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BR CASE STUDY: 애경 '트리오 곡물설거지'
인지도는 높지만 저가 이미지를 벗지 못하고 있는 낡은 소비재 브랜드가 있다. 시장에는 매일같이 좀 더 세련된 신제품들이 쏟아지고 이 기업은 불과 2년 사이에 해당 카테고리에서 시장점유율 5분의 1을 잃었다. 설상가상으로 최악의 경제위기가 몰아쳐 시장의 소비심리는 바닥이다. 직원들이 머리를 짜내어 신제품을 기획했지만 경영진은 불경기에 추가 홍보비를 투입하는 것에 회의적이다. 외부 상황도 나쁜데 내부적인 지원마저도 기대하기 힘든 상황에서 신제품으로 브랜드를 살려낼 수 있을까?
2008년 애경산업의 ‘트리오’ 주방세제 브랜드에 실제로 일어났던 일이다. 트리오는 ‘퐁퐁’과 함께 오랜 기간 한국의 주방세제 시장을 양분해온 브랜드였지만 2000년대 들어 새롭게 등장한 ‘참그린(CJ)’ ‘자연퐁(LG)’ 등의 대기업 제품들에 급속도로 밀려나고 있는 상황이었다. 2006년에 30%선을 유지하던 애경의 주방세제시장 점유율은 불과 2년 만에 24%까지 떨어졌다.
더군다나 2008년은 전 세계적인 호황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금융위기가 시작되던 때였다. 이러다 큰일 나는 것 아니냐는 위기감이 팽배했다. 이런 상황에서 트리오팀이 기대를 걸어볼 수 있는 것은 신제품 ‘트리오 곡물설거지’뿐이었다. 하지만 경영진은 낡은 ‘트리오’ 브랜드로 소비자들의 지갑을 열게 할 수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또 상큼한 과일향에 투명한 제품들이 주방세제 시장을 이끌고 있는데 ‘곡물설거지’는 텁텁한 누룽지향에 색깔도 불투명해 깔끔하지 못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불안 요소였다.
출시를 앞두고 마케팅팀이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제품에 대한 신뢰, 팀원들의 열정과 주인의식, 그리고 행운이었다. 서울 서남부, 구로구청 앞에 위치한 애경산업 본사는 1981년에 지어진 아담한 6층 건물이다. 트리오가 탄생했던 애경의 옛 영등포공장 부지에서 멀지 않은 이곳은 한국 주방세제 산업의 역사와 함께해왔다는 자부심이 묻어 있다. 그런 곳에서 일하는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회사와 브랜드에 강한 애착을 갖게 된다. 고경표 브랜드 매니저를 비롯한 트리오팀은 경영진을 설득해서 이 제품을 시장에서 반드시 띄워보겠다는 의지를 다졌다.
불황에서 궁여지책으로 만든 ‘저가마일드’ 세제
1954년 ‘애경유지공업’으로 창립한 애경은 1956년 ‘미향’ 비누를 발매한 데 이어 1966년에는 영등포 공장에서 한국 최초로 주방세제 ‘트리오’를 생산하기 시작했다. 창업주인 채몽인 사장이 1970년 타계하자 당시 35살이었던 부인 장영신 씨가 경영권을 넘겨받았다. 이후 40여 년 동안 총매출 4조3000억 원(2011년)의 중견그룹으로 성장했다.
주방세제 트리오는 1966년 출시된 이래 애경의 캐시카우 역할을 톡톡히 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마일드’ 주방세제들이 등장하면서 시장의 판도가 바뀌기 시작했다. 소비자들의 취향이 고급화되면서 세정력뿐 아니라 손에 자극을 덜 주는 고급 성분을 쓴 세제를 찾게 된 것이다. 애경의 ‘순샘’, LG생활건강의 ‘자연퐁’, CJ의 ‘참그린’ 등이 바로 이때 등장한 제품들이다.
마일드 세제들의 등장 이후 기존 퐁퐁과 트리오는 저가 제품군으로 분류돼 업소와 단체납품용 제품으로 포지셔닝하게 된다. 또한 2000년대 중반에는 마일드 카테고리에서 다시 ‘고가 마일드(프리미엄)’라는 새로운 카테고리가 등장한다. LG 생활건강의 ‘세이프’가 대표적으로 이 고가품 시장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빠르게 성장하며 기존 업체들의 시장을 잠식했다.
한때 퐁퐁과 트리오의 단일 시장이었던 주방세제 시장은 불과 10년 만에 일반(저가), 마일드, 고가 마일드, 그리고 기타(할인점 자체 브랜드, 농축 세제 등) 등 4개 카테고리가 경합하는 복잡한 경쟁시장으로 진화했다. 특히 이 중에서도 마일드 부문이 덩치가 가장 컸다. 이 부문의 강자는 LG생활건강의 자연퐁이었다. 애경의 문제는 저가시장에서는 트리오가 확실한 브랜드파워를 갖고 있지만 마일드 시장에서는 순샘이 그만큼의 힘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것이었다. LG생활건강과 CJ 등 경쟁사들이 대기업의 역량을 집중해 마일드 시장을 공략했기 때문이기도 했다. 애경의 전체 주방세제 시장점유율은 2006년 30% 안팎에서 2008년 24%선까지 떨어졌다.
돌파구는 신제품으로 찾아야 했다. 2007년 말부터 세계 경기가 급속도로 나빠지면서 고경표 트리오 브랜드매니저(현재 제주항공 마케팅팀장)와 김광현 사원(현재 2080 치약 브랜드매니저)은 불황형 상품을 출시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시장에서 마일드 세제는 저가 세제의 평균 1.5배 정도의 가격으로 팔린다. 트리오팀은 이 50% 갭의 중간을 공략하는 것으로 전략을 세웠다. 마일드와 저가 카테고리 사이, 약 1.25배 가격대에 새로운 프라이싱 포인트를 잡았다. 2008년 3월의 일이었다.
원가를 줄이되 새로운 가치를 준다
세제의 원가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계면활성제다. 석유를 정제해 나오는 계면활성제는 세정력에 관계된 부분으로 BASF, Shell 등 외국 기업들이 주로 생산하며 단가가 가장 비싼 원료다. 따라서 기존의 마일드 세제보다 가격이 저렴한 저가마일드 세제를 만들기 위해서는 계면활성제의 비율을 낮춰야만 했다. 마일드 세제인 순샘의 계면활성제 비율이 15%이니 원가 비율대로 하자면 새로운 저가마일드 세제의 계면활성제 비율은 12∼13% 정도가 적당했다. 또한 계면활성제는 그릇에 묻은 음식찌꺼기뿐 아니라 피부의 탄력을 유지시키는 기름기도 빼앗아가는 성질이 있으므로 화학적 계면활성제 비율을 낮춰 손에 자극을 덜 준다는 ‘저자극 친환경’을 마케팅 포인트로 잡을 수 있었다.
이제 당면한 문제는 계면활성제 비율이 적어도 그릇을 씻는 데는 불편하지 않게 만드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서 연구소에서 많은 노력을 기울여 세정력이 크게 떨어지지 않는 시제품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기존의 ‘마일드’급 세제에 비해 거품이 덜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성질이 급해 설거지도 빨리빨리 끝내기를 좋아하는 한국 주부들이 이를 어떻게 받아들이도록 하느냐는 것이 다음 문제였다.
계면활성제의 비율이 낮으면서 가격이 싸고 세정력이 다소 떨어지는 듯하더라도 구입할 만하다는 느낌을 주기 위해서는 제품 고유의 기능적 밸류가 있어야 했다. 단순히 ‘저자극 친환경’이라는 구호만으로는 소비자들을 사로잡기 힘들다고 봤다. 이들은 당시 유행하기 시작한 곡물이라는 콘셉트를 이용하기로 했다. 연구소는 수많은 시행착오 끝에 시각적, 후각적으로 밀과 쌀누룽지의 느낌을 주는 세제 용액을 만들어냈다. 기존 세제들이 투명한 색깔과 상큼한 과일향이 나는 반면 ‘트리오 곡물설거지’는 색깔도 희끄무레하고 냄새도 구수텁텁했다. 어차피 세척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진다면 색깔과 냄새 등으로 친환경, 저자극이라는 특성을 강조하기로 했다. “사실 이 제품은 순샘보다 거품이 덜 납니다. 이런 부분에서 소비자들의 심리적 저항감을 없애준 것이 ‘곡물로 설거지를 한다, 자연 친화적 성분을 가지고 설거지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거품이 덜 나더라도 ‘아, 이것은 친환경 성분이니까 거품이 덜 나는구나’라고 소비자들이 인정해 준 것입니다.” 이석주 전무의 말이다.
다음 결정해야 할 문제는 브랜드였다. 저가제품에서 쓰는 ‘트리오’ 브랜드를 가져갈 것인가, 아니면 마일드 제품에서 쓰는 ‘순샘’ 브랜드를 가져갈 것인가, 혹은 제3의 신규 브랜드를 론칭할 것인가 하는 문제였다. 결론은 트리오였다. “불황기에는 소비자들이 위험한 시도는 하지 않습니다. 어려울 때일수록 전통 있는 브랜드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소비자가 신뢰하는 전통 있는 브랜드가 필요하기 때문에 트리오를 사용하자고 했습니다. 트리오는 모르는 사람이 없으니까요.”
제품의 디자인은 기존의 순샘 브랜드에 못지 않게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주기로 했다. ‘트리오지만 트리오 같지 않게’ 만들자는 기획이었다. 결과적으로 탄생한 최종 제품은 <그림 2>에서 보는 것과 같은 이미지로 기존의 트리오 제품과는 확연히 차별되고 오히려 순샘 쪽에 가까웠다. 제품 출시는 2008년 7월로 정해졌고 한 달 앞서 6월부터 시장에서 파일럿 테스트(pilot test)를 진행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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