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visiting Machiavelli-3
편집자주
많은 사람들은 마키아벨리를 ‘권모술수의 대가’로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억울하게 살고 있는 약자들에게 “더 이상 당하지 마라”고 조언했던 인물입니다. 메디치 가문의 창조 경영 리더십 연재로 독자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던 김상근 연세대 교수가 마키아벨리를 주제로 연재합니다. 시대를 뛰어넘는 통찰력을 주는 마키아벨리의 이야기 속에서 깊은 지혜와 통찰을 얻으시기 바랍니다.
냉소의 눈초리를 가진 남자
토스카나 지방의 도시국가 피렌체는 시뇨리아 정청(Signoria, 政廳)을 중심으로 국가의 업무를 수행해왔다. 시뇨리아 정청(베키오궁전으로도 불린다)은 서울 광화문에 있는 정부종합청사쯤에 해당하는 관공서다. 피렌체의 행정부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도 이 건물에서 일했다. 피렌체의 외교와 국방을 담당하던 제2 서기장 마키아벨리는 이 건물 2층의 집무실(Cancelleria)을 사용했는데 지금도 마키아벨리의 흔적이 남아 있다. 부조작품으로 조각된 마키아벨리의 흉상과 산티 디 티토(Santi di Tito, 1536∼1603)가 그린 유명한 마키아벨리의 초상화가 전시돼 있다.
피렌체 시뇨리아 정청 안에 보존돼 있는 마키아벨리의 집무실 입구 |
시뇨리아 정청의 2층 집무실에 걸려 있는 마키아벨리의 초상화 |
최초로 마키아벨리 전기를 출간(1877년)했던 파스콸레 빌라리(Pasquale Villari)는 그의 외모에 대해 이런 기록을 남겨놓았다.
“그는 보통 정도의 신장에 마른 체구를 가졌다. 늘 반짝이던 눈과 검은 머리카락, 작은 두상에 매부리코를 가졌으며 입술은 늘 굳게 닫혀 있었다. 외모로도 그가 날카로운 관찰자이며 생각하는 사람이란 인상을 주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무엇인가 말하려드는 듯 입술을 연신 씰룩거렸으며 눈에서는 냉소적인 기운이 느껴졌다. 차갑고 무거운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는데 그 심각한 표정을 쉽게 잊지 못하게 만드는 인물이었다. 때로는 공상에 빠져들곤 했는데 그 정도가 심해 어떤 때는 기이한 느낌을 주었다.”
‘눈에서는 냉소적인 기운이 느껴졌다’는 빌라리의 표현은 마키아벨리에 대한 일반적인 통념에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날카로운 관찰자에다 늘 생각하는 사람이라는 현자(賢者)의 이미지에 냉소적인 외모가 더해졌다는 것은 그의 삶이 그렇게 평범하지 않았다는 것과 그가 겪었던 생의 고초가 예사롭지 않았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도메니코 베카푸미가 ㅡ케치로 그린 날개꺾기(Strappado) 고문의 실제 모습. 마키아벨리는 바르젤로 감옥에서 이런 고문을 여섯 번 당했다. |
바르젤로 감옥에서 당한 날개 꺾기 고문
<군주론>의 말미에 이런 표현이 나온다. “오늘날에 와서는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을 밤낮으로 보고 있다.”1 마키아벨리는 왜 이런 표현을 썼을까? 무엇이 그에게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으로 보였을까? 나폴리 군대가 자기 고향 마을을 휩쓸고 지나가고 프랑스의 대포가 굉음을 내며 피렌체 시내에서 무력시위를 벌이고 있을 때, 체사레 보르자와 율리우스 2세와 같은 ‘왕관을 쓴 괴물’들이 이탈리아를 유린하고 있을 때, 마키아벨리는 그것을 대격변이라고 느꼈을까? 삶과 역사와 정치의 현장에서 철저한 현실주의적 사고로 일관했던 마키아벨리에게 최대의 격변은 아마 자신의 삶에 밀어닥친 끔직한 불행이었을 것이다.
마키아벨리는 자신이 근무하는 시뇨리아 정청에서 100m도 떨어져 있지 않는 바르젤로 감옥에서 무자비한 고문을 당하는 신세로 전락한다. 1512년, 피에로 소데리니가 이끌던 피렌체 공화정이 무너지고 메디치 가문이 복권된 다음, 전(前) 정부의 고위직 관리였던 마키아벨리에게는 모진 고난과 시련이 기다리고 있었다. 마키아벨리는 바르젤로 감옥에서 악명 높기로 소문난 ‘날개꺾기(Strappado)’ 고문을 당했다. 메디치 가문을 전복시키려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가 체포된 날은 피렌체의 엄동설한이 기승을 부리던 2월8일이었다. 극심한 고문의 고통과 지하 감옥의 추위에 떨며 마키아벨리는 자신에게 닥친 최대의 격변을 맞는다. 마키아벨리는 날개꺾기 고문을 모두 6차례 당했다. 마키아벨리가 반(反) 메디치 암살 시도에 개입했다고 불었던 두 명의 음모자 보스콜리(Pietro Boscoli)와 카포니(Agostino Capponi)는 고문이 시작된 지 2주 만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그러나 마키아벨리는 이빨을 굳게 깨물고 여섯 차례의 날개꺾기 고문을 견디면서 끝까지 무죄를 주장했다. 인간의 생각을 완전히 초월한 대격변을 밤낮으로 겪었던 마키아벨리의 두 눈에 분노의 핏발이 섰을까? 고문기술자들에게 욕설을 퍼부으며 자신에게 닥친 운명을 저주하고 있었을까?
그렇지 않았다. 우리들의 친구 마키아벨리는 고문을 당하면서도 익살을 부렸다. 대격변이 몰아닥쳐도 그는 여유 있게 그 운명의 장난에 몸을 맡기면서 해학을 즐기는 놀라운 용기를 보여주었다. 마키아벨리는 동료들이 죽어 나가는 감옥에서 시(詩)를 지었다. 충성을 다 바쳤던 조국이 자신을 배신자로 몰고 그 뒤에서 이 모든 고난의 대변혁을 사주하고 있는 메디치 가문을 향해 이런 유쾌한 시를 날렸던 것이다.
“줄리아노(메디치 가문의 수장), 당신은 아시는가요? 내 다리에 쇠사슬이 묶여 있음을!
뒤로 팔이 묶인 채 여섯 번이나 들어 올려 졌다가,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졌음을!
그 밖에 내가 당한 고생은 더 이상 말하고 싶지 않아요.
왜냐하면 이것이야 말로 시인인 내가 감내해야 할 고통이지요.
바르젤로 감옥 벽으로 이가 오밀조밀 기어 다니고 있습니다.
토할 것 같은 역겨움을 일으키는 징그러운 이 동물은 나비처럼 살이 오동통 올랐군요.
론체스바예스(Roncesvalles) 학살 사건 이후의 악취처럼, 고약한 냄새가 이곳에 가득해요.
오, 내가 있는 이곳은 소 잡는 백정들이 있는 사르데냐(Sardinia)의 작은 숲,
나의 정겨운 오두막이 있는 곳,
이곳에서 들리는 신음소리는 마치 지상의 끝에서 들려오는 것 같아요.
주피터는 번개를 내리치고, 에트나(Etna) 산을 쩌렁쩌렁 울립니다.
어떤 사람은 쇠사슬에 묶여 있고, 다른 이들은 쇠고랑을 차고 끌려가네요.
쇠사슬과 쇠고랑, 그리고 문짝이 털컥거리는 소리,
어떤 사람은 뒤로 팔을 묶어 들어 올리는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소릴 지릅니다.
이 나쁜 놈들아, 너무 높이 들어 올리지 마! 이건 너무하잖아!
이 순간에 나를 가장 가슴 아프게 만드는 것은,
새벽 미명쯤, 가까스로 잠들려는 시간에,
수도사들의 이런 기도 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당신들을 위해서 기도하겠어요(Per voi s’ora)’
제발 당신의 자비로운 은총이 내게 임하기를!
그래서 당신의 조상들이 베풀었던 은총보다 당신의 것이 더욱 크기를!2
마키아벨리가 고문을 당했던 바르젤로 감옥의 전경. 지금은 도나텔로와 미켈란젤로의 조각이 전시돼 있는 이탈리아 국립 조각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
1) <군주론> 제 25장, 운명은 인간사에 얼마나 영향력을 미치며, 또 어떻게 대처해야 할 것인가.
2) Michael White, Machiavelli: A Man Misunderstood, 1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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