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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ity Innovation -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전 세계에 ‘드라큘라 스토리’를 파는 루마니아 브라쇼브

김민주 | 53호 (2010년 3월 Issue 2)

“검은 망토를 두르고 밤에 활동한다. 날카로운 송곳니로 사람의 목을, 특히 젊은 여성의 목을 물어 피를 빨아먹는다. 물린 사람 역시 영원히 흡혈귀로 만들어버리는 전염성 강한 존재다.”
 
국경을 뛰어넘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흡혈귀 ‘드라큘라’ 얘기다. 드라큘라는 영화, 애니메이션 등 다양한 버전으로 우리에게 다가왔다. 몇 년 전 TV 시트콤 ‘안녕, 프란체스카’도 드라큘라로 대표되는 흡혈귀를 소재로 한 것이다. 드라큘라가 지역과 세대를 불문하고 널리 알려진 이유는 뭘까.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실제 드라큘라 모델을 루마니아에서 만나게 된다.
 
‘드라큘라 스토리텔링’
원래 뱀파이어(vampire)의 기원이 되는 드라큘라 백작의 전설은 아일랜드의 괴기 소설가 브램 스토커(Bram Stoker, 1847∼1912)가 쓴 <드라큘라>라는 소설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1847년 더블린에서 태어난 브램 스토커는 어렸을 때 병치레가 잦아 많은 시간을 침대에서 보내야 했다. 그의 어머니는 그런 병약한 아들을 위로하기 위해서 아일랜드의 동화나 민담, 전설과 같은 흥미진진한 이야기들을 많이 들려주었는데, 이런 영향 때문인지 그는 커서 괴기 소설 작가가 됐다. 그는 왈라키아 공국의 블라드 3세(1431∼1476)에 대한 실제 이야기를 듣고 1897년에 소설 <드라큘라>를 출간했다. 이 괴기 소설은 당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15세기 중반 루마니아 옛 왕국 중 하나인 왈라키아 공국(트란실바니아 지역)의 군주였던 블라드 3세는 오스만투르크에 대항해 민족을 지키고, 강력한 부패 척결 정책으로 국민들의 지지를 받았던 국민 영웅이었다. 그는 오스만투르크와의 전투에서 잡힌 포로들을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잔혹한 처벌을 가하곤 했는데, 적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주기 위해서였다. 그의 별명은 ‘블라드 테페스(Vlad Tepes)’인데 ‘꼬챙이로 찌르는 블라드(Vlad the Impaler)’라는 뜻이다. 이 이야기가 후대에 퍼지면서 그는 브램 스토커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흡혈귀의 역할 모델이 됐다.
 
드라큘라는 왜 그렇게 잔인한 군주가 됐을까? 단순히 성격 파탄자여서 그랬을까, 아니면 그렇게 된 특별한 시대적 환경이 있었던 것일까? 드라큘라 역시 인간이었다. 가족사의 아픔이 내재된 내면의 폭력성을 일깨워 냉혈 군주로 만들었다.
 
14세기 말 왈라키아 공국은 블라드 가문이 통치하고 있었다. 블라드 2세는 외적의 침입으로부터 국가를 잘 지켜냈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지기스문트로부터 ‘드라큘(Dracul·용을 뜻하는 ‘dragon’을 의미)’의 기사단의 기사로 임명받았다. 그래서 블라드 2세는 ‘블라드 드라큘’로 불리게 됐다. 드라큘 끝에 a가 붙은 드라큘라는 ‘용의 아들’을 의미한다.
 
그런데 1436년 블라드 2세는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버티지 못하고 패배하고 말았다. 블라드 2세는 둘째와 셋째 아들과 함께 오스만투르크로 끌려갔고, 나중에 드라큘라가 된 둘째 아들은 자그마치 16년 동안 참담한 포로 생활을 했다. 그때 마침 왈라키아에서 블라드 2세와 장남이 암살당하자, 오스만투르크는 이 둘째 아들을 왈라키아에 보내 왕위를 계승토록 했다.
 
오스만투르크에 복수의 칼날을 갈았던 블라드 3세는 이때부터 공포정치를 시작했다. 오스만투르크의 사신들을 꼬챙이에 꽂아 오스만 사람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오스만 군들이 왈라키아를 공격하러 올 때 진군 길에 꼬챙이에 꽂힌 오스만 군인들의 시신을 전시해, 사기가 떨어진 오스만 군을 격퇴하기도 했다. 블라드 3세는 이처럼 외부 사람들에게는 잔혹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는 했지만, 왈라키아 사람들에게는 나라를 지킨 국가적 영웅이자 기독교를 지켜낸 종교적 영웅이었다.

 
브라쇼브 남서쪽 32km에 위치한 브란성. 1212년 독일기사단의 요새로 건축되었고 이후 몇 차례 개축을 거쳐 지금의 낭만적인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드라큘라 스토리를 팔아라
루마니아인들은 그 후에 실제로 존재했던 드라큘라의 흔적을 어떻게 관광 상품으로 만들었을까. 블라드 3세가 예전에 브란성(Bran Castle)에 잠시 머물렀던 적이 있었는데 이 성은 이제 ‘드라큘라의 성’이 됐다.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지역의 브라쇼브(Brasov)에 위치한 브란성을 찾는 관광객은 연간 25만 명에 이른다. 게다가 매년 관광 수입만 100만 유로(약 12억 원) 이상이다. AFP 통신에 따르면 이 성의 부동산 가격은 2500만 유로로 추산됐다. 1377년 브라쇼브 상인들이 세운 브란성은 루마니아 정부와 주민에게 ‘황금알을 낳는 거위’나 다름없다. 성 내부는 해골로 장식되어 있고, 성 주변에는 루마니아를 방문하는 관광객의 흥미를 끌기 위한 상점과 식당이 즐비하다. 상점에선 드라큘라의 모습을 새긴 티셔츠, 인형, 술이 팔리고 있고 레스토랑과 카페의 탁자까지 관 모양으로 바꿔놓았다. 아예 호텔 내부를 성 입구에 있는 좁고 어두컴컴한 ‘공포의 터널’처럼 만들어놓은 곳도 여러 곳이다. 블라드 3세의 아버지인 블라드 2세가 1431년부터 1436년까지 살았던 집으로 블라드 3세가 태어난 집도 현재 보존돼 있다. 산상 교회는 루마니아 무레슈주 시기쇼아라 역사 지구에 있는 교회인데, 그 근처 광장에 있는 황갈색 3층 건물이 블라드의 생가다. 현재는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드라큘라 테마 공원도 조성 예정
블라드 3세는 과연 어디에 묻혀 있을까? 확실하지는 않지만 루마니아의 수도인 부쿠레슈티 인근의 스나고프 수도원에 묻힌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스나고프는 루마니아 최고 문화 유적 중 하나였는데, 근세 이후 한참 동안 관리가 소홀해져 그만 폐허가 되고 말았다. 2009년 들어 루마니아 관광부는 드라큘라 백작의 실제 모델이었던 블라드 테페스의 묘지가 있는 수도 부쿠레슈티 주변에 6000만 달러를 들여 테마 공원을 짓겠다고 발표했다. 공원 안에는 ‘공포 체험관’을 비롯해 각종 회의 시설, 도서관이 들어설 예정이다. 전 세계 4000여 개에 이르는 드라큘라 애호가 클럽까지 연결할 수 있다면 충분히 상업성이 있을 것으로 루마니아 당국은 보고 있다. 루마니아 관광부는 당초 블라드의 출생지로 알려진 시기쇼아라를 테마 공원 후보지로 검토해왔으나 중세 고성과 산림에 대한 훼손을 피하면서 관광객을 많이 유치할 수 있는 수도 인근이 최종 후보지로 적절하다고 결정했다. 루마니아 정부는 3150만 달러가 드는 이 사업이 3000개 일자리를 창출하고 연간 수십만 명의 관광객을 유치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보고 있다.
 
원 소스, 멀티 유스의 스토리텔링
흥미롭게도 드라큘라 가문의 대가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의 후손 중 한 명이 오토마르 루돌페 블라드 드라큘라인데 올해로 62세다. 그는 중세 때 지어진 독일의 브란덴부르크 주 셴켄도르프의 한 성을 8년 전에 구입해 ‘흡혈귀 테마 공원’을 조성했다. 이 성에 박쥐집과 마늘밭을 마련하고 다양한 관, 영구차, 핏빛 드라큘라 포도주까지 제공해 관광 명소로 발돋움했다. 그런데 이 후손은 곧 영국으로 이주할 계획이다. 드라큘라를 싫어하는 독일의 신나치주의자들이 이 성에 갈고리십자가(하켄크로이츠)와 각종 낙서를 했고 열 번이나 불을 지르기도 했기 때문이다. 어찌됐건 드라큘라 가문의 시련은 현재 진행형인 셈이다.
 
드라큘라는 때때로 공익 목적으로 활용된다. ‘드라큘라 백작’이 국제적십자사 독일 지부의 헌혈 캠페인에 검은 망토의 드라큘라 복장으로 참가해 한꺼번에 시민 800명에게서 피를 받아낸 적이 있다. 드라큘라에 대한 기념물은 루마니아에만 있지 않다. 런던의 마담 투소 박물관의 ‘공포관’ 입구에는 블라드 3세의 얼굴 동상이 세워져 있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가 감독한 영화 <드라큘라> 초반부에 등장하는 배우 게리 올드만이 바로 이 동상의 모습을 보고 분장을 했다고 한다.
 
15세기 실존 인물이었던 드라큘라에 상상력이 더해져 소설로 탈바꿈을 한 드라큘라는 엄청난 사업 기회를 만들었다. 실존 인물의 활동 지역이었던 루마니아 지역의 브란성과 인근 지역의 캐릭터 상품, 상점, 레스토랑만이 아니다. 다양한 지역에서 드라큘라 테마 공원을 만들어냈다. 드라큘라 소재는 100여 년 동안 영화, 연극, 뮤지컬, TV 시리즈, 만화, 비디오 게임 등 다양한 문화 엔터테인먼트 콘텐츠로 꾸준한 인기를 누려왔다. 한마디로 말해 드라큘라는 잘 만들어진 스토리가 다양한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원 소스 멀티 유스(one source multi use)’의 대표적인 사례가 아닐 수 없다.
편집자주 한국 최고의 마케팅 사례 연구 전문가로 꼽히는 김민주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가 전 세계 도시의 혁신 사례를 분석한 ‘City Innovation’ 코너를 연재하고 있습니다. 급격한 환경 변화와 거센 도전에도 굴하지 않고 성공적으로 도시를 운영한 사례는 행정 전문가뿐만 아니라 기업 경영자들에게도 전략과 조직 운영, 리더십 등과 관련해 좋은 교훈을 줍니다. 독자 여러분의 많은 관심 바랍니다.
 
필자는 마케팅 컨설팅 회사인 리드앤리더 대표이자 비즈니스 사례 사이트인 이마스(emars.co.kr)의 대표 운영자다. 서울대와 시카고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했으며, 한국은행과 SK에너지에서 근무했고 건국대 겸임 교수를 지냈다. <로하스 경제학> <글로벌 기업의 지속가능경영> <하인리히 법칙> 등의 저서와 <깨진 유리창 법칙> 등의 역서가 있다.
  • 김민주 김민주 | - (현) 리드앤리더 컨설팅 대표이사, 이마스 대표 운영자
    - 한국은행, SK그룹 근무
    - 건국대 경영대학원 겸임교수
    mjkim8966@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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