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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 어드바이저 100인이 전망한 ‘Business Trend Insight’

2027년 경영 화두로 떠오를 12개의 키워드

DBR X1, X2팀,정리=백상경 | 448호 (2026년 9월 Issue 1)
“이미 일어난 미래들(The Futures That Have Already Happened).”

경영학 구루 피터 드러커가 1989년 10월 이코노미스트에 기고한 글1 의 제목이다. 드러커는 1990년대의 시작을 앞두고 경영자들이 주목할 인구, 경제, 사회의 변화를 짚으면서 미래에 대한 ‘예측’이 아니라 이미 관찰된 사실에서 도출한 ‘결론’이라고 강조했다.

사실 트렌드가 본래 그렇다. 누구도 체감 못하는 트렌드는 없다. 현실에서 징후조차 찾을 수 없는 변화는 변화가 아니다. 새로운 기술이 등장하고, 소비자의 행동이 바뀌며, 기업의 투자와 조직 운영 방식이 달라진다. 그렇게 윤곽을 드러낸 미래를 우리는 트렌드라고 부른다. 단순히 변화를 아는 것과 그 너머 의미를 통찰하는 것은 다르다. 드러커의 지적처럼 대부분의 사람은 변화를 알고 있면서도 “그 미래가 내 업무와 조직에 어떤 의미를 갖는가?”라는 질문엔 쉽사리 도달하지 못한다. 변화의 한복판에선 새로운 현실이 금세 익숙해지기 마련이고 대수롭지 않게 흘려보내기 쉽다.

흩어진 변화의 단서를 모아 하나의 개념으로 조각하는 작업은 그래서 의미가 있다. 지금은 작아 보이는 변화가 어떤 흐름과 맞물려 있는지, 어느 방향으로 확산할지를 입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어서다. 한발 앞서 시장의 기회를 포착하고 더 나은 성과를 창출해야 하는 경영자들에겐 더욱 중요한 일이다.

인공지능(AI)만 봐도 그렇다. AI라는 단어 자체가 진부하게 들릴 정도로 기술은 이미 우리 현실 깊숙이 들어왔다. 생성형 AI는 기업의 일상적인 업무 도구가 됐고 일부 기업에선 스스로 일하는 AI 에이전트를 인간과 동등한 업무 수행 주체로 관리하려는 시도까지 한다. 여기까지는 비교적 익숙한 AI 전환의 이야기다. 하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세밀한 변화, 연쇄 작용을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AI가 직접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의 직무 개념은 새로운 전기를 맞았다. 하나의 직무를 여러 과업으로 나눈 뒤 사람과 AI, 외부 전문가에게 다시 배분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휴머노이드 역시 화려한 시연을 넘어 제조와 물류 현장에서 실제 생산성과 경제성을 검증받는 단계로 이동했다. 이에 로봇을 자산으로 구매하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작업량만큼만 빌려 쓰는 형태의 새로운 근로 모델까지 거론된다.

기술이 일을 대신하게 되면서 인간에겐 새로운 도전 과제가 주어졌다. AI의 도움으로 높은 수준의 결과물을 만드는 일이 쉬워진 세상, 이제 결과물의 완성도와 담당자의 실제 전문성을 어떻게 구분할 것인지가 새로운 이슈로 떠오른다. 직접 자료를 읽고, 시행착오를 겪으며, 판단력을 쌓는 ‘인간의 배움’ 과정이 줄어드는 것도 또 다른 파급효과를 일으킨다. 단기 성과와 별개로 구성원의 장기적인 역량 형성이 어려워질 수 있다. 개인, 나아가 조직의 역량 관리 관점에서 풀어야 할 숙제도 생긴 셈이다.

AI 경쟁의 파장은 기술 산업 안에 머물지 않는다. AI 모델을 대규모로 운영하려면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막대한 전력이 필요하다. 글로벌 경쟁의 무대는 이제 컴퓨팅 인프라뿐 아니라 에너지와 핵심 자원의 안정적인 공급 문제로 확장한다. 지정학적 갈등과 공급망 불안이 반복되는 가운데 기업과 국가는 효율성 향상과 리스크 관리라는 두 마리 토끼를 동시에 노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에너지를 둘러싼 변화가 이를 잘 보여준다. 해외에서 값싼 화석연료를 안정적으로 들여올 수 있다는 전제가 흔들리고 AI발 전력 수요까지 늘면서 자국에서 생산할 수 있는 에너지원과 관련 기술·설비 공급망이 새롭게 각광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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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BR은 ‘이미 일어난 미래들’이 어디까지 이어지고 뻗어갈지, 기업의 전략과 조직엔 앞으로 무엇을 요구될지를 집요하게 탐구했다. 필진과 객원 편집위원, 명예 기자 등 DBR과 함께 콘텐츠를 만들어온 석학과 업계 전문가 등 100명의 어드바이저와 함께 다방면의 새로운 변화를 포착했다. 그 결과 AI와 조직, 지정학과 에너지, ESG, 소비, 문화에 이르는 다양한 분야에서 2027년 비즈니스 환경에서 놓쳐선 안 될 12개의 변화상을 키워드로 정리했다.

이들 키워드가 공통적으로 가리키는 2027년의 과제는 ‘리바운더리(Re-boundary)’다. AI를 필두로 한 획기적인 기술 발전, 국제 정세 변화와 패권 이동은 지금껏 당연하게 여겼던 제도와 기준, 규칙의 일대 전환을 요구하고 있다. 수년 동안 진행돼온 변화는 이제 단단한 뿌리를 내렸고, 과거 통용됐던 비즈니스의 대전제를 비틀고 있다. 제도와 규칙을 하나하나 고쳐나가는 것으론 부족하다. 흐려진 경계 속에서 헤매지 않으려면 시대에 걸맞은 새로운 선을 그려야 한다. 익숙했던 기존 방식 전체를 다시 따져 묻고, 앞으로 유지할 것과 바꿀 것을 치열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새로운 기준의 필요성은 시장과 사회 전반에 걸쳐서도 확인된다. 고도성장을 거치며 자본주의의 성과를 먼저 누린 한국 사회는 이제 시장이 만들어내는 격차와 성과 배분, 선택에 따르는 책임을 뒤늦게 체감하고 있다. 주주권 강화 이후 자본시장의 옥석 가리기가 선명해진 것이나 반도체 성과급을 둘러싼 논쟁이 커진 것이 대표적인 장면이다. 여기에 지금의 성장 비용을 다음 세대에 얼마나 넘길 것인지라는 문제까지 더해진다. 성장 자체를 넘어 ‘어떤 방식의 자본주의를 운용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답해야 한다.

기업을 평가하는 방식도 달라졌다. 제품이나 경영 성과만 보는 것이 아니라 그 결과가 어떤 과정을 거쳐 만들어졌는지 확인하려는 요구가 커졌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로 내부 정보는 그 어느 때보다 빠르게 퍼진다. 원산지와 공급망, 각종 데이터를 개인도 직접 검증할 수 있다. 기업이 보여줄 정보를 선택하던 기존의 ‘투명성’ 환경은 이면의 과정까지 밖으로 드러나는 ‘탈은폐’ 환경으로 이동하고 있다. 정보를 더 많이 공개하는 것 이상으로, 설명 가능한 의사결정 과정을 만드는 게 중요해진다.

개인의 일상을 들여다보면 AI 사용 방식의 변화가 눈에 띈다. 지금까지는 사람이 여러 앱을 찾아다니며 필요한 기능을 직접 연결했지만 앞으론 원하는 일을 말하면 AI가 필요한 서비스와 데이터를 찾아 연결하고 실행까지 돕는 방식이 확산할 전망이다. 소프트웨어를 하나씩 사용하는 대신 하나의 일을 끝내기 위해 여러 기능을 AI가 매끄럽게 이어주는 것이다. 알고리즘과 브랜드의 자극이 더 정교해지는 환경에서 소비자가 자신의 욕망을 직접 관리하려는 모습도 나타나고 있다. AI가 평균 이상의 글과 이미지, 영상을 손쉽게 만들어내는 시대, 조금 서툴더라도 사람의 몸과 시간이 남은 결과물에 더 높은 가치를 부여하는 흐름도 보인다. 무엇을 기술에 넘기고, 무엇을 인간에게 남겨둘 것인지를 다시 정립하는 과정이다.

2027년을 관통할 리바운더리의 흐름은 특정 기술이나 산업에 국한하지 않는다. 성과를 나누는 방식, 기업이 책임을 설명하는 방식, 위기에 대비하고 에너지를 확보하는 방식, 사람과 기계에 일을 배분하는 방식, 소비자의 선택을 돕고 브랜드의 가치를 만드는 방식까지 경영의 여러 기본값을 다시 맞추는 과정이다. 최종 선정한 12개 키워드를 비롯해 어드바이저 100인의 시각을 종합한 ‘2027 비즈니스 트렌드 인사이트’로 2027년 놓쳐선 안 될 중요한 변화의 흐름을 하나씩 짚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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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의 계산서를 다시 쓰다

가장 먼저 따져볼 것은 성장의 계산법이다. 한국은 짧은 기간 독보적인 경제 성장을 이뤘다. 기업 규모와 국민 소득 수준도 빠르게 높아졌다. 반면 자본주의의 원리와 그에 따르는 비용을 사회적으로 학습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부족했다. 문정빈 고려대 경영대학 교수는 이를 ‘후불제 자본주의(Capitalism on Deferred Payments)’라고 표현한다. 민주주의 제도의 혜택을 먼저 누리고 그에 필요한 책임과 비용을 뒤늦게 학습했다는 ‘후불제 민주주의’의 문제의식을 자본주의에 차용한 개념이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규범을 뒤늦게 익히는 ‘학습의 후불제’와 현재 세대의 성장 비용을 다음 세대로 넘기는 ‘부담의 후불제’가 함께 나타나고 있다.

2026년 주식시장의 모습은 그 단면을 보여준다. 상법 개정과 주주권 강화는 코리아 디스카운트를 줄이고 기업가치를 제대로 평가받게 하자는 취지에서 추진됐다. 하지만 시장 효율성이 높아진다고 모든 기업의 주가가 함께 오르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수익성과 성장성을 인정받는 기업이 재평가를 받아 자금이 몰렸을 뿐 그렇지 못한 기업은 상대적으로 소외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효율은 결국 ‘옥석 가리기’로 귀결한다. 코리아 디스카운트의 완화가 모든 기업의 동반 상승을 뜻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한국 사회는 뒤늦게 체감하고 있다.

반도체 업계의 성과급 논쟁도 비슷한 질문을 던진다. 자본주의는 단순히 노력을 보상하는 체제가 아니라 결과로 나타난 성과를 보상하는 체제에 가깝다. 다만 성과는 노력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히려 어느 산업과 기업을 선택했는지, 어떤 능력을 갖췄는지, 어떤 시장 상황을 만났는지 등이 더 큰 영향을 주기도 한다. 이를 선택(Choice), 능력(Ability), 운(Fortune), 노력(Effort)의 조합으로 보는 것이 문 교수가 제안하는 ‘카페(CAFE) 모형’이다. 반도체 슈퍼사이클은 오랜 투자와 기술 축적, 구성원의 노력뿐 아니라 외부 수요와 경쟁 상황의 영향을 함께 받은 결과다. 그렇다면 높은 성과가 발생했을 때 그 과실을 어느 범위까지, 어떤 기준으로 배분하는 것이 적절할까. 최근의 성과급 논쟁은 단순히 보상 수준을 정하는 문제를 넘어 기업의 성과에 기여한 여러 요인을 어떻게 평가할지를 묻는 문제로 이어질 수 있다. 아직 한국 사회는 그 해답에 합의하지 못했다.

자산시장에서는 복리의 효과가 격차를 더 벌린다. 누구에게나 같은 수익률이 적용되더라도 보유 자산 규모에 따라 절대적 증가액은 달라진다. 자산이 많을수록 더 다양한 투자 기회와 정보에 접근할 여지도 커진다. 저성장이 이어질수록 성장률 자체만큼이나 성장 과실을 누가 가져가는지가 중요한 사회적 쟁점이 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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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불제 자본주의 개념은 우리 자본주의의 운영 방식에 대한 질문으로 이어진다. ‘성장이냐 분배냐’라는 익숙한 질문에서 벗어나 앞으로 어떤 방식의 자본주의를 운용할 것인지를 고민해보자는 화두를 던진다. 최근 사회안전망과 정부의 역할을 강화해야 한다는 흐름이 있지만 여기에도 비용이 따른다. 연금과 국가부채, 신산업의 노동 문제처럼 당장의 편익과 비용이 세대를 달리해 발생하는 영역에서 ‘부담의 후불제’를 어디까지 이어갈 것인지도 따져볼 필요가 있다.

성장 과실과 비용을 둘러싼 계산이 복잡해지는 가운데 기업의 의사결정 과정도 이전보다 더 많이 노출되고 있다. 황세림 성균관대 SKK GSB 교수는 이를 ‘쇼윈도 경제(Show Window Economy)’라고 명명했다. 결과가 좋으면 과정은 크게 묻지 않던 시대는 저물어가고 있다. 개인과 기업, 조직이 의사결정의 과정까지 외부의 검증 대상이 되는 환경이 도래했다. 기업이 공개할 정보를 스스로 선택하던 ‘투명성’의 시대에서 시장과 기술, 제도가 감춰진 정보까지 밖으로 끌어내는 ‘강제된 탈은폐(De-concealment)’의 시대로 이동하고 있는 것이다.

스마트폰과 소셜미디어를 통해 조직 내부의 정보는 빠르게 밖으로 퍼진다. 과거 전문가의 영역이던 사진의 진위나 원산지, 공급망 정보 등은 이제 개인도 비교적 쉽게 확인할 수 있다. 동시에 투명성과 신뢰가 제품 구매와 투자 판단에 직접 영향을 주면서 정보 공개가 갖는 경제적 의미도 커졌다. 각각 초연결, 검증 기술의 대중화, 신뢰의 화폐화라는 세 가지 변화다.

기업을 평가하는 주체도 다양해졌다. 소비자는 제품의 원산지와 생산 과정을 살피고 투자자는 자본 배분을 본다. 직원은 성과와 보상의 기준을 들여다본다. 같은 결정을 놓고 정부와 지역사회, 협력업체가 각자의 기준에서 평가하고 행동할 수 있다. 이홍 광운대 경영대학 명예교수가 제시한 ‘기업 투명성 소비’ 개념과도 궤를 함께하는 부분이다. 제품 기능이나 가격만이 아니라 생산 과정과 기업의 행동 자체가 소비자의 판단 대상이 되는 흐름이 강해지고 있다. 파타고니아처럼 원재료의 출처와 생산 공장, 노동·환경 기준을 오랫동안 관리해온 기업은 신뢰를 얻고 브랜드 가치 향상 효과를 누릴 수 있다. 반대로 이미지와 실체의 차이가 큰 기업은 검증대 위에 오른다. 이를테면 AI 기술을 제대로 활용하지 않는데도 AI 활용 성과를 부풀리는 ‘AI 워싱(AI Washing)’ 기업 같은 경우를 들 수 있다. 혁신 없는 혁신 기업 이미지가 벗겨지는 순간 쇼윈도는 심판의 무대로 바뀔 수도 있다.

쇼윈도 경제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공개하는 정보의 양을 늘리는 게 아니라 정보 공개의 틀을 정교하게 설계하는 것이다. 정보 공개, 소비자의 반응, 기업 행동의 개선으로 이어지는 과정이 완결성 있게 연결돼야 투명성은 진짜 의미를 갖는다. 정보를 제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거기서 확인한 문제를 실제 의사결정의 변화로 연결해야 한다는 뜻이다.


위기가 상수가 된 시대의 경영

극단적 충격은 경영 환경의 상수가 됐다. 과거엔 전쟁과 대형 자연재해, 금융시장 충격이나 공급망 마비 같은 사건을 이례적으로 보고 평상시 경영과 구분했다. 그래서 평시 사업계획을 세운 뒤 위기가 발생하면 별도의 비상 체제를 가동했다.

류종기 UNIST 지구환경도시건설공학과 겸임교수는 이런 구분이 점차 어려워지는 현상을 ‘극단의 일상화(Extreme as Normal)’라고 설명한다. 지정학적 충돌과 기상이변, 금융 충격, 공급망 마비, 사이버 공격과 새로운 기술 위험처럼 성격이 다른 사건이 반복되고 중첩하면서 정상과 비상의 경계가 흐려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오늘날 기업은 공급망과 금융, IT 시스템 등이 촘촘하게 연결돼 있다. 한 지역에서 발생한 사건의 영향이 다른 영역으로 빠르게 번질 수 있다는 얘기다. 에너지 가격 상승이 물류비와 제조 원가를 움직이고, 비용 부담이 운전자본과 자금조달 문제로 이어지는 식이다. 개별 위험을 각각 관리하는 것과 별개로 충격의 영향 범위와 지속성, 반복 가능성을 함께 살펴볼 필요가 커졌다.

이제 위기 대응은 일회성 업무로 남겨두기 어렵다. 대체 공급처와 안전재고, 백업 시스템, 여유 생산능력처럼 평상시에는 비용으로 보던 자원을 일정 부분 유지해야 할 수도 있다. ‘준비 투자(Readiness Investment)’의 관점이다. 위기가 정확히 언제 발생할지 맞히려 하지 말고 예상과 다른 상황에서도 기업이 계속 움직일 수 있는 선택권을 확보해야 한다. 물론 여유 자원을 많이 확보하는 것 자체가 답은 아니다. 평상시 비용을 지나치게 높이면 기업 경쟁력이 떨어질 수 있다. 그래서 준비 투자는 평상시 운영에도 활용할 수 있도록 설계해야 한다. 효율성의 포기가 아닌 효율성의 기준에 충격을 견디는 능력까지 포함하는 것이다. 지향점은 ‘전천후 기업(All-Weather Company)’이다. 현금과 차입 여력, 공급망의 대안, 적정한 여유 생산능력과 숙련 인력 등은 위기가 시작된 뒤에 바로 마련하기 어렵다. 극단적 사건이 반복된다면 준비 역시 예산과 경영 프로세스 안에서 반복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지정학적 위기, AI발 전력 수요 급증이라는 측면에서 2027년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은 어느 때보다 커질 전망이다. 이에 김성우 김앤장 법률사무소 환경에너지연구소장은 ‘에너지 패트리에이션(Energy-patriation)’을 강조했다. 해외 수입에 크게 의존하던 에너지의 일부를 자국에서 생산하고 이를 뒷받침하는 관련 기술과 설비의 공급망을 안정적으로 확보하려는 각국의 움직임을 설명하는 개념이다.

에너지 안보는 청정에너지 전환을 촉진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그간 재생에너지는 값싸고 안정적인 화석연료 중심의 에너지 체제와 충돌하는 것으로 여겨졌다. 하지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 이어 미국·이스라엘-이란 전쟁까지 발발하며 주요 해상 수송로의 불안이 커졌다. 이제 해외에서 연료를 안정적으로 조달할 수 있다는 전제 자체가 흔들리고 있다. 이에 수입 연료가 필요 없는 태양광과 풍력이 주목을 받고 있는 것이다. 원자력도 마찬가지다. 우라늄 수입이 필요하지만 상대적으로 장기간 에너지원을 비축할 수 있다. 재생에너지와 원전, ESS 등을 적절히 결합한 에너지 안보 전략이 중요하다.

AI는 안정적인 전력 확보의 중요성을 더 키운다. 아무리 좋은 반도체와 AI 모델을 확보해도 데이터센터를 계속 가동할 값싸고 안정적인 전력이 부족하면 산업을 유지하기 어렵다. AI를 구동할 전력을 어디서, 누구의 기술로, 얼마에 확보할 것인가가 국가 경쟁력을 좌우하는 질문이 됐다. 국가별 대응은 조금씩 다르다. 미국은 기후 정책 변화와는 별개로 AI 데이터센터에 전력을 공급하고 경제성을 높이기 위해 태양광, 풍력, ESS 투자를 이어가고 있다. EU는 수입 화석연료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전기화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중국은 기존의 높은 에너지 자급 기반에 재생에너지와 원전 등을 빠르게 늘리고 관련 설비의 생산능력도 확대했다. 에너지 전환을 움직이는 환경·안보·경제의 세 축이 국가마다 다른 비중으로 작동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에겐 부담과 기회가 함께 있다. 한국은 원유를 비롯한 에너지 수입 의존도가 높아 지정학적 충격에 취약하다. 하지만 전력기기와 원전, 배터리와 ESS, 가스터빈 등 에너지 전환에 필요한 산업 기반은 충분히 갖췄다. 주요 국가들이 발전원뿐 아니라 이를 생산하고 저장하고 전송할 기술과 설비, 안정적인 공급망을 중요하게 보기 시작하면 한국에는 수출의 기회가 된다. 결국 자국산업 육성과 에너지 안보를 동시에 잡을 열쇠는 기술에 있다. 국내에서 생산 가능한 에너지를 늘리는 것, 이를 뒷받침할 차세대 기술과 산업을 함께 키우는 것이 ‘한국형 에너지 패트리에이션’의 핵심이다.

중첩하는 위기는 경영계의 최대 화두였던 ESG에도 현실적인 제약으로 작용한다. 이에 김경준 전 딜로이트컨설팅 부회장은 ‘ESG 리밸런싱(ESG Rebalancing)’이 2027년의 핵심 경영 키워드가 될 것으로 봤다. ESG를 폐기하자는 주장이 아니다. 정치·사회적 흐름에 과도하게 반응해 기업 경영이 실제 사업 전략과 유리되는 상황을 경계하고 산업 경쟁력과 에너지 안보, 공급망 안정 같은 현실적인 조건을 함께 반영하자는 문제의식이다. 세계적으로 ESG는 후퇴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미국에선 ESG와 기후정책을 둘러싼 정치적 반발이 커지고, 유럽에서도 에너지 가격 상승과 제조업 경쟁력 저하, 녹색경제 투자 성과의 불확실성이 부각됐다. 특히 EU가 친환경 산업의 성장 기대를 바탕으로 추진한 투자는 예상보다 부진한 수요, 전쟁발 에너지 위기 속에서 부진한 성과를 보이고 있다.

사회적 방향성과 실제 시장 수요를 동일하게 보지 말아야 한다. 이미 추진 중인 ESG 사업과 투자를 다시 점검하는 전략적 리밸런싱이 필요한 시점이다. 경제성과 향후 시장성을 다시 살펴보고 매몰비용을 점검하면서 사업의 지속가능성을 따져봐야 한다. 각종 공시와 보고서, 평가와 점검에 들어가는 비용도 다시 살펴볼 수 있다. 방대한 데이터를 수집하고 분류하는 업무에는 AI를 활용하고 실제 의사결정에 도움이 되지 않는 중복적인 프로세스는 줄이는 식이다. 노태우 한양대 국제학부 교수가 제시한 ‘에이전틱 AI ESG(Agentic AI ESG)’ 개념과도 맞닿은 이야기다. 규제 변화와 탄소 데이터, 공급망 정보 관리에 AI 에이전트를 적극 활용하면서 ESG 업무의 효율을 높이는 방법을 고려할 만하다.


더 깊이 뿌리내린 AI, 기업의 양극화

우리 일상 깊숙한 곳까지 들어온 AI는 이제 사회 전반에 걸쳐 거대한 변화를 일으키고 있다. 특히 기업 경영에서 파급효과가 크다. 생성형 AI가 등장한 초기에는 모델의 성능과 도입 속도가 관심사였다. 하지만 이젠 지난 수년간의 AI 투자가 실제 생산성과 수익으로 얼마나 이어졌는지를 따질 시점이 가까워지고 있다. 김지현 SK AI위원회 부사장이 말하는 ‘AI K 자형 양극화 시장(AI K-shaped Market)’은 AI가 만들어낸 가치가 기업에 매우 차별적으로 배분될 가능성을 주목한다. AI 가치사슬의 핵심 지점을 확보했거나 AI를 활용해 생산성을 높이고 실제 수익으로 연결한 기업에는 자본과 성장 기회가 모일 수 있다. 반면 AI 전환이 늦거나 AI를 도입하고도 부가가치를 제대로 남기지 못한 기업은 뒤처질 수밖에 없다. AI 투자를 실제 산업의 생산성과 이익으로 전환한 성적표를 받아보는 시기가 바로 2027년이 될 수 있다.

차이는 이미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AI 투자 확대는 반도체와 데이터센터, 전력과 클라우드 등 AI 인프라로 자본을 끌어들이고 있다. 기업용 소프트웨어와 데이터 플랫폼처럼 AI가 실제 업무에서 작동하는 데 필요한 영역에도 관심이 높아졌다. 단순히 AI 기업이어서 돈이 몰리는 게 아니다. AI가 확산할수록 반드시 거쳐야 하는 병목, 고객이 쉽게 바꾸기 어려운 통제 지점을 갖고 있기 때문에 각광을 받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 기존 기업도 충분히 AI가 만든 가치를 가져갈 수 있다. 월마트는 고객과 상품, 재고와 물류 데이터 위에 AI를 적용하고 이를 고객 경험과 상품기획, 광고와 멤버십 사업의 개선으로 연결했다. AI의 생산성 향상이 실제 매출과 이익으로 이어질 수 있는 사업 구조를 갖춘 것이다. 중요한 것은 AI 기술 자체를 보유했느냐보다 AI가 만든 가치를 자신의 비즈니스 안에 얼마나 품을 수 있느냐다.

다만 AI를 사용한다고 해서 그 과실까지 자동으로 기업에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기존 수요 자체가 AI에 의해 줄어들 수도 있고, 같은 산업 안에서도 데이터와 시스템, 운영 경험의 차이 때문에 AI 전환의 속도는 달라질 수 있다. 게다가 AI를 먼저 도입한 기업은 학습의 복리 효과도 누린다. 사용 데이터와 시행착오를 축적하고 더 빨리 업무 개선에 활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뒤늦게 같은 AI 모델을 구매하더라도 경쟁사가 쌓은 운영 경험까지 단기간에 따라잡기는 어렵다. AI를 도입했는데 비용 부담만 커지는 경우도 있다. 특히 외부 AI 모델에 크게 의존하는 사업은 고객이 늘수록 비용도 늘고 이익은 감소하는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이젠 ‘AI를 얼마나 많이 쓰는가’보다 ‘AI로 만들어진 가치를 누가 가져가는가’가 더 중요하다. 생산성 향상이 고객가치와 매출, 비용 절감으로 이어지고 다시 데이터와 제품에 투자되는 구조를 만들 수 있는지가 기업 간 격차를 벌리는 요인이 될 전망이다.


과업으로 쪼개지는 직무, 재정의되는 근로

AI가 실제 업무를 수행하기 시작하면서 조직에서는 ‘사람 몇 명을 대체할 수 있느냐’가 아니라 조금 더 세밀한 질문이 필요해지고 있다. 하나의 직무 안에도 AI에 맡기기 좋은 일과 사람이 맡아야 할 일이 섞여 있기 때문이다. 박제홍 아키텍트에쿼티 대표가 제안한 ‘과업 경제(Task Economy)’는 이 변화에 주목한다. 직무를 하나의 덩어리로 보고 사람에게 맡기는 대신 작은 과업 단위로 나누고 AI와 내부 직원, 외부 전문가에게 다시 배분하는 구조를 말한다. 최근 AI 도입 이후 직원을 줄였다가 일부 인력을 다시 채용하는 ‘AI 부메랑’ 현상이 벌어지고 있는데 AI와 인간이 맡을 과업을 확인해 재색인(re-indexing)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분석 업무는 자료 수집과 정리, 데이터 분석, 가설 설정, 보고서 작성, 고객과의 커뮤니케이션이 어우러져 있다. 이를 과업별로 쪼개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반복적인 자료 수집과 초안 작성은 AI가 맡고 복잡한 판단은 내부 직원, 일시적으로 필요한 전문적인 검토는 외부 전문가가 맡는 식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업무의 결과뿐 아니라 과정도 데이터로 남기는 것이다. 외부 전문가가 어떤 이유로 AI의 결과를 수정했는지, 내부 직원이 어떤 조직의 맥락을 반영해 최종 판단을 내렸는지를 기록해 다음 업무에서 AI가 참고할 수 있는 자료로 삼을 수 있다. 노동력을 구매한 뒤 완성된 결과물만 남기는 기존의 아웃소싱과 달리 판단의 과정까지 기업의 내부 자산으로 축적하는 구조다.

조직관리 방식도 여기에 맞춰 변화할 수 있다. 직무별 인원만 관리하는 것이 아니라 조직이 실제로 어떤 일을 수행하고 있는지, 해당 과업이 얼마나 반복적인지, 얼마나 많은 판단이 필요한지, 결과를 검증하기 얼마나 어려운지 정리하는 ‘과업 원장(Task Ledger)’을 두는 식의 새로운 접근이 필요하다. 실제로 미국을 중심으로 다양한 과업 경제 시장이 나타나고 있다. AI 기업과 각 분야 전문가를 중개하는 머코어(Mercor) 같은 플랫폼이 대표적이다. 변호사와 의사, 엔지니어 등 각 분야 고숙련 전문가를 AI 기업이 필요로 하는 세분화한 과업과 연결한다. 표준화한 노동을 작은 단위로 거래하던 긱 이코노미를 넘어서 전문적인 지식과 판단까지도 거래 가능한 단위로 바꿀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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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머노이드도 업무 환경과 고용 구조에 새로운 바람을 불어넣을 전망이다. 최홍섭 마음AI 기술총괄 CEO가 제시한 ‘고용형 휴머노이드(Hirable Humanoid)’ 개념을 주목할 만하다. 로봇 자체를 구매하기보다 필요한 기간과 작업량만큼 로봇이 제공하는 노동력과 작업 성과에 비용을 지불하는 방식이다. 로봇을 고정자산이 아니라 서비스형 노동력으로 보는 근본적인 시각 변화다.

현재 피지컬 AI의 상용화를 가로막는 문제 가운데 하나는 현장 데이터 부족이다. 로봇이 실제 공장에서 다양한 작업을 안정적으로 수행하려면 많은 현장 데이터가 필요하다. 하지만 지능이 검증되지 않은 로봇을 먼저 생산 라인에 투입하기는 어렵다. 데이터를 쌓기 위해 현장에 들어가야 하는데 현장에 들어가려면 먼저 데이터를 쌓아야 하는 문제가 생긴다. 해법은 ‘데이터 퍼스트(Data First)’다. 완전 자율 로봇을 먼저 만든 뒤 현장에 보내는 게 아니라 초기엔 사람이 원격으로 조종해 실제 업무에 투입하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데이터가 쌓이면 모델을 개선하고 점차 사람의 개입 비중을 낮춘다. 자동화율이 높아지면 한 명의 원격 조종자가 여러 대를 관리하는 구조도 가능할 수 있다.

로봇 공급기업 입장에선 완벽한 AI를 구축하지 않고도 현장 데이터와 매출을 동시에 확보할 수 있다. 고객 기업 입장에서는 큰 규모의 자본적 지출(CAPEX) 없이 운영비(OPEX) 형태로 휴머노이드를 도입하는 효과가 생긴다. 작은 공정부터 도입해 생산성을 확인한 뒤 적용 범위를 넓힐 수도 있다. 값비싼 로봇을 샀다가 제대로 활용하지 못할 위험을 줄일 수 있는 셈이다. 실제로 스타트업 1X테크놀로지스의 가정용 로봇 ‘네오(Neo)’, 어질리티 로보틱스의 물류 휴머노이드 ‘디지트(Digit)’ 등이 이 같은 방식으로 공급되고 있다.

국내 중소 제조기업의 인력난은 고용형 휴머노이드 시장을 앞당기는 요인이 될 수 있다. 특히 위험하거나 반복적이고 인력을 구하기 어려운 업무부터 활용될 가능성이 있다. 이 같은 피지컬 AI 시대의 새로운 근로 구조가 로봇을 움직이고 관리하는 텔레오퍼레이터(로봇 원격 조종사), 로봇 슈퍼바이저, 로봇 트레이너 등의 다양한 직업을 창출할 수도 있을 전망이다.

한편 AI와 로봇이 더 많은 업무를 맡게 되는 시대, 인간의 역량은 어떻게 바뀔까. 박종규 뉴욕시립대 경영학과 부교수는 ‘역량 착시(Competence Illusion)’ 가능성을 제시했다. AI를 활용해 만든 수준 높은 결과물을 개인의 실제 직무 역량과 동일하게 보는 현상을 말한다. AI를 잘 활용하는 능력은 이제 시대에 걸맞은 직무 능력이다. 하지만 좋은 결과물을 만드는 것과 결과를 이해하고, 설명하며, 새로운 상황에 적용할 수 있는 전문성은 별개의 영역이다. AI는 정보를 빠르게 요약하고 논리를 구조화한다. 업무에선 큰 도움이 된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담당자가 직접 자료를 읽고, 방향을 고민하고, 잘못된 판단을 수정하는 과정이 줄어들 수 있다.

교육학에서는 일정한 인지적 노력과 시행착오를 장기적인 학습에 필요한 ‘생산적 어려움(Desirable Difficulties)’으로 본다. 생산적 어려움이 줄어들수록 개인의 역량 축적은 더뎌진다. 전문가를 만드는 학습 과정이 약화할 수 있다는 얘기다. 특히 저연차 직원에게 더 중요한 문제다. 이미 전문성을 쌓은 직원은 AI의 결과를 기존의 경험과 비교해 판단할 수 있다. 하지만 신입 직원은 비교 기준 자체를 만드는 단계에 서 있다. AI의 논리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는데도 좋은 결과가 반복되면 자신의 실력이 높아졌다는 착각에 빠지기 쉽다. 이미 가진 능력이 약해지는 ‘디스킬링(Deskilling)’을 넘어 애초에 전문성이나 핵심 역량을 형성하지 못하는 ‘네버 스킬링(Never-skilling)’의 위험까지 제기된다.

구성원의 역량을 평가하는 기준 역시 달리할 필요가 있다. 결과와 의도를 설명할 수 있는지, 시간이 지난 뒤에도 비슷한 수준으로 다시 수행할 능력이 있는지, 낯선 문제에도 같은 해법을 적용할 수 있는지를 함께 살피는 방식을 적극 검토해야 한다. 즉 설명 가능성, 반복 가능성, 전이 가능성을 평가해야 한다는 말이다. 정병익 앤더슨컨설팅 파트너도 ‘하이브리드 싱킹’이라는 개념으로 비슷한 접근법을 강조했다. 단순히 AI 도구를 잘 쓰는 역량보다 AI와 함께 문제를 재정의하고, 가설을 세우고, 데이터를 해석하며, 사용자와 현장의 맥락을 이해하고, 실행 가능한 전략으로 연결하는 역량이 필요하다는 의미다.


AI 시대, 인간을 다시 보다

AI와 함께하는 소비자의 일상은 어떻게 바뀔까. 장진규 컴패노이드랩스 의장은 ‘AI 증강 라이프웨어(AI-Enhanced Lifeware)’가 하나의 장면이 될 것이라고 봤다. 사람이 디지털 기술을 사용하는 단위가 개별 앱과 기능에서 삶의 목표와 과업으로 이동하는 흐름을 뜻한다. 기존 소프트웨어에 AI 기능을 추가하는 수준을 넘어 여러 소프트웨어와 AI 에이전트가 사용자의 목적을 중심으로 연결돼 작동하는 생활형 지능 체계가 구축될 것이라는 전망이다.

기존 소프트웨어에서는 사용자가 필요한 기능을 찾아야 했다. 회의를 준비하려면 캘린더에서 일정을 잡고, 문서 프로그램으로 안건을 만들고, 메신저를 통해 자료를 요청한다. 각각의 소프트웨어는 자신의 기능을 제공하지만 ‘회의를 잘 준비해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사용자의 최종 목표까지 책임지지는 않는다.

반면 AI 증강 라이프웨어에서는 출발점이 기능이 아니라 목표가 된다. 사용자가 어떤 일을 이루고 싶은지 말하면 AI가 필요한 서비스와 정보를 연결해준다. 슈퍼앱이 여러 기능을 한곳에 모으는 방식이라면 AI 증강 라이프웨어는 사용자의 목표에 맞춰 기능을 순서대로 연결까지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다. 여러 에이전트와 소프트웨어를 연결하는 통합 체계에 가깝다는 점에서 특정 과업의 실행 주체인 AI 에이전트와도 구분된다.

전제 조건은 실행의 안전성이다. AI가 계획을 잘 세우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출장 일정을 그럴듯하게 짜주는 것과 실제 예약을 끝내는 일은 다르다. 웹사이트에 로그인하고 좌석과 취소 조건을 비교하고 결제를 진행해야 한다. 도중에 화면이 달라지거나 오류가 발생하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 하고 제대로 처리됐는지도 확인해야 한다. 그래서 AI 증강 라이프웨어에서 필요한 역량은 목표 이해→계획→실행→결과 확인→오류 복구→인간 승인까지 이어지는 실행 안정성이다. 다만 이것이 모든 일을 AI가 알아서 처리하는 완전 자율화를 뜻하진 않는다. 반복적인 검색과 입력, 정보 정리와 조작은 AI가 줄여주되 목표를 정하고 예외 상황을 판단하며 책임과 취향, 관계가 걸린 순간에는 사람이 개입하는 구조가 필요하다. 사용자는 AI에 일을 맡기면서도 어디까지 허용할 것인지, 어느 단계에서 자신의 승인을 받도록 할지를 정하게 된다.

이 변화는 소프트웨어 기업의 경쟁 방식에도 영향을 준다. 지금까지 좋은 사용자 경험은 메뉴를 얼마나 편리하게 만들고 사용자를 얼마나 오래 서비스 안에 머물게 하느냐와 연결됐다. 하지만 앞으론 AI 친화적인 기능과 데이터를 갖추는 게 더 나은 사용자 경험의 조건일 수 있다. 성과를 판단하는 기준 역시 달라질 전망이다. 클릭 수와 체류시간보다 사용자가 원한 일을 실제로 끝냈는지, 완료까지 얼마나 시간이 걸렸는지, 오류와 예외는 얼마나 발생했는지, 사람이 몇 차례 개입해야 했는지 등이 중요해진다. 사용자의 시간을 얼마나 점유했느냐가 아니라 사용자의 일을 얼마나 잘 완수했는지를 보는 시대가 열릴 것이란 얘기다.

AI가 더 편안한 경험, 더 정교한 분석으로 인간의 욕망을 파고드는 시대, 오히려 소비자가 자신의 욕망을 직접 관리하려는 모습도 나타날 것이란 전망도 나왔다. 송수진 고려대 글로벌비즈니스대학 교수는 이런 움직임을 ‘앤드-벗 컨슈머(AND-BUT Consumer)’로 설명했다. 소비자가 욕망을 무력하게 따르거나 의지로 무조건 억누르는 대신 설계 가능한 대상으로 다루는 현상을 말한다.

오늘날 소비자는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음식과 쇼핑, 숏폼 콘텐츠와 건강, 저축, 업무 같은 장기적인 목표 사이에서 반복적인 선택을 한다. 알고리즘과 브랜드가 더 정교한 자극을 제공할수록 의지력에 기대 계속 참기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래서 택하는 방법이 대결의 조건을 바꾼 새로운 소비 패턴이다.

첫 번째 방식은 욕망의 강도 자체를 낮추는 오프(OFF)다. 대표적인 사례가 위고비·마운자로 같은 GLP-1 계열 비만치료제다. 먹고 싶은 욕구를 의지력으로 참는 대신 포만감과 식욕 신호에 개입해 갈망 자체를 낮춘다. 식욕 참기를 환기해 욕구 차단의 계기를 만들어주는 닥터나우의 ‘마음자로’ 서비스, 논알코올 맥주처럼 즐거움은 유지하되 부담 요소만 덜어내는 소비도 같은 흐름이다. 두 번째 방식은 하기 싫은 일에 좋아하는 것을 결합해 저항감을 낮추는 앤드(AND)다. 최근 소셜미디어에서 확산한 ‘어드민 파티’가 대표적이다. 친구들이 노트북과 간식을 들고 모여 세금 신고나 병원 예약, 이메일 정리처럼 미뤄둔 일을 함께 처리하는 행동이다. 미국 브루클린의 ‘선샤인 런드로맷 앤드 핀볼’처럼 빨래를 기다리는 시간에 핀볼 게임을 결합해 지루한 의무를 여가로 바꾼 사례도 있다. 세 번째 방식인 벗(BUT)은 반복적이고 지루한 행동에 놀이와 미션, 서사를 더해 지속가능하게 만드는 것이다. 러너들이 지도 위에 토끼나 호랑이 모양이 그려지도록 함께 달리는 ‘GPS 아트’나 생크림을 매달고 뛰는 ‘버터런’처럼 평범한 러닝을 하나의 미션으로 바꾸는 방식이 대표적이다.

세 방식의 공통점은 참는 능력을 키우기보다 욕망과 행동이 작동하는 조건을 바꾸는 데 집중한다는 점이다. 욕망과 정면으로 싸우는 대신 강도를 낮추거나, 즐거움을 붙이거나, 반복에 의미를 더해 자신의 반응을 조절하는 것이다.

이들 앤드-벗 컨슈머를 대하는 기업의 전략도 달라져야 한다. 대표적으로 소비자가 자신의 소비를 원하는 수준에서 조정하도록 돕는 접근법을 생각해볼 수 있다. 제품의 기본 효용에 더해 소비의 시작과 중단, 재개와 강도를 사용자가 정하도록 돕는 ‘통제 효용’을 제공하는 식이다. 이처럼 소비자가 원하는 자신이 돼 가는 과정에서 욕망을 효과적으로 조절할 수 있도록 돕는 브랜드가 더 많은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AI의 영향은 업무 방식과 산업 구조의 변화에만 그치지 않는다. AI가 만들어내는 결과물의 수준이 빠르게 높아지고 누구나 일정 수준 이상의 완성도를 손쉽게 구현할 수 있게 되면서 오히려 ‘잘 만든 것’의 희소성은 낮아지고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무엇이 사람의 관심을 끌고 더 높은 가치를 인정받을 것인지에 대한 기준도 달라질 수 있다. 기계가 완성도를 상향 평준화할수록 인간만이 남길 수 있는 흔적과 개성이 새로운 희소성이 되는 역설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AI 시대에는 완성도와 진정성을 바라보는 기준에도 변화가 생길 전망이다. 권문혁 히트메카닉스 대표가 제안한 ‘로센티시티(Raw-authenticity)’는 조금 서툴고 흠집이 보이는 ‘날것(Raw)’과 사람의 몸과 마음에서 나온 ‘진정성(Authenticity)’을 결합한 표현이다. AI가 일정 수준 이상의 글과 이미지, 영상을 손쉽게 만들어내면서 이전에는 제거해야 할 결함으로 여겼던 인간의 흔적이 오히려 가치 있게 받아들여질 수 있다는 발상이다.

AI나 새로운 제작 기술을 거부한다는 뜻은 아니다. 기술을 적극적으로 이용해 표현의 범위를 넓히는 것은 필요하다. 다만 인간의 경험과 감정을 없애는 방향으로 활용하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AI를 활용하더라도 창작자의 판단과 관점이 어느 부분에 들어갔는지를 명료하게 보여주고 서비스에 따라선 사람이 직접 만들고 응대한다는 사실 자체를 차별화 포인트로 삼아야 한다.

여기서 ‘출처(Origin)’는 강력한 경쟁력이 된다. AI가 사람의 목소리와 문체는 물론 거친 질감과 어색한 말투, 의도적으로 남긴 실수까지 정교하게 흉내 낼 수 있다면 단순히 ‘인간적인 느낌이 나는가’만으로는 진정성을 판단하기 어려워진다. 조금 투박하게 만들었다는 이유만으로 로센티시티가 생기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결국 중요한 것은 누가 만들었고, 그 안에 누구의 경험과 시간이 축적돼 있는가다. ‘원조 맛집’ 논쟁을 떠올리면 이해하기 쉽다. 거의 같은 맛을 내는 가게가 생겨도 사람들은 여전히 원조를 찾는다. 음식의 맛만이 아니라 그 맛에 축적된 시간과 이야기까지 함께 소비하기 때문이다.

AI 시대의 콘텐츠와 브랜드도 마찬가지다. 결과물을 정교하게 복제할 수 있을수록 오히려 그 결과가 어디에서 비롯됐는지가 중요해진다. 기업이 축적한 오랜 역사와 고유한 데이터, 창작자의 관점과 제작 과정, 사람의 직접적인 참여는 더 이상 단순한 뒷이야기가 아니라 제품과 브랜드의 ‘출처’를 증명하는 자산이 된다. AI가 결과물의 차이를 좁힐수록 그 결과가 만들어진 배경과 이를 만든 사람의 고유성은 오히려 더 중요한 차별화 요소가 될 가능성이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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