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에서 배우는 위기극복 리더십

위기 징후 파악하고 백성과 소통하라

26호 (2009년 2월 Issue 1)


우리 역사에서 최대 위기는 언제였나”라는 질문에 대답은 크게 2종류였다. 하나는 주로 역사학자들의 대답으로, 일제치하와 같은 이민족의 지배 시기 또는 임진왜란 등의 전란(戰亂)을 꼽는 경우다. 다른 하나는 “당신이 말하는 위기의 관점과 개념이 무엇이냐”고 되묻는, 주로 사회과학자들의 반응이다. 위기에 대한 좀 더 정확한 개념 정의와 함께 어려움을 느끼는 주체에 대한 구분, 즉 어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지배층인지 일반백성인지 구별해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말이다.
 
사서삼경’에는 나오지 않는 ‘위기’라는 말
위기(危機)’는 대체 무엇이고, ‘국난’과는 어떻게 다른가를 옛 문헌들에서 살펴보았다. ‘위기’라는 말의 사전적 의미는 ‘위험한 고비’ 또는 ‘위험한 경우다.1 그런데 ‘위기’라는 말은 ‘사서삼경(四書三經)’에 나오지 않는다. ‘위기’라는 말이 한 단어로 사용된 것은 중국의 당나라 때부터다.2 우리나라 문헌에서는 이규보의 ‘동국이상국집’(1251년)에서 위기라는 말이 처음 나온다. 이규보는 ‘꿈을 기록함’이라는 시에서 “내가 위기를 (잘못) 밟아서[踏危機] 이제 만 리 밖으로 유배되었네”라고 쓰고 있다. 이 밖에 ‘세종실록’ ‘단종실록’에서도 위기라는 말을 살펴볼 수 있다.3
 
이처럼 ‘위기’라는 말은 비록 ‘사서삼경’에는 보이지 않지만 역사적으로 오랫동안 사용된 용어다. 이러한 용례를 참작하고 ‘한한대자전(漢韓大字典)’에 나오는 ‘위’와 ‘기’의 뜻4 을 토대로 위기를 정의하면 ‘잘 보이지 않지만 작게 일어나는 일의 위태로운 조짐 또는 기회’다. 이것은 병(病)의 증상이 이미 겉으로 드러난 ‘위험’이나 ‘국난’과 달리 병의 싹이 막 자라나려는 초창기에 해당한다. 이규보가 “위기를 밟는다”고 표현했듯이 이것은 대응하기에 따라 오히려 건강이 좋아질 수 있는 ‘위험한 신호’다.
 
우리 역사 최대의 위기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생각하는 ‘역사 최대의 위기’는 언제였으며, 당시 사람들은 그 위기에 어떻게 대응했을까.
 
가장 많은 사람이 ‘최대 국난’이라고 꼽은 일제치하 시대(1910∼1945년)는 지배층이나 백성 모두에게 어려웠던 듯하다. 박은식은 ‘한국통사’에서 일제 통치 아래의 “가혹한 세금과 난폭한 수렴”으로 “한민족의 처참함이 고금(古今) 어느 나라보다 더 심하다”면서5 “비록 나라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민족의 정신만은 잘 보존하여 나라의 부활을 도모하자”며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나라는 멸할 수 있으나 역사는 멸할 수 없다고 하였다. 나라는 형(形)이고 역사는 신(神)이기 때문이다. 이제 한국의 형체는 허물어졌으나 정신만이 독존할 수는 없는 것인가. 이것이 통사(痛史)를 저작하는 소이이다. 신이 보존되어 멸하지 않으면 형(국가)은 부활할 시기가 있을 것이다. … 무릇 우리 형제는 서로 생각하고 늘 잊지 말며 형과 신을 전멸시키지 말 것을 구구히 바란다”.6
 
그런데 생각해 보면 1910년 일제에 의한 강제합병 이전에 ‘위험한 신호’는 여러 차례 있었다. 이른바 세도정치의 문을 연 국왕 순조는 34년 동안(1800∼1834년)이나 왕위에 있으면서 ‘한마디라도 논란하고 연구하여 그 결과를 따져 본 적이 없는’ 임금이었다. 그는 또한 “사람을 임용할 때도 최소한의 자격만 살필 뿐 그 업적과 언어를 상고하여 어진 인재인지를 살피지” 않았다.(순조실록 10/11/21, 홍문관 부제학 김이교의 말) 바로 이런 임금들이 왕위에 있었고, 자기편은 무조건 감싸고 정적은 무조건 ‘박격(搏擊)하는’(순조실록 01/05/25) 신료들만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세도정치기는 한국사의 암흑기였다.
 
이 시기에 위정자들은 홍경래의 난(1811∼1812년)과 같은 대규모 민란과 “거의 수를 셀 수 없을 만큼의 이양선(異樣船)이” 다가와 개항을 요청했음에도(순조실록 14/12/29) 끝내 변화를 거부했으며, 급기야 외세에 의해 멸망당했다. 다산 정약용은 19세기 초에 ‘경세유표’를 쓰면서 “지금 터럭 하나만큼이라도 병들지 않은 것이 없다”면서 “지금 고치지 않으면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때 그가 제안한 개혁안이 채택되고 실천되었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을 수도 있다.
 
몽골제국이 예외적으로 고려의 자주성을 인정한 이유
일제치하 시대 다음으로 많은 사람이 국가적 시련기라고 꼽는 것은 몽골의 침략 시기(1231∼1273년)다. 그러나 동시에 이때는 이민족에 대한 강렬한 저항정신이 분출된 시기기도 하다. 실제로 ‘고려사’를 보면 몽골군은 1231년 8월 압록강을 넘자마자 처절한 저항에 부닥쳤다. 예컨대 압록강 근처 철주성의 판관 이희적은 식량이 떨어져 성이 함락되려 하자 “부녀자와 어린아이들을 모아 창고에 넣고 불을 지르고, 장정들을 데리고 스스로 목을 끊어 자살”했다.(고려사 121권) 이어지는 귀주성 전투는 더욱 치열했다. 기록을 보면 귀주성의 군·관·민은 병마사 박서를 중심으로 똘똘 뭉쳐 각종 공성무기로 파상적으로 밀려드는 몽골군을 끝내 물리쳤다.

몽골이 정예 부대 300명을 선발하여 북문을 공격하였으나 (병마사) 박서가 싸워 적을 물리쳤다. 누차(樓車)에 큰 침상을 만들어 쇠가죽으로 겉을 싸서 그 안에 병사들을 감추어 성 밑까지 다가와 굴을 파고 성 안으로 들어오려는 몽골군을 박서는 성 안에서 굴을 뚫고 쇳물을 끓여 부어 누차를 불태웠다. … 이와 같이 몽골군이 30일 동안이나 성을 포위하고 있으면서 지혜를 다 짜고 모든 수단을 다하여 공격하였으나 박서 등의 임기응변으로 끝내 이기지 못하고 퇴각하였다.”7
 
여기서 보듯 귀주성의 백성들은 앞의 철수성 군민 집단 자결 이후 오히려 결사항전으로 맞섰다. 이것은 잔혹한 몽골군의 공격 소문을 듣고 도미노처럼 무너진 유럽의 경우와 대조를 이룬다. 고려인들의 저항이 얼마나 처절하고 강렬했는지 귀주전투에서 패배한 몽골의 한 노장은 “내가 어려서부터 종군하여 천하 성지(城池)의 공방전을 여러 번 겪어 보았으나 일찍이 이러한 맹렬 공격에도 불구하고 끝내 항복하지 않은 것은 처음 보았다”면서8 고려군의 항전정신을 칭찬하고 있다.
 
도대체 무엇이 고려인들로 하여금 그 무시무시한 몽골군의 ‘바람 같은’ 공격을 40년 동안(1231∼1273년)이나 버텨내게 했으며, 항복하고도 끝내 ‘부마국’의 지위를 획득하게 했을까. 고려사 기록의 원천적 제약9 을 감안한 가운데 역사 기록을 면밀히 독해해 보면 몽골군 침략 직전의 최씨 무신정권을 ‘무신집권자 1인 독재 체제’라고 매도할 수 없음을 알게 된다.
 
첫째, 무신정권기는 그 전에 비해 능력이 존중받는 시기였다. 1170년 8월 무신란의 발발 배경이 되기도 하는 고려 의종 시대의 문벌 귀족들과 달리 최씨 무신정권은 능력만 있으면 집안이 한미한 자라도 발탁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이규보만 해도 처음엔 ‘백운거사(白雲居士)’로 재야를 떠돌았지만 무신정권기에 들어 주위 천거로 발탁되었다. 무신정권의 능력 위주의 인재 활용은 최충헌의 아들 최이의 ‘능문능리(能文能吏)’ 이야기에서도 잘 나타난다. 최이는 “일찍이 조정 선비의 등급을 매길 때 문장에 능하고 실무에도 능한 것을 제일로 삼았으며, 문장에 능하나 실무에 능하지 못한 것을 다음으로 삼았다. 실무에는 능하나 문장에 능하지 못한 것을 또 그 다음으로 삼았고, 문장과 실무 모두 능하지 못한 것을 하등으로 삼아서 자기 집 병풍에 써놓고 매번 인사행정을 할 때마다 문득 상고하여 서용했다”고10  기록돼 있다.
 
둘째, 무신정권기는 ‘정치·사회적 대혼란기’라는 말이 역설적으로 보여 주는 것처럼 신분질서의 격변기이기도 했다. 무신들 자신이 문신 귀족과 왕보다 위로 올라선 것처럼 누구도 하극상을 나쁘다고 말할 수 없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무신 정변 이후 공경대부가 천예(賤隸) 속에서 많이 나왔다. 장수와 정승이 어디 씨가 있는 것이겠느냐. 누구나 때가 되면 할 수 있는 것”이라는11 최충헌의 종 만적의 연설이 대표적인 예다.
 
물론 대부분의 민란은 관군에 의해 진압됐지만 무신정권은 민심 수습 차원에서 대부분의 부곡(部曲)이나 소(所)의 주민들을 양민으로 해방시켜 주었다. 이렇게 “신분 해방의 기쁨을 맛본 천민들이 몽골의 침략 세력에 대항하는 주동적 저항 세력으로 나서게”12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최씨 무신정권이 보여 준 능력 위주의 인재 발탁과 신분 해방의 분위기가 온 백성이 몽골군에 맞서 싸운 핵심 요인이었다.
 
지금 천하에 군왕과 신하와 백성과 사직이 있는 것은 오직 우리나라 뿐”이라는 이곡(李穀, 1298∼1351)의 자부심 어린 표현에서 드러나듯이 고려는 이를 배경으로 몽골제국의 지배에도 상대적인 자주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 장기간에 걸친 치열한 항쟁과 더불어 고려를 이끌던 무신정권과 기층민이 일치단결해 몽골로의 완전 귀부를 반대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 민심에게 외면 받은 선조 정권
셋째로 많은 사람이 최대 국난으로 꼽은 임진왜란 때는 백성들의 반응이 몽골침입기와 사뭇 달랐다. 실록을 보면 임란 초기 국왕 선조(宣祖)에 대한 신민들의 불신은 심각했다. 한음도정 이현에 따르면 선조 일행이 궁궐을 떠나던 날 장졸들은 “이 전쟁은 하늘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사람이 빚어낸 일”이라거나 “이제야 학정에 시달린 보복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반응을 보였다. 외침에 맞서 싸우기는커녕 왕의 피란 행렬에 돌멩이를 던진다든가, 왕비 일행을 몽둥이로 쳐서 말 아래로 떨어뜨린다든가, 왕자들의 향방을 왜군에게 알려주는 등의 ‘이적행위’를 했다.
 
왜 그랬을까. 무엇이 신민들로 하여금 몽골침입기와 전혀 다른 행동을 하게 했을까. 첫째 이유는 기대에 못 미치는 국왕 선조의 개혁 의지를 꼽을 수 있다. 명종 재위 22년 동안 문정왕후의 대리정치와 윤원형의 척족정치로 지쳐있던 조선의 신민들은 1567년 선조가 즉위하자 한껏 기대에 부풀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조는 어렸을 때부터 총명해서 명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특히 “글 읽는 것이 매우 정밀했으며, 때로 보통 사람들이 미처 생각하지 못한 질문을 해 선생들도 대답을 못할”13 정도였다. 실제로 선조는 즉위하던 해에 을사사화 때 유배된 노수신 등을 석방해 등용하는가 하면 조광조를 영의정에 추증하는 등 선비들의 기대에 부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그러나 선조의 선비에 대한 형식적인 예우는 금방 간파되었으며, 비소통적 정치 운영은 실망을 자아냈다. 이황을 비롯해 조식, 이이에 이르기까지 당대의 지식인들은 한사코 조정 출사를 거부했다. 선조는 이황에 대해 “지나치게 의심하는 마음을 가졌다”고 평하는 등 당대 최고 지식인의 말을 듣는 둥 마는 둥했다. 선조 초년에 ‘동호문답’을 지어 올리는 등 열의를 보이던 이이조차도 경연에서 매양 침묵으로 일관하는 왕을 보고 “태평한 정치를 구하려는 뜻이 없는 줄 알고 이내 물러갈 생각을” 했다.
 
둘째 이유는 파탄난 민생경제에 대한 선조 조정의 개선 노력 부재였다. 연이은 자연재해와 이로 인한 흉년 및 전염병은 16세기 조선 백성들의 생활경제를 크게 위협하고 있었다. 선조 20∼23년(1587∼1590년)에 일어난 한재는 “근고(近古)에 없던 것”이라는 표현이 나올 정도였다. 그런 와중에도 정부 공사는 계속돼 농민들은 농사지을 시간까지 빼앗겼다.
 
1589년에 생원 양천회(梁千會)는 상소를 올렸다. “밖으로 변방의 시비가 계속되고 안으로는 토목공사가 많아서 굶주린 백성들이 관부(官府) 공급에 분주하다가 쓰러지고 유리(流離)하는 자가 태반에 이른”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직위에 있는 자들은 당파를 모으고 사욕을 채워 몸을 영광되게 하고 집을 윤택하게 하는 것을 일삼으며, 수령은 아첨하는 자들로 꽉 차 위아래가 다 민생을 착취하는 일에 힘을 기울였다.”(선조실록 22/10/28)
 
상황이 이러한 데도 선조 정권은 여전히 양반을 군역에서 제외시키는가 하면 허다한 공납제(貢納制)의 폐단을 방치하고 있었다. 조정 신료들은 민생의 구제보다 이념적 논쟁에 매몰되어 있었다. 선조 정권은 임진왜란 이전에 이미 백성들의 신망을 크게 잃고 있었으며, 임진왜란이 없었다면 오히려 더 빨리 자체 붕괴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선조는 일본의 위협을 예측해 국방을 강화하지 못한 책임, 무능한 관료제와 양반들의 군역 기피같은 도덕적 해이 등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져야 했다. 그러나 선조 정권의 국가경영 능력은 전쟁이 끝난 뒤에도 전혀 평가받지 않았다. 전쟁 중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지휘하는 ‘전쟁기계’의 공격을 막아내느라, 전후에는 7년 동안의 전쟁으로 황폐해진 국토를 재건하느라 아무도 평가를 시도하지 않은 것이다.
 
한마디로 선조 정권이 겪은 국난의 요체는 내·외부적 도전에 대한 무대응과 무감각, 국가경영능력의 부재였다. 제임스 팔레가 지적한 것처럼 옛 소련은 1989년 훨씬 이전에 무너질 수 있었음에도 공산주의 이데올로기 지배로 인해 체제의 건강성을 자체적으로 진단할 기회를 갖지 못했다. 똑같은 말이 17세기에 유교윤리와 유교적 국가경영을 신봉하던 조선에 적용될 수 있지 않을까.14
 
역사 속 지도자들이 보여준 위기 극복의 조건
지금까지 살핀 것처럼 역사 속의 국난은 그냥 갑자기 찾아오지 않았다. 미리 몇 차례의 ‘위험한 신호’를 보낸 뒤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을 때 큰 화란으로 악화됐다. 반면에 효과적으로 잘 대처했을 때 위기는 오히려 ‘국운 상승의 기회’로 작용했다. 백제와 고구려를 패망시킨 당나라가 신라마저 집어삼키려 했을 때 신라 문무왕과 당대의 영웅 김유신의 사례가 그랬다. 거란군 수십만 명이 쳐들어왔을 때 서희가 국왕 성종의 위임을 받아 오히려 강동6주를 얻어낸 것도 대표적인 사례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위험한 신호’가 ‘국운 상승의 기회’로 바뀔 수 있을까.

첫째, 지도자는 위기에 민감해야 한다. 1591년 3월 통신사로 일본에 다녀온 황윤길, 김성일에게 국왕 선조가 던진 첫 마디는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이 어떻게 생겼더냐?(秀吉何狀)”였다. 이에 대해 황윤길은 “눈빛이 반짝반짝하여 담과 지략이 있는 사람인 듯합니다”라고 했고, 김성일은 “그의 눈이 쥐와 같으니 족히 두려워할 위인이 못됩니다”라고 대답했다.(선조수정실록 24/3/1) 전쟁의 조짐을 파악하고 돌아온 신하들에게 기껏 물어본다는 게 적장의 외모였다는 사실이 그가 위기에 얼마나 둔감했는가를 잘 보여 준다.
 
이에 반해 세종대왕은 ‘위험한 신호’에 매우 민감한 사람이었다. 1436년(세종 15년) 한밤중에 세종은 경복궁의 강녕전 밖으로 나와야 했다. 한 시녀(侍女)가 “뱀이 궁궐 안으로 들어와 기둥을 안고 여러 번 오르내리더니 홀연 사라졌다”고 말한 탓이다. 세종은 건물 밖으로 나와 내시와 시녀에게 뱀을 찾도록 했다. 한참 뒤 책상 위에 뱀이 숨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중요한 것은 이에 대한 세종의 반응이었다. 세종은 “내가 이를 세밀히 분석하건대 금년에 한기(旱氣)가 너무 심하고 재변이 누차 나타나는 것에 대한 하늘의 견책(譴責)임이 틀림없다”면서 다음날 백성들의 어려움을 묻기 위해 들판으로 나갔다. 뱀을 하늘의 견책으로 보고 더욱 조심하는 정치를 한 것이다. 세종의 이러한 태도는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불과 1년 전에 기껏해야 적장의 외모나 묻는 선조와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
 
그런데 지도자의 민감성은 결코 담장 안에서 길러질 수 없다. 신하들은 늘 왕의 주위에 담을 쌓으려고 애쓴다. “백성들에게 법을 가르쳐 주면 악용될 수 있다”(세종실록 14/11/07)거나 “백성들은 허튼 말하기를 좋아하니 다 믿을 수는 없다. 오직 조정에서 행하기에 달려 있다”(영조실록 26/7/3)는 말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세종과 영조가 궁궐 문을 열고 나가 여염 백성들을 만났을 때 그 ‘담장’은 무너졌고, 왕들의 현장 감각은 살아났다.

둘째, 신민들과의 소통이 중요하다. 세종이 한밤중에 뱀의 출현을 보고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과 대화를 나눈 것처럼 지도자는 먼저 구성원들의 말을 경청해야 한다. 또한 위기를 극복한 이후 전개될 국가 비전을 공유해야 한다. 지도자에게 제아무리 고상한 목표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이 소통되고 공감되지 않는 한 추진력을 얻을 수 없다.
 
조선조 말기 고종의 경우가 그랬다. 그는 일본과의 개항조약 체결(1876년) 이후 본격적인 개혁 개방의 필요성을 느끼고 전국의 척양비(斥洋碑) 철거를 지시했다(1882년). “다시는 서양이니 왜(倭)니 하면서 근거 없는 말을 퍼뜨려 인심을 소란하게 하지 말라”고도 했다. 그러나 “안으로 정교(政敎)를 닦고 밖으로 선린(善隣)관계를 맺어 부강한 나라로 발전”시키려는 그의 하교는(고종실록 19/8/5) ‘황야에서 홀로 외치는 소리’에 불과했다. 신료나 백성들과 목표에 대한 진지한 의견 교환의 과정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조 후기의 영조는 균역법을 시행하기에 앞서 3차례나 궁궐 밖으로 나가 백성들에게 법의 취지를 설명하는가 하면, 창경궁 홍화문 앞에 모든 신료를 모이게 한 다음 그들의 의견을 물었다. 그는 어려움에 봉착할 때면 신민들에게 의견을 묻곤 했다. 청계천 준천((濬川)이 반대에 부닥치자 궁궐 밖으로 나가 준천이 끝났을 때의 발전된 청계천의 모습을 설명하며 반대자들을 설득했다. 영조는 세종과 마찬가지로 비전을 공유하는 데 진력한 군주였다.
 
셋째, 열린 인재 등용과 권한 위임이 필요하다. 비상한 위기는 비상한 능력을 지닌 인재에 의해 효과적으로 극복할 수 있다. 따라서 비상한 능력을 지닌 자라면 출신이나 정치적 입장을 초월해 중용해야 한다. 세종이 자신의 ‘정적’인 황희를 중용했을 때가 그랬다. 원래 양녕대군을 지지한 황희는 충녕대군, 곧 세종이 세자가 되었을 때 유배를 떠나야 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였기에 세종에게 발탁되었을 때 혼신을 다해 강원도의 대기근을 구제했으며, 온갖 부패사건에 연루된 초기의 ‘간사한 소인배’에서 그야말로 ‘참된 재상’으로 거듭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영조시대의 오명항과 박문수 역시 그랬다. 그들은 같은 소론인 이인좌 등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자칫 큰 정치적 홍역을 치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영조에 의해 총사령관 및 부관으로 발탁됐다. 이들은 목숨을 걸고 싸웠으며, 결국 성공적으로 난을 진압했다. 한때 왕의 반대파인 그들이 더욱 더 최선의 노력을 기울여 자기 능력을 증명한 것이다.
 
아울러 세종이나 영조는 그들에게 신뢰와 함께 충분한 권한을 주어서 일을 이뤄내도록 했다. 군주가 이러한 모습을 보이면 유능한 인재들은 투철한 책임의식으로 맡은 일을 완수한다. 세종시대의 허조가 죽음을 앞두고 “평생토록 국가의 일을 스스로 자기 일처럼 여겼다(自以國家之事 爲己任)”고 말한 것처럼 당시 대다수 신료는 ‘비록 이 나라의 임금은 세종이지만 내가 이 나라의 주인’이라는 마음을 가졌다. 허조뿐 아니라 황희·김종서·최윤덕·박연·장영실도 모두 비슷한 자세로 자기 일을 했다. 세종 초년 대기근 등의 위기는 바로 이들의 열정적인 능력 발휘가 있었기 때문에 극복될 수 있었으며, 재위 중반기에 이르러 수많은 업적이 쏟아져 나왔다.
 
요즘처럼 위기라는 말을 자주 하는 때도 없는 듯하다. 어떤 사람은 위기를 인식하고 사람들이 말하는 때라면 이미 위기가 아니라고도 한다. 지도자와 구성원들이 위기를 절감(切感)하지 않은 한, 국민과의 소통을 통해 그 느낌과 공동체의 비전을 공유하지 않는 한, 그리고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인재를 뽑아 권한을 위임하지 않는 한 결코 전화위복(轉禍爲福)의 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필자는 서울대 정치학과 대학원에서 ‘정조(正祖)’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현재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국가경영연구소 연구실장으로 재직 중이며 ‘실록학교’ 등에서 세종·영조·정조의 리더십을 강의하고 있다. 저서로는 <세종처럼: 소통과헌신의리더십> <정치정조> 등이 있으며, ‘경국대전의 정치학’ ‘다산의군주론’ ‘서희의협상리더십’ 50편의 연구논문이 있다.
동아비즈니스리뷰 348호 The New Chapter, Web 3.0 2022년 07월 Issue 1 목차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