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화는 우리 의식 속에 다양한 형태로 이미지화돼 있다. 농촌 어른들은 자식들이 보내주는 해외여행을, 대학생들은 ‘취업 수단’의 하나인 해외 어학연수를, 기러기 아빠는 환율 변동으로 매달 달라지는 송금액을, 기업은 환율에 따른 손익이나 가격 경쟁력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개인 주식거래자는 24시간 쉼 없는 세계 주식시장을 세계화의 이미지로 생각할 것이다.
세계화와 세계 도시화의 이면에는 국제 금융자본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2008년 엘렌 브라운은 <달러>라는 책에서 세계화의 동력인 국제 금융의 이면을 조심스럽게 펼쳐 보였다. 1971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이 달러의 금 태환 정지를 선언한 이후, 신용 창출의 자유화와 화폐의 상품화를 통해 금융시장의 세계화를 촉발했다.
금융시장의 자유화와 세계화와 맞물려 1980년대 이후 ‘세계 도시(World City)’ 논의도 시작됐다. 1990년대 이후에는 국가 경쟁력의 핵심으로 메가시티리전(Mega City Region·MCR), 즉 초광역적 대도시권(광역경제권)이 주목받고 있다. 일본은 이 같은 변화에 대응해 국토 정책의 기조를 균형 정책에서 선택과 집중을 통한 성장으로 바꿔 국토 개발의 밑그림을 다시 그리고 있다.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와 글로벌컨설팅사인 모니터그룹이 최근 실시한 20개 메가시티리전 경쟁력 평가에서 도쿄와 오사카경제권은 각각 종합 순위 3위와 10위를 차지했다.
아시아 도시 간 경쟁 촉발
1873년 쥘 베른이 발표한 <80일간의 세계 일주>에서는 영국 신사 필리어스 포그가 프랑스 출신의 하인 파스파르투와 함께 런던을 떠나 수에즈에서 인도로, 중국에서 일본으로,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다시 대서양을 건너 80일 만에 런던으로 돌아왔다. 20세기 후반에는 그 시간이 3일로 단축됐다. 극단적으로 말해 19세기 세계를 횡적으로 관리하는 데 약 80개의 세계 도시가 필요했다면, 오늘날은 3개로 충분하다. 향후 교통 통신의 발달로 세계 일주가 하루로 단축된다면, 세계 도시는 뉴욕 하나만으로 족할지도 모른다.
코모리(小森正彦)는 <아시아의 도시 간 경쟁>(2008년)에서 도쿄가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일본인의 우려를 생생하게 전하고 있다. 일본 도쿄와 중국 상하이는 동북아시아 시간대의 국제 금융거래를 좌지우지하는 세계 도시 자리를 두고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있다. 여기에 중국과 시간대가 비슷한 싱가포르가 가세한 형국이다. 서울은 아쉽게도 국제 금융의 둥지를 차지하기 위한 동북아 도시 간 경쟁 구도에 아직 명함도 내밀지 못하고 있다.
일본의 위기감은 도쿄에 이어 제2의 도시인 오사카의 변화에서도 확인된다. 국내총생산(GDP) 규모가 한국과 비슷한 간사이경제권(關西經濟圈)의 거점인 오사카권은 도쿄권과 경쟁하던 과거 전략에서 벗어나 한국 부산권, 중국 상하이권 등 인접 국가의 대도시권과 연계하는 세계화 전략으로 전환했다.
국토 균형 정책의 포로가 된 1980년대
21세기 일본 국토 정책을 논하기 위해서는 먼저 1980년대 나카소네(中曾根康弘) 총리의 세계 도시화 전략 실패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국토 정책의 유신(維新)이 1980년대 일본 국토 정책, 즉 수도 이전과 테크노폴리스 등 국토 균형발전 정책이 남긴 유산을 해결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01년 고이즈미(小泉純一郞) 총리가 본격화한 일본 국토 정책의 유신은 나카소네의 세계 도시화 전략을 실패하게 만든 국토 균형 정책을 해체하는 것이었다. 이는 정부 관료, 정치인, 지방 건설 토호 등 이권의 해체를 뜻한다.
나카소네는 1970년대 다나카 내각에서 통산산업성과 과학기술청 장관으로 재임하면서 세계 경제의 변화를 체감했다. 그는 1980년대 초반 홍콩의 중국 반환 일정이 가시화하자, 도쿄를 홍콩을 대신하는 국제 금융도시로 키우기 위한 세계 도시화 전략을 모색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제4차 전국 종합계획(1981년 착수, 1987년 승인)에 세계 도시화 전략을 담아 그 밖의 정치적 과제를 해결하고자 했다.
당시 일본은 대외적으로 1985년 이후 미국의 시장 개방 압력 및 내수 확대 요구가 강화되는 시기였다. 대내적으로는 사무실 면적 부족이 사회적 이슈로 제기되는 등 건설 자본의 규제 완화 압력도 커지고 있었다. 그러나 나카소네 총리는 정치적으로 자유롭지 못해 기존의 국토 균형 정책에 대한 입장을 분명하게 정할 수 없었다. 다나카(田中角榮) 전 총리의 영향 아래 있는 인물로 내각을 채워 ‘다나카소네 내각’이라는 비판까지 자초했다.
다나카 전 총리는 1970년대 초반 국정 방향을 성장 노선에서 균형 노선으로 전면 전환하고, ‘일본열도 개조론’을 국토 균형 정책으로 발표한 인물이다. 그는 1972년 아동 수당제 도입, 1973년 노인 의료비 전액 지원, 1974년 종신 고용제 도입 등 전방위적인 균형 정책을 추진했다. 그 결과 자민당 일당 지배 체제의 대외적·정치적 기반이 안정됐고, 내부적으로는 자민당 내 파벌 균형이 무너져 다나카 파의 당 지배가 강화됐다.
1974년 퇴임한 다나카 총리는 1976년 뇌물 수수 혐의로 구속됐지만, 그의 영향력은 이후 성립된 오히라, 스즈키, 나카소네 내각에도 미쳤다. 다나카는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명분의 공공사업 확대를 통해 지방에 대한 지배력을 강화하는 한편, 자민당에 대한 지배력마저 확보했다. 그 결과 중앙 관료의 예산 책정에 대한 영향력은 상실됐고, ‘예산의 정치화’가 심화됐다. 경제의 공공사업 의존성이 강화돼 노동계와 재계의 견제력도 약해졌다.
나카소네 총리는 이러한 정치 경제적 여건 아래서 1987년 확정된 제4차 전국종합개발계획을 통해 도쿄의 세계 도시화 전략과 지방의 발전 열망을 대변한 국토 균형발전이라는 2가지 과제를 동시에 해결해야 했다. 세계 도시화 전략 외에 수도 이전 계획, 26개 테크노폴리스 건설 계획, 정비 신칸센, 42개 리조트 건설 계획 등 국토 균형발전 정책의 종합선물세트를 마련한 것이다. 재정 적자를 우려한 일본 정부는 민간 자본을 활용하기 위해 각종 규제를 대폭 완화하는 등 신자유주의 정책을 전면적으로 채택했다. 그러나 이 계획은 확정 후 불과 4년 만에 종료됐다.
1985년 이후 국가 부채가 급격히 늘어나 1990년대 재정 적자가 GDP의 70%에 이르렀다. 1990년 3월 대장성이 부동산 관련 대출의 총량 규제 방침을 밝히자 엔화, 채권, 주식, 지가(地價)가 동시에 대폭락했다. 이에 앞서 금리 인상까지 단행되자 일본 경제의 버블이 붕괴하기 시작한 것이다. 1985년의 3배로 늘어난 지가와 주가는 1990년 붕괴되기 시작해 고이즈미 총리가 취임한 2001년 그동안의 상승분을 모두 반납하고 제자리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