운용이 지난해 9월 펴낸 ‘글로벌화의 새로운 성격’ 보고서는 미래 글로벌화 10대 트렌드 중 절반이 신흥개발국의 영향력 증대와 관련 있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앞으로 신흥개발국은 세계 경제의 지형도를 어떻게 바꿔나갈 것인가.
 
신흥개발국 기업, 기술 혁신의 주체로
신흥개발국 기업들은 현재 풍부한 천연자원과 저임금, 정부 지원을 기반으로 선진국 기업들을 추격하고 있다. 앞으로는 신흥개발국 기업들이 기술 혁신에 힘입어 선진 기업들을 앞서는 경우도 빈번하게 나타날 것이다.

물론 이들이 단기간 내에 첨단기술 분야에서 선진 기업들과 직접적으로 경쟁하는 것은 가능하지 않을 것이다. 기술 기반 구축의 역사가 짧은 특성상, 첨단 기술 개발 게임은 애당초 지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대신 이들은 선진 기업들이 약점을 가진 제조기술 혁신과 저원가 기술 혁신에서 차별화를 시도할 것이다.

제조기술 혁신은 수율 개선이나 조립, 금형 등 제조 공정상의 기술 혁신을 의미한다. 이와 관련해 주목할 기업은 대만의 홍하이(鴻海·Hon Hai)다.

전자기기 제조 대행업체(EMS)인 이 회사의 매출액은 지난해 600억 달러를 넘었고, 올해는 800억 달러가 목표다. 이런 추세라면 2
3년 후엔 삼성전자(2007년 글로벌 매출 1034억 달러)마저 넘어설 전망이다.

홍하이가 2000년대 들어 연 30% 이상의 고속성장을 계속한 비결은 뛰어난 제조 기술에 있다. 홍하이는 금형, 케이스 제조, 조립 분야의 생산 기술을 집중적으로 개발했다. 그 결과 아무리 복잡한 제품 형태라도 고객 요구대로 제조해 줄 수 있게 됐다. 애플 아이폰의 이음새 없는 마감 처리는 홍하이가 보유한 레이저 용접 기술의 ‘작품’이다. 소니, 애플, 모토롤라 등 다양한 글로벌 전자기업들이 홍하이에 제품 생산을 맡긴다.

저원가 기술 혁신은 소득이 낮은 신흥개발국 40억 인구를 공략하기 위한 것이다. 성능 향상보다는 원가 절감, 내구성 증대, 독특한 문화적 특성 반영 등을 강조한다. 그동안은 선진 기업들이 20달러짜리 휴대전화나 100달러 노트북 PC 등을 내놓으며 앞서 왔다. 하지만 앞으로는 신흥개발국 기업들이 저원가 기술 혁신에서 강점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중국의 통신장비 기업인 화웨이를 보자. 이 회사는 시스코나 에릭슨 등 선진 업체보다 방대한 제품군을 갖고 있지만, 매출 대비 R&D 비용은 10% 미만이다. 업계 평균인 13
14%보다 훨씬 낮다. 기술 인력들에게 제품은 물론 개발 과정의 저원가 혁신까지 동시에 강력하게 요구하기 때문이다. 화웨이는 경쟁사보다 40% 이상 싼 가격에 통신장비를 공급함으로써 세계 통신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가고 있다.

인도 기업들도 싼 가격으로 만족할 만한 성능의 제품을 만드는 ‘절약형 기술(frugal enginee-ring)’ 개발에 온 힘을 기울이고 있다. 상대적으로 소득이 낮은 자국 소비자들을 만족시키려면 ‘싸고도 좋은 제품’을 만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인도 기업들은 풍부한 기술 인력과 선진국 기업들의 하청을 맡으면서 축적한 제조기술을 기반으로 저원가 혁신을 주도하며, 최근에는 선진국 기업들의 ‘역할 모델’ 역할까지 하고 있다. 인도 타타자동차가 선보인 240만 원대의 초저가 자동차 ‘나노’가 대표적인 사례. 이 차에 자극을 받은 선진국 기업들은 너도나도 초저가차 생산에 뛰어들고 있다. ‘나노’는 다양한 산업에서 신흥개발국 기업들이 저원가 기술 혁신의 주도자가 될 수 있음을 잘 보여준다.

신흥개발국 기업, 글로벌 M&A의 주체로
신흥개발국 기업의 또 다른 약진은 글로벌 M&A에서 이뤄질 것이다. 이들은 이미 선진국 기업을 쇼핑하기 시작했다. 보스턴컨설팅그룹(BCG)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1997년 불과 4건에 불과했던 신흥개발국 기업들의 해외 M&A가 2006년에는 72건으로 크게 늘었다. 레노보의 IBM PC 사업 인수, 사우디 석유 공사의 GE 플라스틱 인수, 화웨이의 3Com 인수 시도가 그 예이다. 한국 기업들이 해외 기업의 M&A를 주저하는 것과는 크게 차이나는 대목이다.

신흥개발국 기업들은 앞으로도 압축 성장, 글로벌 브랜드력 획득, 첨단 기술 확보라는 세 마리 토끼를 한꺼번에 잡기 위해 글로벌 M&A를 더욱 강화할 것으로 전망된다. 특히 서브프라임 위기는 신흥개발국 기업들의 M&A 강화에 좋은 기회가 될 수 있다. 선진국에서 자금 마련을 위한 대출이나 채권 발행이 어려워지면서 선진국 기업들의 M&A가 주춤하고 있기 때문이다. 1980년대 미국 경기가 어려워지면서 일본 기업들이 미국 기업 매입에 대거 나섰던 것처럼, 신흥개발국 기업들은 향후 3
4년간 글로벌 M&A의 새로운 큰 손으로 떠오를 것이다.

당연한 일이지만 한국 기업들은 신흥개발국 기업들이 첨단 기술 확보 목적에서 글로벌 M&A를 시도하는 경우에 특히 주의해야 한다. 신흥개발국 기업들은 이런 M&A를 통해 저원가 기술 및 제조 기술 혁신을 넘어 첨단 제품·기술 개발이란 새로운 고지를 쉽게 확보할 수 있다. 최근 휴대폰 시장에서 모토롤라의 휴대폰 사업 매각이 화제가 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사실 삼성, LG, 소니에릭슨 등 기존 기업들에게 모토롤라는 인수 대상으로 크게 매력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매각 추이에 촉각을 곤두세우는 이유는 화웨이나 ZTE 등 중국의 신흥 통신 기업들이 이를 인수할 가능성 때문이다. 모토롤라의 기술 특허, 글로벌 브랜드가 화웨이가 가진 저원가 경쟁력, 신흥개발국 통신 사업자와의 밀월 관계와 결합된다면 엄청난 파장이 야기될 것이다. 모토롤라 브랜드의 슬림폰이 불과 10
30달러의 가격에 중국, 인도, 아프리카에서 팔린다면 어떤 결과가 일어날까?
 
국부펀드를 통한 신흥개발국의 정치력 강화
신흥개발국 국부펀드의 금융 시장 영향력 증대도 눈길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다. 신흥개발국의 국부펀드는 지난해 헤지펀드, 사모펀드와 함께 세계 금융시장의 ‘3대 큰 손’으로 부상했다. 중국, 러시아, 인도 등 신흥개발국들이 경제 성장을 통해 축적한 자본으로 국부펀드를 경쟁적으로 조성, 활용하려 하기 때문이다.

모건스탠리에 따르면 세계의 국부펀드 규모는 지난해 기준으로 2.9조 달러에 달한다. 이는 헤지펀드(1.5조 달러)나 사모펀드(0.7조 달러)보다 훨씬 큰 규모이며, 2015년에는 4배 가까이로 늘어나 12조 달러 가량이 될 전망이다.

서브프라임 위기는 국부펀드가 그 위력을 드러내는 계기가 됐다. 선진국의 돈줄이 막히면서 헤지펀드나 사모펀드의 활동이 크게 위축되는 반면, 신흥개발국 국부펀드들은 600억 달러의 거액을 서방 금융 기관에 수혈하는 저력을 보여줬다.

앞으로 특히 문제가 될 소지가 있는 것은 신흥개발국 국부펀드가 자국의 정치적, 전략적 이해관계를 위해 움직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이다. 물론 국부펀드들은 자신들의 글로벌 투자 확대가 단순한 재무적 자본 투자에 불과하다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를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중국의 국부펀드는 크게 3가지의 투자 방향을 보일 전망인데, 모두가 만만찮은 영향력과 시사점을 가지고 있다.
첫째 방향은 석유, 철광석, 곡물 등 전략 원자재의 선(先) 확보다. 이미 지난해 하반기부터 중국 등의 국부펀드 자금 유입은 원자재 가격 상승의 중요한 원인으로 지목받고 있다.
둘째, 세계적인 정보력, 금융 기법, M&A 경험을 지닌 글로벌 금융기관에 대한 지분 투자다. 중국 국부펀드는 지난해 모건스탠리, 베어스턴스, 블랙스톤 등 선진 금융기관에 집중 투자했다. 이는 향후 중국 기업들의 M&A 추진 시 이들이 가진 정보력, 금융 기법, M&A 경험을 직간접적으로 활용하겠다는 의도로 해석할 수 있다.
셋째, 첨단 기술을 보유한 선진 전자·IT 기업의 매입 또는 자국 기업의 M&A에 대한 지원이다. 지난해 8월에는 중국 기업이 국부펀드의 지원 하에 하드디스크 업체인 시게이트 매입을 시도한다는 소문이 퍼져 논란이 일기도 했다. 신흥개발국 국부펀드가 자국 기업의 글로벌 M&A에 있어 직간접적인 지원을 해줄 공산이 커지고 있다.

신흥개발국에 대한 관점 변화 필요
앞서 살펴본 것처럼 향후 글로벌 경제에서 신흥개발국의 영향력은 더욱 강화될 전망이다. 구체적으로는 신흥개발국 기업의 기술 역량 강화, M&A 시장 참여 확대, 국부펀드의 세계 금융 시장 영향력 증대 등 다양한 현상들이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기업들은 단순히 신흥개발국을 유망 시장이나 생산 기지의 관점에서 접근해 왔다. 그러나 앞으로는 신흥개발국과 신흥개발국 기업을 경쟁의 관점에서도 주의깊게 살펴봐야 한다. 신흥개발국 기업들의 기술 역량 강화에 맞서 어떤 형태의 기술적 차별화를 도모할 것인지, 선진 기업의 브랜드를 인수한 신흥개발국 기업들에 대응해 어떤 대응책을 세울 것인지 고민해야 한다는 말이다. 나아가 최근 새만금 개발의 사우디 투자 유치 사례처럼 경우에 따라서는 재무 전략 수립에 있어 신흥개발국 자본 유치 또한 고려해야 한다.

세계는 역동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특히 예상 외로 빠른 신흥개발국과 신흥개발국 기업의 성장으로 인해 향후 우리 경제 및 기업은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으로 전망된다. 보다 주의 깊은 관심과 대응 방향 모색이 필요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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