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고 효율’ 아닌 ‘최다 대안’ 가져야
북미·亞 등 병렬 생산 역량 절실
Article at a Glance
이란 전쟁과 호르무즈 해협 마비 이전에 후티 반군의 미사일 공격과 홍해 사태가 있었다. 파나마운하를 둘러싼 미·중 갈등, 시베리아횡단철도를 멈춰 세운 러·우 전쟁도 현재 진행형이다. 2026년, 우리는 안보와 정치가 경제를 압도하는 지정학의 시대를 살고 있다. 글로벌 공급망은 더 이상 자유로운 교역 통로가 아니라 상시 위협받는 불안한 길이 됐고 상대를 굴복하기 위해 사용하는 수단이 됐다. 패러다임은 적시성(JIT)에서 유연성(JIC)으로 바뀌었다. 이제 기업은 대체 가능한 공급망을 즉시 가동할 수 있는 ‘전략적 선택권’을 핵심 자산으로 정의하고 대체 경로를 사전에 구축하고 유지하기 위한 ‘병렬 역량’을 확보해야 한다.
1. ‘보이지 않는 손’의 종말, ‘움켜쥐는 손’으로의 전환
지난 수십 년간 글로벌경영은 ‘보이지 않는 손’에 기반한 효율성에 의해 지배돼왔다. 비용을 최소화하고 속도를 극대화하는 ‘적기 생산(Just-In-Time, JIT)’ 방식은 기업의 이윤을 극대화하는 최선의 경로로 추대됐다. 그러나 2026년 현재 펼쳐진 에픽 퓨리 작전(Operation Epic Fury)과 호르무즈 해협의 봉쇄, 격화하는 미·중 관세전쟁은 효율성이라는 단일 가치가 얼마나 취약한 기반 위에 형성돼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세계경제포럼(World Economic Forum, WEF)의 ‘글로벌 리스크 보고서 2026’에 따르면 우리는 관세가 외교를, 제재가 협상을, 공급망이 군대를 대체하는 시대에 직면했다.
이제 안보와 정치가 경제 논리를 압도하는 지정학의 시대가 도래했다.
1
경제적 이익보다 국가적 생존과 패권이 우선시되면서 글로벌 공급망은 더 이상 자유로운 교역의 통로가 아니라 상대방을 굴복시키는 ‘무기’로 변모하고 있다. 이 대전환기에 기업들이 가져야 할 새로운 생존 방식으로 ‘전략적 선택권(Strategic Option)’
2
과 ‘병렬 역량(Parallel Capacity)’
3
을 제안한다. 나아가 변화한 글로벌 공급망 질서 속에서 우리 기업과 국가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2. 공급망의 파편화와 물류 요충지의 무기화
(1) 에너지 및 물류의 심장부, 호르무즈 해협의 마비
2026년 2월 28일, 미·이스라엘 연합군의 이란 내 주요 시설 공습(에픽 퓨리 작전)은 글로벌 에너지 공급망의 심장부인 호르무즈 해협을 마비시켰다. 호르무즈 해협은 전 세계 해상 원유 교역량의 약 27~34%, LNG의 약 20~22%가 통과하는 글로벌 에너지 물류 요충지다. 에픽 퓨리 작전 이후 이란 혁명수비대(IRGC)가 해협 폐쇄를 선언하고 민간 선박에 대한 공격 위협을 가하자 평시 대비 선박 통항량은 90% 이상 급감했다. 이로 인해 해상 운임과 보험료가 각각 12배까지 폭등하며 글로벌 에너지 시장의 구조적 불안정성이 심화했다. 특히 한국은 원유 수입의 약 70%를 중동에 의존한다. 이 때문에 이러한 지정학적 리스크에 가장 취약한 구조를 가질 수밖에 없다.
4
현재 호르무즈 해협은 ‘완전 개방’도 ‘완전 폐쇄’도 아닌 ‘운영상 제약’ 상태에 놓여 있다. 보험료가 12배 폭등하고 선박 통항량이 90% 급감한 상황에서 물류 경쟁의 기준은 비용 효율성에서 운송 가능성 확보, 즉 어떠한 제약 속에서도 운송권을 확보할 수 있는가라는 실행력(Execution)의 문제로 전환됐다.
5
특정 해상 초크 포인트(chokepoint)
6
특정 해상 초크 포인트(chokepoint)에 대한 통제 여부가 글로벌 에너지 가격과 공급 안정성을 좌우한다. 이렇게 공급망의 특정 구간에 대한 통제력 자체가 전략적 무기로 전환되는 시대, 특정 경로에 대한 단일 의존은 곧 경영의 포기를 의미하는 것과 같다.
(2) 진행형 지정학 리스크, 홍해 사태2023년 12월 16일 홍해 바브엘만데브 해협에서 노르웨이 선적 유조선 스트린다호가 후티 반군의 미사일 공격을 받은 이후 우리나라를 포함한 전 세계 선사들은 아시아와 유럽을 이어주는 최단 거리 수에즈운하 항로를 포기하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우회 중이다. 이 우회로 평균 운송 시간은 10~15일이 늘었고 운임은 2~2.5배 증가했다. 그 결과 지금까지도 과거 대비 높은 해운 운임을 유지하고 있다.
7
이란 공습 이전까지만 해도 상황은 호전될 것처럼 보였다. 다수의 글로벌 물류 전문 컨설팅 기관에서 2026년 홍해를 통한 운항 재개를 예상했다. 이미 2025년부터 해상운임도 낮아지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번 이란 공습으로 해상운임은 다시 급등세로 돌아섰다. 특히 후티 반군이 이란 공습의 보복으로 다시 홍해 바브엘만데브 해협에 미사일 공격을 언급하고 있다. 이제 이 항로를 다시 이용할 수 없는 상황에 직면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글로벌 해상 네트워크가 단일 경로 의존 구조에서 다중 경로 전략으로 전환될 수밖에 없음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3) 불안한 태평양~대서양 지름길, 파나마운하지난 2023년 태평양과 대서양을 연결하는 파나마운하에도 큰 문제가 생겼다. 기후 변화로 인해 운하 가동에 차질을 빚은 것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파나마운하의 가치는 높아졌다. 아시아와 미국 동부까지 안전한 공급망으로 아시아~파나마운하~미국 동부 항로가 활성화하면서다. 과거 아시아와 미국 무역은 미국 서부 항만을 통해 이뤄졌는데 팬데믹 때문에 당시 미국 서부 항만이 정체됐고, 파나마운하를 거쳐서 미국 동부 항만으로 가는 전 구간 해상(All-water) 운송이 각광을 받았다. 글로벌 기업들의 미국 신규 투자가 동부, 동남부
8
로 집중되면서 파나마운하를 통한 미국 동부 항만 이용은 더욱 증가하고 있다.
문제는 파나마운하 갈수기(매년 1~4월)가 2023년 초부터 사실상 연중으로 확대된 것이다. [그림 2]에서 볼 수 있듯 파나마운하는 운하 가운데 있는 가툰호(Gatun Lake)의 담수를 양방향으로 흘려보내 선박들이 태평양과 대서양의 고저 차이를 극복하면서 통항한다. 그런데 이 지역 일대의 가뭄으로 가툰호의 담수가 부족해졌다. 파나마 운하청 발표에 따르면 운하 통항 선박 숫자는 2023년 1월 일평균 36척에서 2024년 1월 24척으로 급감했다.
9
현재는 정상화됐으나 언제 다시 기후 변화로 파나마운하에 통항 장애가 생길지 모르는 상황이다. 파나마운하 통항 선박 숫자와 선박 운송 물동량이 제한될 경우 전 구간 해상 운송에도 문제가 생길 수밖에 없다.
트럼프 2기 집권 이후 파나마운하는 중국을 견제하기 위한 수단으로 다시 부상했다. 중국은 미·중 갈등을 오래전부터 대비하면서 글로벌 물류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세계 주요 거점에 항만을 중심으로 하는 물류거점을 확보했다.
파나마운하 역시 예외가 아니었다. 중국은 미국을 대신할 식량과 에너지 자원의 수입처로 남미를 눈여겨봤다. 이들과 연결을 위해 파나마운하 양측에 항만도 확보했다. 에너지 자원은 베네수엘라, 식량 자원을 브라질을 중심으로 무역망을 구축했다. 이를 지원하기 위해 파나마운하의 대서양 측 크리스토발항(Christobal)과 태평양 측 발보아항(Balboa)을 보유하면서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 중국 항만운영사인 CK 허치슨(CK Hutchison)이 미국의 대아시아 물동량 80%가 통과하는 파나마운하 양측에 이들 항만을 보유하고 있는데 유사시 미국의 무역로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할 수 있다는 의미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런 상황은 미국으로 하여금 지정학적 반발을 일으키는 요인으로 작동했다. 트럼프는 2025년 1월 대통령으로 취임하자마자 자국의 사모펀드인 블랙스톤을 통해 CK 허치슨 홀딩스의 파나마 항만을 인수하고자 했다.
중국 정부의 개입으로 거래는 불발됐지만 2026년 2월 파나마 대법원이 CK 허치슨 홀딩스의 항만 운영권 연장이 불법적으로 진행됐다며 연장 무효 판결
10
을 내렸다. 현재 파나마운하의 지정학적 주도권은 미국에 유리한 쪽으로 흐르고 있다. 지정학적 충돌에 더해 기후 변수까지 공급망 리스크 요인으로 편입하면서 물류 시스템은 더 이상 예측 가능한 인프라가 아닌 불확실성 관리 대상이 됐다.
(4) 지정학적 충돌 중 우회로 남북회랑과 중부회랑의 부상우크라이나 전쟁 과정에서 러시아, 이란, 중국 등 비서방국들의 생존을 위한 공급망 다원화 전략이 물류망에서도 진행됐다.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서방이 주도한 대러시아 제재는 기존 러시아 영토를 동서로 횡단해서 동북아·중앙아시아·유럽을 연결하던 시베리아횡단철도(Trans-Siberian Railroad, TSR) 이용률을 급락시켰고 한국과 일본의 항만에서 러시아 극동의 항만과 연결되는 해상 물동량도 감소했다. TSR을 통한 중국발 유럽행 화물 역시 중국 일대일로의 일환인 중부회랑(Trans-Caspian Transport Corridor, TCTC)으로 분산됐다. 제재에 참여한 한국·일본발 유럽·중앙아시아행 화물은 대부분 해상 항로나 중국횡단철도를 통해 중부회랑을 거쳐 유럽으로 가는 형태로 전환됐다. 미국은 이러한 대체 공급망 구축에 맞서 주도권을 유지하기 위해 중부회랑 중간 거점인 아르메니아의 잔게주르회랑(Zangezur Corridor)
11
구간을 99년간 조차(임대)하면서 지정학적 관여의 여지를 남겼다. 반면 러시아는 이란, 인도로 이어지는 국제남북운송회랑(International North-South Transport Corridor, INSTC)을 강화해 자국과 아시아 우방 간의 신속한 물류 루트를 확보했다. 특히 중국으로 집중되던 자국 자원 수출을 이 회랑을 통해 인도와 연결함으로써 경제적 이익뿐만 아니라 전략적인 안정성도 확보했다. 그러나 이번 이란 공습은 국제남북운송회랑 이용을 한동안 어렵게 만들 것으로 보인다. 지정학적 향방에 따라 해당 물류 공급망은 일정 기간 불안정성을 유지할 가능성이 크다.
(5) 상시화된 관세 전쟁과 미국 중심주의12
트럼프 2기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보호무역주의는 더욱 강화돼 ‘아메리카 3.0(America 3.0)’으로 진화한 미국 우선주의(MAGA)를 더욱 공고화하고 있다. 과거 3% 수준이던 보편 관세를 10~50%로 인상하고 중국에 대해서는 100% 이상의 징벌적 관세를 부과하는 등 관세가 외교를 대체하고 공급망이 군대를 대체하는 양상이 뚜렷해지고 있다. 중국에 대한 145%의 상호·보편 관세 부과와 베트남(46%), 멕시코(25%) 등 우회 수출국에 대한 징벌적 관세는 글로벌 분업 체계를 근본적으로 해체하고 있다. 이후 미국 자국 투자, 자국 제품 수입 요구 등 전략적 협상을 통해 관세는 조정됐으나 이제 관세는 단순한 무역 장벽을 넘어 상대국을 굴복시키는 전략적 압박 수단이 됐다.
미국은 바이든 정부 당시 첨단 기술 분야(반도체, AI, 배터리 등)에서 중국의 접근을 원천 차단하는 ‘디리스킹(De-risking)’을 강화했다. IRA(인플레이션 감축법)와 반도체지원법을 통해 동맹국들에 미국 내 투자(On-shoring)와 인접국 투자(Near-shoring)를 강요하며 공급망을 안보 블록화했다. 트럼프 2기부터는 더 강력한 자국 투자 정책을 통해 일방적인 관세 부과 이후 관세 축소 혹은 유예 등의 조건을 통해 더 큰 자국 투자를 끌어내고 있다. 이는 북미 내에서 대부분 상품이 생산과 동시에 소비되고 일부가 외국으로 수출되는 구조로 기존 아시아 생산 후 미국 소비라는 국제 분업 체계의 해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글로벌 공급망은 이제 북미 중심 체계와 아시아 중심 체계로 명확히 이원화되는 구조적 재편기에 진입하고 있다. 미국 수출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한국, 일본, 대만 기업들에 전례 없는 선택을 압박하는 거대한 변화다.
(6) 피지컬 AI로 인한 기정학13
적 이슈와 공급망 변화기술 경쟁 역시 물류 공급망 재편의 핵심 요인이다. 과거 글로벌 공급망은 선진국이 고부가가치 활동을 담당하고 신흥국이 생산을 맡는 수직적 분업 체계에 기반해 구축됐다. 그러나 최근 피지컬 AI와 자동화 기술의 발전은 이 구조를 흔들고 있다. 자동화 생산기술이 확산하면 저임금 국가의 생산 경쟁력이 약화할 수 있으며 미국과 같은 고임금 국가에서도 제조업 생산이 가능해질 수 있다.
14
이 경우 글로벌 공급망은 미국 내 생산-소비-수출 구조로 재편될 가능성도 있다.
미국의 경우 2025년 1인당 국내총생산(GDP)이 8만9000달러에 이르고 있다. 저임금으로 미국 제조업과 서비스 기반을 지지해 주던 불법 이민자들의 이탈로 미국 내 인건비가 더욱더 상승하고 있다. 미국 내 생산을 위해선 구조적인 비용 문제가 존재한다는 의미다. 다만 이 문제는 피지컬 AI와 같은 방법이 대안이 될 수 있다. 현재 미국의 최대 물류·유통 기업인 아마존의 생존 비결도 ‘키바(Kiva)’라는 물류 로봇이었다. 아마존의 진화된 로보틱스 기술은 현재 100만 대 이상의 피지컬 AI 활용과 함께 대량 감원을 시행하고 있는 상황과 맥락을 같이한다.
기술력과 시장을 가진 미국과 중국 같은 곳은 고부가가치 첨단 제품을 생산하고 내수 시장뿐 아니라 세계 시장도 공략하면서 특정 상품에서 글로벌 지배력을 갖게 될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미국은 안보와 자국 소비시장, 중국은 자국 중심의 수직 분업과 물류 공급망을 기초로 피지컬 AI를 통한 자동화 생산력을 강화할 가능성이 크다. 기술과 물류 공급망이 우수한 한국, 일본, 대만, 독일, 네덜란드도 기정학적 요인을 활용해 글로벌 생산 입지로 성장할 수 있는 곳이다. 이들 국가는 고임금을 포함한 높은 생산 비용으로 과거 기업들이 국외로 이전한 지역인데 피지컬 AI와 같은 고임금 노동 기술 덕분에 글로벌 생산 입지로 다시 성장할 가능성이 있다. 첨단 제품의 생산 국지화가 이뤄지면 글로벌 차원의 조달과 소비를 선점하려는 경쟁이 본격화하고 이것이 또 다른 지정학적 갈등으로 이어질 수도 있다. 다만 이런 갈등은 앞서 언급했던 해운과 철도 물류 공급망보다는 항공 물류 공급망에서 번질 것이다. 제품별로 부담할 수 있는 물류비가 있는데 여기서 말하는 첨단 고가 제품은 효용성 차원에서 대부분 항공으로 이동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15
3. 전략적 패러다임의 전환: JIT에서 JIC로
(1) 공급망의 전략적 실패글로벌 공급망 리스크 관리 전문기업인 스페라(Sphera)가 발표한 ‘공급망 리스크 리포트 2026’에는 글로벌 기업 CEO 800명을 설문 조사한 결과가 실렸다. 응답자들은 “모든 위험을 통제하고 있다”고 믿었지만 실제로는 73%의 기업이 지난 1년간 공급망 교란으로 실질적 손실을 입었다고 밝혔다. 과거의 시스템은 ‘완전 개방’ 혹은 ‘완전 폐쇄’라는 이분법적 상황에는 대응할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호르무즈 해협처럼 ‘운영상 제약(Operational Constraint)’이 걸린 모호한 상황에서의 실행력은 확보하지 못했다. 기업들은 1차 협력사인 티어-1(Tier-1)의 상황은 파악하고 있지만 그 너머 하위 공급망(N-Tier)에 대한 데이터는 제대로 확보하지 못하고 있다. 정확한 데이터 부족(44.5%)과 공급업체의 협력 부재(34.8%)는 위기 발생 시 즉각적인 대안 경로 확보를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16
피지컬 AI와 자동화 기술의 발전은 기존 ‘아시아 생산-미국 소비’의 수직적 분업 구조를 파괴하고 있다. AI 기반 자동화 공정은 저임금 국가의 매력을 약화시키고 고임금 국가인 미국이나 한국에서도 직접 제조가 가능한 ‘제조의 국지화(Localization)’를 촉진하고 있다.
17
(2) 효율의 종말과 유연성(JIC)으로의 전환과거의 JIT는 재고를 비용으로 간주하고 이를 최소화하는 데 집중했다. 그러나 코로나 팬데믹과 전쟁을 거치며 기업들은 안정성이 효율성보다 우선함을 깨달았다. 이제 효율성 중심의 운영 방식은 폐기돼야 한다. 기업들은 공급처 다변화, 재고 버퍼 확대, 리스크 모니터링을 포함하는 유연성(JIC) 전략을 필수적으로 채택해야 한다.18
나아가 인내와 회복탄력성에 기반한 ‘병렬 역량(Parallel Capacity)’ 전략을 통해 불확실성을 장기적으로 견뎌낼 수 있는 체질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단순한 우회로 확보를 넘어 특정 지역이 봉쇄되더라도 즉각 가동할 수 있는 복수의 공급망 대안이 필요하다는 의미다.19
이는 마치 컴퓨터 시스템의 이중화 작업처럼 비용은 증가하지만 시스템의 영속성을 보장하는 보험과 같다. 물류에서는 호르무즈 해협 봉쇄에 대비해 사우디의 동-서 파이프라인 우회 경로를 확보하거나 홍해 사태에 대응해 희망봉 우회 항로를 전략적으로 운용하는 능력이 이에 해당한다.러시아의 국제남북교통회랑과 북극항로, 중국의 중부회랑, 일대일로 해상물류망 등도 국가 차원의 공급망 ‘병렬 역량(Parallel Capacity)’을 확보하기 위한 경우라 할 수 있다. 단순한 신규 물류망 개척을 넘어서 지분 확보, 공동 투자, 인수 등을 통한 우선 이용권이나 안전이용권을 보장받아야 한다. 기업들은 생산에서는 북미 중심 체계, 아시아 중심 체계, 글로벌 사우스 중심 체계 등으로 분리해 운용함으로써 리스크를 분산해야 한다. 티어-1, 티어-2 등 협력사 단계별로 입지, 비용, 시간, 품질 등을 고려한 대안 마련 역시 필요하다. 또한 단순 모니터링을 넘어 실시간으로 업데이트되고 감사 가능한 ‘증명된 가시성(Visibility as Proof)’을 확보해야 한다. AI 기술을 활용해 하위 공급망(N-Tier)의 재무 상태와 품질 결함을 사전에 감지하는 의사결정 지능(Decision Intelligence)을 구축해야 한다.
20
예를 들면 이미 삼성전자는 2024년 시작된 홍해 사태 때부터 동남아에서 생산한 제품을 유럽으로 수출할 때 수에즈운하 항로 대신 스리랑카 콜롬보항(호르무즈 해협 사태 이전에는 두바이항)으로 해상 운송하고 이후 유럽까지 항공 운송하는 Sea&Air 모델을 적용했다. 순수 항공 운송을 택하는 것보다 비용은 50% 절감하고, 순수 해상 운송을 선택하는 것보다 시간은 2주 이상 단축한 하이브리드 해법을 마련한 것이다.
21
테슬라의 경우 상습 정체 및 노조 파업이 심한 미국 서안 항만(LA항과 롱비치항)의 문제가 발생할 경우 즉시 미국 동안 항만이나 멕시코 서안 항만을 이용한 국경 육상물류망으로 전환되도록 시스템을 구축해 두고 있다.
22
이 두 사례는 글로벌 기업들이 병렬 역량으로 물류공급망의 유연성을 강화한 대표적인 사례다.
4. 우리 기업을 위한 전략 제언첫째, 실질적으로 병렬 역량을 구축하기 위한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공급망, 생산망, 물류망 모두에 대해 북미 중심 체계와 아시아 중심 체계, 글로벌 사우스 중심 체계 등을 병렬적으로 운용해야 한다. 이는 비용 중복을 의미하지만 한쪽의 붕괴가 전체의 파멸로 이어지는 것을 막는 유일한 방법이다. 나아가 ‘전략적 선택권’을 기업의 핵심 자산으로 정의해야 한다. 이제 가장 많은 공급망 대안을 가진 기업이 시장의 가격 결정력을 쥐게 될 것이다.
둘째, 효율성 중심의 KPI를 회복탄력성 중심으로 재설계해야 한다. 단순 원가 절감보다는 공급망 중단 시 복구 시간(Time to Recovery)과 대안 확보 능력을 핵심 성과 지표로 삼아야 한다.
셋째, 물류 거점의 직접 소유와 통제권을 확보해야 한다. 앞으로의 경쟁력은 항만, 공항과 물류 거점의 소유권이나 우선 이용권이 좌우한다. 주요 물류 요충지에 독자적인 운영권이나 지분을 확보해 위기 시 하역이나 처리 우선권을 보장받는 전략이 필요하다.
넷째, 피지컬 AI와 자동화를 통해 제조 국지화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 자동화 기술의 발전은 저임금 국가의 매력을 약화시키고 소비지 인근 생산을 가능하게 한다. 숙련노동에 의존하지 않는 전 자동화 플랫폼을 구축해 고비용 지역에서도 수익성을 확보할 수 있는 제조 플랫폼 역량을 갖춰야 한다.
다섯째, 데이터 무결성에 기반한 공급망 가시성을 확보해야 한다. 단순히 ‘공급망을 보고 있다는 주장을 넘어 실시간으로 하위 공급업체(N-Tier)의 재고, 생산능력, 물류흐름, 재무 상태와 품질까지 파악할 수 있는 증명된 가시성이 필요하다.
여섯째, 화주-물류기업 간 전략적 동반 진출을 강화해야 한다. 개별 기업의 대응은 한계가 있다. 얼라이언스나 컨소시엄을 통해 창고, 인력, 정보를 공유하는 공동화(Sharing) 전략이 필수적이다. 공급망의 핵심 요소가 되고 있는 물류 부문의 역량을 강화할 수 있는 방안이다.
5. 전략적 선택권이 곧 국력이고 기업의 경쟁력이다이제 세계는 운송로가 분열하고, 비용은 상승하며, 변동성이 상수가 되는 시대로 진입했다. 이 혼돈의 시대에 승자는 가장 효율적인 기업이 아니라 가장 많은 대안을 가지고 전략적 선택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업이 될 것이다. 기업들은 이제 효율성이라는 낡은 잣대를 버리고 병렬적 역량에 기반한 새로운 복합 전략으로 무장해야 한다. 위기(Crisis)는 대안이 없는 자에게는 재앙이지만 병렬 역량을 갖춘 자에게는 시장의 판도를 바꿀 절호의 기회다.
정부 역시 효율성에 입각한 정책이 아니라 기업들이 전략적 선택권이 가능하도록 도와야 한다. 외교적 유연성을 강화하고 전략적 글로벌 물류 공급망을 확보하면서 범부처 차원의 공급망 유지·관리 체계를 구축해야 한다. 앞으로의 산업 경쟁력은 더 이상 생산 비용이 아니라 공급망 통제력에서 결정된다. 가장 효율적인 기업이 아니라 가장 많은 대안을 보유한 기업이 시장을 지배하게 될 것이다. 한국 역시 전략적 물류 거점 확보와 공급망 주권 강화를 통해 새로운 글로벌 질서에 대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