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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에서 북경까지

자화자찬의 기술… 이겼다고 도 넘지 말자

안동섭 | 295호 (2020년 4월 Issue 2)
편집자주
인간사에는 늘 반복되는 패턴이 나타납니다. 우리가 역사에서 교훈을 얻는다 함은 바로 그 패턴 속에서 현재의 우리를 제대로 돌아보고 조금은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도록 노력한다는 의미일 겁니다. 철학과 역사학을 오가며 중국에 대해 깊게 연구하고 있는 필자가 주(周)나라가 낙양을 건설한 후로 현대 중국이 베이징에 도읍하기까지 3000년 역사 속에서 읽고 생각할 만한 거리를 찾아서 서술합니다.

Article at a Glance

칭찬은 밤에 먹는 야식처럼 자극적이다. 하지만 자화자찬은 동서고금(東西古今)을 막론하고 가능한 피해야 할 것으로 여겨졌다. 그런데 자화자찬의 기원을 찾다 보면 옛날 미라를 만들던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과거에는 죽은 사람을 추모하기 위해 신체 일부를 미라로 만들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미라 제작에 드는 비용과 공간 때문에 자연스럽게 초상화로 대체됐다. 그러던 중 중국 송나라 때부터 주지 스님의 임명권을 조정이 관리하면서 죽기 전에 그리던 영정 그림을 살아 있을 때 그리게 됐다. 또한 고승의 초상화를 소유하고 싶은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초상화가 판화 형태로 제작됐다. 문제는 이렇게 여러 장 생긴 초상화를 들고 고승을 찾아오는 제자나 신도들이 많아지면서부터 자신을 그린 그림(自畫, 자화)에 칭찬하는 글은 직접 써야 하는(自讚, 자찬) 일이 늘었다. 하지만 스스로를 칭찬하는 것은 낯부끄러운 일이었던 터라 셀프 조롱을 통해 자신을 낮추는 자찬이 유행했고 이를 겸손하다고 여겼다.


오래전 영국에서 공부하던 때의 일이다. 필자는 쌍둥이 딸을 데리고 나가 난생처음 달리기 시합을 시켜봤다. 아, 내가 왜 그랬을까. 두 사람이 시합을 하게 되면 한 사람은 반드시 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필자는 잠시 잊고 있었다. 경주에서 진 아이는 가정이 파괴되고 나라가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울기 시작했다. 그 소리가 어찌나 크고 구슬프던지 이웃집 노부부가 버선발로 달려 나와서 아이를 달래줄 정도였다. 노부부는 울음소리의 비감(悲感)이 심상치 않은 것을 느끼고 이것은 필시 긴급 구조요청(distress call)일 거라고 생각해서 뛰쳐나왔다고 했다. 마음씨가 고마웠다.

네 살짜리에게 시합에서 지는 일이 상처인 것이야 당연하다만 그래도 이렇게 총 맞은 것처럼 울 일은 아니었다. 대체 왜 그랬을까. 필자는 나중에서야 당사자에게서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는데 이긴 아이가 손을 번쩍 들고, 진 아이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우후!” 하는 소리와 함께 씩 웃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말하자면 상처가 아픈 것보다 상처에 뿌린 소금이 쓰라려 방성대곡(放聲大哭)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라면서 우아하게 지는 법을 배운다. 이번 시합이 마지막 시합이 아니니 언젠가 자신이 이길 날이 올 거라는 것을 아는 아이는 당장의 패배를 받아들이고 다음 시합을 준비한다. 그리고 동시에 우아하게 이기는 법도 배운다. 이긴 뒤에 너무 자랑했다가는 끝 맛이 좋지 않다는 것을 배운다. 그런 짓을 했다가는 당장 조금 기분이 좋을 수는 있으나 장기적으로는 상대방과 큰 원한을 맺게 되니 그 뒷감당이 쉽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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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은 모두 다 큰 어른이므로 시합에서 이기고 나면 진 쪽을 자극해서는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점을 안다고 해서 늘 제대로 실천하는 것은 아니다. 이는 어째서인가. 아마도 이 세상에서 승리한 뒤에 으스대는 것만큼 달콤하고 짭조름한 일이 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서울에서 성공한 사람이 명절에 귀향할 적엔 비단옷을 입는다(錦衣還鄕, 금의환향). 그리고 가능하면 옛 친구들과 친척들이 옷을 잘 볼 수 있도록 낮 시간에 돌아다닌다. 밤에 돌아다닐 거라면 비단옷은 입어 무엇하겠나(錦衣夜行, 금의야행). 값비싼 차를 구입한 뒤에 딱히 긴요한 볼일이 없을 때에도 슬그머니 시내에 몰고 나가는 것은 자동차가 비쌀수록 이른바 ‘하차감’이 좋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랑이란 실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애써 슬그머니 자랑을 했는데 친구가 통곡을 하는 바람에 옆집 노부부가 뛰쳐나와 내게 일장 훈계를 늘어놓으면 큰일이다. 그러므로 안 하는 편이 가장 좋겠지만 꼭 해야겠거든 자화자찬(自畵自讚)만은 가능한 한 피하는 것이 좋겠다.

그런데 자화자찬이란 무엇인가? 이 사자성어는 무려 ‘미라(mummy)’부터 시작한다. 추모(追慕)라는 것은 많은 사람이 모여서 더이상 여기 없는 사람의 모습을 함께 떠올리는 행위다. 하지만 눈앞에 아무것도 없는데 상상력만 발휘해서 누군가를 생각해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우리는 장례를 지내고 제사를 지낼 적에 종종 망자의 유품이나 영정사진을 진설한다. 그런데 그보다 더 좋은 아이템이 있으니 바로 망자의 신체다. 본인이 수업에 직접 출석할 수 있을 때 친구에게 대리 출석을 부탁하지 않는 것처럼 망자의 시신이 직접 의례에 참석할 수 있다면 참석자들은 굳이 만년필 같은 것을 쓰다듬으면서 망자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아도 된다. 영국의 공리주의 철학자 제레미 벤담(Jeremy Bentham, 1748∼1832)의 미라가 대표적인 사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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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담은 공리주의(Utilitarianism)의 아버지로, 조금이라도 이득이 될 것 같으면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던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신체를 보존 처리해서 전시한다면 “추념을 목적으로 초상화, 조각상, 기념비 등을 만들 필요”가 없을 것이므로 그 이득이 적지 않을 것이라고 믿었다. UCL은 그가 죽은 지 20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의 유언을 충실히 이행하며 상당한 관광 수입을 거두고 있으니 벤담의 예측은 과연 빗나가지 않았다.

영국인만 별난 것은 아니다. 과거 중국의 불교도들도 이런 일들에 종사했다. 시작은 고승의 육신이 무척 깨끗하기 때문에 부패하지 않을 거라는 믿음이었다. 4∼5세기 무렵 고승들의 행적에 대한 가장 중요한 사료인 『고승전(高僧傳)』을 보면 죽고 나서도 안색이 마치 살아 있는 듯했다거나, 식탁에 앉은 채로 입적했는데 몇 년 후에도 모습이 그대로였다거나 하는 기록들이 심심치 않게 보인다. 그러다 보니 명망 있는 고승이 입적하게 되면 사찰의 승려와 신도들은 대사(大師)님의 시신이 M사의 햄버거마냥 오래도록 썩지 않기를 기대하게 됐다.

썩을까? 스승님은 수행을 오래 하신 훌륭한 분이시니 안 썩지 않을까? 아아, 제발 썩지 않았으면 좋겠다. (3일 뒤) 아, 망했다! 썩어버렸어! 이렇게 훌륭한 스승님이 이렇게 썩어버리다니. 산 건너 라이벌 사찰의 큰 스님은 입적하고 20년간 썩지 않았다는데. 부끄러운 마음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가 없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스님들과 신도들은 과감하게 죽은 스승의 육신에 손을 대서 망자와 사찰의 명성을 지키고자 했다. 내장을 제거한 시신의 겉면을 두껍게 옻칠해 밀봉하는 방식이었다. 이렇게 만들어진 미라 중 가장 유명한 것은 역시 7세기의 전설적인 선사(禪師) 육조 혜능(六祖慧能, 638∼713)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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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의 미라들은 마치 오늘날 벤담의 미라가 교수 회의에 정식으로 출석하는 것처럼 사찰의 주요 의례에 직접 출석했다. 입적한 스님이 생전에 앉아 제자들의 절을 받던 자리에 미라가 앉아서 절을 받았다. 망자가 맡아보던 역할을 미라가 그대로 이어받은 것이다.

하지만 모든 것이 변하듯 고승의 미라를 의례에 사용하는 문화도 시간이 흘러 변했다. 미라 제작은 어렵고 비쌌을뿐더러 자리도 많이 차지했다. 집 안에서 종이책이 차지하는 공간이 부담스러워서 전자책을 구매하는 사람들처럼 중국의 불교도들은 조사당(祖師堂)을 야금야금 잠식해가는 미라들을 보면서 미라를 대신할 초상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화공(畫工)을 불러 입적을 앞둔 스님의 초상화를 그려서 벽에 걸어두니 미라보다 편리한 점이 많았다.

시간이 흘러 송나라(960∼1276)가 들어서면서 조정이 주지 스님 임명권을 휘두르게 됐다. 정해진 임기를 마친 스님들은 조정의 명에 따라 다른 절로 떠나야만 했다. 이렇게 되자 남아 있는 제자들과 신도들은 먼 훗날 주지 스님이 돌아가신 뒤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나중에 돌아가시게 되면 초상화를 그려서 우리 절에 안치해야 하는데 주지 스님의 다음 임지가 너무 먼 곳이면 찾아가기 곤란하지 않겠나. 이리하여 이 시기를 즈음하여 스님이 죽은 후가 아니라 죽기 한참 전에, 가능하면 현직에 있는 동안 영정으로 쓸 초상화를 미리 그려 놓는 풍습이 생겼다.

그런데 이처럼 초상화를 미리 그려놓는 관습이 자리 잡으면서 사람들은 그것이 본래 미라를 대신한 영정사진임을 망각하게 됐고, 영정사진이 아닌 만큼 꼭 한 장만 그려서 보관해야 한다는 법도 없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득도한 고승의 초상을 집에 걸어두고 싶었던 신도들은 스님의 초상화를 판각해 수백 장씩 찍어냈다. 그리고 그들 일부는 남들과는 다른 ‘명품’을 갖고 싶다는 생각에 초상화를 들고 초상화의 주인공을 찾아가 친필 사인을 부탁하기 시작했다.

찬(讚)은 일종의 문학 장르로, 옛사람의 초상화의 한구석에다 주인공의 덕성/업적 등을 찬양(讚揚)하는 내용의 시구를 써넣은 뒤 서명하고 도장을 찍는 것을 말한다. 다른 사람의 초상화에 찬을 써 주는 것이야 흔한 일이니 문제 될 것이 없다. 아낌없이 칭찬(稱讚)해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자기 자신의 초상화에 찬을 쓰는 것은 실로 멋쩍은 일이다. 자신을 그린 초상화에 찬(讚)을 써주십사 찾아오는 신도들의 연이은 부탁을 받고 쑥스러움을 견디다 못한 주지 스님들은 그래서 결국 기존의 장르를 비틀어서 셀프 칭찬(自讚, 자찬)이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찬(讚)과 달리 자찬(自讚)은 스스로를 최대한 깎아내리는 것이 중요하다. 양기방회(楊岐方會, 992∼1049) 스님의 것을 한 번 읽어보자.

입은 거지 놈 부대 자루가 벌어진 것 같고 似乞兒席袋

코는 뜰 앞의 똥 닦는 막대기 같네
鼻似園頭屎杓

화가께서 고생고생 훌륭하게 그려냈으니 勞君神筆寫成

세상사람들 맘대로 헤아려보시게
一任天下卜度

이런 식의 자찬(自讚)은 송대에 들어 폭증했는데 어떤 유명한 스님의 경우는 현재 ‘남아 있는’ 자찬만 수백 편에 달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렇게 자찬이 유행하는 와중에도 한 가지 변하지 않는 원칙이 있었다. 글은 스님 본인이 써도(自讚, 자찬) 그림을 스스로 그리는 것은 금기였다(自畫, 자화). 이 게임은 언제까지나 자신의 덕을 사모한 다른 이들이 자발적으로 그림을 그려서 가져와 자찬을 부탁할 때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스스로 그림까지 그린다면 자신의 사회적 성공을 너무 노골적으로 자랑하는 꼴이 되지 않겠는가. 그렇게 되면 달리기 시합에서 이긴 후 상대방을 놀려 댄 필자의 딸아이처럼 어른들과 동료들에게 질타를 받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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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성공을 거두면 흔히들 영원히 썩지 않을 거라고(不朽, 불후) 말하지만 사실은 썩는다. 썩는 물건을 자화자찬으로 방부(防腐)처리하는 것은 미라 제작만큼이나 번거롭고 귀찮을뿐더러, 때로는 M사의 햄버거처럼 비웃음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깔끔하게 매장하느니만 못할 것이다. 『주역(周易)』에서는 산을 통째로 땅속에다 묻어 숨기는 것처럼 자신의 성공을 감추는 것이 겸손(謙遜)이라고 했다.1 산도 묻을 수 있는 사람이라면 아마 미라도 묻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아무리 혹독하게 다이어트 중인 사람이라도 가끔은 야식이 당기는 것처럼 아무리 겸손한 사람이라도 가끔은 달콤 짭짜름한 자랑질이 당긴다. 자랑질이 정 참기 어렵거든 셀카를 한 장 올린 후 양기방회 스님의 자찬을 본받아보자. #야식#눈탱이#부었어#못생김#부끄


참고문헌
1. Foulk, T. Griffith, and Robert H. Sharf, 1993, On the Ritual Use of Ch’an Portraiture in Medieval China. Cahiers d’Extrême-Asie 7(1): 149–219.


필자소개 안동섭 중국 후난대 악록서원 조교수 dongsob@unix.ox.ac.uk
필자는 연세대에서 철학을 전공하고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중국 남송시대를 연구한 논문으로 동양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정이의 거경에 대한 연구’ ‘Contested Connection: the 12th-century debate on Zhou Dunyi’s hometown’ 등 다수 논문을 국내외 유력 학술지에 개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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