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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과 경영

김유신의 결단, 고구려의 심장 얼리다

임용한 | 14호 (2008년 8월 Issue 1)
서기 662년 1월 23일, 칠중성(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아래로 내려다보이는 임진강 나루에서 신라군 부대가 도하를 준비하고 있었다. 강폭이 넓지 않고 겨울이어서 수량도 적었지만, 신라군의 눈에 비친 강은 영락없는 죽음의 강이었다. 기나긴 삼국 항쟁의 역사 동안 신라군이 이 강을 넘어 고구려 영토로 진군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신라가 최대 영토를 확보했던 진흥왕 때에도 고구려의 모서리인 동해안을 따라 점령했을 뿐이다. 고구려의 중심인 황해도·평안도 지역에는 발도 디뎌 보지 못했다.

 
불침의 땅 고구려에 진입한 신라
이 불침의 땅으로 지금 신라군이 들어가야 한다. 그것도 2만6000석의 식량 수레를 끌고서 말이다. 당시 수레에는 1015석 정도를 실을 수 있었으니 2만6000석이면 약 2000대의 수레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온다. 이 긴 행렬을 전투부대가 호위하면서 고구려의 영토 200km를 종단해 평양성까지 가야 한다.(이때의 구불구불한 도로 사정과 우회 기동을 해야 하는 사정을 감안하면 실제 이동 거리는 400km가 넘을 것이다) 당시 평양성을 포위 중인 당나라군이 식량이 부족해지자 신라에 군량을 조달하라고 강요한 것이다.
 
고구려를 공격하는 당나라군을 원조하는 작전이었기에 이 전역(戰役)은 오랫동안 주목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삼국 항쟁은 오늘날의 국가적·민족적 시각이 아니라 당시를 산 사람들 입장에서 이해할 필요가 있다. 또 이런 저런 감정을 떠나 순수한 군사적 입장에서 보면 이 전역은 이 땅에서 행해진 모든 군사작전 가운데 가장 어렵고도 곤란한 작전이었다.
 
고구려 군대가 당나라와의 전쟁에 투입된 상황이라고는 해도 신라와 백제의 국경을 지키는 군대가 다 없어진 것은 아니었다. 조선시대까지도 우리나라 도로는 매우 열악해서 경상도에서 거둔 조세를 서울까지 수송하는 것도 대단히 힘겨운 일이었다. 북부 지방의 지형은 더욱 험악했으며, 때로는 영하 20도를 넘나드는 혹한의 추위도 이겨내야 했다. 눈과 얼음으로 덮인 산악도로로 수레를 밀면서 지금까지 제대로 이겨본 적이 없는 고구려 군의 방어선을 돌파해 나가야 하는 힘겨운 여정이었다.
 
모든 병사들이 참담한 심정으로 강을 바라보며 서 있을 때 65세의 노장군(당시 평균수명은 잘 해야 40대 정도였다)이 선두에서 배에 올랐다. 사령관 김유신이었다.

임진강을 건넌 그는 고구려군을 피해 수레부대를 끌고 험한 산길로 우회했다. 그러나 황해도도 벗어나기 전에 고구려군의 차단선에 걸렸다. 신라군은 포기하지 않고 전투를 벌여 정면 돌파에 성공했다. 혹한과 눈보라로 병사와 가축이 동사했지만 끝끝내 황해도를 돌파해서 평양성 60km 지점까지 진출한다.
 
벼슬 내걸고 결사대 모집
하지만 이곳에서 신라군은 한계에 부닥쳤다. 당나라군 협력 없이는 돌파가 불가능했지만 당나라군은 신라군이 여기까지 온 것을 알지 못했다. 김유신은 급찬(級飡) 벼슬을 내걸고 결사대를 모집했다. 그러자 열기와 구근이라는 용사가 자원했다. 이들은 15명의 팀을 짜서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뚫고 당나라군과 연락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식량을 전달하자 더 큰 위기가 닥쳤다. 식량을 얻은 당나라군이 바로 철군했기 때문이다. 김유신 부대는 고구려의 영토 한복판에 갇혔다. 필사의 탈출이 시작됐다. 소의 허리에 북을 매달고 꼬리에 북채를 매달아 북을 치게 해서 군대가 주둔하고 있는 척 위장하고, 병력을 빼내 고구려군의 포위망을 벗어났다는 전설은 이 탈출 과정에서 발생했다. 고구려군은 신라군이 국경인 임진강을 건너려는 즈음에 간신히 따라잡았다. 그러나 신라군은 희생을 내기는 했지만 선발부대와 후발부대 간 유기적인 협력 작전으로 큰 승리를 거두고 도하에 성공한다.
 
성공의 원동력은 김유신 리더십
이 작전이 성공한 원동력 가운데 하나로 김유신의 리더십을 빼놓을 수 없다. 김유신은 신라에 멸망한 금관가야의 왕족 출신이다. 신라에 투항해서 진골 신분을 얻었지만, 정통 신라 귀족들로부터 상당한 차별을 받았다. 하지만 그는 탁월한 정치적 능력과 부단한 자기계발로 이런 차별을 극복했다. 그의 처남인 김춘추가 무열왕으로 즉위할 당시 김유신은 이미 신라의 정통 가문들을 압도하는 최고 군벌이 돼 있었다. 서기 661년 무열왕이 사망하고 문무왕이 즉위했다. 문무왕은 김유신의 조카다. 이로써 그는 혈통적으로도 망명 왕족이 아닌 정통 신라 왕족이 됐다. 그동안 받아온 모든 차별과 콤플렉스를 완벽하게 극복한 것이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억울한 경험과 한이 많은 사람들은 그 한을 극복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러나 김유신은 이 함정을 극복했다. 그 증거가 662년의 고구려 원정이다. 김유신의 삶의 목표가 개인적 한의 극복이었다면 이 원정에 참여할 이유는 전혀 없었다. 문무왕의 즉위와 함께 그는 더 이상 올라갈 곳 없는 권력의 정점에 도달했다. 고구려 원정은 성공 가능성이 없는 위험한 원정이었다. 성공해도 그에게 도움이 될 게 없고, 실패하면 전사하거나 정치적 실각이라는 참혹한 결과를 맛봐야 했다.
 
하지만 이런 상황에서도 김유신은 이 원정에 참여했다. 이유는 국가적 입장과 국가적 미래라는 관점에서 사태를 바라봤기 때문이다. 이런 시각을 가짐으로써 그는 사태의 본질을 파악하고, 미래를 예측하는 탁월한 통찰력을 지닐 수 있었다.

당나라가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큰 타격을 받고 발을 뺀다면 이미 백제도 멸망한 상태에서 고구려와 신라 간 전면전이 벌어질 것이 뻔했다. 그러므로 신라는 힘들어도 승부를 걸어야 했다.
   
 
군량을 수송하는 척 적당히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다가 철군해서 당나라의 비난을 피하고, 고구려가 멸망하거나 약해지기를 기다리는 방법도 있다. 아마 당시 조정 관료의 90%는 이렇게 주장했을 것이다. 설마 이 생각까지는 못했겠지만 그렇게 했더라면 수 천 년 후에 쏟아질 반민족적 행위라는 비난도 완화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김유신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당나라가 승리한다고 해도 신라가 방관자적 입장을 취한다면 고구려의 전 영토는 당나라에 귀속됐을 것이다. 다음 타깃이 될 것이 빤한 신라는 한강 이남의 좁은 영토와 국력만을 갖고 당나라를 상대해야 했을 것이다.
 
신라군 능력 향상을 위한 정공법
고구려 원정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진실은 신라군의 능력이다. 군대 능력은 전투력과 파괴력만으로 가늠하는 것이 아니다. 적진을 통과하며 수천 대의 수레를 호송하기 위해서는 조직적인 정찰·수색·교란·우회기동·통신·돌파 등 웬만한 전투보다 더 복잡한 능력을 요구한다. 적어도 ‘삼국사기’ 기록만 놓고 보면 신라군은 이렇게 대규모의 복잡한 전투를 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서 한해 전 백제를 공략할 때에도 계백의 4000 결사대에 고전했고, 의자왕이 항복한 후에도 백제 부흥군이 신라와 부여의 교통로 및 보급로를 차단하자 이 길을 제대로 뚫지 못했다.
 
군대 수준을 높이는 데 훈련만으로는 절대적인 한계가 있다. 고구려가 승리하든 당나라가 승리하든 최후의 결전은 예고돼 있었다. 최후의 전투에서 살아남기 위해서 신라군은 성장해야 했으며, 성장하기 위해서는 당나라와 고구려군이 혈전을 벌이는 현장으로 뛰어들어야 했다.
 
이처럼 힘들고 복잡한 작전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구성원 개개인의 능력과 헌신을 극대화해야 한다. 김유신은 이 부분에서도 성공했다. 비결은 과감한 인재 발굴과 포상이었다. 당시 사회는 극도로 폐쇄적인 신분제로 운영되고 있었다. 김유신은 신분제를 폐지하자고 주장하지는 않았지만, 운용 과정에서 유연성을 발휘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열기와 구근이 임무를 완수하자 스스로 포상이 너무 적다고 판단하고 문무왕의 반대를 꺾고 3등급이나 높은 사찬(沙飡·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여덟째 등급)을 제수했다. 신분과 관직이라는 기득권에 대한 우리 선조들의 집착을 잘 알지 못하는 현대인들은 이해하기 어렵겠지만, 이는 대단한 ‘사건’이었다.
 
고려·조선 시대에도 군공에 대한 포상은 정말 인색했다. 우리가 알 만한 큰 공을 세운 사람들이 하찮은 벼슬을 받거나, 전투 중에 내건 포상 약속이 쉽게 뒤집히는 경우가 허다했다. 대몽전쟁 때 김윤후는 몽골의 장수 ‘살례탑’을 죽여 몽골군을 철수시켰다. 10만 군대로도 할 수 없는 공을 세웠지만 6품 관직을 받는데 그쳤다. 몽골의 5차 침공 때는 충주성을 사수해서 또다시 몽골군을 철수시켰다. 이 공으로 사령관으로 임명되긴 했지만, 은퇴한 퇴역병을 관리하는 부대였다. 그러고는 더 이상 승진시키지 않다가 정년퇴임을 하게 되자 재상직을 주고 은퇴시켰다.
 
열기와 구근도 김유신이 죽고, 전시라는 긴장감이 사라지자 바로 잊혀졌다. 김유신의 아들들은 열기의 군수 임명을 거부했으며, 무고를 듣고 명색이 고급관원인 구근에게 곤장까지 쳤다. 신분이 낮다고 무시했기 때문이다.
 
정상의 자리 오르려면 과거사 극복해야
리더는 개인의 이해를 떠나 전체와 공공 입장에서 사물을 바라봐야 한다고 말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이유를 도덕적 당위성에서 찾는다. 하지만 그 이유가 도덕 때문만은 아니다.
 
우리는 미래에 대비하며 끊임없이 변화와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공정한 인사를 바탕으로 인재를 등용해야 하며, 눈앞의 이익과 작은 기득권에 집착해서는 안 된다는 얘기를 수없이 듣는다. 그러나 막상 이를 실천하기가 쉽지 않다. 실제로는 자신이 잘못된 목표와 곧 폐기 처분될 기득권에 집착하고 있다는 사실조차도 알지 못하거나, 이것을 알려줘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드는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을 깨닫는 좋은 방법의 하나가 자신의 목표와 지향의 근원을 추적해 보는 것이다.
 
과거의 억울한 기억, 이루지 못한 소망이 내 목표의 근원이 된다면 반성과 수정이 필요하다. 남보다 못한 열악한 환경, 부당하고 억울한 대우, 말 못할 한이 남다른 노력과 자기계발을 추구하는 채찍으로 되는 것은 좋다. 그러나 아픈 기억의 보상이나 말소가 삶의 목표가 돼서는 절대로 안 된다. 과거 경험에 집착하는 행동은 자신의 세계관과 가치관을 20년, 30년 전 상황에 묶어놓는다. 역경을 이겨내고 재능과 노력으로 정상의 자리에 올라선 사람들이 이 함정을 극복하지 못하고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는 경우가 너무나 많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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