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8

누구든 서 있는 자, 넘어질까 조심하라

69호 (2010년 11월 Issue 2)

 
편집자주 15∼17세기 약 300여 년간 이탈리아 피렌체 경제를 주름잡았던 메디치 가문은 르네상스의 탄생과 발전을 이끌어 인류 역사의 물줄기를 바꿔 놓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를 연구해온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코드를 집중 분석합니다. 메디치 가문의 스토리는 창조 혁신을 추구하는 현대 경영자들에게 깊은 교훈을 줍니다.
 
 
캐시 카우(Cash Cow) 때문에 망한 메디치 은행
경영자들의 로망은 젖을 콸콸 쏟아내는 튼실한 젖소를 찾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현금(Cash)을 콸콸 쏟아내는 ‘캐시 카우(Cash Cow)’ 말이다. 캐시 카우를 가진 행운의 경영자는 아침저녁으로 젖을 짜내 팔기만 하면 된다. 저녁이 되면 이 복덩어리들을 헛간에 모아들여 재우고, 또 아침이 되면 들판에 풀어서 마음껏 풀을 뜯어먹게 하면 되기에 추가 경비도 들지 않는다. 자동으로 젖을 짜내는 기계도 개발됐으니, 채유(採乳)를 위한 인건비도 크게 줄일 수 있다. 젖소는 매일 젖으로 고정적인 수익을 쏟아내고, 소 주인은 계속해서 콧노래를 부를 것이다. 우유 시장을 대체할 만한 새로운 드링크 시장이 나타날 가능성도 거의 없고, 닭이나 돼지로부터 우유가 나오는 것도 아니니, 특별히 긴장할 필요도 없다. 세월이 가면 돈이 쌓이고, 콧노래는 계속 될 테니 어느 경영자인들 이런 캐시 카우를 갖고 싶지 않으랴!
 
그런데 캐시 카우 때문에 망한 사람이 있다. 바로 메디치 가문의 리더, 로렌초 데 메디치(Lorenzo de Medici, 1449-1492)다. 로렌초는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했던 탁월한 정치가였으며, 인문주의 학자들과 천재 예술가들을 후원했던 르네상스 운동의 대부(大父)였다.
 
그러나 그는 메디치 은행의 경영자로서는 실패했던 인물이다.1  로렌초가 임종하고(1492년) 채 2 년이 지나기도 전에 메디치 은행은 완전히 몰락하게 된다. 무엇이 그를 실패하게 만들었을까? 왜 그는 모든 경영자들이 갖고 싶어 하던 캐시 카우를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쇄락의 길을 걷게 됐을까?
 
메디치 은행의 캐시 카우
백반(白礬, Alum), 혹은 명반(明礬)이라고 불리는 투명한 광석이 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산알루미늄(aluminium sulfate)인데, 직물을 염색할 때 착색을 위한 매염제(媒染劑)로 사용되고, 가죽을 무두질할 때도 없어서는 안 될 약품으로 사용된다. 모직 산업이 발달했던 피렌체뿐만 아니라, 양모를 탈색할 때 꼭 필요한 약품이었기 때문에 대부분의 유럽국가에서 비싸게 팔리던 물자였다. 연간 30만 플로린 정도의 백반 시장이 유럽에 형성돼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 백반이 지금의 터키 서해안 지역인 이즈미르(Izmir) 광산에서만 출토되고 있었고, 그 지역은 이슬람을 믿던 오스만튀르크 제국에 속해 있었다. 십자군 운동의 열기가 채 가시기 전이었기 때문에, 교황청은 매년 백반 수입을 위해 거액의 돈이 이슬람 제국으로 흘러들어가는 것에 대해 염려하고 있었다. 중동 국가로부터 석유를 많이 수입하면 할수록, 오사마 빈 라덴의 테러리스트 조직을 돕는 것이라고 불평하는 미국의 우익정치가의 불만과 흡사한 일이 15세기에도 있었던 것이다.
 
유럽과 교황청의 이런 우려를 단번에 불식시키는 반가운 소식이 알려졌다. 백반 사업을 하던 조반니 다 카스트로(Giovanni da Castro)란 사람이 우연히 로마 인근의 톨파(Tolfa)라는 곳에서 대규모 백반 광산을 발견한 것이다. 당시 교황이었던 바오로 2세(1464-1471년 재위)는 즉시 톨파 지역을 교황령 영토로 귀속시키고, 백반 산업이 무슬림 이교도에 의해 지배당하는 것을 막기 위해 메디치 은행에 사업의 독점권을 부여했다. 메디치 은행이 교황청의 주거래 은행이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무슬림 상인에게 백반을 구매하는 유럽의 모든 사업자는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파문에 처하겠다는 엄포를 놓으며, 메디치 은행의 백반 사업을 지원했다. 몸이 아파 병석에 누워 있는 아버지 피에로를 대신해서, 이제 겨우 17살이 된 로렌초 데 메디치가 로마로 가서 교황 바오로 2세와 백반 전매 계약을 맺게 된다(1466년). 엄청난 규모의 독점적 이익이 보장된 계약을 체결하기 위해 로마로 가면서, 아마 로렌초는 콧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모직 산업과 은행업에 이어, 백반 사업이라는 또 다른 캐시 카우가 메디치 가문에 굴러들어오고 있었으니 말이다.
 
캐시 카우를 가진 경영자들은 로렌초의 실책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할아버지와 아버지의 재산으로 태어날 때부터 부자였을 뿐 아니라, 불과 17살의 첫 공식 비즈니스 여행에서 아무런 경쟁자가 없는 캐시 카우를 잡게 된 로렌초는 그 후로부터 사업에 최선을 다하지 않았다. 로렌초는 복잡한 메디치 은행의 재무제표를 읽는 것을 싫어했다. 나이든 참모들이 사업 상 중요한 결정을 의뢰하면 그는 이렇게 말하곤 했다. “저는 그런 일에 대해서 잘 모릅니다.”2  물론 그 일이란 은행 비즈니스와 관련된 것이다. 백반 사업이라는 캐시 카우로 횡재한 로렌초가 이런 태도를 취하기 시작했을 때부터 메디치 은행은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서서히 몰락하는 메디치 은행
메디치 가문의 실질적인 창업자인 조반니 디 비치 데 메디치가 로마 은행을 인수했을 때(1397년), 메디치 은행은 업계 3위 수준에 불과했다. 스피니(Spini) 은행과 알베르티(Alberti) 은행이 로마의 은행업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반니 디 비치의 가업을 이어받았던 코시모는 메디치 은행을 빠르게 성장시켜 유럽을 대표하는 명문 은행가로 변신시켰다. 코시모는 경영의 천재였다. 그는 다른 은행가 가문들과 전혀 다른 은행의 지배구조를 확립시켰다. 페루치나 바르디 가문과 같은 피렌체의 거물 은행업자들은 본점과 지점의 지배구조를 주종관계로 고착시키고, 모든 지점장들은 본점에서 주는 급여를 받도록 했다. 그러나 코시모는 파트너십 제도를 이용해서, 지점장들이 월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수익에 대한 지분을 나누는 지배구조를 채택했던 것이다. 각 지점의 지점장들은 총 자본금의 49% 이하의 금액을 투자했고, 코시모는 총 자본금의 51% 이상을 투자해서, 그 지점의 소유권을 메디치 가문으로 종속시켰다. 이것은 오늘날 널리 활용되는 지주회사(holding company) 형태의 거버넌스와 유사하다. 코시모는 각 지점의 운영은 투자 파트너인 지점장에게 맡기는 대신 중요한 정책의 결정, 지점장의 파트너십 참여 여부, 정치적 변화에 따른 기업의 전략 등만 결정을 내렸다. 또한 코시모는 각 지점을 독립채산제로 운영하면서, 위험을 최대한 분산시키는 경영 원칙을 세웠다. 코시모는 로마와 피렌체의 본점 외에도 피사, 밀라노, 제네바(1466년에 리용으로 옮김), 아비뇽, 브뤼헤(Bruges), 런던에 메디치 은행의 지점을 속속 확장했다. 1458년을 기준으로 코시모가 경영하던 기업은 총 11개였다. 유럽의 각 도시에 있는 메디치 은행 지점 외에 두 개의 모직 공장과 한 개의 실크 공장을 따로 운영하고 있었다.
 
코시모는 11개 기업을 모두 직접 관리할 만한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그래서 그는 유능한 전문경영인을 고용하게 된다. 코시모가 가장 총애했던 총괄 전문경영인은 프란체스코 잉게라미(Francesco Ingherami)였다. 코시모는 전 유럽에 흩어져 있는 11개 기업의 재무제표를 꼼꼼히 읽어내던 성실하고 주도면밀한 잉게라미를 늘 칭찬했다. 코시모가 임종했던 1464년 잉게라미는 은퇴했고, 가업을 전수받은 코시모의 아들 피에로는 프란체스코 사세티(Francesco Sassetti)를 기업의 총괄 전문경영인으로 임명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사세티는 아비뇽 지점에서 탁월한 경영 능력을 발휘해서 메디치 가문의 눈에 들었던 인물이다. 1453년, 그는 아비뇽에서 제네바 지점으로 자리를 옮겼고, 다시 메디치 은행에서 높은 수익을 올려 1458년에는 피렌체 본점으로 발탁되었다. 사세티는 피에로와 그의 아들인 로렌초의 총애를 받으며, 전체 메디치 은행의 CEO가 됐다. 로렌초는 모든 업무와 결정을 사세티에게 위임했다. 튼튼한 캐시 카우인 백반 사업도 순조롭게 진행됐기에,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가면서, 사세티는 자만에 빠지게 된다. 그는 집무실에 앉아서 각국의 지점으로부터 보고 되는 재무제표와 보고서를 꼼꼼히 읽는 대신, 보스인 로렌초와 함께 학자들이나 예술가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을 더 좋아했다.
 
그러는 동안, 리용 지점과 브뤼헤 지점에서 악성 채무로 인한 부실 경영의 징후가 나타나고 있었다. 군주에게 융자해 줄 경우 신중을 기하고, 가능하면 돈을 빌려 주지 말라고 경고했던 코시모의 지침은 무시되고 막대한 금액이 리용과 브뤼헤의 정치가들에게 대출됐다. 브뤼헤의 무능한 지점장이었던 토마소 포르티나리(Tommaso Portinari)는 사세티의 관리감독이 소홀해진 틈을 타서 프랑스의 브르고뉴(Bourgogne) 공작에게 거액을 융자해 주었다가 낭패를 당하게 된다. 심지어 경영난에 봉착해서 런던 지점을 폐쇄할 때, 브뤼헤의 지점장 프로티나리는 수익성이 높았던 원단 사업 분야를 빼돌려 개인회사를 차리기까지 했다. 그러나 메디치 은행의 총괄 CEO인 사세티는 토마소 지점장의 모럴 해저드에 대해 모르고 있었다. 로렌초는 사세티를 늘 ‘우리들의 재무장관(nostro ministro)’이라고 부르며, 변함없는 신뢰를 보여주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세티는 더욱 기고만장해졌고, 또 그만큼 게을러졌다. 그는 보스였던 로렌초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예술작품으로 아부하는 타락한 모습을 보여준다. CEO 사세티에게도 모럴 해저드가 나타나기 시작한 것이다.3
 


CEO 사세티의 모럴 해저드
1483년, 사세티는 화가 도메니코 기를란다요(Domenico Ghirlandaio, 1449-1494)에게 의뢰해 피렌체 시내에 있는 산타 트리니타 성당에 <성 프란체스코의 생애> 연작을 그리게 했다.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성당에 작품을 봉헌하는 것은 로렌초와 같은 메디치 보스들이나 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사세티는 이런 메디치 가문의 예술 취향을 간파하고, 로렌초의 환심을 사기 위한 예술품을 주문했다.
 
사세티는 기를란다요의 연작 작품 속에 자기 모습을 집어넣었다. 중앙 제단의 하단 오른쪽에서 경건한 자세로 기도를 드리고 있는 사람이다. 맞은편에서 같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여성은 그의 아내인 네라 코르시(Nera Corsi)다.
 
작품의 오른 쪽 패널에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메디치 은행의 보스이기도 한 로렌초를 슬쩍 등장시킨다. 작품에서 제일 오른쪽에 배치된 부자(父子)는 사세티와 그의 아들이고, 그 옆에 서 있는 검은 머리카락의 남자가 바로 로렌초다. 로렌초 옆에 서 있는 노인은 안토니오 푸치(Antonio Pucci)로, 피렌체의 고위직 행정관이었다. 사세티는 자기 보스처럼 르네상스 예술가를 후원하면서 허세를 부렸을 뿐 아니라, 작품 속에서 노골적으로 메디치 가문을 찬양했다. 로렌초는 기를란다요의 작품에 등장한 자기 모습을 보면서 흡족해 했을 것이다. 그러나 정작 메디치 은행은 서서히 파국의 상황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CEO 사세티는 보스에게 아부하기 바빴고, 로렌초는 전문경영인인 사세티만 믿고 관리감독이라는 리더의 기본적인 책임을 망각했다.
 
런던과 브뤼헤 지점의 연쇄 부도
메디치 은행의 몰락을 초래한 직접적인 원인은 앞에서 언급한 브뤼헤의 지점장 토마소 포르티나리(Tomasso Portinari)의 방만한 경영 때문이다. 포르티나리의 무능과 부정을 사세티가 미리 막을 수만 있었다면, 아니 로렌초가 사세티에게 포르티나리 지점장이 일으킨 문제에 적극 대처하라는 지시만 내렸더라도 메디치 은행이 그렇게 갑자기 몰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메디치 은행이 몰락하게 된 직접적 원인은 포르티나리의 무능과 부정이지만, 그를 감독할 책임을 지고 있던 사세티와, 또 사세티를 감독해야 할 로렌초가 리더의 책임을 망각했기 때문에, 그들 모두의 파국적인 운명은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포르티나리 가문의 사람들은 오랫동안 메디치 가문을 위해서 일해 왔다. 코시모는 폴코 포르티나리를 피렌체 은행 지점장으로 등용했고, 그가 사망하자(1431년), 그의 세 아들, 피겔로, 아체리토, 토마소를 모두 거둬들였다. 코시모가 사망하고 난 이후(1464년), 위로 두 형제는 밀라노 지점의 지점장과 부지점장으로 발탁됐고, 막내 토마소는 브뤼헤 지점으로 파견됐다.4  토마소는 브뤼헤 은행의 지점장으로 승진하기 위해 아뇰로 타니(Angelo Tani) 지점장을 몰아내기 위한 로비를 벌였다. 결국, 피에로 데 메디치(어린 시절 그는 포르티나리 형제들과 함께 생활했다)의 결정으로 토마소는 지점장으로 승진하게 된다(1465년). 실력이나 경영 능력이 아니라 친분을 가진 특수 관계인이 리더십의 위치에 오르는 부적절한 관행이 시작된 것이다.
 
토마소 지점장은 군주에게 돈을 빌려주지 말라던 코시모의 지시를 어기고 부르고뉴의 공작 샤를에게 막대한 금액을 융자해 주었다. 부유층이나 지배계급과 어울리고 싶어 했던 토마소는 그것도 모자라, 샤를이 소유하고 있던 두 척의 갤리선도 구매해 주는 선심을 베풀었다. 아무런 이익을 남기지 못하는 선박을 구매했던 토마소 지점장의 결정으로 메디치 은행은 적자를 피할 길이 없었다. 1472년 메디치 은행은 런던 지점의 문을 닫았고, 남아 있는 모든 자산과 부채는 인근 브뤼헤 은행으로 이관시켰다. 무능할 뿐만 아니라 탐욕스럽기까지 했던 토마소는 이 과정에서 개인의 이익을 챙겼다. 런던 지점에서 이관된 사업 중에서 알짜배기를 빼내 개인 사업을 시작한 것이다. 결국 메디치 은행의 브뤼헤 지점은 더 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런던지점이 폐쇄된 지 채 10년도 지나지 않아 결국 브뤼헤 지점도 문을 닫았다(1480년).
 

메디치 은행의 몰락
메디치 은행은 빠른 속도로 쇠락의 길에 들어섰다. 운도 지독하게 나빴다. 1464년 이후 유럽의 금(金) 가치가 급속도로 올라갔고, 메디치 은행은 재량예금을 맡긴 투자자들에게 금화 플로린으로 지불해야 할 의무가 있었다.5  1475년부터 1495년 사이에 금값은 은화 대비 약 20% 정도 상승했다. 이 말은 곧 메디치 은행이 모든 재량예금의 투자자들에게 약 20% 정도의 높은 이자를 지불해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CEO 사세티의 방만한 경영으로 메디치 은행의 수익성이 떨어진 상태에서 추가 20%의 부담은 메디치 은행을 몰락의 길로 재촉했다. 이름 그대로 재량예금은 수익이 없을 경우 이자를 지불하지 않아도 무방했다. 그러나 로렌초는 자신의 정치적 위상을 지켜나가기 위해 무리하게 재량예금의 이자를 지불하도록 지시했고, 결국 이것이 메디치 은행의 몰락을 초래했다.
 
메디치 은행의 유럽 지점들은 차례로 문을 닫았다. 베니스 지점(1470년)을 시작으로 런던(1472년), 밀라노(1478년), 브뤼헤(1480년), 베네치아 지점(1481년)의 순서로 메디치 은행은 역사의 무대뒤로 사라졌다. 위대한 자 로렌초 데 메디치가 임종한 후, 채 2 년도 지나지 않아 피렌체의 본점까지도 문을 닫게 된다(1494년). 폭동을 일으킨 피렌체 시민들은 메디치 은행 본점의 기록을 모두 불태우고, 남아있던 모든 재산을 새로 발족된 공화국 정부로 귀속시켰다. 조반니 디 비치와 코시모가 이룩했던 메디치 은행의 위대한 시대는 이렇게 종지부를 찍었다.
 
누가 포르티나리를 심판해야 하는가?
1473년 메디치 은행의 브뤼헤 지점이 소유하고 있던 갤리선 한 척이 폴란드의 해적에게 노획 당해 배에 실려 있던 값비싼 화물을 강탈당하고 말았다. 그 귀중품 중에는 그림도 포함돼 있었는데, 바로 브뤼헤 지점의 전 지점장 아뇰로 타니가 한스 멤링에게 주문했던 <최후의 심판>이다.6  제단용 트립티크(삼단으로 포갤 수 있는 장식용 성화)인 이 그림의 중앙을 보면, 대천사장 미카엘의 심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 보인다. 죄인을 심판하는 저울 위에 나체로 앉아 심판을 받고 있는 인물이다. 그 심판을 받고 있는 사람이 바로 메디치 은행을 파국으로 몰고 갔던 토마소 포르티나리이다.
 
그러나 무능하고 부정직했던 토마소 지점장을 진짜로 심판했어야 할 사람은 메디치 은행의 사업을 총괄하던 CEO 사세티가 아닐까? 아니, 전문 경영인이었던 사세티를 감독해야 했던 로렌초야말로 포르티나리를 심판했어야 할 인물이 아닐까? 로렌초는 왜 자신에게 맡겨진 리더의 임무를 소홀히 했을까? 그것은 그가 너무 빨리 캐시 카우가 안겨주는 안락감에 도취되면서 경영의 전투력을 잃었고, 결국 이런 안일함이 부하 직원들의 모럴 해저드를 유발시켰기 때문이다.
 
최고 경영자들은 안전한 캐시 카우를 가졌을 때 더욱 신중하게 심판의 잣대를 들이대야 하고, 부하 직원들의 모럴 해저드를 경계해야 한다. 캐시 카우를 가진 자가 모럴 해저드를 조심해야 하는 이치는, 누구든지 서 있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해야 하는 이치와 같다.
 
김상근 연세대 신과대학 교수 skk@yonsei.ac.kr
 
필자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주립대 및 에모리대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 신학대학원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연세대 신과대학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SK케미칼 고문도 맡고 있다. <르네상스 창조 경영> <천재들의 도시 피렌체> 등 14권의 책을 냈다. 르네상스 시대의 창조적 영감을 현대적 언어로 재해석하는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50호 Smart Worcation 2022년 08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