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제철의 25년은 선진국에 대한 후진국의 일대 추격이고 인간 스스로의 능력한계에 대한 일대 도전이었으며 5000년 동안 쌓아 온 우리 민족의 체념과 패배의식에 일대 분발의 기름을 붓는 국민정신의 시험장이었다.” -1992년 광양제철소 준공식 축사에서
고 청암 박태준 전 포스코 명예회장(1927∼2011년)은 한국 경제사(史)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군인 출신으로 맨손으로 포항제철(현 포스코)을 일으켜 세계 최고의 철강 회사로 키워냈지만 정작 포스코 주식은 하나도 소유하지 않았다. 한국전쟁 후 해외 유학을 계획했지만 고 박정희 전 대통령의 명으로 포항과 광양에 제철소를 세우는 데 인생을 바쳤고 나중에는 원해서라기보다는 ‘포철을 외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 정치에 입문하기도 했다. 1990년 청암이 레지옹 도뇌르 훈장을 받을 때 프랑스의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은 “당신은 국가가 필요로 할 때 언제 어디서나 가장 앞에 서있었다. 6·25전쟁 때는 장교로 투신했고 국가가 경제 현대화를 요구했을 때 당신은 기업인으로 나라 앞에 섰다. 국가가 미래를 위한 정치인을 필요로 할 때 당신은 또 정치인으로 그 부름에 응했다”고 말한 바 있다.
청암은 자기자본으로 기업을 일으킨 고 이병철 삼성그룹 창업자나 고 정주영 현대그룹 창업자, 고 구인회 LG그룹 창업자와는 결이 다르다. 포항제철소는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대일청구자금’ 7370만 달러와 일본상업은행 차관 5000만 달러를 합친 1억2370만 달러를 조달해 지었다. 그는 전문경영인에 가깝다. 하지만 그가 포스코를 경영할 때는 물론이고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존재감’만큼은 어느 오너 못지 않게 유지했다. 포스코 임직원들은 ‘박태준이 곧 포스코고 포스코가 곧 박태준’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이는 현대 기업의 지배구조 관점에서 보면 불가사의한 일이다. 1968년 설립 당시 공기업이었던 포스코는 2000년 민영화가 됐지만 평생 동안 포스코 주식 한 장 소유하지 않은 청암은 2011년 타계 때까지 실질적인 회사의 어른이었던 셈이다.
이러한 독특한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경영학적 개념 중 하나는 ‘진정성 리더십(Authentic Leadership)’이다. 진정성 리더십은 2000년대 들어 엔론과 월드컴, 타이코 등의 CEO들이 사적인 이익을 위해 부정을 저지르고 주주들에게 손해를 끼치면서 새롭게 각광받기 시작한 리더십으로 명확한 자기인식을 바탕으로 확고한 가치와 원칙을 세우고 투명한 관계를 바탕으로 주위에 긍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능력을 말한다.
청암은 1970년 포항제철소 건설 현장에서 “선조들의 피값으로 짓는 제철소 건설이 실패하면 우리는 모두 ‘우향우’ 해서 동해 바다에 몸을 던져야 한다”고 말했고 공사 기간 동안 영일만 모래밭 귀퉁이에 슬레이트 지붕을 덧댄 2층 목조건물을 짓고 숙식을 해결했다. 이 건물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사막전의 영웅이었던 롬멜 장군의 야전 지휘소를 연상시킨다고 해서 롬멜하우스로 불렸다. 이런 그의 열정과 노고 덕분에 포스코는 창사 이래 한번도 적자를 낸 적이 없다. 1980년대 초에는 평생을 아끼는 사이로 지냈던 호암이 삼성중공업을 주겠다고 하자 “과분한 선물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나 저는 제 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제가 국가의 일을 맡아 중도에 그만둘 수야 없지 않습니까”라며 정중히 거절하기도 했다.
진정성 리더십 전문가인 하버드비즈니스스쿨(HBS)의 스콧 스눅(Scott Snook) 교수는 DBR과의 인터뷰에서 진정성 리더십에 대해 “어떤 스타일이건 당신 스스로에게 진실되기만 하다면 문제가 없다. 중요한 건 스스로가 누구인지, 나의 ‘진북(true north)’은 어디인지를 끊임없이 탐색하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청암의 ‘진북’은 민족과 국가였고 포스코였던 것이다.
지난해 타계하기 전 포스코 현장 퇴직 근로자들에게 말했듯이 청암은 “우리는 후세에게 행복을 주기 위해 희생하는 세대”라는 명확한 자기인식이 있었고 ‘제철보국’이라는 핵심가치와 목적의식을 가지고 있었다. 2000년대 들어서야 주목받기 시작한 진정성 리더십의 최고 롤모델은 1960년대부터 이를 실천하면서 지금의 포스코를 이룩한 청암인 셈이다.
김선우 기자 sublime@donga.com
필자는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에서 인문지리학을 전공하고 University of Washington에서 MBA 학위를 받았다.
2001년 동아일보에 입사해 사회부, 문화부, 경제부, 산업부에서 근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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