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필름 고모리 회장
Article at a Glance – 혁신 아날로그 필름이 불필요한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은 코닥, 후지 등 거대 필름제작회사를 위기에 빠뜨렸다. 그 결과 환경변화에 적절하게 대처하지 못한 코닥은 시장에서 사라졌다. 반면 후지는 주력제품의 시장이 거의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건재하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한 것일까. 후지필름은 2000년을 정점으로 필름시장이 하락세에 접어들자 새로운 성장 동력을 찾았다. 이들은 과거의 영광에 안주하지 않고 기존 기술을 바탕으로 TAC필름, 화장품 사업 등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성과를 냈다. 이런 판단을 내린 배경에는 고모리 시게다카 회장의 선견지명과 결단력이 작용했다. 그는 전문경영인임에도 불구하고 주인의식을 가지고 과감하게 후지필름에서 구조조정 등 개혁을 주도했다.
주력사업의 시장이 급속하게 축소돼 기업이 소멸 위기에 처했을 때 경영자는 과연 어떻게 새로운 주력사업을 창출할 것인가? 이 질문은 경영자가 풀어야 할 어려운 문제 중 하나일 것이다. 파괴와 창조. 말은 쉽지만 실행은 결코 쉽지 않다. 대부분의 기업들은 이런 난문을 풀지 못해 결국 쇠퇴의 길로 접어든다. ‘기업수명 30년 설’이 설득력을 얻는 배경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런 문제를 수년 만에 해결하고 새로운 주력사업을 창출해 낸 대표적인 일본 기업이 하나 있다. 바로 후지필름이다. 후지필름은 필름시장의 위기에서 과감하게 개혁을 시도했고 그 결과 새로운 주력사업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개혁 주도자는 고모리 시게다카(古森重隆) 회장 겸 CEO다. 고모리 회장의 업적은 사실 이스트먼코닥 때문에 더욱 빛났다. 전 세계 필름시장에서 양대 거성 중 하나였던 코닥이 2012년 파산보호 신청을 했기 때문이다. 무엇이 두 기업의 명암을 갈랐을까?
본업이 소멸 위기에 처했을 때 경영자가 현상을 인식하고 과감한 개혁을 실행한 기업은 생존했다. 그렇지 못한 기업은 내리막길을 멈출 수 없었다. 고모리 회장은 후지필름이 처한 당시의 위기를 “도요타에서 자동차가 없어지고 신닛테츠(신일본제철)에서 철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고 표현했다. 위기를 대하는 마음가짐을 읽을 수 있는 절박한 표현이다. 고모리 회장은 현재 일본에서 가장 주목받는 경영자 중 한 명이다. 내수 축소와 본업 소멸의 위기에 처한 많은 일본 기업에 귀감이 되기 때문이다. 고모리 회장은 과연 어떻게 주력사업을 변혁시키는 데 성공했을까? 우리가 후지필름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는 하나 더 있다. 한국 기업이 일본 기업에 비해 경쟁력이 뒤처지는 핵심 화학소재 산업에서 후지필름은 강한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이 액정패널 제조에 사용되는 편광판 보호필름인 TAC필름을 후지필름 등 일본 기업에서 거의 100% 수입하고 있다. 최근 한국 기업들은 정밀화학 소재사업을 강화하고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도 후지필름의 사례는 한국 기업에 적지 않은 시사점을 줄 것이다.
기업소개: 후지필름 후지필름은 1934년 필름제조 국산화를 위해 대일본셀룰로이드의 사진필름 사업을 분리시켜 사진필름, 인화지 등 사진감광재료를 제조하는 후지사진필름㈜으로 출발했다. 1962년 영국의 Rank Xerox Limited와 합작으로 후지제록스㈜를 설립했고 1965년 판매 부문을 분리해서 후지컬러판매㈜를 설립했다. 2001년에는 후지제록스의 주식 25%를 추가 확보해 출자비율 75%의 연결 자회사로 만들었다. 2004년 유통 관련 4대 특약점의 영업권을 인수해 후지필름이메징㈜을 설립해 국내 영업 기능을 통합했다. 2005년 후지사진필름㈜에서 ‘사진’이라는 단어를 빼고 후지필름㈜으로 사명을 변경했고 2006년 후지필름㈜과 후지제록스㈜를 모두 소유한 지주회사 후지필름홀딩스㈜를 출범했다. 2014년 3월 말 자회사 273개, 종업원 7만8595명을 두고 있다. 연결 매출액은 2013년 2조4400억 엔, 영업이익 1408억 엔이다. 사업 부문은 사진·광학 관련 사업인 ‘이미징 솔루션’(매출 3736억 엔, 비중 15.3%), 액정소재·의료기기·화장품 관련 사업인 ‘인포메이션 솔루션’(매출 9339억 엔, 비중 38.3%), 복사기·복합기 관련 사업인 ‘다큐멘트 솔루션’(매출 1조 1325억 엔, 비중 46.4%) 등으로 구성돼 있다. 매출은 국내 42.5%, 해외 57.5%이며 아시아 비중은 27.6%다.
위기를 직감한 고모리 회장
후지필름은 전 세계 컬러필름(은염필름) 분야에서 코닥에 이어 2위 기업이었다. 일본 시장에서는 점유율 70%를 기록했다. 거의 독점기업이었다. 컬러필름 수요는 순조롭게 증가해서 2000년 정점을 기록했다. 2003년까지 조금씩 감소했으나 여전히 판매량은 높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고모리 회장이 후지사진필름(현 후지필름홀딩스) 사장(COO)으로 취임한 것은 바로 전 세계 컬러필름의 수요가 정점이던 2000년이었다. 당시 후지필름은 재래식 카메라의 디지털화로 막연하게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다. 디지털카메라 제조 등 나름대로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카메라와 필름이 일체형인 인스턴트 카메라 ‘우쓰룬데스’는 판매가 호조였다. 그래서 위기의식이 그렇게 절박하지는 않았다. 중국 등 신흥국 시장의 수요도 늘고 있었다. 사내에서는 ‘어떻게 되겠지’라는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시장 지배 기업들이 흔히 겪는 자만이었다. 고모리는 달랐다. 주력사업인 필름사업이 ‘대전전야’라는 것을 직감했다.
그는 과거부터 디지털화의 영향에 주목하고 있었다. 1980년경 디지털화가 진전되면 스캐너가 보급될 것이라고 판단하고 사내 여러 반대를 뿌리치고 스캐너 사업을 강하게 주장해 성공한 경험도 가지고 있었다. 곧 디지털의 파고가 필름사업을 엄습할 것이라고 직감했다. 이런 상황에서 컬러필름 수요 예측이 2000년부터 감소세로 바뀐다는 보고를 받았다. 다른 경영진은 예측 결과를 반신반의했으나 고모리는 이런 판단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 후지필름의 예측은 카메라 출하 대수, 출생자 수, 결혼자 수, 가족구성 변화, 여행자 수 등을 토대로 작성했다. 수요 예측은 상당히 정확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공에 젖어 있는 다른 경영진은 부정적인 전망을 외면했다. 고모리는 평소 현장 담당자의 의견을 모니터링하고 중시해왔다. 필름사업이 위기라는 것을 금방 직감했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예측분석 실무진이 현실을 회피하지 않고 경영진이 싫어할 분석 결과를 그대로 보고했다는 점이다. 경영진이 판단을 그르치지 않도록 상사에게 직언하는 실무자의 자세도 난국을 타개하는 중요한 요소 중 하나다.
고모리가 위기를 직감해도 개혁은 쉽지 않았다. 그는 시장이 성장하고 있을 때 사업구조를 바꾼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이때 직감했다. 게다가 당시는 최종 의사결정권을 가지지 못한 사장급 COO였기 때문에 본격적인 개혁은 CEO로 취임한 2003년부터 추진해야 했다. 필름 분야 매출이 2003년부터 본격적으로 감소하자 고모리는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한다. 고모리는 당시 “CEO는 인생 마지막 성적표다. 마지막 성적표가 꼴찌면 내 인생도 꼴찌로 끝난다. 어디 한번 해보자”라는 각오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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