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회원가입|고객센터
Top
검색버튼 메뉴버튼

전쟁과 경영

혁신을 재앙으로 이끄는 2가지 오류

임용한 | 97호 (2012년 1월 Issue 2)

 

 

편집자주

전쟁은 역사가 만들어낸 비극입니다. 그러나 전쟁은 인간의 극한 능력과 지혜를 시험하며 조직과 기술 발전을 가져온 원동력이기도 합니다. 전쟁과 한국사를 연구해온 임용한 박사가 전쟁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을 연재하고 있습니다. 이 코너를 통해 리더십과 조직 운영, 인사 관리, 전략 등과 관련한 생생한 역사의 지혜를 만나기 바랍니다.

 

전쟁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변화를 초래한 마물은 화약이다. 특히 총이 발명되면서 전쟁의 양상과 전술에 대혁신이 일어났다. 서구에서는 대략 17∼18세기 동안 총과 대포가 전쟁을 지배하면서 창과 칼, 심지어 기병까지도 존재와 가치를 위협받게 됐다.

 

사실 대포는 공성전에서 특히 위협적이었지만 정확도가 형편없고 발사속도가 느려서 야전에서의 효율성은 의심스러웠다. 그러나 이런 실상을 아는 전문가는 드물었다. 이 때문에 처음 화기에 숙달된 군대와 그렇지 못한 군대가 맞붙었을 때 화기는 놀라운 결과를 도출하곤 했다. 엄청난 소리에 적군이 한번에 무너지기도 했고 말은 놀라서 날뛰었다.

 

명중률이 형편없다는 것을 알아도 일단 제대로 맞으면 방패나 성벽을 무용지물로 만들고 사람을 몇 명이나 관통할 수 있다는 사실이 병사들에게는 커다란 공포감을 줬다. 대포로 인한 직접적 피해보다 공격 대형이 허물어지면서 당하는 피해가 훨씬 컸지만 가공할 대포를 향해 꼿꼿하게 전진하기는 힘들었다.

 

화약 병기의 등장

16세기에 총이 등장하자 화약병기에 대한 환호와 기대는 더욱 커졌다. 일반적으로 총과 대포가 기병을 퇴장시켰다고 알고 있지만 사실 총이 나오기 이전부터 기사의 영광은 점점 사라지고 있었다. 과거 기사가 전쟁을 지배했던 것은 기병이 보병보다 우월해서가 아니었다. 보병들이 기병 대비 상대적으로 무장이 열악했고 훈련이 덜 된 병사들이 많았던 탓이었다. 고대부터 야무지게 조직된 보병들이 장창을 들고 창의 숲을 형성하면 기병들이 그것을 뚫기는 쉽지 않았다. 후대로 올수록 평민 중에서도 전문 군인 집단이 양성되고 훈련이 충실해지자 보병은 점점 무서운 힘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동양의 기병, 특히 유목기병은 탁월한 기마술과 궁술로 무장한 덕에 창병을 사격으로 제압하고 약화시킬 수 있었다. 하지만 중무장 기병을 선호하는 서구의 기사들은 육탄으로 창의 숲을 돌파해야 했다. 이런 육탄 돌파는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어려워졌다. 특히 스위스 용병대처럼 잘 훈련되고 전의로 똘똘 뭉친 보병군단은 기병의 공격을 거의 붕괴시켜버린 전설적인 전과를 여러 차례 올리기까지 했다. 도끼창으로 무장한 보병 밀집창병 대형은 기사들에게 그 자체로 공포의 대상이 됐다.

 

그때 총이 발명됐다. 총의 발명은 기병들이 보병군단의 창의 숲에 육탄으로 부딪히지 않고 창날의 바깥에서 창병을 사냥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보병들도 총으로 무장했지만 17세기까지 소총의 유효사거리는 겨우 25m 정도였다. 사격 속도는 1분에 2발 정도였다. 보병들이 아무리 교대로 순환발사를 해도 장전 시간이 너무 길어서 소총의 사정거리 밖에서 대기하던 기병들이 그 사이로 뛰어들기에는 충분한 여유가 있었다. 그리고 기병들은 언제나 보병들보다 중무장을 할 수 있었다. 창의 사정거리는 아무리 길어야 4∼5m로 보병의 코앞까지 접근해서 기병이 소총을 들이댄다. 그것도 말 위에서 내려다보면서.

 

창 대신 총으로 무장한 기병

이 황홀한 장면에 매료된 기병들은 16세기가 가기 전, 총이 아직 원시적 상태에 있을 때에 서둘러 기병창을 버리고 총을 집어 들었다. 필요는 발명의 어머니, 기병을 위한 짧고 간편한 소총이 개발됐고 이보다 더 간편한 피스톨도 나왔다. 피스톨은 기병에게 큰 인기를 끌었다. 화약을 재우고 부싯돌로 화승을 점화해야 하는 화승총과 달리 방아쇠를 당기면 부싯돌이 돌아가면서 화약을 점화하는 보다 간편한 격발장치도 개발됐다. 이때의 피스톨은 겨우 한 발밖에 쏠 수가 없었지만 작고 가벼운 탓에 두 자루 정도는 상비할 수 있었다. 기병은 보통의 유효 사거리인 25m 근처에서 한 발을 쏘고 더 근접해서 한 발을 더 쏜다. 창병 몇 명이 쓰러지고 공포에 사로잡힌 보병이 진을 깨고 도망치기 시작하면 기병은 말을 달려 도망치는 적병의 등 뒤에서 칼을 휘둘러 살육을 시작한다. 적이 제법 견고하게 버티면 기병들은 즉시 옆으로 말을 달려 보병의 사격권에서 벗어나고 후위의 기병이 다시 돌격한다. 빠져나간 기병은 본래 대형의 맨 뒤로 돌아가서 다시 총을 장전한다. 이런 식으로 기병들은 보병들이 무너질 때까지 계속 선회하며 보병들을 압박한다.

 

전 유럽의 기병이 창을 버리고 총을 들었다. 그러나 이 선회전술은 심각한 문제점이 있었다. 총신이 짧아진 피스톨은 명중률이 더 형편없었다. 게다가 기병은 절대 가만히 있지 못하는 말 위에서 발사한다. 선회대형은 복잡하고 낭비적이었다. 총을 사용하면서 백병전을 연습하지 않게 됨으로써 기병들의 전투력이 뚝 떨어졌다. 기병과 보병이 서로 총으로 대결한다고 할 때 보다 효율적이고 명중률이 높은 집단이 승리하는 게 당연하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피스톨을 이용한 기병들의 선회전술은 요란하고 부산스럽기만 하지 실효성은 하나도 없는 겁쟁이들의 전술이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1610년 클루시노 전투(Battle of Klushino)가 이를 극적으로 보여준다.

 

1610년 클루시노 전투

1610년 폴란드가 클루시노 지역에서 러시아·스웨덴 연합군과 맞붙었다. 당시 폴란드는 유럽에서 제일 낙후된 지역으로 피스톨이 부족해 거의 창과 기병도로 무장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용기가 있었다.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이 선회전술을 사용해서 폴란드 군에게 일제 사격을 퍼붓고 선회하려고 할 때 폴란드 기병들은 검을 들고 달려들었다. 러시아와 스웨덴 기병들은 당황했으나 피스톨을 장전할 틈이 없었다. 행여나 발사를 해도 적을 말에서 떨어뜨릴 확률은 10%도 되지 않았다. 화약무기를 지나치게 신뢰한 탓에 그들은 검술과 창술이 서툴렀다. 용감한 폴란드 기병들은 헛되이 저항하는 신식 기병들의 선회대형을 조각조각 내고 박살내 버렸다.

 

충격을 받은 러시아·스웨덴 연합군 기병들은 겁쟁이 전술을 버리고 다시 기병도를 들었다. 화약무기를 아주 포기한 것은 아니지만 소리만 요란한 무기에 의존해서는 기병이 허풍쟁이 부대로 전락해 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들은 뜨거운 화약병기와 서늘한 검날, 즉 냉병기를 함께 장착했다. 적진과 충돌할 때는 오직 냉병기에 의존하고 적진에 돌입한 후 난전이 벌어졌을 때 피스톨을 보조적으로 사용했다. 이 변화는 대성공을 거뒀다. 그제야 화약무기도 제 역할을 찾았으며 기병대가 의장대로 전락하는 것을 150년 이상 늦췄다.

 

서늘한 검날, 참담한 패배

1914, 유럽은 인류 역사상 최악의 전쟁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 독일과 프랑스의 전쟁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이 전쟁은 곧 수천만 명의 사상자를 낼 세계 대전으로 비화할 참이었다. 1차 세계대전이 2차 세계대전보다 더 많은 사상자를 낸 이유는 유럽의 모든 나라가 무기와 기술의 발전에는 열심인 반면 그것에 대처할 전술 개발에는 소홀했던 탓이었다. 모두들 강력한 살상무기를 개발, 장착해서 적을 일거에 박살내 버리면 될 것이라고 믿었다. 그들은 더 강력한 소총과 기관총, 무시무시한 대포의 개발에 열을 올렸고 강력한 화력으로 단숨에 적을 섬멸하는 공격전술에 집착했다. 그런데 막상 전쟁이 터지자 서로 간에 이런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괴물 같은 살상기계 앞에 병사들을 무모하게 돌격시키는 꼴이 돼 버렸다.

 

그러나 이건 나은 편이었다. 러시아에서는 더 비참한 비극이 준비되고 있었다. 1차 대전 직전 러시아의 군사개혁과 전쟁준비를 책임진 사람은 블라디미르 수콤리노프 장군이었다. 19세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터키 전쟁에 젊은 기병장교로 참전했던 그는 기병도를 들고 과감한 돌격을 감행해 획기적인 승리를 거뒀다. 운 좋게도 그의 승리는 기병의 검과 창이 위력을 발휘하는 게 가능했던 시기가 거의 끝나갈 무렵 전술적으로 가장 낙후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었기에 일어날 수 있었던 기적적인 사건이었다. 그러나 수콤리노프는 이 단 한번의 전투 경험을 영원한 진리로 믿었다. 그는 차가운 검날과 용기를 대체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거부했다. 그는 늘 자랑스럽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현대전이란 사악한 기술혁신일 뿐이다난 지난 25년간 군사교본을 한번도 본 일이 없다.”

 

20세기에 들어서자 그는 화기전술을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는 혁신적인 교관을 모조리 참모대학에서 파면했다. 심지어 러일전쟁에서 일본군에게 무참하게 당한 뒤에도 러시아 군의 개혁을 거부하고 현대전과 현대 군사과학에 대한 연구마저도 중지시켰다. 그는 포탄과 소총, 총알 생산 공장 증설도 거부했다. 덕분에 러시아군은 선진무기와 선진전술을 고사하고 단순히 포탄의 양에서도 서방군대의 3분의 1도 못 되는 분량을 가지고 1차 세계대전을 치러야 했다. 그 결과 러시아군은 참혹한 패배를 거듭했고 국가와 지휘관에 대한 병사들의 분노가 러시아 혁명과 제정 러시아의 종말을 초래했다.

 

변화와 신기술을 대할 때 벌어지는 두 가지 오류

클루시노 전투와 수콤리노프의 군사정책은 변화와 신기술을 대할 때 종종 벌어지는 두 가지 오류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17세기 클루시노 전투는 신기술에 너무나 성급하게 열광해 변화에 너무 개방적이었던 탓에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에 큰 낭패를 안겨줄 뻔했다. 20세기 초 1차 세계대전 당시 러시아군의 참혹한 패배에 상당한 원인 제공 역할을 한 수콤리노프는 신기술의 힘에 너무 무감하거나 보수적이어서 화를 불렀다. 이 두 가지 사례는 현재에도 예외 없이 벌어지고 있어서 우리를 난감하게 한다.

 

화기를 둘러싼 17세기와 20세기 사건 사이에는 두 가지 공통점이 있다. 우선 두 경우 모두 기술의 실상과 변화의 내용을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 17세기 기병들은 화약의 무기를 과대평가했고 20세기 러시아는 과소평가했다. 믿기지 않지만 이 둘 다 객관적인 실험과 분석적 태도만 있었다면 충분히 감지할 수 있는 일이었다. 감정과 욕망이 객관적 판단을 저해했다는 점 역시 닮아 있다. 클루시노 전투 당시 러시아·스웨덴 연합군은 백병전을 피할 수 있다는 유혹에 빠져 서늘한 검날 대신 겉보기에 화려한 피스톨을 선택했다. 수콤리노프로 대변되는 20세기 러시아는 구세대의 특권을 유지하려는 고루한 욕망이 이성을 가렸다.

 

현대 사회는 변화와 신기술이 넘쳐 난다. 보수적 태도는 거의 사라졌다. 많은 사람들이 정보와 변화에 목말라 하는 게 그 증거다. 그러나 욕망을 조절하지 못하면 두 가지 잘못을 똑같이 반복하게 된다. 지도자일수록 자신의 판단과 고집, 선입견이 개인적 욕망과 유혹에 사로잡힌 게 아닌지 늘 검증하고 조심하는 태도가 필요하다.

 

 

 

임용한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yhkmyy@hanmail.net

필자는 연세대 사학과를 졸업하고 경희대에서 한국사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과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 등 다수의 책과 논문을 저술했다.

  • 임용한 임용한 | - (현) KJ인문경영연구원 대표
    - 한국역사고전연구소장
    - 『조선국왕 이야기』, 『전쟁의 역사』, 『조선전기 관리등용제도 연구』, 『조선전기 수령제와 지방통치』저술
    yhkmyy@hanmail.net
    이 필자의 다른 기사 보기
인기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