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의 가슴속에 가장 큰 자부심으로 남아 있는 국가가 고구려다. 일단 영토가 넓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광개토대왕(375∼413년)이 있다. 광개토대왕은 그의 묘호를 줄인 말이고, 그의 정확한 묘호는 국강상광개토경평안호태왕(國岡上廣開土境平安好太王)이다. 묘호는 왕이 죽은 뒤에 그의 업적을 평가해서 제정한다.
광개토대왕의 이 묘호은 ‘국토를 개척하고 경계를 넓히고, 나라를 평안하게 한 훌륭하고 위대한 왕’이라는 의미다. 이 긴 묘호도 깊이 분석하면 꽤 여러 의미가 있다. 그리고 이 긴 묘호를 줄여서 부르려면 광개토대왕보다 호태왕이 적합하다는 주장도 있다. 그러나 ‘호태왕’은 별로 인기가 없다. 오랜 세월 동아시아 한 귀퉁이에서 가난하고 작은 나라로 살아왔고, 식민지의 아픔까지 겪어야 했던 우리에게는 광개토대왕이라는 호칭이 메시지도 분명하고 매력적인 듯하다.
작은 나라를 대국으로 변모시켜
그러나 이 ‘광개토경’에 대한 집착이 이상한 부작용을 낳고 있다. 많은 사람이 광개토대왕이 이룩한 업적과 영토의 면적에만 관심을 기울일 뿐 광개토대왕이 가난하고 작은 나라를 만주 벌판을 지배하는 ‘대고구려’로 변모시킬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인지는 묻지 않는다. 아니 이렇게 말하면 당장 이런 의문부터 떠오를 것이다. “뭐? 고구려가 작고 약한 나라라고?”
우리는 광개토대왕이라 하면 무조건 크고 강한 고구려를 연상하고 싶어 한다. 그러나 강한 군대로 강국을 만드는 것은 평범한 업적이다. 약소국을 강국으로 만드는 것이 진정한 영웅의 면모가 아닐까.
기원전 1세기 때 주몽은 지금의 만주 북부 창춘과 눙안 지역에 있던 북부여에서 일련의 부족을 이끌고 남쪽으로 탈출했다. 여기서 동남쪽으로 가면 지금의 선양과 랴오양이 있는 만주의 평원지역이고, 남쪽은 산악지역이다. 별로 강력하지도 않은 작은 이주민 집단이 갈 수 있는 곳이 평야일까 산악지역일까. 주몽은 바보가 아니었기 때문에 후자를 택했다. 더욱이 랴오양 지역에는 이미 한나라 세력이 진출해 있었다. 주몽은 산곡 간에 위치한 작은 나라와 부족집단을 흡수하면서 세력을 키웠고, 강과 산으로 둘러싸인 적당한 분지를 골라 나라를 세웠다. 그곳이 지금의 환인시다. 그러나 부여의 압박이 거세지자 주몽의 아들 유리왕은 다시 남쪽으로 200여km를 후퇴한다. 그렇게 해서 세운 수도가 현재의 지린성 지안시에 있는 국내성이다.
유리왕은 상당한 정치적 반발을 감수하면서 국내성 천도를 단행했는데, 얼마 후에 이 결단이 탁월했음이 증명된다. 부여에 이어 더욱 강력한 한나라가 침공해 왔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방어전 300년
이후 300년간 고구려의 초기 전쟁사는 아슬아슬한 방어전의 연속이었다. 수도가 포위된 적이 여러 번이고 동성왕 때는 한나라군, 고국원왕 때는 선비족 모용씨에게 함락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구려가 버텨낼 수 있었던 이유는 고구려의 북쪽과 서쪽에 첩첩히 쌓여 있는 산악 때문이었다. 부여든 한나라든 선비족이든 국내성까지 진군하려면 수십 개의 고개를 넘으면서 300km가 넘는 산길을 뚫고 와야 했다.
예나 지금이나 침략전쟁을 수행하려면 군대와 무기 이전에 돈과 식량이 있어야 한다. ‘손자병법’의 저자 손무는 결코 잔인한 지휘관이 아니었다. 군주에게 전쟁에서 승리하고 군대를 키우는 것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배불리 먹이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주장한 사람이다. 그러나 손무는 적국을 침공할 경우 식량은 약탈로 조달하고, 병사들에게는 약탈을 장려하고 포상해야 한다고 서술했다. 당시의 형편없는 교통 및 운송수단 덕분에 쌀 20섬을 본국에서 수송해 공급하려면 200섬이 소모됐기 때문이다.
산악지형은 병사들을 힘들게 할뿐 아니라 진군속도를 떨어뜨려 시간과 돈을 마구 잡아먹었다. 게다가 산곡 간에 펼쳐진 평야는 좁고 마을도 작아 배부르게 약탈할 만한 도시도 없었다. 고구려군은 수도 근처까지 적을 최대한 끌어들여 지친 적을 요격하거나 산성에 올라가 버티면서 그들에게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소진시켰다.
그런데 고구려가 힘을 키워 밖으로 뻗어 나가려 하자 역으로 산악 지형이 심각한 장애가 되었다. 고구려가 산악을 벗어나 대륙으로 가기 위해 가장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는 지금의 의주와 단둥 일대로 추정되는 시안핑이다. 이곳이 고구려를 둘러싼 산악의 출구이기 때문이다. 북쪽으로는 랴오양과 선양, 서쪽으로는 여순과 다롄으로 가는 평원이 열린다. 한반도로 진입하기에도 여기서 남하하는 것이 거의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나 국내성에서 단둥까지 이르는 육로도 역시 좁고 험한 고갯길이다. 현재도 자동차로 4, 5시간이 걸리는데, 도중에 면 소재지 정도의 읍이 2개 정도밖에 없을 정도로 중간 기지로 삼을 만한 도시가 없다. 이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대규모 정복전쟁이 불가능했다. 광개토대왕은 이 문제를 어떻게 극복했을까.
험한 길 피해 몸소 수군 이끌어
이 의문에 대한 단서가 광개토대왕 비문에 있다. “영락(광개토대왕의 연호) 6년(396년) 병신(丙申)년에 왕이 몸소 수군(水軍)을 이끌고 백잔국(百殘國, 백제)을 토벌하였다. …백잔이 의에 복종하지 않고 감히 나와서 맞서 싸우니 왕이 크게 노하여 아리수(阿利水, 한강)를 건너 선발대를 보내 성에 육박하였다. 백잔 군대는 구렁으로 돌아가니 쫓아서 성을 포위하였다. 이에 백잔왕(아신왕)은 곤경에 빠져 남녀 1000명과 가는 포 1000필을 바치고 왕에게 항복하며 이제부터 영원히 왕의 노객(奴客, 신하)이 되겠다고 맹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