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지난해 만주 일대 고구려 유적지를 답사했다. 보통 한국사 전공자들이 해외답사 때 먼저 찾는 곳이 고구려 유적지다. 그 중 한 곳이 환인에 있는 오녀산성이다. 주몽이 처음 나라를 세운 비류수 강가의 산성이라고 추정되는 곳이다.
오녀산성까지는 꽤 멀다. 버스가 경사 급한 산등성이를 빙빙 돌며 올라가야 했다. 고개의 정상에 섰을 때 갑자기 전경이 환하게 넓어지며 오녀산성과 그 아래로 완만하면서도 깊고 넓게 퍼져 있는 구릉과 계곡의 전모가 드러났다.
그 장엄한 광경 앞에서 먼저 떠오르는 영상은 고구려나 주몽이 아니라 지금부터 600년 전, 어쩌면 바로 그 고개 위에 엎드려 있었을 몇 명의 용사들이었다.
세종 때 이뤄진 4군6진 개척으로 여진족과의 전쟁이 벌어졌다. 여진족은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만주와 간도에 폭넓게 흩어져 살고 있었지만 언제든지 조선이나 중국을 위협할 수 있는 잠재력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위험한 집단이 파저 강 유역의 건주여진이었다. 현재 지명으로 퉁화·환인 일대에 거주하던 집단이었다. 이 지역의 위험성은 역사적으로 증명된다. 고구려가 바로 이곳을 터전으로 성장했으며, 16세기 말에는 건주여진의 후손 누르하치가 이곳에서 후금을 일으켰다.
세종이 4군6진을 개척하자 건주위의 여진은 집요하게 조선의 요새와 개척지를 공격했다. 소규모 게릴라 부대로 공격하기도 했으며, 여러 부족이 합해 대규모 공세를 펼치기도 했다. 조선 정착민들도 새로 차지한 땅을 지키기 위해 애썼다. 울타리를 높이고, 일반 농민들은 등에 활을 메고 경작을 했다.
그러나 아무리 경계를 철저히 한다 해도 기습 공격에 완벽하게 대비하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게릴라전을 펼치는 적들은 효율성과 능률 면에서 앞서 있었다. 수비 쪽에서는 소수의 적이 어느 지역에서 언제 출몰할지 모르기 때문에 전 지역에 걸쳐 경계태세를 확립해야 한다. 상대적으로 수비 쪽의 인력과 비용이 많이 소모된다는 것이다.
이런 불리한 여건을 극복하기 위해 조선에서는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엄밀히 말해 정식부대가 아닌 소수의 전문요원들이었다. 이들을 정탐자 또는 체탐자라고 불렀다. 강(국경)을 넘어 들어가 여진족의 움직임이나 침공 징후를 탐지하는 것이 이들의 임무였다.
처음에는 여진 지역의 지리· 동정 등을 살피기 위해 간헐적으로 정탐꾼을 보냈던 것 같다. 그러다가 4군6진이 개척되고 여진족과의 충돌이 빈번해지면서 체계화되기 시작했다. 전성기에는 강변의 군사기지마다 3명의 체탐자를 두게 했다. 평안도에만 540명의 체탐자가 있었다.
전술도 점점 발달했던 것 같다. 처음에는 보통 2, 3명이 한 조가 되어 움직였지만 나중에는 5∼10명으로 늘었다. 이들은 주기적으로 여진 지역에 들어갔으며, 보통 3∼5일씩 활동하고 교대했다. 높은 곳에 숨어 적의 침공을 감시할 때는 2, 3명이 하루치 식량만 들고 강 건너 비밀관측소에서 정보 수집 활동을 했다. 이들은 낮에 은신하고 야간에 이동하며 정찰·잠복 임무를 수행했다.
이들은 여진 지역에 사는 조선인들의 도움을 받기도 했다. 이들이 체계적인 활동을 하면서 여진족의 대응력도 높아졌다. 아지트인 조선인의 집이 발각돼 체탐자들이 살해당했다는 기록도 있고, 영화처럼 유능한 특수부대원의 집이 공격을 받아 가족들이 살해되는 사건도 있었다.
세종 19년(1437)에 2차 여진 정벌을 계획하면서 이들에게 가장 어려운 임무가 내려졌다. 1차 여진 정벌은 절반의 성공밖에 거두지 못했다. 지역의 특성을 잘 알지 못했고, 전략거점이 될 만한 대도시가 적었으며, 여진족 지도부의 행방을 몰랐던 탓에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다. 더욱이 1차 여진 정벌 후 여진족은 조선군이 공격할 때 대피할 지역까지 세밀하게 설정해 두었다. 조선군 사령부는 체탐자들에게 타격 목표로 삼을 적의 근거지를 찾아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지금까지의 임무와는 수준이 다른 매우 위험한 과제였다. 지금까지는 적의 침략을 사전에 탐지하는 것이 주목적이어서 정해진 장소에 은신해 관측하고 이 지역에 사는 협력자를 만나 정보를 수집하면 됐다. 그러나 적의 근거지나 은신처를 찾아내려면 적진으로 깊이 들어가 돌아다녀야 했다. 더욱이 여진족도 침공의 낌새를 채고 경계를 강화했다.
세종 19년 5월에 파견한 팀들은 임무 수행에 실패했다. 윗선에서 심한 질타가 쏟아졌다. 다시 여러 팀이 파견됐다. 이 가운데 이산 출신의 김장이 지휘하는 팀에게 환인에 있는 우라산성(‘우라’는 여진어로 물이라는 뜻이다. 강가에 있는 산성이어서 이런 이름을 붙인 것 같다)을 정찰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이곳이 조선군이 침공했을 때 여진족들이 집결하도록 계획된 피란처이기 때문이었다. 압록강에서 환인까지는 실제 거리로 300km 이상을 침투해야 하는 대장정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