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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아슬아슬 명종?선조 교체기 중용의 재상 이준경, 과업 이루고 떠나다

김준태 | 166호 (2014년 12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재상 이준경은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였다. 특히 그는 2인자로서 권력 공백기와 리더 교체기를 성공적으로 관리했다. 그는 권력 교체기의 2인자답게 조직의 중심을 잡아주면서 매끄러운 권력 승계를 이끌어냈고 사사로운 감정을 배제하고 단호하면서도 신속하게 권력 공백을 메꿨다. 또 지난 리더십과의 결별, 구권력 숙청을 서두르기 쉬운 신임 리더가 단계를 밟아 권력을 강화하고 안정화할 수 있도록 도왔다.

이준경은 또한 새 리더십이 어느 정도 안정화되자 새 리더에게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물러나는 용단을 보였다. 현대사회의 조직이나 기업의 2인자에게도 시사점이 큰 부분이다.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국가의 주석(柱石)으로 의지하고 중히 여길 만한 신하로서 이 사람보다 훌륭한 이는 없을 것입니다.”

 

퇴계는 누구를 믿고 정치를 펼쳐가야 할지를 묻는 선조의 질문에 답하며 위와 같이 그를 평가했다.

 

남명 조식의 죽마고우이자 화담 서경덕, 퇴계 이황 같은 대학자들의 절친한 벗이었으며 성수침(우계 성혼의 부친), 백인걸, 기대승의 존경과 지우를 받았다. 문하에 이원익, 정탁, 이항복, 이덕형, 심희수 등의 명재상들을 키워낸 이, 바로 동고(東皐) 이준경(李浚慶, 1499∼1572) 얘기다.

 

재상 이준경의 파란만장한 삶

조선 중기를 대표하는 정치가이자 재상 이준경은 고려 말의 유학자 둔촌 이집의 후손이다. 집안은 대대로 정승과 판서를 배출한 명문가였는데 할아버지 이세좌가 폐비 윤씨에게 사약을 전달했다는 죄목으로 연산군에 의해 숙청되고 아버지 이수정도 함께 사사되면서 그는 6살의 어린 나이에 고난을 겪게 된다. 형 이윤경과 함께 유배를 간 것이다. 그러다 1506년 중종반정이 일어나면서 풀려났고 1532 32세에 처음으로 관직에 나아가기 전까지는 주로 칩거하며 학문에 힘썼다. 과거 응시와 관직 진출은 상대적으로 늦은 편이었는데 연산군 집권기간과 중종조의 기묘사화 등 정치적 혼란 속에 그가 존경하고 가까이 했던 이들이 목숨을 잃거나 탄압받는 모습을 보면서 출사에 회의를 가졌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런 그가 과거에 응시한 것은 모친의 간곡한 당부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준경이 마주한 현실은 여전히 어둡기만 했다. 척신 김안로의 공포정치가 횡행하고 있었다. 그는 기묘사화의 피해자들이 무죄라고 주장했다가 김안로의 눈 밖에 나 파직당한다. 그러자 그는 미련 없이 관직을 떠났고 5년간 집 밖을 나서지 않았다. 그가 본격적인 관직생활을 한 것은 김안로가 사사된 1537년 이후부터다. 이조좌랑, 홍문관 부제학, 형조참판, 대사헌 등을 차례로 역임했는데 안타깝게도 시련은 끝나지 않았다. 을사사화가 일어나면서 아끼는 조카이자 제자인 이중열이 사약을 받았고 우애가 깊던 종형들도 귀양지에서 죽음을 맞았다. 이때 슬픔을 이기지 못해 통곡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준경 자신도 외척 윤원형의 일파인 이기, 진복창 등의 모함으로 유배를 갔다. 원래는 더 큰 죄목을 뒤집어쓸 뻔했지만 중전의 할아버지이자 명망 있던 재상인 심연원이 적극 변호해줘 무사할 수 있었다.

 

몇 년 후 귀양에서 풀려난 이준경에게 명종은 각 조의 판서를 차례로 제수했다. 하지만 윤원형의 척신정치 아래에서 자신의 뜻을 제대로 펼 수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인지 그때마다 그는 거듭 사직상소를 올린다. 다만 함경도 순변사가 돼 국경을 방어하는 일이나 호남 지방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는 일 등은 기꺼이 맡았다. 국가적인 위기를 방관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때 이준경은 전라도 순찰사로서 전주부윤으로 있던 형 이윤경과 함께 을묘왜란을 진압하는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 후 그는 우의정과 좌의정에 보임됐고 1565년 윤원형의 몰락과 함께 영의정에 오른다.

 

강직한 성품으로 직언을 올리고 선비를 보호하며 국가안보에 기여하는 등 이준경이 세운 공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영의정이 되기 전까지는 사실 그렇게 특별하지는 않았다. 특히 판서에서 좌의정을 지내는 몇 년간은 재상으로서 윤원형과 함께 국정을 담당했기 때문에 도덕적 순수성 면에서 비난을 받을 소지도 있었다. 그러나 영의정이 되고 명종 후반기에서 선조 즉위 초기까지 국정을 총괄하면서 그는 명재상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특히, 조선조에서 전무후무했던 권력의 공백기를 매끄럽게 수습하고 별다른 충돌과 갈등 없이사림정치의 시대를 연 것은 그의 큰 공로라고 할 수 있다. 다음 세 가지 사건을 통해 자세히 살펴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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