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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똑똑하고 독선적인 정조의 채제공, ‘예스맨+α’로 차선의 국정 이끌었다

김준태 | 191호 (2015년 12월 Issue 2)

Article at a Glance

정조는 1인자로서는 굉장히 까다로운 유형인똑똑하고 부지런한 리더였다. 웬만해서는 2인자인 재상들이 정조의 맘에 들기가 어려웠는데 채제공은 정조로부터 신뢰를 받았고 앞장서서 정조시대의 개혁 어젠다를 추진해나갔다. 그는 정조의 노선을 충실히 따랐지만 무조건적으로 추종하는 예스맨은 아니었다. 하지만 임금을 절대 직접적으로 비판하지 않았다. 자기 고집이 강하고 다른 이들의 일처리에 안 그래도 불만이 많은 정조에게 직접적인 비판을 가할 경우 오히려 고집을 꺾지 않고 잘못된 일을 밀어붙이는 역효과가 날 것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채제공은 주로 일의 각론이나 정책의 시행방법에 대해 다른 의견을 제시하는 형태로 간언을 했다. 채제공은 정조가 이야기한 A안에 동의할 수 없을 때에는 “A가 아니라 B가 맞다고 말하지 않고 “A가 맞지만 A+1 혹은 A-1로 하면 더 나아질 것 같다고 말하는 방식을 활용했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1인자를 보좌하는 입장이라면 이 방식은 조직을 위한 올바른 결정을 위해서든, 1인자와의 친밀한 관계 형성을 위해서든 매우 좋은 방법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직장인들이 쓰는 약어 중에똑게, 똑부, 멍게, 멍부라는 말이 있다. 상사의 유형을 네 가지로 구분한 것인데 순서대로똑똑하고 게으른상사, ‘똑똑하고 부지런한상사, ‘멍청하고 게으른상사, ‘멍청하고 부지런한상사를 말한다. 독일 바이마르공화국에서 참모총장을 지낸 쿠르트 폰 하머슈타인-에쿠오르트(Kurt von Hammerstein-Equord) 장군이 1933년에 출판한 ‘<지휘교범>’ 나는 장교들을 똑똑하고, 게으르고, 부지런하고, 멍청한 네 부류로 나눈다. 사람들은 대부분 이 중 두 가지 특성을 가지고 있으니 영리하고 근면한 자들은 고급 참모 역할에 적합하다. 멍청하고 게으른 자들은 전 세계 군대의 90%를 차지하는데 이런 자들은 정해진 일이나 시키면 된다. 영리하고 게으른 자들은 어떤 상황이든 대처할 수 있으므로 최고 지휘관에 적합하고, 멍청하고 근면한 자들은 위험하므로 신속히 제거해야 한다1 라는 대목에서 유래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똑똑하고 게으른 사람이 똑똑하고 부지런한 사람보다 선호된다는 점이다. 아마 그가 한 사람의 개인이라면 똑똑하고 부지런한 쪽이 더 높은 평가를 받았을 것이다. 최고의 역량을 발휘하리라 기대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보스인 이상 그를 모시는 부하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봐야 한다. 일반적으로 똑똑하고 부지런한 보스는 똑똑하기 때문에 부하들이 그의 지적 수준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부지런하기 때문에 그의 업무 속도를 따라가기가 힘들다. 다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역량이 워낙 뛰어나다 보니 부하가 하는 일에 만족하지 못하고 직접 개입해서 시시콜콜 코치하기도 한다. 모든 일을 세세한 것까지 자기가 직접 관장하려 드는 소위만기총람형 지도자는 바로똑똑하고 부지런한유형에서 등장해왔다.

 

똑똑하고 부지런한 정조, 그가 인정한 재상

 

 

 

조선의 임금들 중에서 이 유형(똑똑하고 부지런한)에 속하는 군주는 정조다. 그는 군사(君師, 임금이자 스승)를 자임하며 신하들에게 유교경전을 강의할 정도로 학문이 뛰어났다. “학문은 작은 완성에 만족하면 안 된다. 더욱 힘써 정진하면서 언제나 자신의 부족함을 탄식해야 한다.” “혹시라도 단 한 점의 치우친 생각이 생기면 치열하게 성찰해 단속해야 한다2 라고 되뇌며 언제나 스스로를 채찍질했다. 정무를 보느라 하루에 2∼3시간밖에 자지 않고, 며칠 밤을 지새우면서 옥안(獄案)을 검토하는 등 그의 근면함도 감히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뿐만 아니라 정조는 자신이 모든 업무를 관할해야 마음을 놓았다. 그는내가 비록 덕이 모자라지만 의리에 관계되는 문제는 한번 중심을 잡은 다음에는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는데 신하로서 누가 감히 그에 반대하여 나를 이기려는 생각을 가질 것인가. <서경>에 이르길오직 군주만이 극(, 정치의 기준)을 만든다고 하지 않았는가3  라며 군주 중심의 정치관을 피력한다. “내가 혹 잡다한 업무를 보기도 하나 이 어찌 내가 하고 싶어서 하는 일이겠는가라고도 했다. 정조는 자기가 자질구레한 일들까지 살피기는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어서라고 말한다. 당시의 정치상황이 워낙 좋지 못한데다 신하들은 무사안일에 빠져 있어 믿고 맡길 사람이 없으니, 부득이하게 직접 나서서 만기를 총람한다는 것이다.4 이것은똑똑하고 부지런한리더들이 자주 하는 말이기도 한데, 즉 다른 사람들이 내 기준에 미치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보며 답답해하느니 차라리 자기가 직접 도맡아 처리하겠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정조를 모시는 신하들은 어땠을까. 특히 수석참모인 재상은 정조와 어떻게 관계설정을 맺었고, 또 어떻게 행동하고 처신했을까. 이상의 정조에 대한 소개만으로도 정조 밑에서 재상 노릇 하기란 참으로 만만치 않은 일이었음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똑똑한 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당대의 누구보다도 똑똑하고 누구보다 부지런했다. 아버지 사도세자 문제, 여러 차례의 암살 위협 등으로 의심도 많았다. 즉위 초기의 권력기반이 위태로웠기 때문에 왕권을 공고히 하는 일에 집착하다시피 했다. 보좌하기에 무척 까다로운 1인자였을 것이고, 이런 정조 밑에서 2인자의 재상은 자연 운신하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게다가 정조는 자신의 정치적 목적에 따라 재상의 임명과 해임을 전략적으로 운용했다. “나는 정승을 등용해서 일을 맡겼다가 해임해 내보내고, 다시 등용하고 하는 주기를 대체로 8년으로 해왔다. 그 사람의 입장에서는 8년이나 쉬기 때문에 세월을 낭비하게 되는 점이 있으나 반드시 쉬게 한 다음에 썼던 이유는 단지 상황이 그러해서가 아니었다. 그 사람을 위해 신망을 기르는 방안이었다. 쉬는 동안 잘 쉬고 잘 처신하는 것이 어찌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5 재상에게 일부러 고난을 주었다는 것이다. 정조의 말처럼 시련을 줌으로써 그 사람을 더 강하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자신이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재상을 진퇴시킬 수 있고 힘들게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과시함으로써 왕권에 대한 복종을 유도한 것이다.

 

정조 재위 기간 동안 재상을 지낸 인물은 20여 명인데 이 중 영의정들에 대해서는 정조가 다음과 같은 회고를 남겼다. “나라에 정승을 두는 일은 무겁게 생각하고 신중해야 한다. 더군다나 영의정은 일반 대신들과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내가 보위에 있은 지난 20여 년의 세월 동안 영의정의 직책을 맡겼던 사람을 꼽아보면 채 열 명이 되지 않는다. 한 장의 상소를 올려 먹구름을 밀치고 어두운 거리 위를 해와 별처럼 밝힌 충헌공 서명선(徐命善, 1728∼1791)이 있고, 일의 조짐을 미리 환히 살펴 혼란한 가운데 나라를 위해 헌신한 문안공 정존겸(鄭存謙, 1722∼1794)이 있다. 효제(孝悌)를 독실하게 실천한 자로는 문정공 김익(金?, 1723∼1790)이 있고, 효안공 홍낙성(洪樂性, 1718∼1798)은 나라와 더불어 기쁨과 슬픔을 함께했다. 평소 자신의 소신을 지켰던 자로는 문숙공 채제공(蔡濟恭, 1720∼1799)을 꼽을 수 있다.”6

 

정조가 거론한 사람 중 정조시대 정치의 중심축은 서명선과 채제공이었다. 여기에 더해 영의정을 지내지는 않았지만 정조가 채제공과 더불어 3대 재상으로 언급한 바 있는 김종수(金鍾秀, 1728∼1799)와 윤시동(尹蓍東, 1729∼1797)이 포함된다.7 서명선은 소론의 영수로서 세손이던 정조를 보호하고 임금으로 즉위하는 데 크게 공헌했고, 세손 시절 정조의 사부를 맡았던 김종수는 노론 청명당을 이끌며 역시 정조의 안정적인 보위계승에 기여했다. 윤시동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이 세 사람은 모두 나머지 한 사람인 채제공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서명선은신과 채제공은 의리상 같은 하늘 아래 살 수 없고 사세(事勢)상 나란히 설 수 없습니다8 라며 채제공을 배척했고, 김종수도어느 시대인들 난신적자가 없었겠습니까마는 마음을 쓰는 것이 이처럼 흉악하고 사특하며 참혹한 해악을 지님이 어찌 이 역적(채제공을 가리킴)과 같은 자가 있었겠습니까9 라고 극언을 한 바 있다. 윤시동 역시 채제공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린다.10 이 세 사람의 주장처럼 채제공은 정말 나쁜 신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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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김준태akademie@skku.edu

    성균관대 유학동양학과 초빙교수

    김준태 교수는 성균관대에서 한국 철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고 동 대학 유교문화연구소, 유학대학 연구교수를 거치며 우리 역사 속 정치가들의 리더십과 철학을 연구하고 있다. 특히 현실 정치에서 조선시대를 이끌었던 군주와 재상들에 집중해 다수의 논문을 썼다. 저서로는 『왕의 경영』 『왕의 공부』 『탁월한 조정자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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