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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경석 산돌커뮤니케이션 이사

"장동건?현빈 서로 느낌 다르잖아요. 기업서체, 회사 이미지로 개성 살려야죠"

최한나 | 162호 (2014년 10월 Issue 1)

Article at a Glance – 전략, 혁신

 

성공하는 서체의 요건은?

일관성: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하는 모든 통로에서 해당 서체를 사용해야 한다. 예컨대 상품 패키지에는 A서체, 광고에는 B서체를 쓰면 소비자가 제품 및 기업에 대해 일관된 이미지를 형성할 수 없다.

지속성:한번 개발하면 적어도 10년 이상 사용하겠다는 생각을 가져야 한다. 한두 해 사용하고 말 서체는 안 하니만 못하다. 개발 후 방치하기보다는 트렌드와 사고방식의 변화에 발맞춰 꾸준히 다듬어주는 일도 필요하다.

가독성:읽히지 않는 글자는 실패다. 개성을 강조하다 실용성을 놓쳐서는 안 된다. 읽기 편한 글자가 오래 생존할 수 있다.

 

편집자주

이 기사의 제작에는 동아일보 미래전략연구소 인턴연구원 김지혜(가톨릭대 영문학과 4학년) 씨가 참여했습니다.

 

현대카드는 전용서체를 활용해 성과를 낸 베스트 케이스로 꼽힌다. 쉴 새 없이 쏟아지는 광고들 사이에서 사람들은 현대카드의 그것을 단번에 구별해낸다. 2005년 현대카드 전용서체가 빛을 본 후 지속적이면서도 일관되게 사용됐을 뿐 아니라 다른 마케팅 및 브랜딩 활동들과 잘 어울려 긍정적인 시너지를 낸 덕분이다.

 

이 시대 많은 기업들이 많이 말하는 데 주력한다. 더 자주 접촉하고, 더 강하게 인식되며, 더 효과적으로 흡수되기를 원한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서체는 굉장히 비효율적인 수단일 수 있다. 직접적이지 않고 단기간에 효과를 볼 수도 없으며 때로는 효과가 있는지 없는지조차 측정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업은 소비자와의 대화에서 스스로 어떤 말투를 사용하고 있는지 점검하고 가다듬어야 한다. 대화는 주고받는 말의 내용만으로 구성되지 않으며 어조와 어투는 내용 이상의 정보를 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이 꾸준히 사용하는 전용서체는 그 기업의 어조이자 어투다. 같은 어조와 어투를 지속적으로 접한 소비자들은 해당 기업에 명확한 이미지를 형성하고 그 기업을 다른 기업과 구별하며 친숙하게 여긴다. 전용서체야말로 직설적이지 않으면서도 잠재의식 속에 다가갈 수 있는 기업 고유의 분위기이자 뉘앙스다. 따져보면 이보다 효과적인 브랜딩 수단도 없다.

 

16년째 기업 전용서체를 비롯한 각종 폰트 디자인을 다루며 삼성과 현대카드, KT&G 등 주요 기업과 전국 도로교통 안내판, 평창동계올림픽, 제주도 등의 글자를 만들어 온 권경석 산돌커뮤니케이션 타이포랩 이사를 DBR이 만났다.

 

권경석 산돌커뮤니케이션 이사는 시각디자인을 전공했다. 1998년 산돌커뮤니케이션에 입사해 지금까지 서체와 관련된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해 왔다. 국내 주요 일간지를 비롯해 현대카드 전용서체(2005), 삼성그룹 전용서체(2003), 국토해양부의 도로교통 안내판과 주소명 전용서체(2008), 네이버 나눔고딕과 옥션고딕(2008), 제주도 전용서체(2010), KT&G 전용서체(2011), 평창올림픽 엠블럼 로고 및 전용서체(2013), HP 전용서체(2014), SBS 전용서체(2014) 등을 개발하는 각종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서체는 어떤 과정을 거쳐 개발되는가.

 

일단 서체 개발을 의뢰한 기업의 담당자로부터 해당 기업이 추구하는 방향이나 목표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질문도 하고 토론도 하면서 틀을 잡아간다. 그런데 기업에서 설명하는 내용은 포괄적이며 모호할 때가 많다. 듣고 나면 어떤 느낌인지 대략 감은 오지만 구체적이지는 않다. 그래서 기업 측의 설명을 듣고 난 후에는 이미지를 잡기 위한 여러 가지 작업을 다양하게 시도한다. 밖으로 나가 지나가는 시민들을 붙잡고 이 기업을 어떻게 생각하는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는지, 이 기업에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 등을 묻는 인터뷰를 진행하기도 하고, 다른 범주의 아이콘들을 활용해 이미지맵을 그리기도 한다. 이미지맵이란 뚜렷한 이미지를 가진 구체적인 대상들로 표현하고 싶은데 모호한 이미지를 대체해보는 작업을 말한다. 예를 들면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남자 연예인 중에 장동건의 느낌이 다르고 현빈이나 정우성이 가진 이미지는 또 다르다. 자동차 중에 벤츠와 BMW는 모두 부를 상징하지만 벤츠가 명예를 강조하며 묵직한 느낌이 드는 반면 BMW는 좀 더 활동적이면서 젊은 느낌을 준다. 남자 연예인 중에 이 기업의 이미지와 가장 잘 어울리는 사람은 누구인지, 자동차로 표현한다면 어떤 자동차로 이 기업을 대변할 수 있을지를 매치해 보는 것이 이미지맵을 그리는 과정이다. 이런 작업들을 통해 해당 기업의 이미지를 구체화한 후 이것을 서체에 담아내는 작업에 들어간다.

 

서체를 한번 만들기 시작하면 적게는 2350, 많게는 11172자를 만든다. 2350자는 한국 표준(KS)으로 이 정도 글자가 있으면 우리나라 말을 모두 표현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지정된 최소 조합이다. 그런데 예전에는 사용하지 않던 말 또는 새로운 말, 이를테면뷁’이라든지 중국 사람들의 발음이나 이름을 한글로 표현하고자 할 때는 2350자 범위를 벗어나는 글자도 필요하다. 따라서 한글을 조합해서 나올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인 11172자를 만들어야 한다.

 

생각한 이미지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결정하는 과정은 분명 창의적인 작업이다. 이전과 다른 모양이나 표현을 생각해내고 그것을 구체적으로 나타내는 일은 디자인에서 요구되는 창의성의 영역으로 봐야 할 것이다. 같은 고딕이라도 어느 쪽을 얼마나 구부리느냐에 따라 느낌은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 하지만가가거겨부터 시작해 한 글자 한 글자를 매만지는 일은 쉽게 말해막노동이다. 0.1㎜를 조정해가면서 하얀 바탕 위 검은색 글자를 하염없이 그리고 다듬어야 한다. 이 작업에만 수개월이 걸린다. 창의성을 꽃피우는 것은 결국 노동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반짝이는 아이디어라도 노동과 시간이 뒷받침되지 않으면 세상 빛을 볼 수 없다.

 

11172자를 만들었다고 해서 작업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단계가 남아 있는데검수. 일단 모든 OS에서 작동하는지 일일이 적용해봐야 한다. 오탈자가 없는지도 꼼꼼히 확인한다. 제일 중요한 과정은을 보는 것인데 이 과정을 통과하지 못하면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수도 있다. 서체는 일종의관계. 한 자 한 자 떼놓고 봤을 때 아무리 예뻐도 모였을 때 별로면 실패다. 이 글자 다음에 어떤 글자가 오느냐, 글자들이 모였을 때 어떤 문장이 만들어지느냐에 따라 느낌이 완전히 달라진다. 마크나 심벌처럼 하나에 모든 것을 압축해 담으려고 하면 십중팔구 실패한다. 그보다는 글자 하나하나에서는 가급적 욕심을 줄이고 글자들이 모였을 때 발휘되는 전체적인 조화와 균형을 맞추는 데 초점을 둬야 한다. 글자만 떼놓고 봤을 때 좀 심심한 듯해야 모였을 때 간이 적당하고 균형이 맞는다. 네이버와나눔고딕프로젝트를 할 때도 그랬다. 처음에는 네이버가 글자를 따로따로 보고는심심하고 평범한 느낌이라면서 다소 불만스러워했지만 합쳐놓고 보니느낌이 다르다고 했다. 글자는 모였을 때 비로소 힘을 발휘한다. 이는 기업의 브랜딩이나 마케팅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일 것이다. 특이한 이벤트 하나 또는 잘생긴 모델 한 명이 기업 이미지를 결정하지 않는다. 기업의 말과 행동 하나하나가 모였을 때 그 모든 것을 아우르는 분위기와 뉘앙스, 그게 그 기업의 브랜드다.

 

 

 

 

기업 서체가 브랜딩이나 마케팅에 효과적인 수단으로 활용될 수 있으려면 어떤 특징을 지녀야 하는가.

 

우리나라에서 기업 서체로 가장 성공한 케이스는 아마도 현대카드일 것이다. 사람들은 문서의 내용을 읽기도 전에 일단 서체만 보고도 이 광고 또는 팸플릿이 현대카드와 관련된 것이라는 점을 알아차린다. 사실 하는 일은 우리나라의 다른 신용카드사들과 얼마나 다른지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현대카드 서체를 보면 어딘지 세련돼 보이고 현대카드는 뭔가 남들이 안 하는 첨단 금융을 할 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다.

 

단순히 서체가 독특하다거나 개성이 강하다고 해서 이런 효과가 나타나지는 않는다. 독특함이나 개성은 그 시점, 그 한순간에 눈길을 잡아끄는 효과가 있을 뿐, 금세 휘발된다. 그것이 곧장 해당 기업을 떠올리게 하거나 기업에 대한 어떤 이미지를 불러오는 것도 아니다.

 

성공하는 서체에는 두 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일관성이다. 소비자들과 소통하기 위한 목적으로 기업 서체를 만들었다면 소비자와 커뮤니케이션 하는 모든 통로에서 그 서체를 사용해야 한다. 상품 패키지, 관련 서비스, 영상 광고, 지면 광고, 외부 행사 할 것 없이 해당 기업이 하는 말과 행동 모두에 그 서체를 써야 한다. 서체는 기업의 목소리 톤, 즉 어조(語調). 상품 패키지에는 귀여운 어린아이의 목소리로 설명해놓고 광고할 때는 중후한 남성의 목소리로 상품을 소개한다면 소비자는 혼란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 제품에 대해, 나아가 그 기업에 대해 일관된 이미지를 형성할 수 없다.

 

둘째, 지속성이다. 한두 해 사용하고 말 서체는 안 하니만 못하다. 기업의 정체성에 어울리는 서체를 만들었다면 아무리 못해도 10년 이상 가져가야 한다. 사실 서체 디자인은 한 번 만들면 반영구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 사람들이 금세 싫증내거나 질리는 다른 디자인과는 다르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헬베티카1 50년이 넘었지만 여전히 인기를 얻으며 다양하게 쓰이고 있다. <타임스> 서체 역시 창간 이후 지속적으로 사랑받으며 영국을 대표하는 서체로 건재하다.

 

현대카드는 두 가지 면에서 모두 잘했다. 신용카드 겉면에 인쇄되는 활자에서부터 사내외에서 사용되는 모든 문서와 광고, 현대카드가 주최하는 모든 행사에서 일관되게 단일한 서체를 사용했다. 2005년 처음 전용서체를 만든 이후 지금까지 약 10년간 계속해서 그 서체를 쓰고 있다. 덕분에 사람들은 현대카드 서체에 충분히 익숙해졌고 서체만 보고도 현대카드를 구별해낸다. 기업이 일관적이면서 지속적으로, 즉 동일한 목소리 톤으로 꾸준히 소통한 결과다.

 

사실 현대카드 서체는 서체 자체만 놓고 보자면 가독성 면에서 높은 점수를 주기 힘들다. 가독성이란 눈에 잘 들어오고 쉽게 읽히는 속성인데 현대카드 서체는 신용카드 플레이트의 형태와 비율을 본떠 만들어졌기 때문에 인위적으로 각이 많이 들어갔다. 그렇다보니 몇 글자 없을 때는 상관없지만 글자가 많이 모이면 부드럽게 읽히지 않고 눈에 자꾸 뭔가 걸려들면서 빠르게 읽히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현대카드는 기업 전체적으로 브랜딩 콘셉트를 명확하게 잡고 그 목적에 맞게 서체를 기획했으며 만든 서체를 일관적이고 지속적으로 사용했다. 그 결과 오히려 그 불편함이 개성으로 인식되고 기업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졌으며 소비자들에게 명확한 메시지를 줄 수 있게 됐다.

  

 

페이퍼에서 웹으로 글자를 접하는 환경이 달라졌다.

 

서체를 만들면서 고려하지 않을 수 없는 변화다. 글자를 많이 접하는 사람이라면 잘 알겠지만 기본적으로 웹은 문서보다 덜 읽힌다. 속도가 느리고 집중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웹에서 사용되는 글자는 문서 위에 놓일 때보다 가독성에 신경을 더 써야 한다. 장식을 줄이고 좀 더 심플해야 한다는 의미다. 웹 전용서체를 개발할 때는 모니터나 핸드폰 화면에 서체가 노출될 때 어떻게 보일지를 분석하고 적용하는 과정이 매우 중요하다. 화면에서 잘 보이도록 보정하는 작업을 힌팅(hinting)이라고 하는데 원래의 디자인 작업을 마친 후 화면에 최적화될 수 있도록 힌팅하는 데도 상당한 시간이 소요된다.

 

‘옥션고딕’을 만들 때 이런 류의 고민을 많이 했다. 옥션은 웹 사이트를 사업장으로 하는 기업이다. 다른 어떤 기업보다도 웹의 특성을 많이 고려해야 했던 작업이었다. 이 밖에도 고민해야 할 점이 많았는데 일단 스스로를 내세우기보다는 자신의 웹 사이트를 매대로 활용하는 다른 사업체들이 더 돋보이게 해야 할 필요가 컸다. 워낙 다양한 물건을 팔기 때문에 특정 종류의 물건을 염두에 두기도 어려웠다. 사용자 연령층이 다양하므로 너무 젊거나 너무 점잖은 느낌이 나는 것도 지양해야 했다.

 

 

처음 고안했던 서체는 지금보다 훨씬 돌기가 부각된 형태였다. 개성이 강하고 독특한 느낌을 주기는 했지만 개발 후 실제 웹 환경에 적용해보니 역시나 돌기들이 눈에 걸려 쉽게 읽히지 않았다. 2, 3차 작업을 거듭하면서 돌기를 다듬고 장식을 줄여 가독성을 높이는 쪽으로 수정을 거듭했다. 아울러 돌기를 제외한 나머지 부분에서 곧은 느낌을 강조해 모든 제품을 아우를 수 있는 중립적 이미지를 표현하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잘 읽히면서도 개성이 죽지 않은, 괜찮은 서체가 나왔다.

 

문자 노출환경이 디지털화하면서 나타난, 눈여겨볼 만한 변화가 하나 더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환경이 디지털화하면 할수록 인간적인 느낌을 선호하는 경향이 강해진다. 최근 작업했던 서체 개발 과정들에서 한번도 예외 없이 논의했던 부분이다. 디지털화는 심플과 미니멀을 특징으로 한다. 2000년대 초, 국내 기업들이 서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던 초기만 해도 정제되고 단정한 고딕체가 주류를 이뤘다. 하지만 지금은 그냥 고딕이 아닌, 손글씨 느낌을 더한 고딕이 대세를 이루고 있다. 이제까지의 글씨체가 딱딱하면서 간결하기만 했다면 이제는 고딕체의 아래 위를 살짝살짝 건드려 필감이 느껴지도록 하는 식이다. 올해 작업을 끝낸 SBS 전용서체가 대표적인 사례다.

 

서체는 결국 기업이 소비자와 소통하는 말투의 분위기나 뉘앙스를 반영하는데 여기서 인간미를 추구하는 경향이 나타난다는 점에 관심을 둘 만하다. 기업이 일방적이거나 위압적으로 보이기보다는 사람들에게 친근하고 편안하게, 친구처럼 다가가고 싶어 한다는 의미가 담긴 현상으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오늘날 기업들이 근본적으로 재고해 봐야 할 마케팅 및 브랜딩의 트렌드이기도 하다.

 

서체를 통해 기업은

소비자의 잠재의식에 다가갈 수 있다.

직접적이지 않으면서도 꾸준하고 은근하게

기업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오늘날 기업들에 서체는 왜 중요한가.

 

소비자에게 기업은 사실 실체가 없다. ‘삼성이라고 들었을 때 누군가는우리나라에서 제일 큰 기업이라고 생각하고, 누군가는갤럭시반도체를 떠올리겠지만 이것들을 아우르면서 딱 떨어지는 무엇으로 표현하기는 쉽지 않다. 그래서 기업들은 브랜딩을 한다. 우리 기업 이름을 들었을 때 소비자들이 떠올려 주기를 바라는 어떤 느낌이나 분위기를 형성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커뮤니케이션을 한다. 이것은 상품이나 서비스 그 자체를 포함해 기업이 영위하는 다양한 활동을 포괄한다.

 

서체는 소비자와의 최접점에 놓인 이미지다. 글자가 담고 있는 내용을 확인하기도 전에 사람들은 서체의 모양이나 구성, 그것들이 모여서 형성하는 이미지로 그 기업이나 상품을 파악한다. 내용은 모르겠지만 이 기업, 뭔가 친절하구나, 이 기업은 좀 자유분방한 느낌이네? 라고 받아들이는 식이다. 우리가 다른 사람의 말을 들을 때 말에 담긴 내용과 별도로 말투나 어조를 통해 그 사람을 평가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서체와 해당 기업 이미지가 잘 맞아떨어졌을 때 효과적인 브랜딩이 이뤄질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에서다. 사실 브랜딩이란 같은 제품이라도 더 좋아 보이게 한다거나 더 가깝게 느껴지도록 하기 위한 것 아닌가. 대놓고 직접 설명한다거나 직설적으로 표현하는 것은 하수다. 소비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잠재의식 속에 심어 놓는 이미지야말로 고수의 브랜딩이다. 이때 서체는 굉장히 효율적인 역할을 할 수 있다. 서체 자체는 브랜딩이나 마케팅을 설명하지 않는다. 서체는 그저 내용을 담아 전달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하지만 서체를 통해 기업은 소비자의 잠재의식에 다가갈 수 있다. 직접적이지 않으면서도 꾸준하고 은근하게 기업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전용서체를 개발하고 싶은 기업들에 팁을 준다면.

 

첫째, 서체 자체는 브랜딩이 아니다. 브랜딩을 할 때 활용할 수 있는 수단 중 하나다. 다시 말하면 기업의 정체성을 확립하고, 그것을 표현하기 위한 브랜딩을 선행하지 않으면 고유의 서체가 나올 수 없다. 우리 기업은 왜 존재하는지, 추구하는 목적이나 방향은 어떤 것인지, 전달하고 싶은 가치나 이미지는 무엇인지에 대한 깊이 있는 고민 없이 서체만 특이하게 만든다고 해서 개성 있는 기업으로 인식되는 것은 아니라는 의미다. 기업의 어떤 활동이든 스스로를 분명히 인식하고 정립하는 것에서부터 출발해야 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또한 전용서체 하나만으로 브랜딩이 완성된다고 오해해서도 안 된다. 현대카드 서체가 높은 인지도와 선호도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밖의 기업 활동과 어울려 시너지를 냈기 때문이다.

 

둘째, 서체는 생명력을 가진 생물이다. 그것도 아주 긴 생명력을 가진 생물이다. 기업의 이미지와 잘 맞아 떨어지고 사람들에게 호응을 얻어 오래 살아남은 서체들은 수십 년, 수백 년씩 생존하기도 한다. 한번 만들어놓고 내버려 둔다고 해서 자생하는 것은 아니다. 시간이 흐르고, 트렌드가 변하고, 사람들이 생각하는 틀과 사회적 구조가 진화하는 것에 발맞춰 끊임없이 다듬어줘야 한다. 스위스의 헬베티카 역시 꾸준히 다듬고 수정을 가해준 덕분에 오랜 생명력을 얻을 수 있었다. 계속 관심을 갖고 보듬어주지 않으면 서체는 오래 살아남을 수 없다. 기업의 전용서체 역시 한번 개발했다고 끝이 아니라 그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다듬어 진화할 수 있게 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현장에서 가장 많이 부딪치는 이슈이기도 한데 가독성을 염두에 둬야 한다. 기업 실무자들과 일을 하다 보면 서체의 개성을 지나치게 중요하게 여겨서얼마나 잘 읽히는가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을 종종 본다. 서체 디자인은 그저 예쁜 글자를 만들기 위한 작업이 아니다. ‘읽힌다또는내용을 전달한다는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는 글자에 무슨 경쟁력이 있겠는가. 자동차를 만들 때 생각한 이미지에 맞춰 아름답게 디자인하기는 했지만 시동이 걸리지도 않고 앞으로 나가지도 않는다면 실패로 봐야 하는 것처럼, 읽히지 않는 글자는 실패다. 아름다우면서도 기업에 잘 부합하는 이미지를 갖추되 서체로서의 기본 기능을 충족해야 한다는 점을 잊으면 안 된다. 결국 읽기 편한 글자가 오래 생존할 수 있다.

 

최한나기자 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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