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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visiting Machiavelli

“내 손에 무기가 들어올 때까지 침묵하라”

김상근 | 120호 (2013년 1월 Issue 1)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는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개보다 못한 대우를 받은 <군주론>

남아 있는 기록과 편지내용을 보면 마키아벨리의 <군주론> 1513 8월에서 1514 1월 사이에 집필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산탄드레아의 시골 농장에 유폐돼 있던 마키아벨리는 이 책의 출간을 통해 자신의 존재가 다시 한번 세상에 알려지기를 원했다. 그러나 <군주론>의 초고를 읽어 본 피렌체의 출판업자는 마키아벨리를 크게 실망시켰다. 피렌체 공화정의 전직 고위관료, 즉 전() 정권의 핵심 참모였으며 메디치가문에 대한 반란 혐의로 투옥된 경력을 가진 사람의 책을 출간한다는 것은 정치적으로 위험한 일이었다. 모름지기 출판사란 세상의 흐름에 민감하기 마련이다. <군주론>의 출간이 끝내 거절되자 마키아벨리의 상심은 더욱 깊어졌다.

 

그래도 마키아벨리는 꿈을 접지 않았다. 비록 출간은 거절됐지만 메디치가문의 리더에게 직접 <군주론>을 헌정해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주고 싶었다. 메디치가문의 심복들에게 <군주론>의 헌정 기회를 달라고 졸라대던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기회를 얻게 된다. 1517, 그러니까 <군주론>이 탈고된 지 2년쯤 지났을 때 마키아벨리는 메디치가문의 부름을 받았다. 그렇게 고대하던 <군주론>의 헌정식 일정이 잡힌 것이다.

 

원래 마키아벨리는 <군주론>느무르의 공작줄리아노 데 메디치(교황 레오 10세의 동생, 1479∼1516)에게 헌정하려고 했지만 그가 1516 3월에 임종하자 생각을 바꾸어 줄리아노의 조카였던우르비노의 공작로렌초 데 메디치(1492∼1519)에게

<군주론>을 헌정하기로 한다. 막내 삼촌 줄리아노가 늘 병석에 누워 있었기 때문에 조카 로렌초가 실질적으로 피렌체의군주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둘째 삼촌이자 교황이었던 레오 10세의 명령에 따라 피렌체의 군 사령관의 자격으로 우르비노를 정벌하는 공을 세웠다(1516 6). 그 무공(武功) 덕분에 로렌초는우르비노의 공작이라는 공식 직함을 얻게 된다. 마키아벨리는 병약했던 줄리아노보다 탁월한 무공과 리더십을 갖춘 로렌초 데 메디치를 알현하고 직접 <군주론>을 헌정키로 했다. 마키아벨리의 절친했던 친구 베토리가 헌정식을 주선해 주었다.

 

마키아벨리는 깨끗하게 친필로 필사한 <군주론> 한 권을 들고 메디치궁정으로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로렌초를 기다렸다. 그러나 메디치가문의 지도자는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마침 그 헌정식에 참여했던 또 다른 사람이 사냥개 한 마리를 선물로 바쳤는데 로렌초는 그 사냥개만 어루만졌다고 한다. 마키아벨리는 모욕에 가까운 대우를 받았다. 정말 그의 <군주론>개보다 못한 대우를 받은 것이다.

 

메디치궁정에서 마키아벨리는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군주론>을 한 페이지만 읽어본다면 당장 메디치가문이 자신을 다시 불러줄 것이라 굳게 믿고 있었는데 정말 개 같은 신세가 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깨끗이 꿈을 접기로 했다. 아니, 강력한 영웅의 도래를 꿈꾸던 <군주론>에 대한 희망 자체를 완전히 포기하기로 했다. 원래 영웅이란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영웅은 도래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생각 자체를 바꾼 것이다. 메디치가문으로부터 모멸을 당한 마키아벨리는 생의 목표를 수정한다. 메디치 같은 영웅의 도래를 막연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자기 손으로 시대의 영웅을 만들고 말겠다는 결심이었다. 마키아벨리의 이 영웅 만들기 프로젝트가 시도된 곳이 바로루첼라이 정원(Orti Oricellari)’의 공부모임이었다.

 

 

루첼라이 정원의 젊은이들

피렌체 역에서 내리면 정면에 보이는 큰 건물이 산타 마리아 노벨라(Santa Maria Novella) 성당이다. 두오모(피렌체 대성당)와 우피치미술관 등 피렌체의 주요 관광지들은 이 성당 건물의 왼쪽 방향에 모여 있다. 이 성당에서 오른쪽 방향으로 100m쯤 걷다보면 갑자기 피렌체 주택가에 작은 숲이 나타난다. 르네상스 스타일로 지어진 주택가 한복판에 피렌체의 명문가 루첼라이(Rucellai)가 만든 도심의 숲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이 바로 마키아벨리가 생애 후반을 바쳤던루첼라이 정원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정원의 한적한 벤치나 풀밭의 그늘진 곳에 앉아 피렌체의 장래를 짊어지고 나갈 청년들과 함께 로마사 공부를 시작했다.

 

루첼라이 정원은 15세기 피렌체의 현자 코시모 데 메디치(Cosimo de Medici, 1389∼1464)가 설립하고위대한 자로렌초 데 메디치(1449∼1492)가 그 명맥을 유지시켰던플라톤 아카데미(Academia Platonica)’의 정신을 계승한 피렌체 지성인들의 학술, 친목 단체였다. 루첼라이 정원은 피렌체의 소장파 젊은이들이 함께 모여 고전을 공부하고 인문학적 소양을 쌓아가던 공부 모임에서 출발했다. 원래 베르나르도 루첼라이가 1490년대에 처음 설립했는데 그가 1514년에 임종하자 그의 조카 코지모 루첼라이(Cosimo Rucellai, 1495∼1519)가 모임의 좌장을 맡았다. 이 모임에 참석했던 젊은이들은 장차 피렌체를 이끌어 가는 동량(棟梁)으로 성장하게 된다. 정치 사상가 차노비 부온델몬티, 역사학자 자코포 나르디, 정치가였던 로렌초 스트로치, 문학가 안톤프란체스코 델리 알비치, 루이지 알라만니, 필리포 데 네를리, 바티스타 델라 팔라 등이 이 모임의 정규 멤버로 참여하고 있었다. 1518년부터 마키아벨리는 이 모임에 초청을 받아 이들의 정신적 스승이 됐다. 실업자였던 마키아벨리의 처지를 딱하게 여기던 귀족 젊은이들이 십시일반으로 돈을 추렴해 약간의 보수를 주기도 했다.

 

마키아벨리는 피렌체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이 청년들 앞에서 <로마사 논고>를 처음 발표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론>을 집필하던 중에 <로마사 논고>라는 새로운 집필 프로젝트를 생각해 냈을 것이다. 1514년 초부터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고 틈틈이 작업을 하다가 1517년부터 본격적으로 <로마사 논고>에 매달렸다. <군주론>이 메디치가문으로부터 냉정하게 거절당한 직후부터 마키아벨리는 <로마사 논고>에 자신의 모든 역량을 집중했다. 메디치가문에 대한 기대와 꿈을 접는 대신루첼라이 정원의 젊은이들에게 희망을 품었다는 뜻이다. 마키아벨리의 <로마사 논고>는 피렌체의 미래 지도자들을 시대의 영웅으로 만들기 위한 그만의 비밀스러운 프로젝트였음이 서문에서 바로 드러난다.

 

“나의 이 글을 읽는 젊은이들이 행운을 만나는 기회를 잡는다면 언제든지 지금 세상의 잘못을 피해 옛 세상의 선례를 본받게 하고 싶습니다. 내 말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 가운데서 단 한 사람만이라도 하느님의 은혜를 넉넉히 받아 이것을 실행할 힘을 가진 사람이 나오길 간절히 바랍니다.”1

 

마키아벨리는 이 피렌체의 젊은이들이 자신에게 수치와 모욕감을 안겨준 메디치가문과 다르기를 진심으로 소망했다. <군주론>이 갑자기 군주의 자리에 오르게 된 로렌초 데 메디치에게 바쳐진 책이었다면 <로마사 논고>지금 군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정한 군주가 될 만한 덕망이 높은미래의 젊은이들에게 바쳐진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기대는 계속 이어진다.

 

(저는) 이 책을 실제로 군주의 자리에 있는 사람들이 아니라 진정한 군주가 될 만한 덕망이 높으신 분, 저에게 높은 지위와 관직, 또는 부를 주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한 능력은 없지만 가능하다면 아낌없이 주고자 하는 마음을 지닌 분에게 바치는 것입니다. 무릇 인간이 올바른 판단을 내리기 위해서는 실제로 관대하게 베푸는 자와 관대하게 베풀 수 있는 능력만 가진 자를, 또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가진 자와 나라를 다스릴 능력이 없으면서도 뻔뻔스럽게 나라를 다스리고 있는 자를 명백하게 판단할 줄 알아야 합니다.”2

 

사실 루첼라이 정원의 공부 모임에 참여하던 피렌체의 젊은이들은 새로운 시대의 도래를 꿈꾸던 사람들이었다. 메디치가문의 참주 정치에 반대하면서 모든 시민이 주인 되는 공화정의 회복을 최대 목표로 삼았던 일종의 정치단체로 발전해 나가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의 이상에 목말라 하던 이 젊은이들을 위해 진정한 승리의 비밀을 가르치게 된 것이다. 메디치 같은 강자의 횡포를 물리치는 방법을 전수한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이 젊은이들을 위해 <로마사 논고>뿐만 아니라 <전쟁의 기술>이란 실무적인 전쟁의 지침서를 집필했다. 미래의 리더들에게 전쟁의 기술을 가르쳐 피렌체를 강국으로 만들겠다는 마키아벨리의 의지가 반영된 책이다. 마키아벨리 생전에 유일하게 <전쟁의 기술>이 출간된 것도 이 젊은이들의 성원과 재정적인 후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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