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at a Glance
작가 유시민이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지적했듯 한국은 민주주의의 혜택을 먼저 누리고 그 비용은 뒤늦게 치렀다. 자본주의도 다르지 않다. 1인당 GDP가 일본과 주요 유럽 국가를 추월하고 코스피가 한때 9000을 넘어선 2026년, 상법 개정 이후의 극심한 주식 쏠림과 반도체 성과급 논쟁은 그 청구서가 도착했다는 신호로 볼 수 있다.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규범을 뒤늦게 익히는 ‘학습의 후불제’와 현세대의 성장 비용을 미래 세대에 떠넘기는 ‘부담의 후불제’가 동시에 작동하고 있다. 신기술의 침투 속도가 세계 최전선인 한국은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 거래, 노동 계약의 비대칭성 해소 등 법치와 계약 규범을 실질화하고 노동자가 성과와 위험을 함께 나누는 구조 등을 통해 위험과 보상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 세대 간 부담도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 학습의 후불제는 불가피했지만 부담의 후불제는 이제 선택의 문제다.
01. 후불제 자본주의
Capitalism on Deferred Payments민주주의를 후불로 학습했던 것처럼 1인당 GDP가 일본, 일부 유럽 국가를 추월하고 주식시장이 역대급 활황을 맞았던 한국 사회가 비싼 대가를 치르며 상법 개정 이후 심화된 주식 쏠림, 반도체 성과급 논쟁 등 자본주의의 진짜 얼굴을 뒤늦게 체득해가는 현상을 의미.
작가 유시민은 저서 『후불제 민주주의』(2009)에서 한국 민주주의의 특징을 날카롭게 지적한 바 있다. 한국은 민주주의 제도의 혜택을 먼저 누렸지만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시민적 비용과 책임은 뒤늦게 치러 왔다는 것이다. 미국 경제학자 밀턴 프리드먼이 『자본주의와 자유』(1962)에서 강조했듯 자본주의는 단순히 돈을 버는 체제가 아니라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 위에 세워진 문명적 질서다. 이 두 권의 책을 나란히 놓고 보면 하나의 질문이 떠오른다. 민주주의를 후불제로 학습한 한국은 자본주의 역시 후불제로 학습해 온 것이 아닐까.
2026년은 그 청구서가 도착한 해로 기억될지 모른다. 구매력 평가 기준인 1인당 GDP가 일본과 주요 유럽 국가들을 추월하고 코스피지수가 한때 9000을 넘어서는 유례없는 변동성을 보이면서 한국의 국민들은 누군가에게는 한없이 달콤하고 누군가에게는 쓰디쓴 자본주의의 참맛을 보았다. OECD에 가입한 지 30년이 지났고 공식적인 해외 원조국이 되면서 명실상부한 선진국에 진입했음에도 한국 사회 전반의 자본주의에 대한 이해는 부족했는데 이제서야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 각성이 시작되고 있는 모양새다. 후불제는 두 가지 차원에서 작동해 왔다. 하나는 자본주의의 원리와 규범을 뒤늦게 익혀 가는 학습의 후불제이고, 다른 하나는 현세대의 성장 비용을 미래 세대에 전가하는 부담의 후불제다.
이식된 자본주의
한국은 자본주의를 스스로 발명한 나라가 아니다. 한국의 첫 자본주의 경험은 자유시장경제라기보다 식민지 수탈 경제에 가까웠다. 회사령으로 조선인의 기업 설립을 통제하고, 토지조사사업으로 전통적 소유관계를 재편하며, 산업 배치를 제국의 필요에 종속시킨 체제 아래에서 한국 민족 다수가 경험한 시장이란 자유로운 교환의 장이 아니라 수탈의 통로였다. 시장에 대한 뿌리 깊은 양가감정은 여기서 출발한다.
해방 이후에는 냉전 질서 속에서 미국식 시장경제 체제가 급속히 이식됐다. 그 출발점부터가 상징적이다. 일본인이 남기고 간 귀속재산을 민간에 넘긴 과정은 한국 자본가 계급 형성의 원점이었는데 그 과정은 시장 경쟁이 아니라 정치적 연줄과 행정적 재량에 의해 좌우됐다. 시가보다 훨씬 낮은 가격에 장기 분할 상환 조건으로 연고자에게 우선 배정된 기업들이 훗날 재벌의 모태가 됐다. 한국 자본주의의 첫 단추는 경쟁을 통한 부의 축적이 아니라 정치를 통한 부의 축적이었던 셈이다.
산업화 시대는 이 유산 위에 세워졌다. 박정희 시대의 개발국가는 놀라운 산업화를 이끌어냈다. 이는 나름의 내적 논리를 가진 모델이었다. 국가가 관치금융으로 자원을 배분하고 수출 성과라는 객관적 지표로 기업을 선별하는 방식은 시장이 미성숙한 조건에서 상당한 효율성을 발휘했다. 그러나 그 유산은 양면적이다. 오늘날 한국 대기업이 가진 글로벌 경쟁력의 맹아는 그 시기에 형성된 것이지만 동시에 경쟁의 규칙보다 결과를 우선하고 시장의 신뢰보다 국가의 보증에 의존하는 관행 역시 그 시기에 뿌리를 내렸다.
은행 문턱을 넘는 능력이 곧 사업 능력이던 시대, 정부의 산업 지정이 기업의 운명을 갈랐던 시대의 기억은 서구가 수백 년에 걸쳐 축적한 계약 문화, 법치주의, 독립적 사법체계, 주주권 개념과는 다른 종류의 자본주의 감각을 한국 사회에 남겼다. 한국에서 돈은 존중받으면서도 동시에 의심받는다. 부의 축적이 혁신과 기업가정신의 결과라기보다 권력, 특혜, 부동산 투기, 정경유착과 연결돼 형성됐던 기억이 여전히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한국은 자본주의의 철학을 충분히 이해한 뒤 선택한 것이 아니라 생존과 성장의 필요 속에서 먼저 경험하게 됐다.
흥미롭게도 이 순서는 문학이 먼저 포착한 바 있다. 찰스 디킨스의 『위대한 유산』에서 대장간 소년 핍은 정체 모를 후원자의 돈으로 하루아침에 신사가 되지만 부를 다루는 법도, 그 부가 어디서 왔는지도 알지 못한 채 런던 생활을 시작한다. 재산이 먼저 도착하고, 그 의미에 대한 학습은 나중에 값비싸게 이뤄지는 것이다. 핍이 뒤늦게 마주하는 진실, 즉 자신을 신사로 만든 돈이 유배된 죄수의 돈이었다는 것은 부의 향유와 부의 기원에 대한 질문이 어긋날 때 정체성 전체가 흔들린다는 점을 보여준다. 부를 먼저 쥐고 그 출처와 정당성의 문제는 나중에 마주하게 된 한국 자본주의의 학습 순서는 핍의 모습을 닮았다.
각성의 청구서: 상법 개정의 교훈 학습의 후불제가 청구서로 돌아오는 장면을 한국 사회는 올해 목격했다. 주주권을 보호하는 방향으로 상법이 개정되면 코리아 디스카운트가 해소되리라는 기대가 있었고 실제로 상법 개정 이후 전반적인 주가지수는 큰 폭으로 올랐다. 그러나 내부에서 벌어진 일은 많은 이의 예상과 달랐다. 지수의 상승은 수익성과 성장성을 갖춘 소수 기업의 리레이팅(re-rating), 즉 재평가가 이끈 것이었고 다수 종목은 상승에서 소외되거나 오히려 가치가 떨어졌다. 쏠림의 정도는 수치로 확인된다. 코스피지수가 사이드카 발동 속에 2.25% 오른 8,228.70으로 마감한 5월 27일, 하락 종목은 826개로 상승 종목 75개의 10배를 넘었다. 시가총액 상위 반도체 관련 종목들이 코스피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연초 39% 수준에서 불과 넉 달 만에 절반 가까이로 확대됐다. 지수는 시장 전체의 온기나 냉기를 측정하는 체온계가 아니라 소수 종목의 체온계가 돼 가고 있었다. 그 소수에 들지 못한 다수의 실상은 코스닥에서 선명히 드러난다. 영업이익으로 이자 비용조차 감당하지 못하는 상태가 3년 이상 지속된 이른바 한계기업의 비중은 코스닥에서 이미 20%를 넘어섰다. 기준을 넓혀 당기순손실 기업까지 포함하면 코스닥 상장사 1268곳 중 44%인 558곳이 손실을 기록하고 있다. 자본시장연구원의 분석에 따르면 코스닥 시장에서 한계기업이 모두 퇴출됐다고 가정할 경우 지수는 37% 추가 상승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부실기업들이 시장 전체의 평가를 끌어내리고 있었다는 뜻이다. 코스닥 시가총액이 8.6배 증가하는 동안 지수 상승이 1.6배에 그쳤다는 사실은 이 시장의 외형적 성장과 내실 사이의 괴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시장이 옥석을 가리기 시작했을 때 무엇이 드러날지는 어쩌면 예정돼 있었던 셈이다. 이것은 제도의 실패가 아니다. 오히려 제도가 약속대로 작동한 결과다. 효율적인 시장이란 옥석을 가리는 시장이며 옥석이 가려지면 옥과 석의 가격은 벌어질 수밖에 없다. 코리아 디스카운트 해소란 모든 주식이 골고루 오르는 것이 아니라 각 기업이 제 가치대로 평가받는 것이었다. 실제로 올해 시행된 상장폐지 제도 개편으로 코스닥에서 최대 220개 상장사가 상장폐지 사정권에 들었는데 이는 지난해 상장폐지 결정 38건의 약 6배에 달하는 규모다. 제도가 정비될수록 퇴출은 빨라지고 격차는 선명해진다. 주주권 보호와 시장 효율화를 요구했던 시민들이 정작 그 결과로 나타난 기업 격차 앞에서 당혹스러워하는 모습이야말로 한국이 자본주의를 결과부터 먼저 경험하고 원리는 나중에 배우고 있다는 증거다.
노력이 아니라 성과를 보상하는 체제: CAFE 모형 한국 사회는 자본주의를 노력을 보상하는 체제로 이해하고 싶어 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는 압축성장기의 경험과도 관련이 있다. 실제로 산업화 초기에는 근면과 헌신이 성과와 상당히 강하게 연결됐다. 그러나 현대 자본주의는 노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자본주의는 본질적으로 성과를 보상하는 체제이며 그 성과는 선택(Choice), 능력(Ability), 운(Fortune), 노력(Effort)의 함수다. 필자는 이를 CAFE 모형이라 부른다.
보상 = f(C, A, F, E)
어떤 산업을 선택했는지, 어떤 기술 변화의 흐름에 올라탔는지, 어떤 시대에 태어났는지, 어떤 네트워크와 생태계에 속했는지가 개인의 성과를 크게 좌우한다. 굳이 비중을 따지자면 자본주의는 노력 자체보다 선택과 능력, 운이 보상에 미치는 영향이 더 큰 체제다. 노동시간과 노동량을 보상의 중요한 기준으로 삼았던 사회주의 체제에서 오히려 노력이 더 직접적인 평가 기준으로 여겨졌다는 점을 떠올리면 이런 차이는 두 체제가 무엇을 보상하는가라는 본질적인 문제와 맞닿아 있다.
이런 현실은 디킨스의 소설에서도 선명하게 드러난다. 『올리버 트위스트』에서 올리버를 구빈원과 범죄 소굴에서 벗어나게 한 결정적 계기는 그의 근면이나 재능이 아니라 출생의 비밀, 다시 말해 그가 스스로 선택하거나 통제할 수 없었던 운(F)이었다. 반면 『데이비드 코퍼필드』의 미코버 씨는 성실함과 낙관(E)을 잃지 않으면서도 번번이 빚에 쫓긴다. “연 수입 20파운드에 지출이 19파운드 19실링 6펜스면 행복, 지출이 20파운드 6펜스면 불행”이라는 유명한 원칙처럼 그는 누구보다 성실하게 삶의 산수를 따졌지만 그것만으로는 궁핍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노력한 만큼 보상받는다는 통념과 실제 자본주의의 작동 방식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간극이 있으며 자본주의의 본고장 영국 독자들은 이미 디킨스의 소설을 통해 그 역설을 경험하고 있었던 셈이다.
최근 반도체 슈퍼사이클과 함께 불붙은 한국 사회의 성과급 논쟁은 자본주의에 대한 인지부조화를 나타내는 극명한 사례다. 성과를 낸 회사의 직원들은 “회사가 큰 이익을 냈으니 구성원들이 더 많은 보상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반도체 호황은 부분적으로 운(F)의 결과(지정학적 수요 급증, 경쟁사의 기술 지연)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수십 년에 걸친 선택(C)과 노력(E)의 산물이기도 하기에 타당한 요구라 볼 수 있다. 문제는 과거의 상식을 아득히 뛰어넘는 수준의 성과급이 소득 격차를 확대하고, 그것이 곧 자산 격차로 이어진다는 점이다. 성과의 과실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는 단순한 노사 협상의 문제가 아니라 CAFE의 각 요소에 기여한 주체가 누구인지를 사회가 어떻게 합의하느냐의 문제다. 그런데 한국 사회는 아직 그 합의를 만들어내지 못했다.가장 평등한 원칙, 가장 불평등한 결과 자본주의의 역설은 여기서 한 겹 더 깊어진다. 자본주의에서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는 원칙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복리(compound interest)의 원칙이다. 누구의 돈이든 같은 수익률이라면 같은 속도로 불어난다. “복리 효과의 힘을 이용해 자산을 축적하라”는 조언이 넘쳐나는 이유다. 이보다 공평한 규칙은 없어 보인다. 그러나 바로 이 평등한 원칙이 가장 불평등한 결과를 낳는다. 복리 효과는 원금에 비례하기에 원래 자산이 컸던 이들에게 더 유리하게 작동한다. 같은 연 5% 이율이라도 원금 1억 원과 10억 원의 격차는 시간이 갈수록 지수적으로 벌어진다.
더 근본적인 문제가 있다. 현실에서는 부자의 수익률 자체가 더 높다는 점이다. 10억 원은 5억 원보다 두 배 힘이 센 것이 아니다. 그 이상이다. 10억 원을 가진 사람은 더 많은 투자 대상을 고려할 수 있고, 더 좋은 투자 기회를 소개받으며, 기회가 왔을 때 더 빨리 움직일 수 있다. 최소 투자금액의 문턱을 넘고, 정보 네트워크에 접근하고, 유동성의 여유로 위기를 오히려 기회로 바꾼다.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는 『21세기 자본』에서 자본수익률(r)이 경제성장률(g)을 상회하는 한 부의 집중은 심화될 수밖에 없다는 r>g 부등식을 제시했는데 그가 함께 보여준 더 흥미로운 실증은 자산 규모별 수익률 격차다. 미국 대학 기금들의 운용 성과를 비교하면 기금 규모가 클수록 수익률이 체계적으로 높았다. 수백억 달러를 운용하는 하버드대와 예일대는 최고의 운용 인력을 고용하고 사모펀드와 헤지펀드 같은 대체투자에 접근하며, 소규모 대학 기금보다 연간 수 %포인트 높은 수익률을 장기간 유지했다. 규모가 수익률을 만들고 수익률이 다시 규모를 키운다. 부는 단리도 복리도 아닌 복리 위의 복리로 증식한다. 빈부격차가 교과서의 복리 공식이 예측하는 것보다 더 빠르게 벌어지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올해 화제가 된 국내 드라마 ‘모두가 자신의 무가치함과 싸우고 있다(모자무싸)’의 제목은 이 구조가 만들어내는 심리적 풍경을 정확히 포착한다. 사람들의 시선은 언제나 위를 향하게 돼 있는데 지수적 성장의 세계에서는 나보다 자산 분위가 조금이라도 높은 사람이 나보다 더 빨리, 더 크게 부자가 된다. 모두가 같은 수익률로 성장해도 등급 간 절대 격차는 계속 확대된다. 전문직과 자산가일수록 오히려 더 큰 상대적 박탈감에 시달리는 역설은 개인의 심리 문제가 아니라 구조의 산물이다.
디킨스라면 이런 모습이 낯설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만든 가장 유명한 인물인 스크루지는 돈이 돈을 낳는 ‘복리’의 논리를 상징하는 인물이다. 돈을 버는 것보다 이미 가진 돈을 계속 불리는 데 삶의 목적을 둔다. 흥미로운 것은 『크리스마스 캐럴』에서 스크루지가 구원받는 방식이다. 유령들은 그에게 돈을 벌지 말라고 하지 않는다. 대신 자신만을 위해 돈을 쌓아두는 삶에서 벗어나 주변 사람들과 나누고 관계를 회복하라고 일깨운다. 결국 디킨스가 문제 삼은 것은 부를 늘리는 행위 자체가 아니라 그렇게 만들어진 부가 사람들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느냐였다.
부담의 후불제 이런 증식의 논리는 세대 간에도 작동한다. 한국 사회는 성장의 과실은 빠르게 나누면서도 그 과정에서 발생한 손실과 제도적 비용은 종종 미래로 미뤄왔다. 외환위기 당시 투입된 공적자금부터 부동산 부채, 저출생, 연금 고갈 문제까지 형태는 다르지만 비슷한 구조를 공유한다. 현재의 안정과 성장을 유지하기 위해 그 비용의 일부를 미래 세대에 넘기는 방식이다.
이 구조에도 문학적 원형이 있다. 디킨스의 『리틀 도릿』에서 주인공 에이미는 빚을 갚지 못한 사람을 가두던 채무자 감옥(debtors’ prison)인 마셜시(Marshalsea)에서 태어난다. 아버지가 진 빚이 딸에게도 태어나는 순간부터 삶의 조건이 된 것이다. 말하자면 이전 세대가 남긴 청구서를 떠안은 채 인생을 시작한다.
이는 디킨스 자신의 상처이기도 했다. 열두 살 때 아버지가 빚 때문에 마셜시 채무자 감옥에 수감되자 디킨스는 학교를 그만두고 구두약 공장에서 일해야 했다. 그는 이때의 기억을 오랫동안 감췄지만 빚과 가난이 다음 세대의 삶을 옥죄는 모습은 그의 소설에 반복해서 등장한다.
지금 걷은 보험료로 현재 세대의 연금을 지급하는 부과식(pay-as-you-go) 연금과 국가 부채의 시대에 『리틀 도릿』을 다시 읽으면 마셜시의 담장은 사라진 것이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을 만큼 넓어진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 태어나는 아이들은 더 이상 채무자 감옥의 담장 안에서 태어나지는 않는다. 그러나 이전 세대가 남긴 청구서를 안고 태어날 수는 있다. 사이토 고헤이 도쿄대 교수는 『지속불가능 자본주의』에서 이 문제를 더 급진적으로 밀어붙인다. 지수적 성장은 유한한 지구에서 지속가능하지 않으며 자본주의의 성장은 본질적으로 미래 세대의 자원과 에너지를 현재로 당겨쓰는 구조라는 것이다. 연금 문제는 그 축소판이다. 현재 세대의 노후를 미래 세대의 보험료로 지탱하는 부과식 연금은 인구가 늘고 경제가 성장한다는 전제 위에서만 성립한다. 그 전제가 무너진 지금, 우리는 자본주의 전체가 일종의 거대한 후불제였을 가능성과 마주하고 있다.
21세기의 맨체스터 부담의 후불제는 재정과 연금의 장부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신산업의 노동 현장에서 진행 중이다. 이를 보려면 역사를 하나 경유할 필요가 있다. 산업혁명의 기술적 발명지는 사실 영국 맨체스터가 아니었다. 제임스 와트의 증기기관은 글래스고에서 개량됐고, 핵심 특허와 자본은 버밍엄에 모여 있었다. 그러나 세계가 산업혁명의 얼굴로 기억하는 도시는 맨체스터다. 신기술이 노동과 주거, 시간 감각을 가장 밀도 높게 재편한 현장이었기 때문이다. 사회학자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1844년 이 도시에서 기록한 노동자 실태 보고서가 지금도 읽히고, 예닐곱 살 아이들이 갱도의 통풍문 옆에서 하루 열두 시간을 보낸다는 사실이 밝혀져 1842년 영국 의회를 뒤집어 놓은 광산조사위원회 보고서가 지금도 인용되는 이유다.
디킨스는 구빈원의 소년이 죽 한 그릇을 더 달라고 청하는 장면, 그 소년이 하마터면 굴뚝 청소부에게 팔려 갈 뻔한 장면을 통해 통계만으로는 보여줄 수 없는 제도 지체의 비용에 얼굴과 이름을 붙였다. 당시 공장법과 광산법 같은 제도적 보호 장치는 늘 산업화가 낳은 피해보다 한발 늦게 등장했다. 새로운 산업이 성장하는 속도를 제도가 따라잡지 못하는 동안 그 격차에서 발생한 비용은 가장 취약한 사람들이 몸으로 감당해야 했다. 자본주의의 원산지 영국에서도 새로운 산업에 적응하는 과정은 결국 ‘후불 학습’이었던 셈이다. 다만 영국이 두 세기에 걸쳐 나눠 낸 수업료를 한국은 훨씬 짧은 시간에 압축해서 내고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21세기의 맨체스터는 어디일까. 적어도 인공지능(AI) 혁명의 발명지가 한국은 아니다. 파운데이션 모델을 개발하고 막대한 자본을 움직이는 중심지는 미국 샌프란시스코와 중국 항저우 등에 있지 경기도 판교에 있지 않다. 그러나 발명의 지도와 침투의 지도는 다르다. 제조업 노동자 1인당 로봇 밀도 세계 1위, 일상 곳곳에 깊숙이 자리 잡은 플랫폼 경제, 창작 노동마저 주 단위의 알고리즘 경쟁으로 재편한 웹툰 산업까지 살펴보면 한국은 신기술이 사회에 침투하는 속도와 강도 면에서 세계의 최전선에 있다. 이는 장경섭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가 ‘압축적 근대성(compressed modernity)’이라고 설명한 한국 사회의 특성과도 맞닿아 있다. 하나의 변화에 적응하고 그에 필요한 완충 장치를 마련하기도 전에 다음 변화가 밀려오는 사회다. 산업혁명의 충격과 모순이 가장 먼저 집약됐던 19세기 맨체스터처럼 오늘날 한국은 새로운 기술이 사회를 얼마나 빠르고 깊게 바꿀 수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현장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은 ‘21세기의 맨체스터’라 할 수 있다.
그 함의는 낭만적이지 않다. 배달 라이더는 알고리즘이 배정한 시간 안에 배송을 마쳐야 하지만 이들이 근로자인지 자영업자인지는 아직 어느 나라도 깔끔하게 답하지 못했고, 그 회색지대에서 사고의 위험은 개인이 홀로 감당한다. 주간 연재 웹툰 작가의 노동 강도는 창작이라는 이름 아래 산업 재해 통계 바깥에 놓여 있고, 세계가 감탄하는 K콘텐츠의 원가 구조에는 제작 현장의 노동이 오랫동안 제대로 계상되지 않았다. 1840년대 갱도에서 그랬듯 제도가 도착하기 전까지 격차는 몸으로 메워진다. 부담의 후불제의 21세기 판본은 연금 장부가 아니라 심야의 도로 위에서, 마감 전날의 작업실에서 진행되고 있다. 디킨스가 오늘 밤 서울에 온다면 그는 소설의 첫 장면을 어디서 찾을지 오래 고민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비관할 이유는 없다 이 모든 진단 앞에서 사이토 교수처럼 탈성장을 결론으로 삼아야 할까. 필자의 생각은 다르다. 탈성장론에는 진단의 통찰에도 불구하고 근본적인 설계 결함이 있다. 어떤 경제 체제든 유지되려면 구성원 각자가 그 체제 안에 남아 협력할 이유가 있어야 한다. 경제학이 참여 제약(participation constraint)이라 부르는 조건이다. 성장을 멈춘 경제에서 혁신가는 왜 위험을 감수하는가. 저축하는 사람은 왜 소비를 미루는가. 다음 세대는 왜 이전 세대가 설계한 축소의 규율을 받아들이는가. 탈성장론은 모두가 자발적으로 덜 갖는 데 동의하는 세계를 전제하지만 동의를 이끌어낼 유인 구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스크루지의 구원이 증식의 중단이 아니라 공동체로의 복귀였다는 『크리스마스 캐럴』의 통찰을 떠올려보자. 필요한 것은 ‘성장의 정지’가 아니라 ‘성장과 참여의 재연결’이다.
오히려 역사를 돌아보면 지수적 성장의 한계라는 위협은 바로 그 위협 때문에 인류의 창의성을 자극해 왔다. 영국 경제학자 토머스 맬서스가 인구 폭발로 인한 파국을 예언했을 때 농업 혁명이 왔고, 석유 고갈이 임박했다는 경고가 반복될 때마다 탐사 기술과 대체 에너지가 등장했다. 제약이 혁신을 낳는다는 것은 경영학의 오래된 통찰이기도 하다. 자원의 유한성은 자본주의의 사망 선고가 아니라 자본주의가 풀어야 할 다음 문제의 정의에 가깝다.
그리고 한국에는 긍정적인 선례도 있다. 민주주의를 시행착오 속에서 학습해온 한국 사회는 여러 차례 큰 정치적 갈등과 위기를 겪으면서도 이를 헌법과 제도의 틀 안에서 해결하려는 경험을 축적해왔다. 후불제 학습은 늦은 학습일 수 있지만 반드시 실패한 학습을 뜻하지는 않는다. 한국 사회는 때로 큰 비용과 시행착오를 겪은 뒤 제도를 보완하고 새로운 질서에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민주주의가 그랬다면 자본주의의 학습도 다르리라는 법은 없다.
어떤 자본주의를 선택할 것인가 그렇다면 한국 사회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개별 정책의 나열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질문의 전환이다. 지금까지 한국의 정책 논쟁은 성장이냐 분배냐를 두고 다퉈 왔다. 그러나 후불제 자본주의 관점에서 보면 진짜 질문은 다르다. 어떤 자본주의를 할 것인가. 각성한 시민들의 선호는 이미 갈라지고 있다. 일부 젊은 세대는 효율성, 개인의 선택의 자유와 그에 따른 책임을 강조하는 근본주의적 자본주의에 끌리는 듯하다. 반면 다른 이들은 사회적 안전망 강화와 정부 개입을 통한 격차 축소, 즉 복지국가형 수정 자본주의를 지지한다.
여기서 참조할 만한 것은 앞서간 나라들의 경험이다. 그런데 그 경험이 주는 교훈은 어느 한쪽 모델의 승리가 아니다. 근본주의적 자본주의에 가장 가까운 미국은 세계 최고의 혁신 생태계를 만들어냈지만 동시에 프린스턴대 경제학과 명예교수 부부 앵거스 디턴과 앤 케이스가 ‘절망사(deaths of despair)’라 명명한 현상, 즉 학력이 낮은 백인 중년층에서 약물, 알코올중독, 자살로 인한 사망이 급증하는 현상을 낳았다. 체제에서 밀려난 이들이 삶 자체에서 퇴장하고 있는 것이다. 반대편의 유럽 복지국가들은 격차를 억제하는 데는 성공했지만 성장 동력의 정체와 혁신의 지체라는 다른 종류의 대가를 치르고 있으며 그 재정 부담은 역시 미래 세대에 이월되고 있다. 양쪽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참여 제약의 위기를 겪고 있는 셈이다. 한국이 어느 한 모델을 수입하는 것으로 답을 대신할 수 없는 이유이며 뒤늦게 학습한 자가 오히려 앞선 자들의 시행착오 위에서 제3의 답을 설계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질문에 답하는 과정에서 적어도 세 가지 방향은 분명해 보인다.
첫째, 법치와 계약 규범의 실질화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사이의 불공정 거래, 노동 계약의 비대칭성, 아직 법적 이름을 얻지 못한 플랫폼 노동의 지위를 바로잡고 사법 불신을 해소하지 않으면 시장 신뢰는 구호에 그친다. 제도가 참사보다 먼저 도착하게 만드는 것, 그것이 맨체스터의 역사가 남긴 첫 번째 교훈이다.
둘째, 위험과 보상의 재연결이다. 실패한 경영자가 책임을 지고, 성공한 기업가가 정당한 보상을 받으며, 노동자가 성과와 위험을 함께 나누는 구조가 정착돼야 한다. 여기에는 부자의 수익률이 더 높아지는 구조적 격차를 보정하는 장치, 즉 기회의 문턱을 낮추는 금융 접근성, 자산 형성의 사다리도 포함돼야 한다.
셋째, 세대 간 부담의 공정한 분배다. 연금 개혁, 재정 준칙, 부동산 세제 개편은 현세대의 불편을 감수하면서 미래 세대에 넘기는 청구서를 줄이는 작업이다. 이 세 가지는 개별 부처의 정책 과제가 아니라 하나의 질문에 대한 답이다. 바로 “다음 세대가 기꺼이 참여할 만한 자본주의는 어떤 모습인가”라는 질문이다. 저출생 예산 규모를 논하기 전에, 국민연금의 보험료율을 다투기 전에, 이 질문에 대한 사회적 합의가 먼저다.
한국은 자본주의의 운영 체제를 빠르게 받아들였지만 그것을 안정적으로 작동시키는 방법은 시행착오를 거치며 익혀왔다. 새로운 체제를 처음 경험하는 과정에서 ‘학습의 후불제’는 어느 정도 불가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생긴 비용까지 미래로 미루는 ‘부담의 후불제’는 다른 문제다. 우리는 앞선 선택의 청구서를 받아 든 세대인 동시에 저출생으로 그 청구서를 함께 감당할 다음 세대마저 줄어드는 시대를 살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문제가 발생한 뒤 비용을 치르는 방식에서 벗어나 비용을 미리 계산하고 현재 세대가 감당할 몫을 먼저 책임지는 ‘선불의 자본주의’로 나아가는 일이다. 한국 사회가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제도를 보완해왔듯 자본주의 역시 학습하고 개선할 수 있다. 다음 세대에게 이 체제에 참여하고 미래를 설계할 이유를 만들어주는 것, 그것이 한국 자본주의가 풀어야 할 다음 과제다. 190년 전 한 소설가의 증언이 산업화의 그늘을 세상에 드러내고 개혁의 목소리에 힘을 보탰듯 오늘 우리가 포착한 문제 역시 내일의 제도를 앞당기는 출발점이 될 수 있다. 21세기의 맨체스터라 할 만큼 빠른 변화를 경험하고 있는 한국은 이미 새로운 기술과 자본주의가 만들어내는 가능성과 비용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그 경험에서 얻은 교훈을 제도로 바꾸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