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
탁월한 실력의 신숙주가 ‘배신의 아이콘’이 된 이유는?
Article at a Glance – HR, 인문학
숙주나물이 숙주나물로 불리게 된 건 잘 변하기 때문이다. 변절자 신숙주로부터 유래한 말이다. 그만큼 신숙주는 조선왕조 ‘배신의 아이콘’이었다. 사람들이 배신감을 크게 느낀 건 그가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더 많은 비판을 받는지도 모른다. 신숙주는 문장력이 뛰어나고 유학에 능통한 것은 물론 외교와 안보, 어학능력까지 모두 갖춘 르네상스형 인간이었다. 늘 겸손함을 유지하고 1인자가 하기 곤란한 일을 처리하면서 세 명이 넘는 왕의 총애를 받았다. 2인자로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였지만 그는 ‘직언하지 않는 참모’였다. 조직의 미래를 위하는 2인자라면 신숙주의 다른 모든 면을 배우더라도 ‘직언하지 않는 점’만큼은 반면교사로 삼을 필요가 있다. |
편집자주
기업이 거대해지고 복잡해질수록 CEO를 보좌해줄 최고경영진의 필요성과 중요성이 커집니다. 리더의 올바른 판단과 경영을 도와주고 때로는 직언도 서슴지 않는 2인자의 존재는 기업의 흥망을 좌우하기도 합니다. 조선시대 명재상들 역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위치에서 군주를 보좌하며 나라를 이끌었습니다. 조선시대 왕과 재상들의 삶과 리더십에 정통한 김준태 작가가 ‘조선 명재상을 통해 본 2인자 경영학’을 연재합니다.
배신의 아이콘, 신숙주
1456년(세조2년) 6월2일. 명나라 사신을 환영하는 연회장에서 세조와 세자를 제거하고 단종을 복위시키고자 했던 사육신의 계획이 발각됐다. 이날 저녁 집으로 돌아온 신숙주는 깜짝 놀랐다. 안채의 문이 활짝 열려져 있고 부인은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황급히 집 안 구석구석을 찾아다니던 신숙주는 두어 자 되는 베를 손에 쥐고 홀로 다락 대들보 밑에 앉아 있는 부인을 발견했다. “부인! 어째서 그 곳에 계시오?” 하고 그가 묻자 부인은 의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평소 성삼문 등과 형제보다도 더 두터운 친교를 맺으셨기에 오늘 옥사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틀림없이 당신도 함께 체포돼 죽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신이 죽었다는 얘기를 들으면 저도 자결하려 하던 참입니다. 그런데 당신께서 어째서 혼자 살아 돌아오신 것입니까?” 신숙주는 말문이 막혀 어찌할 바를 몰랐다.
널리 알려진 이 장면은 조선 중기 <송와잡설(松窩雜說)>로부터 근대 이광수가 지은 소설 <단종애사>에 이르기까지 여러 책들에서 조금씩 다르게 변주돼 왔다. 어떤 기록에는 부인이 이러한 신숙주를 야단치고 목숨을 끊었다고 돼 있고, 또 어떤 기록에는 신숙주가 ‘자식들 때문에 죽지 못했다’고 변명한 것으로 돼 있다. 그런데 이 얘기는 완벽한 허구다. 신숙주의 부인은 사육신 사건이 일어나기 전, 신숙주가 명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당시에 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이 일화는 사육신 때의 일이 아니라 계유정난이 일어나서 김종서가 죽던 날, 혹은 단종이 퇴위하고 세조가 보위에 오르던 날에 있었던 것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근거를 대지는 못했다.
그렇다면 왜 이렇게 잘못된 사실이 수백 년이 지나도록 진실처럼 믿어져 왔을까. 왜 백성들은 녹두나물이 잘 쉬기 때문에 ‘숙주’나물이라고 부른다는 등 그를 변절의 대명사로 꼽았을까. 신숙주가 격하된 것은 무엇보다 숙종 때 단종과 사육신이 복권되고1 대의명분과 의리가 강조됐던 조선의 정신사적 흐름에 기인한다. 거기에 더해 그만큼 그가 출중한 인물이었던 것도 이유일 것이다. 흔히 실망은 기대에 비례하기 마련이다. 기대가 컸던 사람일수록 그 기대를 지키지 않았을 때 오는 실망도 커진다. 더욱이 그 사람이 뛰어난 능력을 가지고 있다면 실망은 쉽게 미움으로까지 변모되는데 훌륭한 자질과 역량을 잘못된 곳에 쓴 데 대한 아쉬움이 짙어지는 것이다. 정인지, 정창손, 최항 등 집현전의 다른 선배들도 같은 길을 걸었지만 유독 신숙주에게 ‘변절자’라는 집중포화가 쏟아진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모든 분야에 뛰어났던 르네상스적 인간. 어학의 천재이자 외교, 안보 분야의 귀재. 탁월한 행정능력과 정무감각을 갖췄으며 세종과 문종의 총애를 받았던 그가 주군의 후계자를 저버리고 수양대군의 왕위찬탈을 지지한 것. ‘불의(不義)’한 정권에 참여해 중추로 활동한 그의 삶이 비장한 최후를 맞으며 충절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벗, 성삼문과 대비되면서 사람들의 실망도 커졌을 것이다.
그런데 명분을 중요시하는 조선 사회에서 이러한 ‘변절자’의 낙인은 치명적인 것이어야 하지만 그를 비난했던 사람들조차도 신숙주를 ‘악인(惡人)’이나 ‘간웅(奸雄)’으로 보지는 않는다. 지조가 부족한 나약한 지식인 정도로 평가한다. 이는 무엇보다 신숙주가 남긴 업적과 그의 행적 때문일 것이다. 그는 부귀와 권력을 탐한 다른 세조의 공신들과는 달리 엄격하게 자기 자신을 관리하며 맡은 바 소임에 최선을 다했다. ‘세조를 왕으로 만든 것은 한명회지만 세조를 왕답게 만든 것은 신숙주’라는 세간의 평가처럼 만약 신숙주가 없었다면 14세기 후반의 조선은 지금 우리가 알던 모습과는 많이 달랐을 것이다.
탁월했던, 너무나 탁월했던…
신숙주는 1438년 세종20년, 진사시에 장원하고 이어 문과에 3등으로 급제했다. 세종의 재위기간 동안에는 집현전 부수찬, 응교, 직제학을 지내는 등 주로 집현전 학사로 활동한다. 이 시기에 주목할 만한 이력은 1443년, 스물여섯의 나이로 서장관(書狀官)2 이 돼 일본에 다녀온 것이다. 큰 병을 앓은 직후였기 때문에 얼마든지 사양해도 괜찮을 험난한 여정이었지만 신숙주는 기꺼이 받아들였고 ‘시(詩)를 써달라는 사람들이 몰려들어도 머뭇거림 없이 즉석에서 지어주니 모두가 탄복하는’ 등 문명(文名)을 떨쳤다. 양국 간의 난제도 해결했다. 이 경험을 바탕으로 그는 귀국 후에 일본의 역사와 지리, 정세, 대일 교류의 역사, 사신 왕래 절차 등을 집약한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저술한다. “국교를 맺어 서로 예방하며 풍습이 다른 나라를 어루만지고 접촉하는 데 있어서는 반드시 먼저 그 정세를 알아야 예(禮)를 다할 수 있다”3 는 취지에서 지은 이 책은 조선과 일본을 막론하고 후대에까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신숙주는 학문에 무척 뛰어났다. 명나라 사신으로 조선을 찾은 한림학사 예겸(倪謙)으로부터 ‘굴원4 의 반열에 오를 만한 동방의 명인이다’라는 칭찬을 받았고5 훈민정음 창제에도 깊이 관여한다. 음운학과 어학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홍무정운(洪武正韻)>의 한글주석서와 <동국정운(東國正韻)>의 책임 편찬을 맡았으며 중국어, 일본어, 몽고어, 여진어를 비롯한 각국의 언어에 능통해서 통번역도 자유자재로 할 정도였다고 전해진다. 학문에 대한 열정 또한 깊어서 집현전에서 밤새 책을 읽다가 새벽닭이 울고 나서야 잠이 들곤 했는데 이를 본 세종이 자신이 입고 있던 돈피 가죽옷을 벗어 덮어주었다는 유명한 일화를 남기기도 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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