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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ssons from Classic -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上

천재’를 포기한 살리에리, 관계에서 길을 찾다

김혜옥 | 105호 (2012년 5월 Issue 2)


유명한 역사 소설 작가 피터 쉐퍼와 밀로스 포만 감독의아마데우스(Amadeus)’ 18세기 말엽 유럽 음악계를 대표하는 작곡가였던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의 라이벌 관계에 초점을 맞춘다. 살리에리가 성실성과 진지함을 무기로 자신의 지위를 차곡차곡 쌓아나갔다면 모차르트는 천재성을 인정받아 20대부터에스컬레이터형 출세를 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 그리고 살리에리는 자신이 갖지 못한 직관과 재능의 문제를 모차르트의 탓으로 돌리며 평생 원망하는 조역(助役)으로 표현된다.

 

하지만 역사에 기록된 그의 모습에서 모차르트를 시기하거나 질투할 만한 동기를 발견하기는 어렵다. 오스트리아의 권위 있는 작곡가였던 살리에리는 음악뿐만 아니라 문학, 역사, 종교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교양을 갖춘 르네상스맨으로 통했다. 반면 모차르트는 당시 빈 오페라계의큰손이었던 요제프 황제가 여러 번 주목하긴 했지만 상연하는 작품마다 성공을 거두지는 못했던 상황이었다. 역사가 도로시 링크(Dorothea Link)에 따르면 모차르트는 살리에리를 원망하는 내용으로 아버지에게 편지를 보낸 적도 있었다. 대본가(Libretto)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Ponte)가 살리에리와도 활발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것을 알게 되면서 불편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그 훌륭한 이탈리아인 신사분들(살리에리와 다 폰테)을 알고 계실 겁니다. 그분들이 항상 함께하는 한 저에게 기회가 오지 않습니다. 어찌되었든 그들의 꼼수(A trick of Salieri)에도 불구하고 제가 이탈리안 오페라를 잘해낼 수 있다는 것을 입증해 보이고 말겠습니다.”1

 

그렇지만 살리에리는 생각보다 후한 사람이었다. 자신의 음악계 후배였던 모차르트를 오히려 인정하며 서로를 존중할 수 있는 방향으로 관계를 이끌고자 했던 흔적이 여러 군데서 발견된다. 1788년 왕궁의 음악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오페라피가로의 결혼을 여러 번 지휘하며 후배의 기를 살려준 것이 대표적이다. 또 모차르트가 죽기 1년 전인 1790년 레오폴드 2세 황제의 대관식 미사 때에는 직접 모차르트의 ‘Mass’를 연주해 그의 작품성을 널리 알리기도 했다.

 

한편 모차르트 역시 살리에리를 완전히숙적으로 취급했던 것은 아니다. 그는 원래 감정의 기복이 심했다고 알려져 있고 사회성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려서부터 유럽 전역으로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예술가들과 교분을 쌓았던 영향으로 음악적인 공감대가 있는 이들과는 자주 소통했다. 그러한 모차르트에게 살리에리는잘 정리된 사전과 같은 사람이었다. 살리에리가 헨델 이후 유럽 오페라계의 단골 소재인 아르미다(Armida·1차 십자군전쟁의 영웅 아르미다가 예루살렘을 구하는 이야기로 영웅 스토리 기반 오페라의 주요 모티프였다)를 당대의 감각에 맞게 각색해 성공시키자 모차르트는 그 작품에서 도움을 받아돈 조반니(Don Giovanni)’를 작곡하기에 이른다.

 

모차르트가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나자 그의 작은 아들 프란츠 크사비어(Franz Xavier)와 제자 쥐스마이어(Suzzmayer)는 살리에리의 문하생이 됐다. 서로 상대방에 대한 믿음 없이는 해석이 불가능한 행동이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시대에는 어떤 특징들이 있었을까? 우선 자신들의 고용주뿐만 아니라 동료들로부터 다면 평가를 받는 시대였다. 작곡가들은 1750년대 이전(바로크 시대)처럼 자신을 마케팅하기 위해 여러 도시를 돌아다니기보다는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고 법적으로 생활을 보장해 줄 수 있는 각국의 궁정에 몸을 의탁해 평생을 보냈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유명 작곡가의 추천이었다. 평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또 있었다. 이 시대는 정치, 경제적인 패러다임이 변해가는 과도기였기에 예술가들은 변화에 적응할 필요가 있었다. 바흐와 헨델이 살았던 20∼30년 전까지만 하더라도신앙과 이상이 중요한 키워드였으나 살리에리와 모차르트와의 시대에는대중의 개념이 등장하면서 저마다 이성과 보편을 말하기 시작했다. ‘숭고한 예술보다이해하기 쉬운 예술로 관심을 돌리던 시기였던 것이다. 따라서 시장의 취향도 자주 변했다. 경쟁(Competition)과 혁신(Innovation) 못지 않게 협력(Collaboration)이 중요해졌다. 상대방은 극복해야 할 대상이라기보다는 앞을 예측할 수 없는 전환기에 전략적으로 함께 배울 수 있는 사람으로 인식됐다. 각자 독립된 영역을 갖고 있었던 작곡가, 작품의 원작자, 리브레티스트(작사가), 오케스트라 등과 얼마나 잘 어울려 우수한 결과를 이끌어 내느냐가 핵심이었다. 살리에리와 모차르트, 두 작곡가의 삶은 창의성 못지 않게 네트워크, 인정, 상호존중을 중요시했던 시대를 대변한다.

 

 

 

 

살리에리, 덕망을 무기로 삼다

안토니오 살리에리(Antonio Salieri)는 바흐가 죽던 해인 1750년에 이탈리아 레냐고(Legnago)에서 태어났다. 당시 이 도시는 베니스(Venice) 공화국의 속주로서 부유한 상인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곳이었다. 살리에리의 아버지도 제법 여유가 있었던지 큰아들 프란체스코를 타르티니(Tartini)의 제자로 보내 바이올리니스트로 훈련시키는가 하면 작은아들 안토니오에게도 성악, 작곡, 오르간 등을 공부시켰다. 영화아마데우스에서 아버지의 죽음을 자못 기다리는 못된 아들로 표현된 것과 달리 살리에리의 유년기는 천진난만했던 것으로 알려진다. 아버지가 사주는 책들과 설탕을 몹시 좋아했고 바이올린 솔로이스트였던 형이 출연하는 바이올린 협주곡을 사랑했던 아이였다.

 

하지만 1763년과 그 이듬해에 걸쳐 어머니와 아버지를 차례로 잃게 되면서 살리에리는 바흐와 마찬가지로더부살이를 시작하게 된다. 어린 살리에리에게 일어난 일련의 비극들은 그를 격려하고 응원하는 사람들과 관계를 맺으며 세계관을 넓혀나가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는 파도바의 성당에서 사제로 복무하고 있었던 형과 같이 살게 되면서 교회음악 합창에 눈을 뜬다. 그리고 베니스 공화국의 세도 가문인 모체니고(Mocenigo) 일가의 장남 지오반니(Giovanni)와 인연을 맺게 되면서 본격적으로 커리어를 시작하게 됐다. 일종의 서생(심부름을 하면서 장학금을 받아 공부하는) 역할을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음악사가들은 동생을 아꼈던 형들과 주변의 평판이 큰 역할을 했을 것이라고 해석한다. 이러한인연의 힘은 살리에리가 유명한 사부들을 만나는 데에도 큰 역할을 했다. 살리에리는 오르간의 대가 페스체티(Pescetti)에게 사사하는 한편 그가 죽자 유명한 성악가였던 파치니(Pacini)에게 도제식으로 레슨을 받는다. 그러다가 독일인으로 이탈리아를 자주 왕래하던 작곡가 겸 지휘자 플로리안 가스만(Florian Gassman)을 만나 삶의 큰 변화를 경험하게 된다. 유난히 듣는 귀가 발달했던 살리에리를 눈여겨본 가스만은 ‘15살의 천애고아를 당대 정치, 경제의 중심지 빈(Wien)으로 데려가 같이 살면서 집중 교육을 시킨다. 살리에리는 가스만이 결혼한 후에도 스승의 보살핌을 받으며 지원과 격려 가운데 성장했다.

 

(Wien)은 기회의 땅이었다. 당시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였던 요제프 2세는 독일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로 상연하는 오페라단을 각각 경영했다. 음악에 조예가 깊었던 그는 각지에서 음악인들을 모집해 오케스트라와 연주단체를 구성하고 전문 학교를 설립하는 데 주도적이었다. 일종의 산업 플랫폼(Industrial Platform)을 만든 것이다. 산업조직 연구자인 리처드 슈말렌지 MIT 교수는 단순히 시장의 구조를 편성하는 것뿐만 아니라카탈리스트(Catalist)’, 즉 촉매 역할을 할 수 있는 기제가 필요하다고 주장한다.2 다국적의 예술가들과 더불어 연주, 교육, 마케팅이 한자리에서 가능했던 당시 빈의 시스템은 이에 딱 부합한다. 살리에리는 이런 구조에서이탈리아인이 아닌독일 음악 유파의 작곡가로 성장한다.

 

16세가 되던 1766년에 살리에리는 중요한 기회를 잡는다. 황제가 유력 인사들을 저녁 식사에 초대하는 자리에서 간단한 소곡을 챔버 오케스트라와 연주할 수 있는 순서를 부여받은 것이다. 여기에는 스승 가스만의 노력과 관심이 기여한 바가 컸다. 황제 역시도 겸손한 살리에리의 성품과 작품의 풍격에 큰 인상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부터 살리에리는 1790년 요제프 2세가 사망할 때까지 25년간 가장 든든한 후원자를 배경으로 열정적으로 활동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살리에리가 다른 작곡가들과 차별화되는 포인트는 무엇이었을까? 고전주의 시대 작품들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 중 하나는서로 비슷비슷하다는 것인데 이것을 단순히 서로 모방하고 학습했다고 보기보다는 전략적인 판단에 기인한 선택이었다고 해석하는 것이 옳다. 주변의 평가(Critique)가 작품의 질을 결정했기 때문에 상식에 벗어나는 예술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살리에리 역시 마찬가지였다. 혁신보다는 선배들의 전통을 계승하는 관점에서 창작에 접근했다. 그는 오케스트라를 사용하거나 노래에 사용되는 텍스트를 음운적으로 변화시키는 등의조그마한 변화에는 매우 적극적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소재들은 기존의 원작이 이미 존재하고 있거나 다른 작곡가에 의해 이미 검증된 모티브를 중심으로 구성했다. 당대 음악계의 원로들은 그의 수월성을 인정했다. 비록 이탈리아인이었지만 철저하게 독일 오페라의 작법을 따랐고 빈 음악계의 취향에 맞게 프랑스어, 독일어, 이탈리아어로 작품을 만들고 연주할 수 있는 역량이 됐기 때문이다.

 

살리에리는 자신이 함께 작업하는 파트너들과의 우정을 소중히 여기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는 확실히관계를 중요시했던 예술가로 기록된다. 1770년에는 경쟁자로도 인식됐을 법한 같은 이탈리아 출신 작곡가 보케리니(Boccherini)의 동생인 지오반니 보케리니(Giovanni Boccherini)와 협업해 당시 블랙 코미디의 장인으로 불렸던 프랑스의 작가 몰리에르(Moliere)여류 문사들(La Donna letterate)’을 원작으로 하는 코믹 오페라를 상연하게 된다. 요제프 2세가 직접 관리하는 궁중 발레단의 일원이었던 보케리니는 특유의 상상력과 연출력을 바탕으로 살리에리에게 리브레토(오페라의 가사)를 써주었다.

 

살리에리의 가장 큰 장점은대중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잘 파악한다는 것이다. 그는 단순히 화려한 소재와 드라마틱한 무대 구성으로 시각을 사로잡는 데에만 집중하지 않았다. 작품 자체의 수월성을 평가하는 다양한 기준이 정착된 시대였기 때문이다. 고전 시대가 되면서 귀족들뿐만 아니라 부유한 상인, 중산층들도 오페라를 보고 평할 수 있을 만큼 문화 수준이 향상됐다. 소설, 희곡 등을 통해 남겨져 있었던 작품들을 새롭게 각색해서 오페라로 만든 것들이 가장 큰 관심을 끌었다. ‘순결한 여자(La donna Innocente)’는 당시 코미디의 권위자였던 세르반테스의돈 키호테의 모티프를 오스트리아 배경으로 바꿔 상연한 것이었다. 진지하고 장중한 구성으로 돼 있던 오페라 세리아(Opera Seria) 일색에 지쳐 있었던 군중들은 막간극의 형태를 취하면서도 익살과 해학적 비유를 담고 있었던 오페라 부파(Opera Buffa)로 눈길을 돌리고 있었다. 그는고상한 취향을 가진 관객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용도로 극을 찾는 관객을 구분해 공략할 줄 알았다. 또 그 실현 방법을 찾는 데에도 능수능란했다. ‘아르미다(Armida)’알체스테(Alceste)’와 같이 헨델을 비롯한 선대 작곡가들의 고전(古典)을 다시 작곡할 때는 원로 작사가 메타스타시오(Metastasio)와 함께 작업하는가 하면오페라 부파를 위해서는 해학극의 대가였던 보케리니와 팀을 꾸렸다. 한편 서민적인 소재로 오페라를 만들 때에는 도메니코 포기(Domenico Foggi)와 같은 이들이 기꺼이 협업을 했다.이들 작사가는 각자의 분야와 주제에서 명인 대우를 받는 사람들이었다. 따라서 이들과 같이 작업한다는 것은 흥행의 보증수표임과 동시에 정당성(Legitimacy)을 인정받을 수 있는 기제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러한 살리에리의 전략이 항상 순조로웠던 것만은 아니다. 시대의 변화가 그를 가만 두지 않았다. 조직 연구자 도날드 숀(D. A Schön)은 특정한 아이디어가 사회 전반에 채택되기 위해서는 논쟁(Political Debate)을 통한 테스트를 받아야만 한다고 주장한 바 있다. 거센 비판과 문제 제기를 통해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는 사회 구조(Social Structure)에 의한 인정을 받기 어렵다는 것이다.3 살리에리의 경우에는 다소 보수적인 작품 경향이 문제였다. 유럽 전역에 퍼져 있었던 계몽주의의 물결을 독일의 관점에서 재해석하고자 했던 요제프 2세는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독일 정신(German Value)을 새롭게 창조해내는 데 주력했다. 결국 황제는 시작부터 끝까지 자국어로 통일된 아리아, 합창, 막간의 대사가 배치된 징슈필 오페라(Singspiel Opera)로 관심을 돌렸다. 재무적으로 곤경에 처해 있었던 이탈리안 오페라 극장들은 문을 닫아야 했다. 이때 살리에리는 잠시 쉬어가는 기간을 갖기로 결심한다. 가장 충실한 황제의 예술가였던 그는 고향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자유롭게 여행하면서 전환점을 모색했다.

 

 

 

 

‘음악 시장(Market for the Music Composition)’으로 간 살리에리

1778년부터 1788년까지 10년간 살리에리는 합스부르크왕가와의 전속 계약을 유지하면서 기회가 닿는 대로 자주 이탈리아와 프랑스를 돌아다녔다. 이 시기에 그가 주목했던 것은시장이었다. 바로크 시대까지만 하더라도 음악가는 왕실이나 도시가 소유한카펠(Kaffell)’, 즉 교회와 연관관계를 맺으면서 살아야 했다. 모든 작품은 계약주의 저작권으로 귀속됐고 외부에서 연주라도 위촉받을 시에는 일일이 계약주의 허락을 받아야 했다. 자신의 전속 음악가가 외도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던 영주들은 일방적으로 작곡가를 해고하거나 내쫓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풍토에서재미있는 작품이 자유롭게 나올 턱이 없었다. 결국 종교와 궁정 중심의 바로크 시대가 막을 내리고 명료하고 경쾌한 예술사조를 중심으로 한 고전주의 시대가 열리면서카펠을 통한 계약주-음악가 간의 불평등 관계도 점차 와해돼 갔다. 다양한 표현의 요구와 넘쳐나는 대중의 수요를 경제 시스템이 감당할 재간이 없었던 셈이다. 작곡가들은 궁정이나 영주 가문과 인연을 맺는 상태는 그대로 유지했지만 마음 맞는 이들끼리 살롱(Salon)을 꾸려 개인 연주회를 열고 정객(政客)이나 부호(富戶)들과 활발하게 연대했다. 이러한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독자적인 비즈니스 모델(Business Model)을 만들어 나가기도 했다. 경제학자 윌리엄 보몰(William Boumol) 18세기 말엽직접 제품을 개발하는 사람들이 독자적으로 산업 구조를 만들어 나갔던 것을 의미 있는 맥락으로 기록하고 있다.4

 

살리에리는 1784년부터 시작된 프랑스 체류를 계기로작곡가 중심의 시장에 입문하게 된다. 일찍이 오스트리아에서 이름을 알리다가 그 무대를 파리로 옮겼던 선배 글룩(Gluck)의 초청이 계기가 됐다. 파리는 오스트리아보다 경제 규모는 작았지만 예술가 간 자유로운 네트워크와 수준 높은 비평가들을 기반으로 한 문화 시장이었다. 가장 강력한 스폰서였던 합스부르크왕가에 의존했던 빈의 문화계와 달리 파리의 음악 시장은 딱히 누가 맹주라고 할 만한 여지가 없는 ‘무주공산’이었다. 글룩은 바로 이 점을 노리고 파리 오페라 시장으로 관심을 돌렸다. 그렇지만 그는 비평가들의 엄혹한 비판과 대중의 민감성을 몹시 두려워했다. 신문이라고까지 표현할 수는 없지만 종이 매체를 통해 그날그날의 오페라에 대한 전문가들의 견해와 시선이 퍼져 나갔다. 결국 글룩은 1784년 살리에리를구원투수로 활용하기 위해 파리로 불렀다. 실제로 몇몇 작품은 살리에리의 가필과 수정보완을 거쳐 성공 수표를 받아 시장으로 내보내졌다.

 

분명 살리에리는 글룩의 모습이 잘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빈에서는 궁정 귀족들과의 인연과 화려한 언변을 기반으로 자신 있게 오페라 코믹을 써 나갔던 선배가 정작 파리에서는 한치 앞을 알 수 없는 경쟁에 내몰려 갈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살리에리는 빈에서는 해보지 못했던 다양한 실험적 시도를 기반으로 오페라를 써 나갔다. 정치적인 음모, 암살, 복수극과 같은 음험한 요소가 담긴 모티브를 기반으로 아이스킬로스의 그리스 비극다나이드(Les Danaïdes)’를 프랑스 오페라로 살려냈다. 마침 파리 문화계에서는 입헌 군주 정치 요구와 부르봉왕조의 부도덕성에 대한 비판이 곳곳에서 일고 있었다. 글룩과 살리에리가 함께(정작 모든 공로는 살리에리에게 돌아갔지만) 작업했다고 알려진 이 작품은고결한 소재와 맛깔스러운 플롯 전개의 오묘한 결합을 이뤘다는 극찬을 받았고 발레, 무대 효과와 연출이 조화를 이루는 종합 예술의 전형이라는 평가를 받았다. 파리의 비평가들이 선택한 작품이었다.

 

살리에리는 이후 빈으로 돌아와서는 이전보다 훨씬 과감해졌다. 그전까지는 좀처럼 손대지 않던 비극에 도전하는가 하면 로렌초 다 폰테(Lorenzo Da Fonte)나 카스티(Casti)처럼 후배 작곡가들이 선호하던 리브레티스트들과도 협업을 시작했다. 물론 실험성이 강해질수록 성과도 들쭉날쭉했다. 파리에서는 성공했던 오페라가 빈에서는 혹평을 받는가 하면 실패한 작품으로 인한 재무적 손실을 성공작의 수익으로 메꿔야 하는 상황도 벌어졌다. 그렇지만 1780년대에 남겼던 그의 몇몇 작품들은 리하르트 바그너나 엑토르 베를리오즈와 같은 이들에게도 깊은 감명을 줄 정도로 신선했다. 그는 작품의 성공을 결정하는 것은 황제의 기분이나 귀족들의 취향에 한정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시장으로 간 살리에리가 얻은 통찰은 그가 합스부르크왕가의 카펠마이스터로 취임하고 나서도 계속 영향력을 발휘했던 것 같다. ‘호르무즈의 왕 악수르(Axur, King of Hormuz)’와 같은 작품을 계속 발표하고 기악곡의 작곡도 멈추지 않았다.

 

살리에리, 결국사람으로 남기를 택하다

그렇지만 시국이 그를 가만두지 않았다. 1790년 살리에리에게 가장 호의적이었던 군주 요제프 2세가 죽고 레오폴트 황제가 즉위하면서부터 상황이 변했다. ‘풍조 단속의 분위기가 사회 전역으로 퍼져 나갔고 노선에 맞지 않는 음악가들은 정리의 대상이 됐다. 새로운 제국의 주인은 프랑스 혁명으로 인해 자신의 국가 역시민주화의 물결에 휘말릴 것을 심각하게 우려했다. 당연히 예술가들의 자유로운 표현도 점차 억압을 받게 됐다. 선제(先帝)의 계몽주의적인 성향과 후원 방식 역시 새로운 방향으로 수정돼 갔다. 신성로마제국의 경제력과 다양한 인적 자원을 기반으로 구축됐던 네트워크는 국수주의 경향과 통제 정책으로 인해 그 위상이 쪼그라들었다.

 

이에 비하면 살리에리가 살아왔던 삶은패러다임 전환기에 대비하기에는 너무나도 허술한 것이었다. 20대의 그는 선배 작곡가들이 남긴 유산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그것을 기반으로 철저하게 학습하는 것을 모토로 성장해 나갔다. 30대 이후부터는 수요와 공급의 이동이 자유로운 음악 시장의 가능성에 주목하고 변화를 추종하고자 애썼다. 그러나 1790년대 이후 유럽 문화계의 변화는 결코 살리에리에게 호의적이지만은 않았다. 그는 후배들로부터 갈랑(Galant) 스타일의 경쾌함을 추종한 나머지 독창성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게 되자 과감하게 협주곡을 비롯한 기악 작곡을 접었다. 새로운 황제가 예술 후원과 문화 진흥보다는 정치적인 책략에 골몰했던 탓인지 오페라를 비롯한 대규모 상연 프로젝트 역시 주의를 끌지 못했다. 결국 그는카펠마이스터라는 직함에 걸맞게 미사, 봉헌송(Offertory·미사 도중 신에게 예물을 드리는 순서에 부르는 노래), 층계송(Gradual·사제가 성체를 봉헌하는 제대 밑의 계단에서 소년 성가대원들이 부르던 노래) 소품과 같은 교회음악 작품들을 중심으로 인생의 후반기를 결산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자신의 작품이 예전만큼 주목받지 못한다고 해서 그 명성을 상실했다고 여겼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복한 경제력과 덕망을 바탕으로 주변을 돌보는 데에도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부모님이 없는 와중에서도 자신의 자원을 할애해 가며 동생에 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형들, 신혼 생활의 단꿈을 쪼개 가면서 제자를 지도했던 열정 어린 스승에 대한 회상이배려심을 꽃피게 한 것이다. 곳곳에서 그를 지원하고 감싸줬던 선배 작곡가들에게 얻은 영감과 통찰도 커다란 유산이 됐다.

 

격변의 시기에 결국 남는 것은사람이라는 통찰 때문이었을까? 음악사가들은 살리에리가 후대의 작곡가들과 가장 많이 연결돼 있었던선생이라고 이야기한다. 헝가리에서 영국으로 무대를 옮겼다가 다시 고국 오스트리아에 정착한 하이든(Haydn)은 가장 믿을 만한 지휘자가 살리에리라고 여긴 나머지 잠시 동안연주할 수 있는 권리의 명목으로 오라토리오천지창조(The Creation)’를 위탁하기도 했다. 또 베토벤도 살리에리를 거의 음악적 대부에 가까울 만큼 신봉했다. 슈베르트 또한 비록 가난한 살림이었지만 살리에리에게서 오페라를 비롯한 성악 작품의 작법을 잠시 동안이나마 배웠다. 리스트도 건반 음악의 자유로움과 독창성을 그의 문하에서 익혔다. 마침 18세기 후반 빈에서피아노포르테(Pianoforte·현대 피아노의 전신 격으로 하프시코드보다 울림이 크고 연주자가 음량을 더욱 자유롭게 조절할 수 있음)’라는 새로운 악기가 등장했는데 살리에리는 건반 음악의 진화를 기반으로 숱한 제자들을 자신의 네트워크에 품었다. 과거 스승이 그랬던 것처럼 무료로 제자를 지도하는가 하면 자주 연주 기회를 소개해주고 유력자 앞에서 음악을 선보일 수 있는 장을 열어 줬다.

 

살리에리 주변으로젊은이들이 계속해서 모여들 수 있었던 것은 점진적으로 삶을 개척해 왔던 그의 성공 스토리가누구나 인정할 만한트랙을 밟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집안의 내력 또는 교회에 소속된 예술가로서 음악을 배워가던 시대에 그는 다양한 사부들에게 사사하며 전문적인 교육에 의한 음악을 체화했던 사람이었다. 그리고 스스로 인정받기 전에 남의 위대함을 먼저 인정했던 이였다. 변화무쌍한 시기에도 변하지 않는 예술의 진리는 바로상호작용(Interaction)’이라는 키워드였다. 살리에리는 자신과 자신의 작품을 둘러싼 모든 이들의 평판을 중요하게 여기고 배려심과 후덕함을 잃지 않는 가운데 그 네트워크를 통한 영향력을 유지했다. 비록 그는혁신가 살리에리로는 기억되지 못하지만 적어도 당대의 음악계를 살찌우고 건강한 소통이 일어날 수 있도록 공헌했다는 평가는 받을 수 있는 셈이다. 결국 살리에리의 최대 업적은사람을 남겼다는 것인지도 모른다.

 

 

 

 

 

김혜옥 연세대 음악대학 합창지휘전공 교수 hokimbangeunice@gmail.com

필자는 줄리어드 음대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학사 및 석사, 웨스트민스터콰이어 칼리지에서 교회음악 및 합창지휘 석사, 맨해튼 음대에서 같은 전공으로 박사 학위를 받았다. 오레건 바흐 페스티벌, 한국합창제 등을 통해 전문 연구자 및 세미나 강사로 활동해 왔다. 현재는 연세대 음악대학 교수 겸 연세 콘서트 콰이어 상임지휘자로 재직 중이다. 2010년 스페인 문화부 주최 국제하바네라콩쿠르에서 최고 지휘자 표창을 수상하기도 했다.

 

천영준 연세대 창조경영센터 선임연구원 taisama@naver.com

필자는 연세대 경영학과 및 교육학과를 졸업하고 정보산업공학과 석사 과정에서 비즈니스 모델 개발 및 경영 전략을 연구했다. 현재 연세대 기술경영협동과정 박사 과정에 재학 중이며 연세대 창조경영센터에서 협업적 혁신(Collective Innovation) 및 소셜 컴퓨팅을 연구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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